등록 : 2014.01.05 17:44 수정 : 2014.02.04 10:49

2013년 11월22일 열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의 시국미사 이후 종교인들의 정치 참여를 둘러싸고 온 나라가 갑자기 떠들썩해졌다. ‘종북구현사제단’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김태흠 새누리당 원내대변인은 “사제복 뒤에 숨지 말고 종북 성향을 국민 앞에 드러내라”고 윽박질렀다. 시국미사 강론을 맡은 박창신 신부는 한 종합편성채널 방송으로부터 ‘종북의 두목’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사제단의 정치적 언행이 ‘정교분리 위반’이라는 해묵은 공격도 가세했다. 물론 이런 공박에는 종교인의 정치 참여가 잘못된 것, 그러므로 회피해야만 할 무엇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예컨대 <중앙일보>는 11월25일치 사설에서 “정치를 향한 종교인들의 월경(越境) 행위가 슬슬 도를 넘고 있다”면서, 최근 사제단의 행보가 “정치구조나 사회생활의 조직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금지한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어기는 잘못일 뿐 아니라 “정교분리를 명시한 헌법 정신에도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한국 천주교의 공식 기구들은 정교분리에 대해 상당히 다른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2013년 12월11일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정기총회 뒤 낸 입장문을 통해 “‘정교분리의 원칙’을 거론하며 교회의 현실 참여에 대해 일각에서 과도하게 우려하는 것은 교회의 가르침을 매우 폐쇄적이고 협의적으로 이해한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일찍이 주교회의는 2000년 12월에 ‘쇄신과 화해’라는 과거사 반성 문건을 발표한 바 있는데, 거기엔 이런 대목도 있었다. “우리 교회는 열강의 침략과 일제의 식민통치로 민족이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교회의 안녕을 보장받고자 정교분리를 이유로 민족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제재하기도 하였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정교분리만큼 자주 오해와 오용의 대상이 되는 용어도 드물 것이다. 정교분리는 ‘국가와 종교의 분리’가 아니라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가리키는 용어로 종종 잘못 이해된다. 또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가 마치 국가가 종교인에게 부과하는 책임이나 의무 중 하나인 것처럼, 혹은 종교인의 정치 참여를 금하는 국가 규제의 일종인 것처럼 오해되기도 한다. 혼란을 줄이기 위해 정교분리라는 말의 세 가지 쓰임새, 곧 (1) ‘역사적 사실’로서의 정교분리, (2) ‘법률적 규범’으로서의 정교분리, (3) ‘종교적(신학적) 규범’으로서의 정교분리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논란은 대개 ‘법률적 규범’으로서의 정교분리 개념을 둘러싼 것이다.

‘역사적 사실’로서의 정교분리

종교인들의 정치 참여가 세인들의 논란거리로 떠오른 것은 지극히 ‘근대적인’ 현상, 더 정확히는 ‘정교분리 이후’의 현상이다. 물론 여기서 정교분리라 함은 (‘신학적 규범’이 아닌) ‘역사적 사실’ 및 ‘법률적 규범’으로서의 정교분리를 가리킨다. 어쨌거나 정교분리 이후 종교-국가 관계나 종교-정치 관계가 이전보다 훨씬 복잡해졌고, 그 와중에 자주 논쟁 대상으로 떠올랐다. 국가와 종교가 법적·제도적으로 분리되고 결별함으로써, 양자 관계는 예측하기 어려운 유동성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국가-종교의 분리를 계기로, 종교와 정치의 관계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워졌을 뿐 아니라 한층 역동적인 것으로 변했다. 왜 그런가? 정교분리의 이전과 이후, 과연 무엇이 달라졌는가?

정교분리 이전의 종교-국가 관계는 ‘정교융합’ 질서로 요약될 수 있다. 종교지도자들이 국가나 통치자들에게 종교적 후광을 제공하려는 경향은 전통사회들의 너무나도 명료하고 가시적인 특징이었다. 종교인들은 신화를 통해 기존 정치권력을 정당화하거나, 통치자의 신적인 본성을 강조하거나, 통치자가 초자연적 존재에 대해 특권적인 접근 능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제시했다. 정교융합 질서에서 종교인의 정치 참여는 일종의 의무요, 특권이었다. 국가 역시 특정 종교를 보호·육성하거나 억압·척결하는 일을 자신의 주요 임무 중 하나로 여겼다. 국가는 종교 영역에 깊숙이 그리고 빈번하게 관여했다. 따라서 국내적 차원과 국제적 차원 모두에서 국가의 종교적 기능 역시 매우 활발했다. 국내 차원에서 국가는 ‘국가종교’를 보호하고 육성함과 동시에, 종교적 ‘이단’ 세력이나 ‘사교’(邪敎) 집단을 색출하고 처벌하는 일에도 적극 나서거나 협력했다. 국제적 차원에서 국가는 국가종교의 해외 진출을 후원·보호하거나 때로 직접 대행하기도 했다. 정교융합 시대에 종교의 입지는 정통, 이단, 관용의 셋 중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국가가 분명한 종교적 색깔과 선호를 드러냈기에, 적극적인 정교유착(정통), 국가/정치로부터의 극단적인 도피(이단), 숨죽인 침묵(관용)이라는 종교적 선택지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정교융합 질서 속에서 종교의 ‘정치적’ 기능, 국가의 ‘종교적’ 기능은 사실상 당연시됐다. 적어도 공적인 무대에서 행해지는 대부분의 종교 행위는 강한 정치적 함축과 효과를 갖고 있었다. 완전히 ‘세속적인’ 정치 행위 자체가 많지 않은 시대였다. 정치적 저항이나 반란도 종종 종교운동의 형태로 나타났을 정도로, ‘지배’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저항’ 영역에서도 종교-정치는 서로 혼융돼 있었다. 정치는 종교로부터, 종교는 정치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18세기 말부터 북미와 유럽 국가들은 정교분리를 법제화하기 시작했다. 1791년 비준된 미국의 첫 번째 수정헌법은 제1조에 ‘국교 설립 금지’를 명문화함으로써 정교분리 제도/담론의 지구적 확산을 선도했다. 20세기에는 한국을 포함한 상당수 비서구 국가들도 이런 흐름에 동참했다. 세계적 차원에서 정교융합의 질서가 정교분리의 질서로 서서히 이행해간 것이다. <세계그리스도교백과사전>에 따르면, 1900년 현재 국교제도를 채택한 나라는 전세계 국가의 65%에 달했지만 1980년대 중반에는 45.3%로 감소했다.

근대세계에 정교분리형 국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국가 관계의 유형에 초점을 맞출 경우 근대사회에는 (1) 정교분리 국가, (2) 국교제 국가, (3) 종교국가라는 세 유형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전히 많은 나라들이 국교제도를 유지하고 있기도 하나, 지난 200여 년 동안 정교분리 국가가 빠른 속도로 확산됐다. 서구에서는 국교제도를 유지 혹은 도입했다 하더라도 국가권력이 종교 내부의 일에 관여하거나, 비국교도에 대해 노골적인 종교 차별을 일삼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국가로서의 종교’(Religion as a state)로 간명하게 정의될 수 있는 종교국가(Religious State)는 가장 극단적이고 예외적인 유형이다. 여기서는 (단순한 국교제 국가를 넘어) 종교 자체가 국가가 되거나, 종교가 국가보다 우위에 있으면서 직접 국가권력을 행사한다. 교황청, 달라이라마가 통치하는 티베트 임시정부, 이슬람 ‘최고지도자’가 ‘국가 위’에 군림하는 헌법수호위원회의 책임자가 되는 1979년 이후의 이란 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정교분리 국가들 가운데도 상당한 편차가 존재한다. 서구 사회들을 예로 들어보면, 국교를 인정하지는 않으나 종교단체를 국가와 대등한 공법인(公法人)으로 인정하는 경우(독일·이탈리아), 국가-종교를 완전히 분리하지만 양자의 관계가 ‘우호적인’ 경우(미국), 국가-종교를 완전히 분리할 뿐 아니라 양자 관계도 ‘비우호적’(프랑스)이거나 ‘철저히 비우호적’(과거의 사회주의 국가들)인 경우 등으로 정교분리의 다채로운 유형들이 발견된다.

정교분리 국가들에서 발견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국가의 종교적 기능들’이 결정적으로 감소됐다는 사실이다. 국가 지배자는 더 이상 스스로 신의 화신이라거나, 초자연적 존재와 특권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정교분리 국가는 국교제도를 폐지하여 기존 국가종교에 대한 특혜들을 폐지하거나 대폭 축소했다. 국가는 더 이상 종교적 이단의 색출과 처벌에 나서지도 않는다. 정교분리 국가의 눈에는 이단도, 정통도, 사교도, 사이비 종교도, 미신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국민의 종교 자유를 중시하는 ‘민주적 국교제 국가들’ 역시 대체로 그러하다). 그런 면에서 정교분리 국가는 ‘이단을 모른다’. 과거처럼 이단-사교에 대한 마녀사냥에 나서는 대신, 정교분리 국가는 시민들에게 종교의 선택과 변경·포기, 심지어 무신론 선전의 자유까지 보장한다.

‘법적 규범’으로서의 정교분리

중세를 포함한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여, 국가-종교의 쌍방 관계에서 국가가 거의 항상 갑(강자)의 지위에 위치했던 반면, 종교는 국가에 대해 거의 항상 을(약자)의 위치에 놓였다. 갑(국가)의 횡포와 간섭으로부터 을(종교)을 보호하는 것이 법적 규범으로서 정교분리의 근본 취지이다. 통상 ‘정교분리’가 ‘종교의 자유’와 한 쌍으로 취급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법학자와 법률가들은 정교분리와 종교의 자유가 ‘목적-수단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해석한다. 여기서 종교의 자유가 목적이라면, 정교분리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정교분리가 철저할수록 종교의 자유가 더욱 확실히 보장되므로, 민주주의 사회들에서는 국교제도보다 정교분리제도가 선호되는 것이다.

양건 전 한양대 교수(전 감사원장)에 따르면, 법적 규범으로서의 정교분리는 “국가는 국민의 세속적 생활에만 관여하고 신앙적 생활은 국민의 자율에 맡겨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리킨다. 더 압축하자면 정교분리는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 내지 비종교성”을 의미한다. 정교분리의 원칙은 국교의 부인, 국가에 의한 종교활동 금지, 국가에 의한 특정 종교 우대 또는 차별 금지 등으로 현실에서 구현된다. 국가의 특정 행위나 법규가 정교분리 법조항에 위반되는지 여부를 판정하기 위해 여러 기준들이 개발되기도 했다. 이 가운데 ‘레몬 검사’(Lemon Test)로 알려진 유명한 세 기준은 ‘세속적 목적’(정부의 행위와 법규는 세속적인 입법 목적을 지녀야 한다), ‘종교적으로 중립적인 결과’(정부 행위·법규의 주된 결과가 종교를 촉진하거나 억제해서는 안 된다), ‘과도한 연루 회피’(정부 행위·법규가 국가와 종교의 과도한 연루를 조장하지 않아야 한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서 보았듯이 근대사회에서 종교-국가 관계의 유형은 다양하며, 그중 하나인 정교분리 국가의 하위 유형들도 다양하다. 이런 역사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정교분리의 기본 정신이나 원칙은 일관되고도 명백하다. 법적 규범으로서의 정교분리는 국가에 관한 것이지 종교에 관한 것이 아니다. 국가권력의 부당한 개입으로부터 시민- 신자와 무신론자- 과 종교단체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 바로 정교분리이기 때문이다. 정교분리는 종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정부에 갖가지 부담과 속박을 귀속시키며, 정부가 혹시나 종교 영역을 침해하지 않는지 끊임없이 감시하도록 요구한다. 정교분리는 철저히 ‘시민적 권리 보호’라는 맥락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정교분리가 마치 국가와 종교 쌍방에 상호 개입 금지 의무를 동시에 부과하는 규범인 양 해석하는 것은 분명한 오류이다. 국가의 비종교성과 종교적 중립성이 정교분리의 골간이므로 공무원의 종교적 행위나 발언은 당연히 금지되지만, 종교지도자들의 정치적 행위나 발언은 당연히 허용된다. 그러므로 종교인의 정치 참여가 정교분리를 규정한 헌법에 위반된다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정교분리 정신을 왜곡하는, 그야말로 정략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주장일 따름이다.

정교분리의 종교적 효과

정교분리가 주로 국가를 구속하는 법적 규범이기 때문에, 기존 논의는 (종교적 효과나 함축을 갖는) 국가 쪽의 행위나 법규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그러나 정교분리의 확산은 종교 쪽에도, 특히 종교가 정치·국가와 관계 맺는 방식에도 강력한 변화의 압력을 가했다. 정교분리라는 법적 규범이 지구적으로 확산됐던 역사적 과정은 종교 쪽에 어떤 변동을 촉진했을까? 이를 탈(脫)권력화·해방·자유·자율·공신력이라는 다섯 가지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정교분리는 종교의 ‘탈권력화’를 촉진했다. 정교융합 질서에서는 국가종교에 과도한 특혜와 권한이 부여됨으로써, 국가권력을 등에 업은 공룡 같은 종교권력이 탄생하고 존속하게 마련이다. 반면에 정교분리는 종교적 특혜·특권 제공 금지를 통해 기존 종교권력을 해체함과 동시에, 정치권력과 경제권력까지 갖는 종교조직의 등장 가능성 자체를 원천봉쇄한다. 정교분리가 이처럼 ‘종교의 탈권력화’를 조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교분리가 항상 ‘종교의 탈정치화’를 낳는 것은 아니다.

둘째, 정교분리는 종교를 국가권력의 족쇄로부터 ‘해방’시킨다. 정교분리는 주류 종교(국가종교)와 비주류 종교(이단적 종교) 모두에게 해방을 뜻할 수 있다. 국가종교는 더 이상 자동적으로 정치나 국가행사에 개입되지 않는다. 국가종교를 억지로 정치 세계로 끌어들이던 인계철선은 정교분리 법제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가종교의 지도자들이 국가 정당화의 강제·압박에서 해방되고, 이 요구를 거부할 경우 맞게 될 가공할 탄압의 공포에서도 해방되는 것이다. 마녀사냥과 희생양 만들기의 손쉬운 먹잇감이던 비주류 종교들도 정교분리를 통해 국가폭력의 공포로부터 비로소 해방되었다. 이처럼 정교분리는 국가의 족쇄, 즉 과도한 정당화 압력(국가종교) 혹은 과도한 억압(비국교도)에서 종교를 벗어나게 해준다.

셋째, 정교분리는 종교에 자유, 특히 저항과 비판적 정치 참여의 자유를 제공했다. 종교인에게 허용된 정치 참여가 항시 ‘체제 정당화’를 지향하는 외길뿐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 참여의 자유라 말할 수 없다. 정교융합 질서에서 종교의 ‘체제 비판적’ 정치 참여란 국가권력의 가혹한 보복과 기나긴 박해를 각오하지 않고선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정교분리의 탈권력화 효과는 (항상 국가권력의 마수를 피해 전전긍긍해야 했던 비주류 종교의 지도자들만이 아니라) 주류 종교의 지도자들에게도 국가와의 비판적 거리와 심리적 여유를 제공해주었다. 통치자가 은혜롭게 제공하던 어마어마한 특혜·특권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종교인들이 집권세력에 대한 부채 의식 없이 기존 정치·사회 체제에 대해 중립적이거나 비판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체제 비판 세력에게 종교적 차별과 불이익을 안기는 게 정교분리 규범을 깨는 처사이므로, 저항적 정치 참여에 뒤따를지도 모를 보복의 공포 또한 사라졌다. 요컨대 종교인들에게 ‘역사상 처음으로’ 체제 비판적 정치 참여의 구조적 가능성이 활짝 열린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정교분리로 인해 종교는 ‘진정한 의미의 정치 참여 자유’를 비로소 획득했다고 말할 수 있다.

넷째, 정교분리는 정치/국가에 대한 접근 방식 측면에서 종교의 ‘자율’과 ‘선택권’을 최대한 확장시켜주었다. 정교분리를 계기로, 종교가 정치에 참여하고 말고는 순전히 종교 내부의 규율이나 규범, 종교지도자 개개인의 정치적 선호·신념에 달린 문제로 변했다. 극단적인 탈정치화나 세속으로부터의 도피에서 종교 정당 결성이나 국가권력에의 기회주의적 영합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정치적 선택이 합법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종교인의 정치 참여를 금기시하는, ‘종교적 규범으로서의 정교분리’도 여러 선택지 중 하나일 것이다(물론 이 선택은 종교정치의 긴 스펙트럼에서 매우 보수적인 쪽에 위치할 것이다). 어쨌든 종교가 정치/국가와 관계하는 양식 면에서 ‘신세계’가,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이처럼 종교 쪽의 정치적 선택 폭이 최대화됨으로써, 정교분리 시대에는 ‘종교 외부’는 물론이고 ‘종교 내부’에서도 정치 참여를 둘러싼 논란이 가열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우리 교단, 우리 종교, 우리 교회에 적합한 정치 참여의 입장이나 방법은 무엇인지, 정치 참여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등을 이제는 스스로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정교분리 시대에는 ‘종교 정치 참여의 쟁점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정교분리 시대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예컨대 정치 참여의 정의와 범위(종교의 정치 참여, 정치화, 정치세력화란 무엇인가), 정치 참여의 가치와 필요성(종교의 정치 참여가 과연 필요한가, 바람직한가), 교회의 정치 참여의 바람직한 절차와 방법론, 정치 참여의 목표와 지향(종교의 정치 참여는 현실적으로 무엇을 지향하고 있으며, 또 마땅히 지향해야 하는가) 등을 둘러싸고 종교인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는 게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는 것이다. 이런 여러 문제를 종교인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하게 놔둬야 하는데도, 대통령이나 국무총리가 나서 특정 종교인의 정치적 발언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면 그 자체가 정교분리 위반이라는 혐의를 받을 만하다. ‘종교적 규범으로서의 정교분리’를 신봉하는 보수적 종교인이 다른 종교인의 정치적 언행을 두고 정교분리 위반 시비를 벌인다면, 이는 자신의 특정한 종교적 신념을 강요함으로써 타 종교인의 종교 자유를 침해함과 동시에 종교 간 갈등을 부추기는 행위라는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교분리는 종교인의 정치 행위가 사회적 공신력 혹은 신뢰를 얻기에 더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다. 정교융합 질서에서 국가종교의 정치 행위는 대부분 ‘권력자들을 위한 정치’였고, 그런 면에서 ‘위로부터의 정치’에 가까웠다. 따라서 통치자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철회되면, 국가종교와 대중의 괴리도 심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국가권력과의 유착관계가 단절되고 각종 특혜·특권을 (자발적 혹은 강제적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는 정교분리 시대에, 종교의 정치 행위는 시민사회의 요구에 일차적으로 반응하는 정치·사회적 약자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정치, 한마디로 ‘아래로부터의 정치’를 지향할 가능성이 그만큼 커졌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구조적 가능성일 따름이고, 정교분리 시대에도 어떤 종교인들은 여전히 정교유착을 능동적·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어떤 정치 참여인가?

한국의 현대사만 놓고 보더라도 종교의 정치 참여 사례는 무궁무진한 편이다. 1940년대 후반과 이명박 정부 시기는 주요 종교들 대부분이 정치활동에 적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주요 종교들의 진보적·보수적 분파들 모두가 정치화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종교정치의 최전성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승만 정권이 불교와 유교 내부의 종권 경쟁에 공공연히 개입하고 개신교와 천주교의 선거정치가 불을 뿜었던 1950년대 후반, 그리스도교 중심의 민주화운동·민중운동이 역동적으로 전개되었던 1970∼80년대 역시 빠뜨릴 수 없다. 그럼에도 이 모든 사례가 정교분리 논쟁을 불러온 것은 아니다. 따라서 종교의 정치 참여를 둘러싼 논쟁은 항시 “왜 하필 지금, 어떤 행위를, 누가 문제 삼는가?” 하는, ‘쟁점화의 정치적 선택성’ 문제와 직결되게 마련이다. 쟁점화 행위 자체에 정치적 이해관계의 충돌 상황이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종교인의 정치 참여가 이렇게 비교적 흔한 현상이라면, 우리가 정작 던져야 할 질문은 “현재 한국의 종교인들은 ‘어떤 정치 참여’를 하고 있는가?”일 것이다. 필자는 종교조직의 이익을 정의하고 이해하는 방식, 표방하는 가치·목적이 갖는 호소력의 범위, 특정 종교의 정치활동으로 인한 과실의 수혜 범위 등을 기준으로 삼아 종교의 정치 참여를 ‘파당정치’와 ‘공동선정치’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본다.

먼저 파당정치는 종교조직의 이익을 상대적으로 협소하게 정의한다. 파당정치는 국공립 시설에서의 더 많은 종교활동 기회, 교단의 공적(정치적·사회적·문화적) 영향력의 증대, 더 많은 정부보조금의 확보, 정부의 더 많은 정책적·법률적 배려 등 비교적 단기적·직접적인 교단 이익을 추구한다. 정치활동의 과실을 공유하는 범위가 좁다는 점에서, 파당정치는 배타적·독점적인 성격 또한 지닌다. 반면에 공동선정치는 광의(廣義)로 정의된 교단 이익 관념에 기초하여, 사회적 약자들의 현실을 우선적으로 혹은 균형 있게 고려하면서, 더 보편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종교적 정치활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공동선정치는 더 보편적인 호소력과 설득력을 갖는 경향이 있고, 공동선정치의 과실 역시 해당 종교나 교단을 넘어 널리 공유되는 경향이 있다. 지금 어떤 종교정치를 선택할 것인가?

글 강인철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으나 성장기 대부분을 서울에서 보냈다. <한국 기독교회와 국가·시민사회, 1945∼1960> <전쟁과 종교> <한국 천주교의 역사사회학>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종교권력과 한국 천주교회>, 그리고 최근의 ‘한국의 종교정치 5부작’ 등 지금까지 모두 11권의 책을 펴냈다.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