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1.05 17:24 수정 : 2014.02.04 10:48

서울 영등포동에 있는 ‘노동자·마을 카페 봄봄’은 노동자와 지역 주민이 마주하고 일상을 공유하며 세상이 바뀌기를 꿈꾸는 공간이다.
서울 영등포의 한 강의실. 각양각색의 립스틱으로 입술을 곱게 물들인 여인들이 모였다. 긴 머리에 꽃을 달고, 리듬에 몸을 맡겼다. 그들은 평범한 직장인이다. 하지만 해가 떨어지면 댄서로 무대에 선다. 하와이 훌라춤을 추며. 훌라춤 동호회 회원들이 춤에 빠져드는 동안 강의실 밖 카페에선 맥주잔이 부딪쳤다. 선후배가 만났다. 안녕을 묻고 흥행 영화 얘기와 철도 파업 소식을 전하며 일상을 나눴다.

해가 걸려 있는 오후엔 더 다양한 사람이 찾는다. 유모차를 끌고 마실 나온 주부들이 생필품과 생활정보를 교환한다. 그사이 엄마 따라 나온 아이들은 카페 구석에 마련된 책방에서 만화책 삼매경에 빠진다. 교복 입은 여학생들은 재잘거리며 스트레스를 풀고, 보험을 하는 30대 후반의 남성 그룹은 영업회의를 하고 간다. 인근에서 1인시위를 하던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도 들러 몸과 마음을 녹인다. 피켓에는 ‘폭행·막말 없는 화목한 삼성전자서비스 영등포센터 만들기’라고 쓰여 있다.

이곳은 동네 해결사 노릇도 한다. 산업재해를 당해 일을 못하는 건설노동자가 찾아와 보험 문제를 해결하고 갔다. 헐레벌떡 뛰어들어온 한 직장인은 급히 프린트를 한 묶음 뽑아 갔다. 소모임도 열린다. ‘토밥커’(토요일에 밥 먹고 커피 마시는 모임), 일본 덕후를 위한 일어 마스터, 세계 노동운동사 읽기 등 소모임 공간으로도 활용된다. 새누리당부터 녹생당까지 이념이 다른 당원도 제각기 모여 친목을 도모한다. 철도 파업 첫날 아침, 철도노조 영등포지부 조합원들이 이곳에 모여 파업 출정식을 열었다.

별별 삶이 공존하는 놀이터

별별 사람이 공존하는 이곳은 ‘노동자·마을 카페 봄봄’이다. 줄여서 ‘카페 봄봄’이라 부른다. 봄봄의 슬로건은 ‘세상을 바꾸는 노동과 마을의 합체’다. 이 거창한 상상이 현실에서는 어떻게 발아하고 있을까. 2013년 12월13일, 개나리색 불빛이 흐르는 봄봄을 찾았다. 봄봄에는 커피 향과 머핀 굽는 냄새가 가득했다. 침이 고였다.

김동규(41) 카페지기는 봄봄에 대해 “다양한 삶과 다른 가치관이 어울리는 열린 놀이터”라고 소개했다. 풀색 앞치마를 두른 채였다. 그는 월·목·토 카페지기로 일한다. 거주지는 서울 화곡동이다. “봄봄은 단 하나의 지향을 목표로 하지 않아요. 봄봄의 실험이 우리 안에 갇히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봄봄의 가치가 마을을 넘어 제각기 삶에 알맞게 스며들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꿈이 좀 크지요. (웃음)”

‘각자도생’을 위한 힐링이 아닌,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 담을 넘어보자는 고민이다. 동규씨 뒤에는 ‘직업운동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2011년 4월16일, 그는 결혼식 예복인 턱시도를 입고 피켓을 들었다. 피켓 문구는 ‘반값 등록금, 될 때까지’였다. 동규씨는 피켓을 든 채 하객을 맞았다. 한국진보연대 활동가로 평소 하던 1인시위를 이어간 것뿐이었는데, 언론에 공개돼 화제가 됐다. 2008년에는 광우병국민대책회의 조직팀장으로 일하다 구치소 신세를 졌다. 동시에 그는 서울노동광장 회원이다. “선배가 소개팅을 시켜줄 때 가끔 놀러 나가는 날라리 회원”이었다.

봄봄은 서울노동광장 사무실을 개방한 곳이다. 노동광장은 노동자 교육단체다. 2006년 영등포 신길동에 설립돼 2010년 현재 터로 옮겼다. 그간 광장을 왕래하던 노동자와 지역에 살던 주민은 서로 인사조차 하지 않으며 지내왔다. 정용진(46) 봄봄 대표는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노동광장을 다니면서도 영등포 주민에게 관심을 갖지 못했다”고 말했다. 건물 주인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는 서울노동광장 대표를 겸하고 있다. 거주지는 인천 부평이다. 마을 공동체 활동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봄봄은 ‘마주 보고 서로 본다’는 의미다. 주민과 노동자가 처음부터 바라본 건 아니다. 제각기 울타리 안에서 사느라 바빴다. 그러는 사이 영등포는 ‘고담시티’가 되어갔다. 영등포 역사 뒤에 자리한 영등포동은 상업지역과 주거지역이 혼재돼 있다. 주거지역에는 고시원 형태(고시텔·리빙텔)의 1인 주거건물이 밀집해 있다. 그곳엔 주변의 전기기술학원·용접기능학원·항공전문학원 등을 다니는 국내외 청년과 젊은 직장인이 산다. 유흥업소도 몰려 있어 밤새 버려진 오물과 쓰레기로 골목은 음침했다. 직업소개소에서는 폭력사건이 종종 발생했다. 주민자치위원회가 나섰다. 밤길 함께 다니기, 공원 치안 확립, 청소년 방범 순찰을 시작했다. 역부족이었다. 자치활동의 주민 참여율은 높지 않았다. 고시텔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영등포는 ‘잠깐 눈만 붙이는 곳’이거나 ‘하루빨리 떠나야 할 곳’이었다. 이웃에 관심을 둘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마주 보고 서로 보는 봄봄

2011년 겨울, 이춘자 전 서울노동광장 대표가 갑자기 쓰러졌다. 뇌출혈 때문이었다. 그는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이 전 대표를 떠나보낸 광장 회원들은 공간 운영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용진씨는 “그간 현안에만 매몰돼 정작 지켜야 할 소중한 공동체 가치를 소홀히 하지 않았는지 고민이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1995년 철도청에 입사해 차량검수노동자로 일했다. 2003년 철도 민영화 저지 파업에 앞장서다 해고당했다. 그 뒤 앞만 보고 달렸다.

어느 날 ‘비정규직 철폐’라고 쓰인 공문서를 봤다. 낯익으면서도 낯설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매일 수만 번도 더 봤던 문구였는데, 답답함에 가슴이 조여왔어요. 비정규직은 지역에 있는데,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용진씨는 주변을 둘러봤다. 결코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용진씨는 비슷한 가치관을 갖고, 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들만 만나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생각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과 삶에서 부대끼며 소통할 기회를 놓쳤다. 화석이 돼버린, 노동과 진보운동의 위기라는 화두를 다시 꺼냈다. 광장 회원 중 누군가 “공간을 열어 마을 공동체 활동을 해보면 어떨까요?”라는 물음을 던졌다. 큰 틀에서는 공감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공동체 수업도 받고, 현장 방문도 갔다. 정답은 없었다. 노동계에서는 노동자가 모일 단 한 평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조차 버거운 게 현실이다. 돈이라는 울타리 안에 상상력도 갇혀버렸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다른 세상을 그리는 상상력이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됐다.

울타리에 갇혀버린 상상력

의견을 모으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광장 회원들의 소속은 다양하다. 활동 방식도, 지향하는 공동체상도 제각각이었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용진씨는 “더디긴 해도 지속적으로 토론을 벌이고 조율해가는 과정을 통해 많이 배웠다”며 “홀로 하던 고민을 더 큰 세계로 확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광장을 개조하는 공사 설계도 다섯 번이나 수정됐다. 회원들만 이용하던 교육실을 열어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쉼터로 바꾸기 위한 과정이었다. 공사가 한창이던 날, 건물 주인이 “시끄럽다”며 광장을 찾았다. 60대 중반의 여사장과 용진씨가 ‘처음으로’ 마주 본 날이다.

2013년 3월, 동규씨는 백수가 됐다. 수렁에 빠진 진보정당운동을 보며 진보연대 활동을 접었다. 운동에서 더 이상 운동성을 느낄 수 없을 때는 오히려 멈추는 것이 새로운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진보정당도 동규씨도 성찰이 필요한 때였다. 이후 그는 청년 공동체 활동을 고민하다, 봄봄 토론에 합류했다. 답 없는 토론이 계속되던 2013년 7월, 봄봄이 문을 열었다. 직장인이 파김치가 돼 집으로 가는 퇴근길에 마음을 녹이고, 토요일 오후 어슬렁거릴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것이 봄봄의 취지였다. 주부와 아이들 위주로 진행된 기존 주민사업과 겹치지 않으면서, 마을 내 사각지대에 있는 주민과 공동체 활동을 꾸려갈 수 있다고 ‘상상’했다.

“뜨악했어요! (웃음) ‘노동자 마을 카페’라는 말에 솔직히 거부감이 좀 있었어요. 처음엔 입구에 서서 들어갈지 말지를 놓고 한참 망설였어요.” 전업주부 이진희(49)씨가 전한 봄봄의 첫인상이다. 봄봄에 들어가자 그녀는 또 한 번 놀랐다. “매니저들이 참 어설펐어요. 카페를 알리지도 않고, 빌린 책이 연체돼도 연락을 안 해요. 카페 운영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되더라고요.” 진희씨는 이날도 빌린 책을 반납하기 위해 봄봄에 들른 길이었다. 카페에는 두 남자처럼 프로답지 않은 요일별 카페지기가 일한다.

진희씨의 거침없는 말에 동규씨의 얼굴이 귀까지 달아올랐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지목한 촛불 세력의 배후(?)가 머리를 긁적였다. “기존에 운동하던 관성으로 주민들을 만나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어떻게 관계를 맺어가야 할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서 스며드는 법을 배우는 중입니다.”

노동, 관계맺기의 통로

봄봄이 문을 연 뒤 카페지기들은 가장 먼저 벽화 그리기에 나섰다. 어두운 마을 분위기도 바꾸고, 오가는 주민과 자연스럽게 만나기 위해서였다. 쓰레기가 쌓인 공터는 텃밭으로 가꿨다. 골목에선 풀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벽에는 봄꽃이 피어났다. 카페에 주민이 한 명도 찾지 않을 때가 있다. 동규씨는 조바심이 난다고 했다. “텅 빈 카페에 홀로 있으면 지인을 조직해 빈 공간을 가득 채워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에 빠지기도 해요. (웃음) 이러다가 아무 성과를 내지 못할 것 같아 문득 불안해지기도 하고요.”

해고 생활 10년차여서일까, 용진씨는 불안을 즐겼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생기는 불안은 정상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요즘에는 ‘오늘은 또 어떤 일이 생길까’ 은근히 기대가 됩니다.” 봄봄 운영 방식은 매달 카페지기와 주민들이 반상회를 열어 결정한다. 주민이, 마을이, 주어가 됐다. 덕분에 봄봄은 2013년 10월 서울시 마을 북카페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봄봄에서 가장 호응이 좋은 건 ‘누구나 강좌’다. 일상의 지혜를 나누기 위해 재능 있는 사람은 누구나 강사로 나설 수 있다. 주제는 무엇이든 상관없다. 수강생 3명만 있으면 강좌가 열린다. 노동과 재능이 돈 버는 수단이 아닌, 관계맺기의 통로가 되게 하자는 취지다. 이를 통해 자화상 그리기, 반려견을 위한 강아지 스카프 만들기, 하우스 맥주 빚기, 내 손으로 바짓단 줄이는 미싱 강좌 등이 열렸다. 강연 경험이 없던 아마추어 강사도 봄봄 수업을 통해 프로로 데뷔했다. 수업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

봄봄은 동규씨 삶에 두려움과 설렘을 동시에 안겼다. “제가 꿈꿔왔던 것, 제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좀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실험해보고 싶어요. 당위와 책임을 우선시했던 기존 삶의 방식이 아니어서 두렵기도 해요. 그렇다고 기존 운동을 부정하거나 조직과 대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존 운동이 낡았다는 이분법적 접근은 경계해야 한다는 당부다.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공동체

만화방과 서점, 카페와 광장, 수다와 토론, 일상과 운동, 중앙정치와 생활정치 ‘사이’에 봄봄이 있다. 봄봄이 앞으로 어떤 공간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예측불허’라는 것만이 확실한 사실이다. 여전히 봄봄 입구에는 들어가지 않고 서성이는 사람이 적지 않다. 동시에 소통 가능성도 포착된다. 시끄럽다며 항의하던 건물 주인은 동화책과 색연필을 조용히 건네고 갔다. 벽을 내줄 수 없다며 노발대발하던 할아버지는 “돌아오는 봄에 벽화를 그려달라”고 당부했다. 노동광장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삶이 공존하고 있었다. 용진씨는 “공간을 열었을 뿐인데 주민들이 손을 잡아주었다”며 “모든 것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도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마을과 노동의 궁합은 어떨까. 진희씨가 말했다. “처음엔 부담스러웠고, 다음엔 신기했어요. 저 사람들(노동광장 회원)이 우리에게 공간을 내주는 게. 지금은 저만을 위한 편안한 공간이 생긴 것 같아요. 돈을 많이 버는 게 행복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바람도 덧붙였다. “젊은이들과 달리 나이 든 저 같은 사람은 집 밖에 나서면 갈 곳이 많지 않아요. 나이 많은 사람도 눈치 보지 않고 편히 들를 수 있는 공간이 되기 바랍니다.”

봄봄은 망망대해에 떠 있다. 공동체상도 미지수다. 수익 창출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현재는 노동광장이 한시적으로 재정적 도움을 주고 있지만 조만간 독립해야 한다. 직업학교에 다니는 청년과 소통할 방법을 찾지 못해 고민이다. 주민도 노동자도 모른다, 마을과 노동의 합체 방법을. 그들이 서로 만나는 길은 수만 가지다. 함께 차를 마시고, 삶을 나누고, 관계를 맺다보면 길이 보일 것이라고 꿈꾼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가면 된다고 상상한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는 것처럼. 동규씨가 마지막까지 거창한 꿈을 풀어낸다. “내가 즐기고 내가 일하고 내가 나누고 내가 꿈꾸는 우리 공간이 되면 좋겠어요. (웃음)”

글 김은성 객원기자 frame4@hanmail.net

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