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1.05 17:10 수정 : 2014.01.06 16:11

사건은 매번 다르지만, 그 출현 과정은 매번 유사하다. 2002년 미선·효순 추모, 2008년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2013년 ‘안녕들’ 대자보가 그렇다. 모두 개인들에 의해 ‘제안’됐고, 그 개인들에 의해 공유·확산됐다. 2008년 5월6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미국 쇠고기 전면 개방 반대 촛불문화제’ 모습들.
‘안녕들 하십니까’ 일곱 글자 가운데 흘려 넘기기 십상인 글자가 ‘들’이다. 실제 일부 언론은 벌써부터 ‘안녕하십니까’라고 줄여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장에서 차지하는 ‘들’의 가치와 위상은 만만치 않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끝을 쉽게 가늠할 수 없는 현상을 이해하려면 ‘들’에 응축된 성분들부터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복수형을 나타내는 이 아슬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음절은 개인을 가리키지도, 전체를 가리키지도 않는다. 모두를 부르는 포즈를 취하지만, 정작 그 자체로는 아무도 부르지 않으면서, 신기하게도 안녕하지 못한 이들만을 요격해서 부르는 효과를 감당한다. 호명하는 이와 호명되는 이 사이의 ‘마주보기’를 넘어 호명되는 이들끼리의 ‘둘러보기’까지 수행하게 하는 것도 바로 ‘들’의 속성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부르는 이나 불리는 이 모두 자신과 처지가 닮은 수많은 ‘나들’의 존재를 서로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2002·2008 촛불·2011 희망버스… 2013 대자보

여기 하나의 ‘사건’이 있다. 어느 대학생이 손글씨로 대자보를 써서 학교 게시판에 붙였다. 오늘날 손글씨 대자보는 흔치 않지만 아주 없는 것도 아니어서, 이것만으로 사건은 구성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게다가 대체로 메시지보다 행위(말 걸기나 말문 열기) 자체가 목적인 인사말이 강력한 저항의 상징이 되어 지뢰밭 터지듯 사방팔방 펴져나갔다. 사건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누군가는 한갓 해프닝쯤으로 치부하거나 철부지 선동 탓으로 원인을 돌리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이 장면보다 더 명백한 ‘사실’은 지금 한국 사회 어디에도 없다. 모든 사건은 앞선 시간들에 예비되어 있다. 그리고 아무런 예비 동작도 없이 별안간 도래해 사실의 진경을 펼쳐놓는다. 결코 타이밍을 놓치는 법도 없다. 다만 어떤 형상을 하고 올지 미리 알 수 없을 뿐이다. 그래서 지금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덕담의 저항’ 혹은 ‘고백의 저항’은 낯설면서도 낯익다.

사건은 언제나 새롭지만, 그 출현 과정은 매번 되풀이된다. 이 ‘차이’와 ‘반복’은 사실이라는 앙금을 남기는데, 그것은 소멸하지 않고 스미어 기억이란 형태로 축적된다. ‘안녕들 하십니까’도 예외가 아니다. 전례 없는 형상과 우연의 얼굴을 하고 나타났지만, 맥락 없이 등장했을 리는 없다. 이 놀라운 사건에서 어떤 기시감을 느낀다고 해도 전혀 놀랄 일은 아닌 것이다. 사건의 출현 과정을 복기해보자. 우리가 먼저 놀라는 건 사건의 시작이 개인이라는 점이다. 한 명의 발화자가 있다. 불특정 다수에게 안부를 물으며, 자신은 안녕하지 못하다고 자문자답한다. 그러자 이에 호응하는 몇 사람이 나타나 각자의 목소리를 냈다. 이 작은 공명은 엄청난 승수효과를 내장한 첫 단계의 꿈틀거림이었을 뿐이다. 철도노조 같은 큰 조직도 충분히 끌어내지 못한 사회적 관심을 어떻게 개인이 끌어냈을까.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같은 전개 과정이 낯설지만은 않다.

2002년 6월,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사건은 한·일 월드컵과 연평도 앞바다 남북 무력 충돌 등에 가려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다 그해 11월 ‘앙마’라는 개인이 제안을 하자 촛불시위가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졌다. 그전까지 사회단체들이 줄기차게 미군 범죄와 이를 방조하는 당국을 비판한 것에 비하면 앙마가 인터넷에 올린 글은 내용도 소박하고 들인 품도 적었다. 결과는 오히려 반대였다. 앙마의 정서적 호소가 이념적 반미에 대한 시민들의 거부감과 부담감을 희석시킨 결과라는 식의 분석이 없지 않았지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태 전개에 붙일 수 있는 직관적 설명은 ‘우연’뿐이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전면 개방 때도 촛불은 타올랐다. 2002년의 그것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 두 차례 모두 조직에 의해 지도되거나 기획되지 않고, 다만 개인(들)에 의해 ‘제안’되었다. 거듭되는 우연은 여전히 우연일까.

거듭되는 것은 또 있다. 촛불에 적대적인 진영은 물론이고, 진보 진영이라 불리는 쪽 내부에서도 비판이 되풀이되었다. 전자가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위협에 즉자적인 반격을 펼친 거라면, 후자에게는 지도되지 않고 기획되지 않은 사태에 대한 난감함이 엿보였다. 전자는 비폭력 행동조차 폭력으로 규정하는 선동으로 맞대응한 반면, 후자는 대의민주주의의 틀 안에 수용되지 않는 과잉을 찾아내려고 했다. 아무려나, 양쪽 모두 촛불에서 읽어낸 것은 비이성·무계통성의 코드였다. 촛불의 미학적 소구점이 감성이라는 것에 주목하면 터무니없다고만 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도되거나 기획되지 않은 운동에 촛불시위만 있었던가. 2011년 희망버스는 송경동 시인 등 개인들의 제안으로 시작되어 온 나라를 용광로처럼 달구었다. 그러자 “희망버스는 진보의 재앙”이라는 독설이 등장했다. 똑같이 반복되는 비판도 숫제 우연만은 아닐 터이다.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회운동적 현상들은 예외 없이 새로운 사건들이다. 새로움을 담고 있지 않으면 사건화되지 못한다. 하나의 요구(제안)가 사건화하는 데는 무엇보다 그 요구가 ‘기존의 것’(이성, 계통성 등)들로서는 넘치는 요구여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요구가 내부로 수렴될 수 있는 것이라면 사건으로 튀어나오지 못한다. 같은 이유에서, 기존의 것이 수용할 수 있는 선에서 요구를 제한하면 사건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새로운 사건에는 늘 새로운 주체가 전제되기 마련이다. (같은 존재가 다시 등장한다 해도 새로운 요구를 들고나오면 다른 주체다.) 이렇듯 사건과 사건의 주체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분리될 수 있는 건 사건의 내부와 외부, 내부의 주체와 외부의 주체이다. 이렇게 볼 때, 지난 10여 년 동안 주요 사건들의 발화점이 지도자, 조직, 전략 어느 것도 갖추지 못한 개인적 주체들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직 중심의 운동이 고전을 거듭하는 사이 개인적 주체들은 기민하게 사건들을 발생시켜왔다. 물론 양쪽이 적대, 모순대당의 관계라는 건 아니다. 어느 면에서는 분업의 성격도 없지 않다. 개인적 주체들이 문제를 제기하거나 새로운 제안을 하면 조직 중심 운동들이 이를 받아안는 형태를 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양쪽 사이에는 긴장도 분명히 존재해왔다. 2002년과 2008년 촛불시위에서는 비조직 참가자들이 조직 단위의 참가를 경계하거나 배척하는 분위기마저 있었다. 이런 기류는 2011년 희망버스에 이어 2013년 철도노조 파업에서 눈에 띄게 변하고 있다. 여러 차례 되풀이되는 사건의 출현과 이후 전개 과정에서 얻은 학습효과를 통해 양쪽이 변증법적 경로를 거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운동 흐름을 비판했던 일군의 지식인 전문가들은 여전히 완고한 태도를 고수하는 것 같다. 실재에 대한 이론의 지체는 아닐까.

후기자본주의에 관한 최근 담론들이 일관되게 붙들고 변주해가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주체의 변화다. 담론의 스펙트럼은 넓고 다양하지만, 적어도 현재 자본주의의 이행 단계가 (체제와의 관계 방식을 포함해) 주체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인식만큼은 예외 없이 공유한다. 큰 흐름은 두 갈래로 형성된다. 그중 하나가 자본에 의해 타자화된 자본주의적 주체들의 수동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몇 해 전부터 우리 사회에 풍미하고 있는 ‘88만원 세대’ 담론이나 ‘자기계발 주체’ 담론 등도 여기에 해당한다. 거칠게 축약하면 이렇다. 자본주의는 내적 모순에 의해 더는 양질의 (정규직)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하고, 이에 따른 노동 내부의 경쟁이 격화되면서 노동 예비군을 비롯한 노동자들은 살아남기 위한 자기계발에 몰입한다. 여기에는 ‘자유’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가 동행하는데, 그 실상은 ‘성과-보상’의 회로 속에 갇힌 쾌락주의나 도덕감정일 뿐이다.

재독 인문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 담론도 이 계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한병철은 현대사회의 권력 작동 패러다임이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이행했다고 본다. 규율사회와 성과사회를 기계적으로 비교하면 산업자본주의와 후기자본주의에 각각 배치될 수 있을 것이다. 규율사회의 주체는 복종하는 주체이자 온순한 신체인 반면, 성과사회의 주체는 자발적인 주체이면서 욕망하는 신체다. (여러 면에서 성과사회 주체는 자기계발 주체와 겹친다.) 성과사회 주체는 체제가 유혹하는 스펙터클하고 스타일리시한 보상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끝없이 착취하며 자신을 피로 상태로 몰아넣는다. 스타일에 갇혀 사는 그들은 나르시시즘적인 개인이기도 하다. 소통이든 적대든 외부와의 관계를 모두 차단한 채 자기 안에 갇혀 산다.1 이렇게 그려지는 주체는 한국 사회에서도 이미 익숙하다. 기성세대, 특히 386세대가 손가락질해온 ‘88만원 세대’이다.

우연의 얼굴로 나타난 놀라운 ‘진리사건’

‘안녕들 하십니까’ 사건의 발화자뿐 아니라 그에 호응하는 상당수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여러 차례 촛불시위를 제안한 주체들도 ‘88만원 세대’ ‘자기계발 주체’ ‘성과사회 주체’에 해당한다.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사려 깊은 접근을 요구한다. 체제에 의해 수동화된 개인이 최근 10년간 한국 사회 주요 사건들의 주역이기도 한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앞에서 언급한, 자본주의 주체 담론의 또 다른 갈래를 참조할 만하다.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주체는 변화해가는 자본주의의 형상에 따라 자신의 역능도 변화시킨다. 말하자면 자본주의에 의해 형성되는 내부 항체인 셈인데, 그 과정은 자본주의를 대칭적으로 닮아가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심화될수록 그들의 잠재적 힘도 커지는 구조다. 남재일 경북대 교수는 ‘‘꽃뱀의 정치’를 떨쳐내는 ‘나들’’(<나·들> 2012년 11월호)이라는 글에서 그들이 저항적 주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탐문했다.

장 보드리야르의 ‘적의 계보학’에 따르면, 유혹하는 시스템에 침투하는 적은 ‘늑대→쥐→해충→바이러스’의 네 단계로 출현한다. 여기서 ‘늑대’는 위협의 정치(전근대), ‘쥐와 해충’(근대)은 기만의 정치, ‘바이러스’(현대)는 유혹의 정치에 각각 침투하는 적이다. 신자유주의는 ‘유혹’이 중심이 되지만, ‘기만’과 ‘위협’이 보완되는 시스템이다. 시스템 전체를 상대하려면 바이러스에서 해충과 쥐로, 그리고 다시 늑대 무리로 변신해 침투해야 한다. 그래야 ‘정치적 사건’이 발생한다. 위키리크스에 실린 내부 고발 문서가 아랍의 민주화운동으로 확산된 과정은 이 단계를 따른 것이다. 이를 알랭 바디우의 ‘진리사건과 충실성의 주체’론에 대입하면, ‘진리사건’(역사가 어디로 가야 올바른지 대중에게 각성시키는 사건)에 ‘충실성의 주체’(진리사건에 헌신하는 개인)들이 형성돼간 것으로 볼 수 있다. 남 교수는 두 사람의 관점을 종합해 다음과 같이 재구성한다.

“유혹의 정치에 대한 저항은 바이러스적인 적의 형태로 출현한 ‘진리사건’에 헌신하는 충실성의 주체들로 시작될 수 있다. 이 윤리·정치적 주체들의 충실성이 유혹된 존재의 동의를 허물어가며 바이러스에서 해충으로, 해충에서 쥐로, 쥐에서 늑대의 모습으로 변신할 때 시스템을 해체하는 정치적 사건이 도래할 수 있다. 바이러스는 네트워크를 통해 증식과 변이를 거듭해 늑대 무리로 진화할 수 있다. 그 방식은 정치적 구호 아래 깃발을 꽂고 유혹된 주체들의 ‘우리’를 구성하는 방식이 아니라, 유혹을 떨쳐버린 ‘나’가 복수의 ‘나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나들’로 모인 윤리·정치적 주체는 어떤 인간인가? 혹은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가? 윤리와 정치가 분열된 사회, 스타일이 현실을 대체한 성과사회에서 그들은 매우 기이한 모습으로 출현한다.”

이 정리에서 다소 미흡하게 언급된 부분은 오늘날 진리사건이 실제로 어떻게 출현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아랍 민주화운동의 경우 위키리크스가 지배권력 내부의 비리를 폭로한 것이 도화선이었다면(물론 그것이 유일하고도 충분한 조건은 아니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무엇이 그 점화 장치를 대신할 수 있을까. 보드리야르의 수사법으로 ‘안녕들 하십니까’ 사건은 바이러스가 시스템에 침투하는 단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사건이 어떻게 바이러스로 증식해 시스템에 침투했는지를 다시 살피고, 과연 그 바이러스가 해충과 쥐, 늑대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을지를 전망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랍 민주화운동이 위키리크스의 폭로에 의해 촉발되었다면 한국의 ‘안녕들 하십니까’ 사건에서는 무엇이 위키리크스의 역할을 수행한 것일까. 철도노조의 파업일까, 아니면 불특정 다수의 안부를 묻고 자신은 안녕하지 못하다고 고백하는 행위들일까.

분명한 사실은, 진리사건은 유일한 모습으로만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황과 조건에 따른 형식과 양태의 가변성은 무한에 가까울지 모른다. 또한 ‘결정적 한 방’식의 일회적 사건이 아닐 수도 있다. 이를테면, 2013년 ‘안녕들 하십니까’뿐 아니라 2011년 희망버스, 2008년을 비롯한 여러 차례의 촛불시위도 각각의 진리사건은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이 진리사건의 개념적 오·남용을 낳을 우려가 있다 해도, 적어도 개별적 사건들은 진리사건의 징후이거나 예비적 진리사건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각각의 사건들은 개별적으로 출현한 것이 아니라 사건들 간의 맥락 속에서 차례차례 도래한 것이고, 2011년 희망버스가 없었다면 2013년 ‘안녕들 하십니까’가 올 수 없었다고 한다면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사건은 ‘차이’와 ‘반복’의 대위법으로 이어가는 서사의 일부이며, 새로운 사건은 앞선 사건들이 남긴 집단기억의 지층 위에 또 하나의 기억을 얹어놓는다.

개인적 주체들의 기억의 공감

그렇다면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최신의 사건은 앞선 사건들의 연장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돌파 시도이기도 할 것이다. ‘안녕들 하십니까’는 이전 사건들을 어떻게 이어받았고, 이제 어디로 밀고 나아갈까. 이전 사건들과 견줘 ‘안녕들 하십니까’ 사건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뚜렷한 차이는 ‘중심의 부재’다. 물론 개인적 주체들의 제안으로 시작된 다른 사건들도 예외 없이 운동을 이끌어가는 중심이 없거나, 적어도 비조직적이었다. ‘안녕들 하십니까’도 이 특성을 공유한다. 하지만 앞선 사건들에는 없는 또 하나의 부재가 ‘안녕들 하십니까’에는 있다. ‘안녕들 하십니까’에는 이슈의 중심이 없다. 2002년에는 미선·효순이 있었고, 2004년에는 대통령 탄핵이 있었으며, 2008년에는 미국산 쇠고기 전면 개방이 있었다. 2011년에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와 김진숙의 고공농성이 있었다. 그런데 2013년 ‘안녕들 하십니까’에는 무엇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첫 발화자의 대자보는 파업 중인 철도노조 조합원들의 무더기 직위해제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지만 글 전체의 마중물일 뿐,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경남 밀양 송전탑, ‘먹튀’ 자본과 노동자 해고 및 사법적 탄압, 불안정노동 등 한국 사회의 여러 현안들을 하나하나 호명해간다. 이어서 이 문제들을 자기 세대의 불안과 성찰로 연결시킨다. 다른 대자보들도 마찬가지다. 어린 학생들부터 중년까지, 지역에서 국외까지, 각자의 처지에서 관심을 갖고 바라본 사회문제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안을 이야기한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꽃이 한꺼번에 피어버린 꽃밭을 떠올려보자. 그 꽃밭은 조경(지도·기획)을 전혀 하지 않았을뿐더러 단일 수종으로 구성되지도 않았다. 그것이 보여주는 가장 명징한 사실은 계절의 도래(봄이 왔다)이다. 이슈의 중심이 없는 ‘안녕들 하십니까’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사회 전체에 퍼져 있는 암울한 시대적 징후이다.

일부 언론은 대자보 내용들에서 ‘온건’을 읽어낸다. 과거 대자보들처럼 ‘진군·애국·단결·혁명·해방’ 같은 단어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비장한 투쟁의 결의나 노골적인 선동의 문구가 없다는 것에 주목한다. 감성적인 문구로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표명하거나 자신의 개인적 문제에 대해 털어놓는 것도 온건함의 방증이다. 대자보 말미에 단체 이름이 아닌 개인 이름이 붙는 것은 이런 관점을 확증한다.2 사건을 애써 대수롭지 않게 보려는 의지가 개입했는지 단언할 수 없지만, ‘안녕들 하십니까’가 앞선 사건들에서 어떤 서사적 맥락으로 닿아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단어는 스스로 급진화하지 않는다. 조직에 진입하려야 진입할 수 없는 배제된 존재들이 다수인 시대에 개인적 주체들은 지금 가장 급진적인 주체들이다. 그래서 지난 10년간 주요 사건을 촉발한 이들이 하나같이 이들 개인적 주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중심, 조직, 지도, 기획이 없다는 것은 취약성을 증명하지 않는다. 무정형은 바이러스의 핵심적 특성이다. 보드리야르의 수사법으로 말하면, 그 바이러스가 늑대로 변신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다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안녕들 하십니까’에 이슈의 중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슈의 중심이 없는 건 각자가 자신의 관심사와 처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일부의 비판대로 그들은 일기장에나 쓰면 맞춤할 내용들을 왜 앞다퉈 사회적으로 ‘공표’하고 있는 걸까. 무엇보다 안녕하지 못함, 불안과 고통이 임계점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물리적 해석은 대자보에서 키워드를 축자해 ‘온건’을 구성하는 것만큼이나 자의적이다. 중요한 건 물리적 지수가 아니라 그들이 앞서의 사건들을 거치며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학습효과가 지금 공적 의제의 내부화와 사적 의제의 외부화라는 화학작용을 거쳐 새로운 형식과 양태로 사건화되고 있다.

최초의 발화자가 언급한 것은 공적 의제들이었다. 그러나 여느 시국선언 유와 달리, 이 의제들을 자신의 안녕과 관련한 사적 의제로 연결짓고 있다. 개인적 주체가 공적 의제를 내부화한 것이다. 이후 다른 대자보들도 분야만 다를 뿐, 아니 모든 분야에 걸쳐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전까지 공적 의제는 다분히 외부 정치의 영역이었다. “민주학우 동참하라” 같은 유서 깊은 구호는 개인과 공공의 분리, 위상차를 전제한다. 숭고한 공공을 위해 한갓 개인은 희생해야 한다. 반면 대자보 사건의 주체들은 개인과 공공의 경계를 횡단해 자신의 신체 안으로 통합한다. 내가 안녕하지 못한 이유와 네가 안녕하지 못한 이유는 겉으로 제가끔이지만, 그것들은 마침내 공공 영역의 보편적인 문제, 나아가 지배체제 자체를 지목할 수밖에 없다. 학우는 더는 동참을 요구받을 필요도 없이 존재 자체가 중심이 되고, 각자는 지금 자기 자리에서 서로 촘촘하게 연결된다.

모두가 중심으로 가는 길, 끝을 물을 이유는 없다

‘안녕들 하십니까’의 이같은 급진성은 앞선 사건들에 이미 예비되어 있었다. 2011년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김진숙’이라는 상징과 ‘정리해고’라는 이슈 아래 모였지만, 자신의 불안한 현실을 다 함께 공유하며 개별적 고통이 사회 전체의 흐름, 거대한 체제가 생활계로 삼투한 결과라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녕들 하십니까’는 희망버스에 있었던 중심을 해체함으로써 모두가 중심인 거대한 무정형의 구조물로 진화하고 있다. 지금 이 사건의 끝이 어디일까를 성급하게 물을 이유는 없다. 앞서의 사건들에서 누구는 실패를 읽고 다른 누구는 성과를 읽지만, 집단기억은 꼬박꼬박 축적된다. 지금까지 한 번도 대의되지 못한 이들이 자신의 말을 가져보고 발언해본, 그 넘치는 경험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체제 안에서 길러졌기에 체제가 지속되는 한 그들도 진화할 것이다. 늑대의 모습으로.

글 안영춘 편집장 jona@hani.co.kr

1 남재일, ‘‘꽃뱀의 정치’를 떨쳐내는 ‘나들’’, <나·들> 2012년 11월호 135쪽 참조.

2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100개 키워드 분석’, <중앙일보> 12월10일치 ‘뉴스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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