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28 04:17 수정 : 2012.12.28 04:17

(왼쪽부터) 대학 1학년 때인 1983년 동네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1986년 강원도 철원에서 군 복무 때 모습. 지난해 7월 16일 서울 덕수궁의 대한문 앞에서 ‘잡년행진’에 나서다.
열다섯, 중3의 5월쯤이었다. 하늘이 유난히 파랬고 아카시아 향기가 진동하던 날, 학교 뒷산에 올라 체육관 뒤편에 나 있는 작은 창을 바라보며 행복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창이 열리며 어떤 아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해성이었다. 아! 저 아이가 어떻게! 해성이는 우리 반 아이였다. 그 아이는 나보다 더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손가락도 훨씬 길고 눈도 더 까맸다. 게다가 그 아이의 이름은 바다 해, 별 성이었다. 바다의 별. 광수라는 이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이름을 가진 그런 아이. 그날 해성이는 순정만화에서 똑 떨어져 나온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내 맘에 쏘옥 들어왔다. 얼굴을 내민 해성이도 창을 바라보던 나도 뜻밖에 눈이 마주쳤기 때문에 잠깐 놀랐고, 한참을 마주 보았다.

소년, 소년을 만나다

 아, 이렇게 사랑을 시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일기장 빼곡히 그 아이의 이름을 채우고 나서야 잠이 드는 날이 많아졌다. 처음엔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더 좋아하는 걸로만 생각했지만 자위를 하면서 해성이를 떠올리는 순간 깨달았다. 아, 내가 말로만 듣던 그 호모로구나!

 친구들이 자기와는 다른 성에 눈뜨며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거칠 때, 난 나와 같은 성에게 끌리는 사실에 당혹했고, 남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될까 두려워 움츠러들었다. 스스로도 인정할 수 없는 정체성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건, 사춘기 소년에게 참으로 가혹했다. 학교를 마치면 20번 버스를 타고 서울역으로 가서 거기서 차를 돌려 도봉구 방학동 종점으로 갔다. 버스 요금 한 번으로 2시간 정도를 탈 수 있어서 좋았다. 방학동 종점에서 우리 집까지 또 서너 시간 걸어야 했지만 거의 매일 그렇게 보냈다. 혼자 우두커니 차창 밖을 보았고, 또 혼자 걸으며 공상에 빠졌다. 어떤 날은 학교에 가지 않고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서울 곳곳을 여행하기도 했다. 결국 친구도 없는 외톨이가 되었고, 성적은 형편없이 떨어졌다. 외로웠지만 더 외로운 곳으로 나를 몰아붙였다. 어차피 나는 평범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나 자신을 벌주었다. 키 150cm도 안 되는 작은 소년이 그렇게 사춘기를 보냈다.

 ‘누구에게든 털어놓고 상의하지 그랬느냐’고 얘기해주고 싶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렇게 숨기고 괴로워하지 말았어야 했다.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선생님에게 ‘호모’가 무엇인지 물었다. 돌아온 답은 “나쁜 짓 하는 사람들이고 병 옮으니 가까이 하면 안 된다”였다. ‘사랑의 전화’에 문의하기도 했다. 몇 번을 전화했다가 끊고 다시 전화한 끝에 떨리는 목소리로 동성친구를 좋아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 나쁜 짓이다. 교회를 다니면 치료할 수 있다”는 얘기를 했다. 그 길로 교회를 찾았고 2년이 넘게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매달렸지만 야속하게도 하나님은 나를 치료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 오빠를 좋아하는 더 큰 죄를 짓게 되면서 교회를 떠나야 했다. 어디서 옮은 건지 모르는 내 병이 싫었고, 그걸 또 남에게 옮길까봐 두려웠다. 손을 잡아줄 사람이 필요했지만 더 얘기할 사람이 없었다.

 

청년, 청년을 만나다

 동성애가 병이 아니고 죄도 아니란 걸 알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파고다극장이 호모들이 크루징하는 곳이었다. <선데이서울>에 ‘P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오르내리던 그곳을 찾아보고 싶었지만 쉽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처럼 그곳에 가게 되었다. 서울 종로에서 ‘가투’(가두투쟁)가 있던 날 ‘백골단’(경찰사복체포조)에 쫓겨 뛰어들어간 골목에 나를 반기듯 우뚝 서 있었다. 마침 <지옥의 묵시록>을 상영하고 있었다. 그래, 난 영화를 보러 온 거야. 호모들을 만나러 온 게 아니라고. 그렇게 나를 달래며 극장으로 들어갔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고 무섭기도 했다. 출입문에서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냥 영화를 보고 있으면 되는 건가?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할아버지 한 분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내 무릎에 손을 얹었고 조금씩 그 손이 허벅지 위로 올라왔다. 깜짝 놀라서 소리를 ‘꽥’ 지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렇게 두 번을 허탕치고 세 번째 나갔을 때 ‘쌔끈한’ 청년을 만났다. 그도 내 옆자리에 앉아 무릎에 손을 얹었고, 그 손이 내 앞섶까지 올라왔다. 잔뜩 흥분한 내 것을 만지면서 내 귀에 속삭였다. “같이 나갈래요?” 그를 따라 종로구 낙원동에 있는 허름한 모텔로 가서 화끈한 섹스를 했다. 그는 대기업에 다니는 청년이었다. 착실히 돈을 모으고 있다는 그는 10년쯤 뒤에 돈이 많이 모이면 스웨덴으로 이민 갈 거라고 했다. 스웨덴에는 호모들이 시내 중심가에서 합법적으로 퍼레이드를 벌이고, 심지어 결혼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그들을 ‘호모’가 아니라 ‘게이’라고 부른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이야기였다. 지구 먼 곳에 그런 곳이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그에게 이민을 갈 게 아니라 한국을 스웨덴처럼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했는데, 그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펄쩍 뛰었다.

 그 뒤로 책이나 영화를 통해 스웨덴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게이들이 동성애 인권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난 더 이상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린 호모가 아니었다. 나 스스로를 긍정하게 되면서 다시 밝고 명랑한 사람으로 되돌아갔고, 차츰 용기가 생겨 주변에 커밍아웃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커밍아웃하던 날, 언젠가 사회적으로 커밍아웃하리라 다짐했다.

 

중년, 청년을 만나다

 ‘친구사이’라는 동성애 인권운동단체의 회원으로 활동하던 어느 날, 그가 내게로 왔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면 친구사이 사무실로 왔다. 문이 열리고 서너 명의 사람들이 들어왔는데, 그만 환하게 빛났다. 그는 나보다 열아홉 살이나 어린 청년이었다. 마흔이 넘은 내가 넘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욕심이 났다. 마치 사춘기 소년처럼 열병을 앓았다. 그에게 이끌리는 감정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바로 작전에 돌입했다. 그와 자주 마주치고, 그의 옆자리에 앉고, 그에게 재잘거렸다. 그러던 중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회원들이 함께 가는 MT. MT를 준비하는 후배에게 부탁해서 그와 같은 조가 되었다. 같이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게임을 하면서 그와 더 친해질 수 있었다. 술이 얼큰하게 취하면서 마음이 풀어지는 순간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에게 산책하자고 꼬드겼다. 밤새 소리와 물소리가 들렸고, 별이 쏟아질 듯 많은 시골길을 걸었다. 시간이 흐르는 동시에 정도 쌓여갈 때 그의 손을 잡았고, 그에게 키스했다. 그렇게 시작된 사랑이 벌써 8년째.

 2013년 가을, 열아홉의 나이 차이가 나는 우리는 결혼할 예정이다. 동성애자의 결혼이 낯설기만 한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공개적으로 결혼식을 할 생각이다. 결혼이 이성애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걸 사람들에게 확인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할 것이다. 동성애자인지 깨닫고 괴로워하던 열다섯 소년은 이렇게 자랐다.

김조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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