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화의 피해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평등’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2000년 ‘구조조정 반대, 민영화 저지’ 한국통신노조 파업 당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한목소리를 내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당시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 노조의 연대 제의를 거부했다. 파업을 벌이던 한국통신(정규직)노조 조합원들이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농성을 벌이던 모습.한겨레 이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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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전 한국통신계약직노조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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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들머리 밖에서 기다리던 계약직 노동자들은 감정이 격해졌다. 자칫 노-노 싸움으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홍 위원장은 마이크를 잡고 소리 내어 울었다. “폭력으로 가면 우리한테 돌아오는 것이 없다. 지금 마음속 울분을 잊지 말자. 안타깝지만 여길 떠나자.”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던 위원장의 호소에 계약직 노동자들은 명동을 떠나야 했다. 계약직은 쫓겨났고, 민주노총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 “너무나 기가 막힙니다. 똑같이 구조조정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를 이렇게 ‘문전박대’할 수 있습니까? 서로 얼굴 보며 같이 일한 게 몇 년인데…. 우린 버림받았습니다. 정규직은 적입니다.” 배신감과 울분을 곱씹으며 계약직들은 눈물을 흘렸다. 비정규직을 내친 한국통신 정규직 노조는 파업 5일 만인 12월22일 회사와 명예퇴직 중단 등에 합의했다. 합의안에 계약직과 관련된 내용은 단 한 줄도 포함되지 않았다. 홀로 남겨진 계약직 노동자들은 정부와 한국통신을 상대로 길고 힘겨운 투쟁에 나서게 된다. 버려진다는 것에 대해 2013년 12월4일 서울 ‘KT 송파지사’ 근처에서 만난 홍준표(51) 전 한국통신계약직노조 위원장은 피곤해 보였다. “인터넷 설치 때문에 오늘 전봇대를 10번 정도 올랐어요. 예전엔 그냥 탔는데, 나이 드니까 사다리 없이는 힘들어요.” 웃을 때 주름이 가득 잡히는 선한 눈매는 여전했다. 2004년부터 그는 다시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송파지사가 그의 작업장이다. 13년 전에는 계약직이었다면 지금은 KT 자회사 소속이다. KT와 자회사가 도급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도급(하청) 노동자라고 부른다. 정규직보다 더 힘든 일을 하지만 월급은 절반가량 되고, 노동시간도 훨씬 길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처지와 비슷하다. 대기업이 이윤을 내는 방식은 이처럼 닮아 있다. 홍 위원장은 1982년 10월부터 한국통신에서 일했다. 누나·매형·고모부 등이 모두 한국통신에서 일하고 있었고, 방황하던 ‘스무 살 홍준표’는 가족의 소개로 한국통신 도급업체에 입사했다. 1995년 가을부터 한국통신은 도급업체에 맡겼던 일을 모두 직영으로 바꿨고, 도급 노동자들은 계약직 신분이 됐다. 당시에는 정규직이 되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전화 설치 같은 현장 업무의 경우 자격증을 따고 근무 경력이 오래되면 정규직이 됐다. 물론 인맥도 작용했다. 어쨌든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가는 ‘다리’ 구실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외환위기와 민영화가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1997년부터 계약직이 정규직이 되는 길은 완전히 막혀버렸고, ‘고통 분담’ 차원에서 임금이 대폭 깎였다. 9년 근속 계약직의 경우 1997년 137만원이던 임금이 2000년 86만원까지 삭감됐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작업복을 물려받고, 4대 보험도 제대로 적용되지 않던 계약직들의 임금이 깎이고, 2~3개월 ‘초단기 계약’까지 강요받았다. 조금만 참으면 정규직을 시켜준다는 회사의 약속이 공수표가 되자 이곳저곳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흩어져 있던 분노를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조직해낸 것이 홍 위원장이다. “제가 지방공사 일을 많이 했어요. 전국을 자주 돌다보니, 지방에서 일하는 계약직과도 안면이 있었던 거죠. 술 한잔 마시면서 얘기하다보니 불만이 다 똑같은 거예요. 바꾸자고 설득했죠.” 홍 위원장은 그들의 처지에 가슴 아파하고 공감하면서 어느새 형님이자 아우가 돼 있었다. 이런 성과들을 모아 2000년 2월29일 한국통신계약직협의회를 만든다. 하지만 협의회로 남아 있기에는 당시 상황이 너무나 촉박했다. 민영화를 앞두고 계약직 대량해고 얘기가 나오면서 노조 설립을 서둘렀다. 이 과정에서 계약직들은 ‘한 줄기 빛’을 발견한다. 한국통신노조(정규직) 규약에 일용직도 가입이 가능하게 돼 있었다. 계약직들이 정규직 노조에 가입하면 한국통신을 상대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00년 3월2일 홍 위원장은 이동걸 한국통신노조 위원장을 만나 “규약대로 노조에 가입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위원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위화감이 생기고, 임금 등 노동조건을 맞추기 어려우며, 무엇보다 수시로 해고되는 계약직에게 지급해야 하는 희생자구제기금을 충당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우리가 순진했던 것 같아요. 규약에 명확히 근거가 있고, 정규직 조합원은 3만8천 명이고 우린 겨우 1400명인데 이거 못 받아줄까 생각했어요. 함께 싸우자는 거였지, 희생자구제기금은 생각도 안 했습니다.” 정규직 노조는 생존권이 걸린 비정규직들의 연대 제안에 돈을 먼저 생각했다. 홍 위원장은 이 위원장을 만난 뒤에도 여러 번 노조 가입을 요구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지는 싸움을 해서는 안 되는데, 계약직만으로 힘들다고 봤어요. 혹시 우리가 이긴다고 해도 엄청난 상처가 남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죠.”
다른 선택의 길이 없었다. 3월31일 한국통신계약직 독자 노조가 출범했다. 하지만 당시에 복수노조가 금지돼 있어 조합원 가입 범위가 중복되는 계약직 노조는 ‘법외노조’가 됐다. 계약직들은 정규직 노조에 조합원 범위를 조정해줄 것을 요구했고, 한 번의 부결을 거쳐 무려 7개월 만에 규약이 변경됐다. 10월14일 드디어 노동부로부터 합법노조로 인정받는다. “남들은 사흘이면 나오는 노조 설립 필증을 우리는 참….” 계약직에게는 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노조 간부들은 노조를 인정받고 좋아했지만 홍 위원장은 마음이 무거웠다. 이제부터는 정말 계약직들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했기 때문이다. 12월 정규직과의 연대집회마저 무산되고, 한국통신은 11월의 1천 명에 이어 12월30일에 6천 명을 해고했다. 그들은 회사에도 정규직에게도 헌신짝처럼 버림받았다. 새해가 밝았고, 비정규직들은 혼자만의 싸움을 시작했다. 2001년 1월2일 해고자가 된 계약직 중 400여 명이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한국통신 본사 앞에서 노숙농성에 들어갔다. 추위를 막아낼 장비는 침낭과 비닐뿐이었다. 폭설과 혹한 등 기상이변에 가까울 정도의 강추위는 사람들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몸이 어떤 상태인지 모를 만큼 꽁꽁 얼어붙었다. 1월15일 이동구씨는 그렇게 쓰러졌다. 뇌경색으로 몸의 반쪽이 마비됐고, 말을 하지 못했다. 동구씨는 겨우 스물일곱이었다. “동구가 다시 걷기는 하는데, 아직 말은 못해요. 그래도 잘 웃어.” 얼굴빛이 어두워진 홍 위원장은 소주 한잔을 마셨다. 한겨울 밖에서 사람이 농성을 하다가 마비까지 왔는데, 세상은 조용했다. 동구씨가 쓰러지면서 노숙농성을 하던 계약직들은 잠시 서울 안암동 고려대 교정에서 쉬게 됐다. 보일러가 돌아가고 따뜻함이 느껴지자, 모두들 곯아떨어졌다. 홍 위원장은 이대로는 억울하다며 또 다른 투쟁을 준비했다. 한강대교 농성. “전봇대를 잘 타던 창기를 깨우려는데, 콧물까지 흘리면서 자는 거예요. 추운 데 있다가 따뜻해지니 몸이 완전히 풀린 거죠. 깨워서 ‘너 올라가야겠다’고 하니, 창기가 벌떡 일어나 바로 짐을 챙기더라고요. 순간 마음이 짠하더군요.” 끝이 보이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 1월16일 새벽 창기씨는 서울 노량진 근처 한강대교 철제 난간에 올랐다. 챙겨온 현수막을 펼쳤으나 바람이 너무 강해 허공에서 휘날렸다. 신고 있던 등산화를 벗어 현수막 아래에 매달았고, 그제야 적혀 있던 글씨가 보였다. ‘한국통신은 고용안정 보장하라.’ 기자들이 올 때까지 난간에서 양말만 신고 덜덜 떨던 창기씨는 동상에 걸렸다. 극한투쟁은 또 다른 극한투쟁으로 이어졌다. 극한의 저항조차 어느새 진부하게 만들어버리는 이 세상에 흠집이라도 내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억울하다. 우리 얘기를 들어달라.” 무관심한 세상을 향해 온몸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노숙농성과 전국 순회투쟁을 거쳐 3월29일 드디어 그들이 일을 냈다. 일명 ‘골뱅이(@) 투쟁’이다. 보완 유지를 위해 투쟁 이름이 필요했는데, 통신노동자들이 싸운다는 의미로 ‘@’를 사용했다고 한다. 새벽 3시10분 계약직 198명은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조직적 움직임으로 경찰의 감시망을 뚫고 서울 목동 전화국을 점거했다. 통신시설이 있는 전화국이 점거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것저것 다 해봐도 안 되니까. 옥쇄투쟁을 결심했어요. 전화국 점거를 담보로 대화의 실마리를 풀어가려고 했어요. 골뱅이 투쟁을 준비하면서 5년(실형) 정도 예상했어요. 제 마지막 역할이라고 봤죠.”
한겨레 서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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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통신 정규직 출신 양한웅·조태욱씨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네요”
‘민영화’라는 거친 파도를 앞두고 한국통신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왜 손잡을 수 없었을까? 비정규직을 냉정하게 내친 정규직의 삶은 나아졌을까? 한국통신에서 민주노조 운동을 해왔던 양한웅(54·사진 왼쪽) 조계종 노동위원회 집행위원장과 조태욱(53·오른쪽) KT 노동인권센터 집행위원장을 2013년 12월10일 만났다. 두 사람 모두 한국통신 정규직 출신이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네요.” 양한웅 위원장은 1990년대 노조 민주화와 민영화 반대 투쟁에 나섰다가 해고된 뒤 공공부문 노동운동을 해왔다. 13년 전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이 투쟁할 때는 이들의 상급단체인 민주노총 공공연맹 수석부위원장이었다. “당시에는 ‘비정규직’이란 개념조차 생소했어요. 당연히 비정규직 운동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에 대한 의식이 없었습니다. 이동걸 집행부뿐만 아니라 민주노조를 한다고 했던 우리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죠.” 양 위원장은 “우리 운동의 수준이 그랬다”고 돌이켰다.
노동현장에서 일상적으로 이뤄진 차별도 연대가 어려웠던 이유라고 했다. 노동조건의 격차는 그들을 ‘다른 노동자’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비정규직을 당시에는 ‘인부’라고 불렀어요. 전화를 고치러 4~5명이 현장에 나가면 그중 1명이 인부였어요.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거칠게 표현하면 ‘따까리’ 역할을 했습니다. 2~3년 일하고 자격증을 따서 정규직이 되기 전까지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죠.” 계약직들이 집단해고에 맞서 싸울 때도 ‘우리 투쟁’이 아닌 만큼 정규직들의 태도는 소극적이었다. “민주노조 운동을 했던 활동가들도 ‘우리 식구들인데 참 안됐다’ 수준의 생각을 했어요. 공동투쟁을 통해 정부와 한국통신을 상대로 한판 붙어보자, 뭐 이런 인식까지 가지 못했죠.” 여기에 민영화로 인한 구조조정 광풍은 정규직을 더욱 움츠리게 했다. “전쟁 중에 폭탄이 막 쏟아지고 있어요. 정규직은 그들을 당분간 지켜줄 참호와 소총이라도 있는데, 비정규직은 허허벌판에 놓여 있죠. 소총을 들고 비정규직과 함께 싸우면 죽을 것 같으니까, 정규직들은 참호 속에서 ‘나만 살겠다’는 심정으로 숨죽이고 있었던 거예요.” 이런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고 양 위원장은 말했다.
민영화가 미칠 영향에 대해 제대로 전망하지 못한 것도 공동투쟁을 어렵게 했다. 조태욱 위원장은 속에 있던 말을 꺼냈다. “당시에는 민영화를 꼭 나쁘게만 생각하지 않았어요. 공기업 때 정부 가이드라인 등 통제가 너무 심했거든요. 지긋지긋했죠. 민영화되면 자율교섭도 할 수 있고, 노동자들의 조건이 더 좋아지지 않을까 기대도 있었어요. 자본의 냉혹함을 경험한 적이 없었던 거죠.” 내부에서조차 민영화에 대한 입장이 다양했던 만큼 민영화를 막기 위해 비정규직과 공동투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더욱 힘들었다.
비정규직을 외면했던 정규직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조 위원장은 “한마디로 비참한 상태”라고 말했다. 2002년 8월 민영기업 KT가 출범한 뒤 구조조정은 한층 더 심해졌다. 2003년 명예퇴직으로 5500명이 퇴출됐고, 2008년 1050명에 이어 2009년 5900여 명이 내몰렸다. 1998년 5만5600여 명이던 직원은 현재 3만1천여 명으로 줄었다. 특히 2005년부터 명예퇴직을 거부하거나 민주노조 활동을 하는 직원 등을 내쫓기 위해 회사가 비밀 퇴출 프로그램을 가동했다는 사실이 폭로되기도 했다. 빡빡한 현실을 반영하듯, 2009년부터 5년 동안 KT에서 자살 등 사망자 수는 188명(재직·퇴직자)에 이르고 있다. 노조는 10년 이상 ‘노사협조주의’ 집행부가 들어섰다. 2009년 7월에는 민주노총마저 탈퇴했다.
노동자들의 악화된 상황과 달리 KT 주주들은 더 높은 배당을 받고 있다. KT의 배당성향(이익 가운데 주주에게 나눠준 금액의 비율)은 2000년대 들어 30~40%대를 유지해오다 2009년 94.2%까지 치솟았고 지난해에도 67.8%에 이르렀다. KT의 외국인 지분은 49%다. 조 위원장은 “노동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번 돈이 외국계 주주 등에게 돌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비정규직이 잠시 정규직의 ‘방패막이’가 될 수는 있지만, 그 방패가 사라지면 그다음은 정규직 차례라는 걸 KT의 역사는 무겁게 얘기해주고 있다. KT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지금 ‘반전’을 꿈꿀 생각마저 거세당한 채 무기력의 늪으로 더욱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글 김소연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기자 dandy@hani.co.kr
양한웅 조계종 노동위원회 집행위원장(사진 왼쪽)과 조태욱 KT 노동인권센터 집행위원장. 사진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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