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1.05 15:08 수정 : 2014.02.04 10:46

윤여준 같은 매력적인 인물이 달리 쓰일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후세대에게 있다. 김영삼 정부 당시 윤여준 청와대 대변인이 기자들에게 브리핑을 하고 있다.한겨레 자료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2년 전에 태어났다.” 2013년 초 나와 한 인터뷰에서 그는 그리 말했다. ‘1939년생’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실감났다. 내가 태어난 해인 1983년, 그는 해외 생활을 마치고 전두환 정권의 청와대로 돌아왔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내 할아버지가 1930년생이셨으니, ‘작은할아버지뻘’이라 불러야 할 만큼의 세대 격차가 있다.

내가 초등학생 고학년 때 신문을 1면부터 읽는 것을 좋아했더라도 ‘관료 윤여준’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정치에 막 관심을 가진 10대 소년에게, ‘청와대 공보수석’이나 ‘환경부 장관’이 누구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2000년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당시 고3이었고, 이미 웹상에서 태동한 안티조선 운동의 조류에 합류하고 있었다.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 운동과 이에 대한 보수세력의 반발이 만들어낸 ‘홍위병’ 논란이 뚜렷이 기억난다. 그러나 윤여준의 조언으로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에게 힘을 싣는 ‘개혁공천’이 실행됐고, 그 결과 2000년 한나라당이 선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11년 가을, ‘안철수의 멘토’라는 이름으로였다. ‘여의도 전략가’ ‘보수정권의 책사’라는 평가와 함께였다. 그러나 곧 그는 안철수와 결별했고, 나는 그의 책 <대통령의 자격>(메디치미디어·2011) 도서강연회의 패널 자격으로 그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토론회 패널 자격으로 두어 번, 또 그가 진행하는 강연회 프로그램 사회를 맡게 되어 10여 번, 결정적으로 <팟캐스트 윤여준> 진행자로 합류해 30여 번을 만났고 그 와중에 여러 번 술자리도 같이했으니, ‘윤여준’에 관한 한 나는 짧은 시간 동안 주류 언론사 기자를 능가하는 집중적인 접촉을 하는 호사를 누린 셈이다.

처음 그에게 느낀 감정은 ‘두려움과 호기심’이었다. 경력이 짧은 마이너 매체 기자로서는 한국 사회의 최상층부를 경험한 명사가 상대방을 어떤 태도로 대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공적 발언의 영역에서는 대단히 합리적일지라도 사적 인간관계의 영역에서는 신분제를 믿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이들이 한국 사회에 제법 많다는 건, 이 땅에서 서른 해를 살기 전에 누구나 알게 되는 진실이 아닌가. 또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오랫동안 보수 정치세력에 몸담았다가 안철수를 거쳐 문재인 지지라는 흐름에 합류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호기심도 당연히 있었다. ‘합리적 보수’ ‘책략가’라는 평가가 모종의 정치철학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사태 파악 및 대처에 대한 발 빠른 감각에서 나온 것인지도 궁금했다.

이 감정들은 서너 번의 만남이 지나기 전에 대부분 해소됐다. 일단 그는 ‘한국 사회 성인 평균’에 비춰볼 때도 압도적으로 타인을 존중하는 사람이다. 사람을 함부로 평하지도 낮춰보지도 않았는데, 처음에는 그것이 예의인지 본심인지 구별하기 힘들었다. 조금 지난 뒤에야 두 가지는 애초 분간이 힘든 것일지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타인 존중과 자기 겸양을 의지적으로 행하다보면, ‘본심’ 자체가 그리 형성될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수십 년간 형성된 습관에서 우러나온 것처럼 보였다. 그 연원은 그와의 대화나 <남자 삼대 교류사>(박유상·메디치미디어·2010)로 미뤄볼 때, 그의 부친 고 윤석오 선생의 독특한 인물 됨됨이에서 나온 가정교육으로까지 소급됐다. 고 윤석오 선생 자신과, 그가 아들 윤여준 전 장관에게 물려준 ‘보수주의’의 가치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자 윤여준이라는 인물과 그 인생행로 역시 납득이 되었다. 내가 이해하는 윤여준은 지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며, 지성으로 납득한 윤리를 삶의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근기’를 갖춘 사람이다. 그가 말하는 보수주의의 미덕의 색채는 한국 사회가 전후에 받아들인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 체제보다는, 만민평등이란 근대 문물을 수용한 조선 선비의 것과 비슷한 빛깔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선비의 잣대로 바라본다 하더라도, 그는 ‘근기’는 있으되 ‘결기’는 부족했다. (당시) ‘야당지’ <동아일보> 기자로 1960년대에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경향신문> 정치부 기자 시절 유신을 겪자 할 일을 찾지 못해 공무원이 되었다. 외교관으로 일본과 싱가포르를 거쳐 ‘1980년 광주’를 싱가포르에서 겪었음에도 전두환 정권 청와대에서 공보 업무를 맡았다. 내면에 갈등이 많았지만 처자식을 위한 밥벌이가 필요했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 선택을 ‘자기합리화’라 스스로 비판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기객관화’를 할 수 있는 이다. 두 아들에게는 “아버지는 소신대로 살지 못했지만 독립운동가, 민주화운동가들도 처자식이 없어 그리 한 것은 아니다. 너희는 비슷한 상황이 오면 소신대로 살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그리 사는 이들에 대한 존경심은 가져야 한다”고 말했단 얘기를 듣고는 이것이 ‘영웅적인 선택을 하지 못한 소시민이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적인 태도’라고 경탄했다.

이 ‘최소한의 윤리적인 태도’는, 한국 사회에선 ‘최대한의 윤리적인 태도’가 된다. 거기에 윤여준이라는 인물에게서 느껴지는 편안함과 매력이 있다. ‘결기’ 측면에서 볼 때 그는 이승만의 경무대에서 일하다 어느 순간 그와 결별한 부친 고 윤석오 선생에 비해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지나친 자기객관화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내 깜냥에 윤여준은 그 시절 굳이 관료로 계속 일하지 않았더라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는 재주를 갖춘 이로 보이니 말이다. 윤여준은 스스로도 “자기객관화를 너무 하다보니 어느 순간 과감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맛이 부족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주변 지인들이 “장관님은 너무 사람을 챙기는 일을 오래 하셔서 습관적으로 남 생각부터 하신다”고 말하는 것을 듣기도 했다.

그랬기에 윤여준은, 그 매력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잘못 활용된 경우가 아닐까. 본인이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지만, 나는 그의 회고에서 이회창이나 박근혜 같은 정치인이 위기 때만 그의 조언에 귀기울였고 위기 이후엔 그를 멀리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국의 보수주의는 윤여준이 원한 만큼의 ‘최소한의 품격’을 갖추지 못했고, 그 결과 그는 긴 세월 보수주의의 품격을 가장하는 역할을 하다 더 이상 스스로도 그리 할 수 없다고 느낄 때쯤 진영을 넘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뀐 진영에서도 윤여준의 처지는 비슷하다. 그의 ‘원칙’을 수용할 수 있는 정치인은 희소하고, 그 스스로 원칙을 천명하는 활동가가 되기 위한 강단은 부족한 탓이다. 그는 사람을 대하는 보수주의의 원칙을 통해 전략가가 될 수 있었던 역설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그와 술자리에서 정치에 대해 다소 깊은 얘기를 하다보면, 나중에는 원칙론과 선거공학이 어지러이 뒤섞인 진술을 만난다. 그가 전해준 경험을 활용해서, 그와 같은 이가 다른 방식으로 쓰일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후세대에게 전해졌다.

글 한윤형 매체 비평지 <미디어스> 기자. <뉴라이트 사용후기> <안티조선 운동사>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공저)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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