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1.05 14:57 수정 : 2014.01.06 15:02

세상은 윤여준을 보수-진보의 경계를 넘나든 사람으로 보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길을 갔을 뿐이라고 했다. 경계가 비뚤어졌거나 흐릿하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2011년 ‘청춘콘서트’에서 안철수 당시 서울대 교수, ‘시골의사’ 박경철 원장(맨 왼쪽)과 대담을 하는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가운데).한겨레 자료
‘개혁적 보수주의자’. 원희룡 전 새누리당 의원이 자처한 정체성이다. ‘하이브리드 보수주의자’. 곽승준 전 미래기획위원장이 주창한 버전이다. 그리고 윤여준의 경우에는 ‘합리적 보수주의자’다. 명사인 보수주의자는 그들의 신분적 정체성을, 흡사하지만 다르게 선택된 수식어들은 그들의 이념적 정체성을 설명한다. 세 사람의 신분은 보수 정당 혹은 정권이 제공했지만, 세 사람의 신념은 보수 정당 혹은 정권이 짜놓은 틀거지에 딱 들어맞질 않는다. 그들의 발언은 좌우 진영에 대한 양비론과 양시론을 자주 오간다. 좌파에게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우파이며, 우파에게 그들은 사상 검증이 완료되지 않은 좌파의 용의자다. 그들이 펼쳐왔던 양비론과 양시론처럼, 그들의 이름은 좌우의 입에서 긍정과 부정으로 끊임없이 오르내린다. 그래서 그들의 권력은 예외적이고, 중심으로부터 박리되어 기능한다. 그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흑백을 거부한다는 정체성은 나무랄 이유가 없지만, 두 팔 벌려 환영하기에는 또 어쩐지 석연찮다. “나는 정치적 모든 것이다”라는 선언처럼 들려서다. 좌표의 모든 지점에 존재할 수 있는 것.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 그런 것을 찾을 때는 좌표의 어느 지점을 바라봐야 하는가?

-자칭 타칭 ‘합리적 보수주의자’인데….

윤여준-아, 잠깐만요. 자칭은 아닙니다. 합리적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지만 스스로 그렇게 부른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합리적 진보주의자’라는 표현은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합리적 보수주의자라는 말이 성립하려면 먼저 ‘비합리적 보수주의자’가 존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비합리적 보수주의자와 합리적 보수주의자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윤여준- 합리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겠죠. 아무래도 많은 분들이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생각·주장·행동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저를 그렇게 부른 것이라고 봅니다.

-어떤 측면에서 사람들이 ‘보수주의자는 합리적이지 않다’고 판단했을까.

윤여준- 글쎄요, 제 관점에서 말하자면 한국 보수는 성찰을 하지 않습니다. 건국 이래 지금까지 보수세력이 한국 사회를 지배해왔는데, 산업화 등의 공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저지른 과오도 많습니다. 산업화 과정만 들여다봐도 그렇죠. 하지만 그런 부분을 인정하지 않고 건국과 국가 발전에 기여한 부분만 이야기하는 태도가 사람들에게 ‘합리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비치는 거라고 짐작합니다.

-윤여준은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의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 찬조연설에서 그는 문재인 후보가 ‘민주주의를 더 잘할 대통령’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합리주의자로서 윤여준이 평가하기에, 문재인 후보가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보다 시대적 합리성에 더 부합하는 정치인이었다는 뜻일 터다. 그런데 시계를 불과 10년 전으로 돌리면 한나라당 국회의원 윤여준이 있었다. 10년 전의 한나라당과 현재의 새누리당이 무엇이 다르다고 보았기에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는가.

윤여준- 반대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보았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누리당이 이름만 바꾸고 로고만 바꿨지 본질은 똑같이 남아 있다고 보았죠. 그렇다고 제가 정당으로서 민주당의 지지자로 돌아선 것은 아닙니다. 대선에서 후보 두 사람의 리더십만 놓고 평가했던 거죠. 저는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가 되기 이전 당 대표, 비상대책위원장이던 시절부터 일관되게 비판해왔습니다.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라서 시대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 리더십을 가지고 있고, 이런 사람이 국가 지도자가 되면 본인도 불행해지고 국가도 불행해진다는 주장을 거듭했죠. 끝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고요. 반면 문재인 후보와는 세미나 토론에서 만나 악수 한 번 나눠본 사이였고, 매체를 통해 접하는 일방적인 이미지만 가지고 있었어요. 대선 전에 만나 2시간을 이야기해보면서 피상적 이미지와 많이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대통령 당선을 도와달라는 게 아니라 당선 이후를 도와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점도 인상 깊었죠. 스스로 청와대에 근무해봤더니 완벽하게 준비하고 당선돼도 국정이란 게 어려운 일인데,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품어본 적도 없던 차에 준비 없이 불려나온 셈이니 밤에 잠도 잘 못 자겠다고 고백하더군요. 2시간 나눈 대화로 어떻게 사람을 알 수 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면서 문재인 후보가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쓴소리를 받아들이는 태도, 노무현을 극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 같은 것들을 눈여겨보았어요.

-결국 이념 전향이 아니라, 인물을 보고 지지할 진영을 선택했다는 것이 아닌가. 만약 다음 대선에서는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가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고, 대화를 나눠보니 그 역시 시대가 요구하는 대통령의 자질을 갖춘 인물이라는 확신이 생긴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

윤여준- 저는 한나라당 국회의원일 때도 내가 어떤 진영에 몸담았느냐를 고민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런 종류의 경계선은 제 머릿속에 아예 없어요. 만약 새누리당에서 자질을 갖춘 후보를 내놓는다면, 그리고 그가 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당연히 도울 의향이 있습니다.

-이택광 교수가 물었다. “그렇다면 윤여준이 대통령의 자질을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윤여준- 문재인 후보가 저를 찾아왔을 때 이런 농담을 했습니다. “저야말로 합리적 보수주의자 아닌가요? 변호사로 평생 잘 먹고 잘 살아왔지 않습니까?” 이념의 잣대로 적대시하는 태도가 엿보이지 않았어요. 한국 사회는 너무 이념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이념에 매몰되지 않는 태도는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반면 박근혜 대통령이 당을 운영하는 방식을 지켜봐온 저로서는 지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보았고요.

-저서 <대통령의 자격>에서도 윤여준은 박정희 리더십을 일부분 긍정하면서도 자유민주주의가 성숙한 이 시대와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마찬가지로 박근혜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반면 국민들은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결국 우리 시대의 국민들은 우리 시대와 맞지 않는 리더십에 대한 향수로써 우리 시대의 지도자를 선택했다는 뜻이 아닌가. 이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윤여준- 아이러니죠. 산업화의 혜택을 본 사람들이 많이 ‘생존’해 있다는 영향이 크겠죠. 빈곤에서 풍요로 이끌어준 지도자에 대한 사회적 기억이 아직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그 기억이 향수로 나타나는 것이죠. 그보다 한 세대 위에서는 여전히 대통령이 ‘상감’입니다. 상감의 따님이 나타났으니 지지할 수밖에 없는 거죠. 한편으로는 민주당이 선거 캠페인부터 시작해서 잘못한 점도 큽니다. 유권자 흡수에 실패했다고 봐야죠. 패인이야 너무 많습니다. 패인 분석만 봐도 여러 가지 형태로 나왔지 않습니까?

-지난 정권 동안 이명박 대통령이 보여준 ‘최고경영자(CEO) 리더십’에 실망한 국민들은 또 다른 CEO인 안철수 후보의 등장에 열광했다. 이명박의 리더십과 안철수의 리더십은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보는가.

윤여준- 청춘콘서트 할 때, 저도 그 열광적인 반응을 보고 놀라 대학생들을 붙잡고 이유를 물어봤어요. 얼른 대답을 못한다는 게 공통점이었죠. 안철수에 열광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죠. 고민 끝에 내놓는 이야기 가운데 큰돈을 벌 수 있었던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무료로 사회에 공개했다는 것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이 갖는 의미의 실체보다 학생들이 훨씬 크게 반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적 헌신성을 보여야 마땅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공적 헌신성은커녕 사적 헌신성만 보여왔기에, 오히려 사인(私人) 안철수가 보여준 공적 헌신성이 상대적으로 가치 있게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저는 해석했어요. ‘현대건설의 CEO’라는 타이틀을 가졌던 이명박과 달리 안철수는 단지 유능한 CEO로 평가된 게 아니었던 거지요.

-이명박 전 대통령도 현대건설 해외 지사에 근무하던 시절 노동자 분규에 맞서 현대건설의 금고를 목숨 내놓고 끌어안아 지켰다는 일화로 유명해졌지 않나. 그것도 일종의 공적 헌신 아닌가.

윤여준- 하하하하. 현대건설의 관점에서야 어마어마한 공적 헌신이었겠죠.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는 공적 헌신과는 거리가 먼 행동이었고요.

-어쨌든 윤여준은 안철수의 청춘콘서트에 출연했고, 대통령 후보 출마 전까지 안철수에 대한 기대치가 느껴지는 발언을 종종 내놓았으며, 한동안은 ‘안철수의 측근’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문재인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안철수를 떠난 이유는 무엇인가.

윤여준- 떠나거나 머무른다고 말할 수 있는 관계가 원천적으로 아니었어요. 청춘콘서트가 열리던 때 제가 안철수 의원에게 제안했던 것은 선거에 직접 뛰어드는 형태가 아니라 양당 지배 구도의 선거에 긍정적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회적 운동이었어요. 논의가 오가는 도중에 오세훈 서울시장이 사임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안철수 의원이 불쑥 서울시장직에 도전하겠다는 말을 꺼냈죠. 저는 반대했습니다. 서울시장이 되는 것보다 우리가 논의했던 운동을 수행하는 것이 더 의미 있고 바람직하다고 보았거든요. 당시 안철수의 결심이 완강했는데, 또 한편으로는 성격이 신중해서 가족의 반대를 이겨내지 못하고 시장 선거에 출마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 후로 저는 <대통령의 자격> 집필에 몰두했고, 안철수 의원은 학교로 가버렸죠. 평소 안부를 주고받을 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으니, 정치적 ‘결별’을 말할 사이도 아니었던 거지요.

-그렇다면 이런 상상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윤여준은 반보수 진영의 두 후보를 모두 가까이서 보았으니, 대통령의 자질도 내심 저울질해보았을 터다. 선거 당시 문재인 후보뿐만 아니라 안철수 후보 역시 도움을 요청해 사이에 놓이게 되었다면, 어느 쪽을 선택했을까.

윤여준- 음…. 저도 확실히는 모르겠네요. 청춘콘서트를 하던 당시에는 안철수 후보가 스스로 권력 추구가 체질에 맞지 않아 정치는 전혀 뜻이 없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그때는 저도 안철수 의원이 정치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대답했죠. 사물에 접근하는 방식이 정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어요. 그래도 대선 출마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는 저 역시 기대와 호기심을 크게 느낀 건 사실입니다. 토네이도가 몰아쳐 기성 양당 구도의 담을 무너뜨리고 지붕이 날아가는 사태를 보게 되기를 희망했던 거죠.

-당시 안철수 후보를 겨냥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방송에 나와 “국민들의 메시아 기대심리는 아주 위험하다”고 발언했다. 대선 과정에서 성향을 노출하는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안철수의 메시아적 아우라가 거품 빠지듯이 빠르게 소진한 느낌이다. 베일에 싸인 매력을 가진 정치인이었는지, 베일이 매력인 정치인이었는지 아리송할 지경이다. 앞으로 그의 정치적 가능성을 어떻게 전망하는가.

윤여준- 국민이 현실을 암담하게 인식하고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느끼면, 알렉산더 대왕 같은 사람이 나타나 큰 칼을 휘둘러 일도양단해주기를 바라는 심리가 생깁니다. 하지만 현실정치에서 메시아는 있을 수 없거든요. 그런 메시아 기대심리는 국민에게도, 안철수 자신에게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 부분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지만, 여전히 안철수 후보에게 가능성은 남아 있다고 봐요. 우리 정치사에서 개인의 이름 뒤에 ‘현상’이 붙은 건 안철수밖에 없어요. 안철수만이 가진 흡입력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아직은 불씨가 다 꺼졌다고는 볼 수 없어요. 지난 대선의 단일화 과정, 단일화 이후의 행보는 안철수 스스로 본인에게 뒤따른 현상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던 것으로 평가해야겠지만, 그건 정치 경험이 없어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이 있을 겁니다.

-규모는 좀 작았지만 ‘문국현 현상’도 있지 않았나.

윤여준- 그래서 ‘제2의 문국현’이 될 거라고 보는 사람이 많았죠. 하지만 문국현의 경우에는 현상이라고 부를 만한 규모가 아니었지 않습니까?

-<한겨레21> 인터뷰특강에서 국민의 정치 참여 방식에 대해 논하면서 “나꼼수의 참여는 카타르시스적 참여이지, 미래를 생산적으로 건설하려는 책임을 수반한 참여라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흥미롭게도 이런 진단은 좌파의 인식과 거의 일치한다. 반면 같은 특강에서 “의회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의원들이 국민들과 촛불을 들고 앉아 있을 거면 정당도 국회도 필요 없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에서는 반대로 완연한 보수주의자의 관점이 드러났다.

윤여준- 한국에서 ‘대표성의 위기’가 시작된 지 꽤 오래됐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한나라당이 무리하게 강행했다가 민심의 역풍을 세게 맞았죠. 그때 저는 이게 바로 심각한 대표성의 위기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의회 다수당이 다수결로 통과시킨 의제는 국민의 일반의지로 간주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국민은 “우리가 언제 그런 권한을 줬느냐”는 대답으로 선거에서 한나라당을 응징했죠. 대의민주제에서 국민은 두 종류의 대표를 뽑습니다. 행정부에서는 대통령을, 입법부에서는 국회의원을. 그런데 국민이 스스로 뽑은 국민의 대표를 불신하는 행태를 보이죠. 이재오 의원이 특임장관 시절 설문조사를 해보았더니 신뢰도 꼴찌인 국가기관이 경찰과 국회였어요. 그다음이 청와대였고요. 그렇다면 국회의 대표들은 신뢰를 회복하고 국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노력해야지, 서울시청 광장의 맨 앞줄을 차지하고 촛불을 들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지 않나요? 오히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제대로 할 테니 분을 푸시고 댁으로 그만 돌아가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촛불은 그 자체로 직접민주주의의 요구예요. 대의제의 부작동을 뜻하는 거고요. 대의제의 책임자들이 왜 거기에 낍니까?

-나꼼수의 카타르시스적 참여와 촛불집회의 직접민주주의적 참여가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면, 시민의 바람직한 정치 참여는 오로지 대의민주제가 마련해놓은 틀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윤여준- 국회를 통한 참여만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일차적으로 국회를 통한 참여가 정상 작동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거죠. 그게 안 되니까 국민이 자꾸 직접 나오는 것 아닙니까. 나꼼수나 촛불집회를 비난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것도 참여인 건 맞아요. 하지만 책임을 수반한 생산적 참여라고 볼 수는 없지요. 군중이 무작위로 모인 거잖아요.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 바람직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 분노를 표출시켜줬지만, 저는 이명박 정권 때 청와대 인사들에게 “나꼼수에게 감사장을 줘야겠다”고 말했습니다. 청와대를 향한 분노를 배출할 공간을 마련해준 셈이거든요. 나꼼수가 없었다면 청와대를 향해 직접 폭발했을 테니까요.

-이명박 정부가 있어 호황을 누렸으니, 그런 관점에서라면 나꼼수도 청와대에 감사해야 될 거다.

윤여준- 촛불도 마찬가지죠. 집권 초기에 촛불이 한번 터져주지 않았다면 이명박 정부는 말기에 심각한 위기를 맞았을 겁니다.

-정치소비자 협동조합 ‘울림’을 발기하기도 했다. ‘정치소비자 협동조합’이란 정확히 어떤 개념인가.

윤여준- ‘정치’를 ‘소비’한다는 지점에서 많은 분들이 어색하게 생각하는데, 아주 단순한 개념입니다. 상품시장에서는 생산자가 언제나 소비자의 뜻을 살펴야 하지 않습니까? 소비자의 의사에 반한 상품은 성공할 수 없지요. 소비자가 냉정하게 심판하니까요. 정치시장에도 정당과 정치인이라는 생산자가 있고, 국민이라는 소비자가 있다고 볼 수 있죠. 이론적으로 국민은 주권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피지배자이기도 해요. 그렇다면 소비자의 역할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정치시장의 생산자들은 소비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선거철이 지나가면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정치시장의 소비자가 상품시장의 소비자처럼 냉정한 심판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비가 감정적 차원에서 이루어질 뿐, 같은 상품을 내놓으면 다시 구매하고 있는 거지요. 정치 소비자도 상품시장의 소비자처럼 냉정하게 생산자를 심판하자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운동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많이 있어요. 저는 형식에 대한 고민을 했습니다. 소수의 엘리트가 다수를 끌고 가는 기존 운동 형식이 시대에 맞지 않아 보였어요. 운동의 주체가 다수의 국민이 되는 조직, 그 형식으로 이상적인 게 바로 협동조합이었습니다.

-하지만 상품시장의 소비자와 달리 정치시장의 소비자는 정파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현실적으로 보수정당의 지지자와 진보정당의 지지자가 하나의 조직 안에서 공통의 정치적 목표를 위해 협조하는 운동이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윤여준- 협동조합의 이름으로는 특정 정파나 특정 개인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조합으로서는 정파성을 초월한 가치를 지향할 수밖에 없지요. 헌법이 규정한 민주공화국의 가치조차 이 시대에는 지켜지지 않고 있으니까요. 그건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지요.

-윤여준은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로 규정하지만, 그의 글과 말은 언제나 보수와 진보의 ‘사이’에 대해서 말한다. 윤여준의 정신에서 그 사이에 놓인 부분을 설명하는 개념이 바로 ‘합리성’이다. 그래서 더욱, 나는 그가 말하는 보수와 진보의 사이보다는 그의 본체인 보수주의가 궁금했다. 그가 보수주의자라면 얼마나 보수주의자인지. 그래서 리트머스시험지 질문을 던져보았다. “동성애자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지난 대선에서 동성애자인 김조광수 감독은 문재인 후보의 선거 유세를 도왔지만, 동성애자 권익 관련 공약이나 언급을 얻어내지 못했다.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에게조차 동성애자 문제는 여전히 부담스러운 이슈였던 모양이다. 최근 김조광수 감독은 동성애자 반려자와 혼인을 신고했다가 행정기관으로부터 반려당했다고 한다. 동성 간 혼인은 합법화돼야 한다고 보는가.

윤여준- 동성애자가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찬성하지 않습니다. 이제 바뀔 때가 되었다고 봐요. 보수적인 가톨릭의 교황조차 얼마 전 동성애자의 권익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인적으로는 선뜻 찬성하기 어렵습니다.

-무엇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건가. 동성애의 존재에? 아니면 동성 간 혼인의 합법화에?

윤여준- 동성 간 혼인을 법이 인정하지 않는 것 자체가 제도적 제재이죠. 그런 제도적 제재에 찬성하지 않고, 또 동성애 자체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는 찬성하기 어렵다는 뜻이죠. 그래도 개인이 동성애를 하겠다면 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흥미로운, 그리고 어떤 면에서 훌륭한 답변이다. 질문이 리트머스시험지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는 점에서. 정확히 ‘합리적 보수주의자’다운 대답이 아닐까. 윤여준은 소수자가 받는 사회적 불이익을 부당하게 인식할 만큼 합리적이지만, 자신의 세계관 바깥에 엄연하게 현존하는 세계의 양태를 찬/반의 사안으로 인식할 만큼은 보수적이다.

가장 짓궂은 질문은 인터뷰 말미를 위해 아껴두었다. 그의 많은 별명 가운데 하나가 ‘보수의 제갈량’이다. 그는 결국 패망국의 책략가였던 제갈량의 운명을 맞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보수 정당의 책사로 치른 두 번의 대선에서 패배하고, 처음으로 진영을 바꿔 치른 대선에서는 보수정당에 패배했다. 모든 대선에서 패배한 셈이다. 책사로서의 삶을 어떻게 자평하는가.

윤여준- 모르는 분들은 ‘불운의 참모’라고 하죠. 그런데 사실 저는 단 한 번도 대선에 관여한 책사였던 적이 없습니다. 이회창 후보가 치른 첫 번째 대선 때는 행정부에 있을 때였으니 전혀 관여한 바가 없고요(당시 윤여준은 환경부 장관이었다). 두 번째 대선에서는 제가 밀어붙인 개혁 공천으로 일어난 당의 풍파를 의식한 이회창 후보가 저를 곁에 두려 하지 않았죠. 2002년 대선 기간에 캠프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이번 대선에서도 대선 운동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약속 아래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고요. 제가 책사로 알려진 이유는, 정치부 기자 출신이어서 한때 출입기자들을 위한 당론 브리핑을 맡았기 때문이에요. 기사 쓰는 데 도움받은 기자들이 고마운 마음에 저를 띄워준 거죠. 처음에는 분신·그림자·최측근이더니 거기에 기획가·전략가·책사가 붙고, 결국 제갈량·장자방으로 과대포장됐어요. 혹시 <나·들>도 제 역할을 과대평가해서 부른 거 아닙니까?

-소리내 대답은 못했지만, 사실 그렇다. 선거운동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지난 대선에서 윤여준의 찬조연설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민주당의 선거운동이 되지 않았나. 찬조연설을 들으면서 민주당 캠프에서 좋아하는 모습보다는 새누리당 캠프에서 텔레비전을 향해 물건을 집어던지는 모습이 먼저 떠오를 만큼 강력했다.

윤여준 그쪽에서 욕을 많이 했겠죠? 그래서 아마 제가 오래 살 겁니다. 하지만 저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개의치도 않고요. 제가 파렴치한 일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다시 합리적 보수주의자다. 인간적 품위, 무딤 없이 날카로운 정신,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각과 사회적 공정성에 대한 열망,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판단 말고는 어떤 권능도 영원하게 섬기지 않겠다는 지적 자신감. 윤여준이 생각하는 합리성이란 그런 뜻으로 읽힌다. 아름다운 인간, 훌륭한 어른, 멋진 인생 선배다. 다만 그보다는 좀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윤여준은 <노인과 바다>의 늙은 어부처럼 보인다. 흑백의 세계를 거부한 채 바다를 홀로 표류하는 외로운 노인. 그가 내비친 정치적 의지는 경이로운 것이지만, 어부는 세계를 만드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흑백과 좌우를 초월한 세계에 살고 있는가.

글 손아람. 힙합 그룹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의 멤버로 활동했다. 그룹 이름과 같은 제목의 소설을 써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서울 용산 참사를 소재로 정통 법정소설인 <소수의견>을 썼으며,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해 <너는 나다-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하다>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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