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2.03 12:48 수정 : 2014.01.07 10:53

타이가 시끄럽다. 반정부 시위대가 방콕 시내 곳곳의 정부 청사를 ‘접수’했다. 요구는 명확하다. ‘잉락 친나왓 총리 퇴진’.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이유를 따져보면, 쉽게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이게 다 잉락 총리의 오빠 때문이다. 2001~2006년 타이 제23대 총리를 지낸 탁신 친나왓 말이다. 푸미폰 아둔야뎃(85) 국왕이 고령으로 칩거에 들어간 21세기 타이 정치는 친나왓 가문이 주도하고 있다.

타이뿐만이 아니다. 바야흐로 ‘가문의 힘’이 아시아 전역을 휩쓸고 있다. 유력 정치인이 나온 집안에서 여지없이 미래 권력이 만들어진다. 주변을 잠시 훑어봐도 가히 ‘현상’이라 부를 만하다.

한국도 동남아도 민주를 띤 세습정치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부친인 아베 신타로는 외교장관과 집권 자민당 간사장을 지냈다.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는 총리 출신이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의 부친 시중쉰은 국무원 부총리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혁명 원로다.

한반도는 어떤가? 잘 알다시피, 김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은 3대째 권력을 세습했다. 박근혜 대한민국 대통령의 아버지는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해 1979년 수하의 총탄으로 비명에 갈 때까지 종신 대통령 노릇을 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같은 시점에 동북아 모든 나라에서 ‘가문의 영광’이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어디 동북아뿐일까? 최근 태풍 하이옌으로 쑥대밭이 된 필리핀의 베니그노 아키노 ‘3세’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그의 아버지 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은 1983년 암살당하기 전까지 필리핀 야권의 가장 유력한 대권 주자였다. 부친의 사망과 함께 정치에 뛰어든 어머니 코라손 아키노는 ‘피플파워’를 이끌며 1986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마힌다 라자팍사 스리랑카 대통령도 태어나면서부터 정치를 배웠다. 집권 스리랑카 자유당 창당을 주도한 뒤 농업부 장관과 국회 부의장을 지낸 아버지 돈 알윈 라자팍사를 비롯해 집안 대부분의 남성이 선출직과 임명직을 가리지 않고 공직을 휘어잡고 있다. 한때 라자팍사 집안 사람들은 스리랑카 정부 예산의 70%를 쥐고 흔들기도 했단다.

20세기 초반 독립운동 시절부터 세기를 바꿔가며 인도 정치권은 간디·네루 집안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파키스탄 정계는 건국 이후 신드 지방에 근거를 둔 부토 가문과 펀자브 지방 출신인 샤리프 가문이 양분해왔다. 그래서다. 1971년 파키스탄에서 분리독립한 이후 지금껏 방글라데시를 옥죄는 ‘가문 정치’가 그리 예외적인 현상이 아닌 셈이다. 방글라데시에선 오늘도 ‘가문의 전쟁’이 불을 뿜고 있다.

전·현 총리 두 엄마와 총선 준비 두 아들

‘방글라데시의 미래, 두 엄마와 두 아들에 달렸다’. 지난 10월25일 이 흥미로운 제목의 기사를 올렸다. 대체 무슨 소릴까? 은 “방글라데시의 미래는, 그곳에 살지 않는 두 남성에게 달려 있다. 두 사람 모두 방글라데시의 막강한 정치 가문의 후계자다”라고 덧붙였다.

‘두 남성’은 누구인가? 한 명은 미국에서 ‘첨단기술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다. 다른 한 명은 영국 런던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다. 그는 방글라데시 검찰의 부패 혐의 수사를 피해 망명 아닌 망명길을 떠난 터다.

미국에 사는 컨설턴트는 최근 방글라데시 농촌 지역을 돌고 있다. 재선에 나선 어머니의 선거 유세를 돕기 위해서다. 귀국길이 막힌 법학도는 대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정치권 유력 인사들과 머리를 맞댔다. 어머니의 권좌 복귀를 지원하기 위해서다. 방글라데시 정치권에선 몇 년 안에 둘 중 한 사람이 총리에 취임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1971년 건국 이래 두 사람의 집안이 방글라데시 정치를 양분해왔다. 첫 번째 남성은 사집 와제드 조이(42). 현 총리인 셰이크 하시나(64) 방글라데시 아와미연맹 대표의 아들이다. 두 번째 남성은 타리크 라흐만(46). 야권 지도자 칼레다 지아(68) 방글라데시 국민당 대표의 아들이다.

지아 대표의 남편은 지아우르 라흐만 전 대통령이다. 그는 1981년 군사쿠데타 와중에 잔혹하게 살해됐다. 지아 대표가 정치에 뛰어든 이유다. 하시나 총리는 독립영웅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맏딸이다. 그 역시 아버지를 포함해 가족 대부분이 1975년 쿠데타 때 암살되면서 자연스레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야권 지도자로 떠오른 두 사람은 힘을 모았다. 1990년 후사인 모하마드 에르샤드 군사독재를 무너뜨리고, 방글라데시에 민주화의 봄을 불러온 것도 두 사람이었다.

하시나 총리는 이번이 두 번째 집권이다. 그사이 지아 대표도 두 차례 집권했다. 총리 임기가 5년이니, 건국 이후 지난 42년 세월의 절반가량을 두 사람이 다스린 셈이다. 민주화 이후 방글라데시 정치권에서 두 사람 외에 따로 눈길을 줄 만한 인물도 없어 보인다.

운명처럼 집권을 향해 내달리고 있는 조이와 라흐만에 대해 불만 여론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젊은 층에선 ‘세습정치’의 폐해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은 10월25일 기사에서 대학생 마자룰 이슬람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방글라데시는 왕국이 아니다. 그런데 왜 두 사람이 어머니의 뒤를 잇는가? 방글라데시를 이끌어갈 만한 머리와 배짱을 지닌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얘긴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글쎄,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조이가 유세를 집중하고 있는 농촌 지역에선 수많은 주민들이 환호성을 울리며 그를 맞이한다. 거리마다, 동네마다, 집권 아와미연맹의 선거 으뜸 구호가 요란하게 울려퍼진다. 그럴 때마다, 조이는 이렇게 화답한단다. “여러분이 곧 이 나라의 미래요, 장차 방글라데시를 이끌어갈 동량입니다. 저는 언제나 여러분 곁을 지킬 것입니다.” 그는 현재 미국 버지니아주의 고급 주택가에서 미국인 부인, 딸과 함께 살고 있다.

국내외서 황태자들의 유세

“언젠가 조이가 총리가 될 것이다. 안 될 이유가 없다.” 하시나 총리의 보좌관 마후부불 하케 샤킬은 최근 <로이터통신> 등 외신들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가 덧붙인 말이 ‘걸작’이다. “방글라데시는 민주주의 국가다. 국민이 원한다면 조이가 집권하는 건 당연하지 않나?”

한편, 영국 런던에 살고 있는 라흐만은 원거리에서 어머니의 선거운동을 지원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부패 혐의로 체포돼 고문까지 당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2008년 법원의 병보석 결정으로 석방된 뒤 방글라데시를 떠났다. 그는 2004년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하시나 현 총리의 선거 유세장 폭발사건에 연루된 혐의도 받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분주하다. <데일리스타> 등 방글라데시 언론의 보도를 종합하면, 그는 최근 영국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오가며 당 고위 관계자들과 머리를 맞대어 선거 전략을 짜고 있다. 내년 총선에서 300개 지역구에 출마할 후보자 공천권도 라흐만이 주무르고 있단다. 앞서 2001~2006년 자이 대표가 두 번째 집권했을 때, 라흐만은 장관 면면까지 직접 고른 것으로 전해진다. 이미 ‘황태자’였던 게다.

“시간문제다. (라흐만은) 영웅처럼 귀국하게 될 것이다. 전 대통령의 아들이자, 두 차례나 총리를 지내며 나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어머니를 두고 있다. 모든 혐의를 벗을 것이고, 명석한 판단력으로 기필코 상황을 반전시킬 것이다.” 라흐만의 지지자라는 자밀루트 카디르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아연해진다.

11월25일 방글라데시 선거관리위원회가 ‘중대 발표’를 내놨다. 내년 1월5일로 차기 총선 투표일을 결정했다는 게다. 지아 대표가 이끄는 방글라데시 국민당은 주저 없이 도로를 막았다. 철도와 수로 역시 철저히 차단했다. ‘48시간 교통파업’이다. 앞서 지아 대표는 지난 11월9일에도 지지자들에게 ‘84시간 총파업’을 촉구하고 거리로 나선 바 있다. 왜?

선거 부정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독립 이후 치러진 첫 번째 선거(1973년) 때부터 부정선거는 방글라데시 정치의 일부였다. 1996년 3월 모든 정치세력의 합의 아래 수정헌법 제13조가 통과된 것도 이 때문이다. 선거일을 적어도 100일 앞두고는 총리를 포함한 내각이 총사퇴하고, 중립내각을 구성해 엄정한 선거 관리를 하도록 하는 게 뼈대다.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성난 노동자

이에 따라 당시 총리였던 지아 대표가 물러났고, 그해 6월 치른 총선에서 하시나 총리가 집권에 성공했다. 그 역시 5년 임기의 막바지였던 2001년 10월 선거를 앞두고 중립내각에 권력을 넘겼다. 그해 선거에서 지아 대표가 다시 총리에 올라섰다. 민주주의가 성숙하고 있었던 걸까? 방글라데시 정치권에서 ‘중립내각도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온 것은 그 무렵부터다.

내년 1월 임기 종료를 앞두고, 하시나 총리는 ‘꾀’를 냈다. 어차피 중립내각도 믿을 수 없다면 독립적인 선거관리위원회를 설치하자는 게다. 지아 대표는 당연히 반발했다. ‘헌법에 따른 사임’을 압박하기 위해 지난 10월부터 격렬한 장외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불과 한 달 남짓 만에 줄잡아 37명이 시위 도중 목숨을 잃었다.

하시나 총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선관위를 출범시키는 한편, 지난 11월18일 집권 아와미연맹 주도의 ‘거국 내각’ 구성을 선언했다. 내각에 불참한 지아 대표는 총선 보이콧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타협점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두 사람의 싸움은 이미 미래 세대의 명운을 건 한판 승부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하시나 총리와 지아 대표의 아귀다툼이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든 지난 11월11일, 방글라데시 곳곳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대규모 공단을 끼고 있는 수도 다카에서도 수천 명의 성난 노동자들이 도로를 점거한 채 경찰에 맞서 격렬한 투석전을 벌였다. 정부가 임명한 특별위원회가 방글라데시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의류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을 무려 77%나 인상하겠다는 발표를 내놓은 직후였다.

방글라데시 의류산업은 한 해 200억달러 이상의 수출고를 올린다. 중국에 이어 세계 제2위다. 의류산업 노동자만도 400만 명을 넘어선다. 그럼에도 의류 노동자들이 직면한 현실은 참혹하다고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다카 외곽 사바르공단에서 지난해 12월 벌어진 타즈린패션 공장 화재사건(124명 사망)과 지난 4월 발생한 라나플라자 공장 건물 붕괴사건(1100여 명 사망)은 이런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위원회의 인상안 발표에도 노동자들이 분노한 이유가 있다. 그렇게 올리고도 방글라데시 의류 노동자들이 받게 될 최저임금은 한 달 5300다카(약 7만원)에 그친다. 여전히 세계 최저 수준이다. 애초 방글라데시 노동계에선 8114다카(약 10만원)를 요구한 바 있다. 그나마 위원회의 발표는 ‘권고 사항’이다. 정부가 승인해야 효력이 발생한다.

총선을 앞두고 서둘러 위원회를 구성했다. 총선을 둘러싸고 극한 정쟁이 이어지고 있다. 내년 총선이 예정대로 치러져 새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위원회의 권고안은 유효할까? 어디서 희망을 찾을 것인가?

글 정인환 <한겨레> 국제부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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