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2.03 12:45 수정 : 2013.12.03 13:43

#2006년 12월10일- 독재자 피노체트의 최후

그가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은 일주일 전인 12월3일이었다. 만 91살을 넘긴 나이다. 돌이키기엔 이미 늦어버린 터다. 가족은 마지막 ‘의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튿날인 12월4일 법원은 그의 가택연금 조처를 해제했다. 엿새 뒤인 12월10일 오후 1시30분(현지시각) 그는 육군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로부터 꼭 45분 뒤,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조용히 숨을 거뒀다. 사인은 충혈성 심장마비와 폐부종이었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1973년부터 90년까지 17년 세월 칠레를 공포로 얼어붙게 한 독재자의 최후는 기이하리만치 평온했다.

피노체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칠레 전역이 들끓었다. 수도 산티아고에서는 라모네다 대통령궁이 지척인 알라메다 거리로 시민들이 몰려나와 독재자의 죽음을 반겼다. 도시의 반대편, 육군병원 앞으로 몰려든 피노체트 지지자들은 애도의 눈물을 쏟아냈다.

이튿날인 12월11일 라스콘데스에 자리한 육군사관학교에서 그의 주검이 일반에 공개됐다. 육군참모총장 출신으로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에서 내무·국방장관을 지낸 카를로스 프라츠 장군의 손자는 독재자의 관에 침을 뱉었다. 주변을 에워싼 피노체트 지지자들은 욕설과 함께 뭇매를 퍼부었다. 쿠데타 직후 아르헨티나로 망명길에 올랐던 프라츠 장군은 1974년 9월30일 차량폭탄 공격으로 아내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 피노체트의 수족 노릇을 했던 비밀경찰 ‘디나’(DINA)의 소행이란 건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밝혀졌다.

12월12일 피노체트의 장례식이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렸다. 슬픔에 잠긴 6만여 명의 조문객이 교정을 가득 메웠다. 전직 대통령이 사망했음에도, 칠레 정부는 공식 애도 기간을 선포하지 않았다. 국장으로 예우하지도 않았다. 다만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경력을 인정해 군장을 치를 수 있도록 허용했다. 피노체트를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한 것은 아옌데 대통령이었다.

장례를 마친 피노체트의 주검은 파르케델마르 공동묘지에 딸린 화장장으로 옮겨졌다. 생전에 은퇴한 독재자는 죽은 뒤 무덤이 훼손당할 것을 걱정해 가족에게 주검을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단다. 유가족은 유해를 군부대에 안장하고 싶어 했지만, 군 당국은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당시 칠레 대통령은 “내 의식에 반한다”는 이유로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피노체트가 죽던 그해 1월 당선된 칠레 사상 첫 여성 대통령, 미첼 바첼레트다.

#2013년 9월11일- 민주화 상징 아옌데 40주기

꼭 40년 세월이 흘렀다. 사상 처음으로 민주적 선거를 통해 집권한 사회주의자였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정부는 1973년 9월11일 피노체트가 이끈 더러운 군대에게 철저히 유린됐다. 그날 새벽 서부 항구도시 발파라이소의 해군기지를 출발한 반역도당은 수도 산티아고 중심가 라모네다 대통령궁을 삽시간에 에워쌌다.

‘투항하라!’ 기세가 오른 쿠데타군은 통수권자에게 되레 명령을 내렸다. 대통령은 전투용 헬멧을 눌러쓰고, 소총을 어깨에 걸었다. 애초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비겁한 대통령궁 수비대마저 근무지를 이탈해 반란군 대열에 합류했다. 대통령궁 내부에 있던 경무장한 소수가 중무장한 다수 병력에 맞서 격렬한 교전을 벌였다. 그도 잠시뿐이었다. 저 멀리서 낮은 소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이윽고 굉음이 사방을 휘감았다. 전투기가 서슴없이 대통령궁에 융단폭격을 가했다. 일방적인 싸움은, 그렇게 끝이 났다.

장렬한 최후였다. 그날 대국민 라디오 연설을 마친 아옌데 대통령은 끝내 숨을 거뒀다. 더러는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다고도 하고, 더러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도 한다. 이윽고 암흑천지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끌려가 갇힌 채, 고문당하고, 능욕당했다. 그렇게 조용히 사라지기도 했고, 어느 날 갑자기 땅속에서 유골로 발견되기도 했다. 의로운 마음만으론 견뎌낼 수 없는 세월이었다.

칠레 공군 장성이던 알베르토 바첼레트는 쿠데타 당일 반란군에게 끌려갔다. 그는 아옌데 정권의 충직한 동반자였다. 공군사관학교에 딸린 비밀 구금시설에 갇힌 그 역시 여러 달 동안 외부와 연락이 끊긴 채 모진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끝까지 결기를 놓지 않았던 그는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이듬해 세상을 등졌다. 당시 국립 칠레대학 의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그의 딸이 바로 미첼 바첼레트(당시 21살)다.

쿠데타 직후부터 재야인사 도피를 돕던 미첼 바첼레트와 그의 어머니 앙헬라 헤리야도 결국 1975년 갑자기 들이닥친 디나 요원들에게 체포됐다. 모녀가 끌려간 곳은 피노체트 정권 아래서도 가장 악명이 높던 산티아고 남동부의 ‘빌라 그리말디’였다. 모진 고문이 가해졌고, 영어의 나날은 기약이 없었다. 이들은 이듬해에야 군부 내 ‘동정론’에 기대어 오스트레일리아로 망명길에 오를 수 있었다.

피노체트 정권 아래서 적어도 3200명이 숨지고, 2만9천 명이 고문당하고, 20만 명가량이 망명을 떠나야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동독으로 거처를 옮겨가며 4년여를 지낸 뒤에야 이들의 귀국이 허용됐다. 학교로 돌아간 미첼 바첼레트는 1983년 의과대학 졸업과 함께 공공의료기관 근무를 자원했다. 하지만 ‘정치적 이유’로 허가받지 못했다. 학교 쪽에선 장학금을 주선해줬다. 그는 소아과 전문의 과정을 밟았다.

피노체트가 물러나고 칠레가 민주화의 봄을 맞으면서, 바첼레트는 1990년 보건부에 딸린 산티아고 서부보건원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됐다. 이후 그는 범아메리카보건기구와 세계보건기구 등에서 컨설턴트로 활약하는 한편, 1994~97년 보건부 차관 비서실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 무렵 ‘민-군 관계’에 대한 호기심에서 국립정치전략연구소(ANEPE)에 진학한 그는 군사전략을 배우기 시작했다. 내친김에 미국 워싱턴의 미주간국방대학(IADC) 유학까지 거친 그는 1998년 귀국 직후 국방장관 비서실장에 발탁됐다.

한편, 대학 1학년 때인 1970년부터 사회당 활동을 시작한 미첼 바첼레트는 1995년부터 당 중앙위원으로 활약했다. 2000년 리카르도 라고스 당시 대통령이 무명의 정치 신인에 불과한 그를 일약 보건부 장관에 기용한 것도 실무능력과 정치력을 겸비한 독특한 이력 때문이었다. 라고스 대통령은 2002년 1월 그를 남미 사상 첫 여성 국방장관에 임명했다.

2005년 1월 사회당 대선 후보로 지명된 그는 이듬해 1월 세바스티안 피녜라 현 대통령과 맞붙은 대선 결선 투표에서 53.5%를 득표하며, 칠레 사상 첫 여성 대통령에 당선된다. 2010년 3월 임기를 마치고 물러날 때 그의 지지율은 88.5%로 고공행진을 멈출 줄 몰랐다.

대통령의 연임을 금지한 헌법이 아니었다면, 그는 2010년 대선에서 무난히 재선에 성공했을 터다. 미첼 바첼레트는 퇴임 뒤 국내 정치와 철저히 담을 쌓고 지냈다. 유엔여성기구 초대 사무총장에 임명되면서 아예 거처를 미국 뉴욕으로 옮기기도 했다. 하지만 피노체트 퇴진 이후 처음으로 우파에 정권을 내줬던 사회당 등 좌파 정치세력에겐 바첼레트보다 나은 대안이 없었다. 칠레 좌파 정당 연대체인 ‘콘세르타시온’은 2013년 대선을 다시 그에게 맡겼다.

#1973년 9월11일- 피노체트 독재와 아옌데의 죽음

아버지를 따라 영국 런던으로 옮겨온 것도 벌써 2년여, 그날도 에벨린 마테이(당시 19살)는 피아노 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워왔다. 아버지 페르난도 마테이는 전투기 조종사 출신으로 당시 노퍽에 주둔한 영국 공군 제74편대에 파견을 나와 있었다.

순식간이었다. 주변의 모든 게 갑자기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며칠 뒤 아버지는 본국의 부름을 받고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런던에 남은 에벨린 마테이는 자국 대사관에서 번역일도 돕고, 피아노 연습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귀국한 페르난도 마테이는 공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영전했다.

3년여에 걸친 피나는 훈련을 했지만 마테이는 피아니스트 꿈을 접고 귀국길에 오른다. 1974년 칠레 가톨릭대학에 진학해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고, 대학원 시절인 1979년부터 모교에서 강의도 했다. 이후 학교와 공직, 민간 업체 등을 거친 그는 피노체트 정권이 막을 내린 1989년 정치권에 뛰어들었다.

이듬해 하원의원에 당선돼 무난히 재선까지 성공한 그는 1997년 상원에 진출했다. 2005년 재선에 성공한 그는 2011년 1월 의회를 떠나 세바스티안 피녜라 정부의 노동·복지부 장관에 기용됐다. 지난 3월 장관 임기를 마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한 그를 보수 세력은 가만두지 않았다. 낙태나 동성애 허용 등 사회문제뿐 아니라, 조세제도와 건강보험 개혁 등 정책 대안에 이르기까지 주류와는 분명 시각이 다름에도, 그는 지난 7월 보수 진영의 2013년 대선 후보로 공식 지명됐다.

#대위와 대위의 딸, 바첼레트와 마테이

“다가오는 칠레 대선에 출마한 후보자들에 얽힌 사연을 작가가 소설로 써낸다면, 지나치게 아귀가 잘 들어맞아 되레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혹평을 받게 될 것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지난 10월6일치 산티아고발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좌파 진영의 대표주자인 미첼 바첼레트와 보수파의 보루인 에벨린 마테이의 기이한 인연을 들여다보면, 이 신문의 지적에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다.

미첼 바첼레트는 1951년 9월29일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프랑스계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에벨린 마테이는 1953년 11월11일 역시 산티아고의 독일계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이 처음 마주친 것은 1958년, 장소는 칠레 북부 안토파가스타의 세로모네로 공군기지다. 두 집안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곳 장교용 주택단지로 이사를 왔다.

알베르토 바첼레트(당시 34살) 대위는 11살 아들 알베르토와 6살 딸 미첼 남매를 슬하에 두고 있었다. 페르난도 마테이(당시 32살) 대위는 6살 아들 알베르토와 4살 딸 마테이, 막 돌을 지난 막내아들 로베르토, 이렇게 삼남매를 두었다. 두 집안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살게 됐다. 미첼은 알베르토와 초등학교에서 같은 반이 됐고, 마테이와는 소꿉동무로 지냈다.

프랑스계인 바첼레트 대위는 외향적이고 사교적이었다. 툭하면 동네 친구들을 불러모아 파티를 즐겼다. 독일계인 마테이 대위는 천성이 조용하고 과묵했다. 그럼에도 둘은 쉽게 가까워졌다. 두 사람 모두 전투기 조종사였고,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관점은 사뭇 달랐지만, 정치와 철학에 관심이 많던 것도 서로에게 끌리게 된 이유였을 게다.

두 집안의 인연은 길게 이어졌다. 1960년대 중반 바첼레트와 마테이 모두 산티아고로 복귀했다. 먼저 이사하게 된 바첼레트의 집 주변은 온통 올리브나무가 심겨 있었다. 나중에 같은 동네로 이사와 집을 짓기 시작한 마테이가 이를 부러워하자, 바첼레트는 올리브나무 두 그루와 버찌나무 한 그루를 선물한 것으로 전해진다. 마테이는 지금도 거실 바로 앞에 올리브나무 두 그루와 버찌나무 한 그루가 자라는 그 집에 살고 있다.

미첼과 에벨린의 우정도 이어졌다. 미첼은 에벨린의 아버지를 ‘페르난도 어저씨’라고 부르며 자랐다. 에벨린은 미첼의 아버지를 ‘베토 아저씨’라고 불렀단다. 바첼레트와 마테이는 둘 다 군 내부에서 승승장구했다. 두 사람 모두 장성으로 진급했다. 정치적 견해 차이는 점점 커져갔지만, 두 사람은 ‘우정 어린 의견 불일치’에 만족할 줄 알았다. 1973년 9월11일의 참극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공군 준장이던 바첼레트는 쿠데타 직전까지 아옌데 정부의 식량배급청장을 겸하고 있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은 보수 세력이 매점매석에 열을 올리며 식량 등 생필품의 부족 사태를 부추기고 있던 터다. 쿠데타 직후 공군사관학교에 딸린 비밀시설로 끌려간 바첼레트가 모진 고문에 시달리고 있을 때, 영국에서 급거 귀국한 마테이 공군 대령이 신임 공군사관학교장으로 부임했다. 마테이는 바첼레트의 운명을 알고 있었을까? 지난 8월 칠레 법원은 마테이를 살인 혐의로 기소해달라며 낸 인권단체의 청원서를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벌써 두 번째다.

쿠데타 이후 세 차례나 투옥과 석방을 반복했던 바첼레트는 이듬해 3월14일 산티아고의 구치소에 수감된 상태에서 심장마비로 삶을 마감했다. 오랜 기간 이어진 고문으로 육신이 무너져내린 탓이다. 피노체트 정권 초기 보건부 장관을 지낸 마테이는 1978년 공군참모총장에 임명되면서, 명실상부한 군부독재의 ‘핵심 4인방’으로 떠올랐다. 늙은 독재자가 영구 집권을 노렸던 1988년 10월 국민투표에서 패했을 때, 군부 실세 가운데 맨 먼저 ‘은퇴’를 입에 올린 것은 마테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2013년 11월19일- 좌파 후보와 우파 후보로

올해 칠레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 방송 프로그램은 <금지된 이미지>란 미니시리즈였단다. 이 프로그램은 쿠데타 당일과 뒤이은 피노체트 독재 시절의 인권유린 상황을 담은 비공개 영상을 통해 당시의 기억을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지난 11월19일 치른 칠레 대선을 관통하는 열쇳말도 바로 ‘기억’이었다. 미첼 바첼레트(61)와 에벨린 마테이(59), 각각 좌파와 우파를 대표해 후보로 나선 두 사람은 칠레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놓고 정면 대결을 벌였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지난 9월23일치에서 바첼레트의 유세 현장을 동행 취재했다. 수도 산티아고에서 남쪽으로 차를 달려 1시간 남짓이면 가닿는 탈라간테가 그 무대였다. 좌파연대인 ‘콘세르타시온’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미첼 바첼레트의 선거 유세를 지켜보기 위해 그곳 도심 광장에 수천 명이 모여들었다. 바첼레트는 차분한 목소리로 왜 ‘콘세르타시온’을 지지해야 하는지, 왜 집권 여당을 지지해선 안 되는지를 설명해나가고 있었다. 불쑥 군중 속에서, 구호처럼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들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바첼레트는 동의의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테이는 어떨까? 그간 여러 차례 군사독재 시절의 잔혹한 인권유린을 비판해온 그다. 그럼에도 아버지와 자신을 변호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대선 후보로 지명된 직후 <프렌사라티나> 등 현지 언론이 ‘1973년 9월11일’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고작 19살이었다. 내가 용서를 구할 이유는 없다.” <타임>은 “이 발언으로 11월 대선에서 칠레 유권자들이 나라의 장래만 결정하지는 않으리라는 점이 명확해졌다. 유권자들은 과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해서도 투표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썼다.

지난 9월11일 산티아고를 비롯한 칠레 전역에서 아옌데 대통령 40주기를 추모하는 거리집회가 열렸다. 집회에 참석한 이들이 손에 든 펼침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돈데 에스탄 로스 데사파레시도스?’(실종된 이들은 어디에?) 과거에 대한 칠레 사회의 ‘기억’에 공통분모가 아예 없는 건 아닌 듯싶다. 좌파든 우파든, 적어도 피노체트 정권이 저지른 극악한 인권유린에 대해선 분노한다.

다만 여전한 것은 ‘쿠데타’에 대한 상반된 인식과 평가다. 세바스티안 피녜라 현 칠레 대통령이 9·11 쿠데타 40주년을 맞아 <타임>과 한 인터뷰에서 내놓은 발언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억만장자인 그는 피노체트 정권 몰락 이후 집권한 첫 우파 대통령이다.

“쿠데타 발발 당시 나는 미국 하버드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그날 대통령궁에 폭격이 퍼부어지는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면서, 현실감조차 들지 않았다. …아옌데 정부의 극단주의가 군부의 움직임을 촉발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쿠데타는 사실 갑작스러운 일도 아니었고,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피녜라 대통령뿐이 아니다. 피노체트 정권 붕괴 이후 20년 세월을 내리 좌파 정부가 집권했지만, 칠레 사회의 주류는 요지부동인 것으로 보인다. 미겔 오테로 아르헨티나 주재 칠레 대사는 지난 10월 현지 일간 <엘클라린>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그때 군사 쿠데타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늘의 칠레는 쿠바와 다름없었을 것이다.”

지난 11월19일 치른 칠레 대통령 선거 1차 투표에서 미첼 바첼레트는 307만3570표를 얻었다. 득표율은 46.69%, 압도적 1위였지만 과반득표에 실패해 결선투표를 치러야 한다. 에벨린 마테이는 164만7490표를 얻어, 25.02%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격차는 크지만 1차 투표 2위다. 그 역시 결선투표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과거가 현재를 만들고, 현재가 미래가 된다. 칠레 국민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결선투표는 12월4일 치러진다.

글 정인환 <한겨레> 국제부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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