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2.02 17:46 수정 : 2014.01.07 10:49

이 글은 최근 발생한 여자 축구선수의 성별 논란에 관한 글이지만, 비판이나 대안적 내용은 없다. 오히려, 이런 사건이 다시 발생한다고 해도 우리 사회는 같은 방식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글이다. 인간이 남녀 양성으로 구성되고 남성은 신체적으로 우월하다는 인식이 자연의 질서처럼 여겨지고, 스포츠 경기에서 남녀 구분 리그가 사라지지 않는 한 완강하게 반복될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착된 성별 규범이 워낙 강력하기 때문에 다른 사회문제와 달리 개인의 저항 가능성, 다른 행위성이 드러날 여지가 거의 없다.

물론, 그렇다고 이 글의 결론이 ‘어쩔 수 없다’는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지를 자각하기 위해서는 어떤 이들의 희생과 인권침해가 불가피한 경우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대안’은 그 희생을 이해하는 것이고, 누구나 그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여자라는 증거?

1993년 12월30일, 미국 네브래스카주의 링컨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남장 여성이 혐오범죄(Hate Crime)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1999년 <소년은 울지 않는다>(Boys Don’t Cry)로 영화화됐고 힐러리 스왱크는 ‘소년’으로 열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내가 성별과 관련한 질문을 받을 때 자주 권하는 텍스트다. 지금도 지구상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을 영원한 실화다. 주인공은 ‘여성’인데 우연한 계기를 통해 남자로 사는 것이 훨씬 편하고 자신에게 맞는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붕대로 성기를 만들어 바지 속에 넣고 다니며, 가슴은 천으로 겹겹으로 감아 남성으로 살아간다.

그녀에게는 여자친구도 있다(이 글에서는 ‘그녀’라고 표기한다). 두 사람은 행복하지만, 몇몇 마을 청년들은 ‘생물학적’으로 여성(Female)인 그녀가 ‘상식’을 어기고 남자로 살아가자 그녀를 단죄하려고 한다. 내가 생물학이 아니라 ‘생물학적’ 존재라고 표현한 것은, 그녀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생물학,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물학이나 자연에 대한 통념 혹은 이데올로기에서만 그녀는 여성으로 간주될 뿐, 누구도 그녀를 여성으로 인식하거나 주장할 권리는 없다. 뒤에 상술하겠지만, 인간은 여성으로도 남성으로도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의 여자친구(애인)를 좋아하는 동네 청년들은 그녀를 괴롭힌다. 남장은 문화적으로는 ‘부자연’스러울지 몰라도 주지하다시피 불법은 아니다. 그러나 성별 질서가 강력하다보니, 불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가령 식사 준비, 세탁 같은 여성의 성역할이 헌법에 보장된 남성의 권리인 줄 알고 이혼 소송시 그러한 성역할을 하지 않은 여성을 불법으로 문제 삼는 남성이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그녀가 여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이들은 아주 ‘쉬운’ 방법을 알고 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인간의 성별을 구별하는 데 가장 떠올리기 쉬운 방법은 성기 확인이다. 남자들은 그녀를 발가벗기고 구타한다. “봐, 여자잖아!” 성기 확인이 성별 구분의 방법이라면, 인간을 여성으로 만드는 방법은 성폭력이다. “우리가 너를 여자로 만들어주마”라며 집단 성폭행을 한다. 말할 것도 없이 두 가지 모두 폭력이지만 이런 방법이 아니더라도, 본인이 생물학적 성별과 사회적 성별의 일치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성의 구분은 그 자체로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남성임을 확인하는 방법으로서 ‘성기 드러내기’(Flashing·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빛을 비추는 도구, 플래시의 그 플래시다)는 흥미로운데, 이것은 이른바 ‘바바리맨’의 성기 노출 폭력을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남성의 성기 확인과 여성의 성기 확인은 같은 차원의 폭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은 바바리맨처럼 타인의 강제가 없어도 스스로 드러내는 경우가 있는데, 그 행위 자체가 여성에게는 성폭력이다. 여성에겐 그것이 성산업에서 이루어지는 판매 행위가 아닌 한, 바바리맨 같은 형식의 자발적 노출은 없다. 남성의 성기는 여성에게 그 자체로 폭력인 반면, 여성의 몸은 남성이 구입하는 서비스 상품이다. 이것은 양성이 대칭적 가치가 아니라 남성 중심의 위계임을 보여주는 수많은 사례 중 하나다.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은 학력·계층·연령과는 무관하고 주로 성별에 따라 나뉜다. 여성들은 대개 “남녀 구분이 자연스러운 현상인 줄 알았는데,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문화적 폭력이군요”라고 말한다. 이 영화를 보고 자신이 화장을 하거나 여성스러운 행위를 하면서 약간의 죄의식이 든다고 말한 여성도 있다. 남성들은 엉뚱한 반응이 많다. “주인공이 왜 저렇게 사는지 모르겠다”와 “그러니까 결론은 저 애가 남자라는 겁니까, 여자라는 겁니까?”라고 묻는다. 내가 “그 질문을 질문하는 영화”라고 답해도 소용없다. 무조건 “저런 경우에는 여자라고 봐야 합니까, 남자라고 봐야 합니까”를 반복하여 묻는다. 정말 그게 궁금한 것이다.

동성애자,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는 이들이 남녀 이분법을 혼란시키는 전복자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존재 자체로 양성 개념을 교란시킨다. 이들의 가시화나 인권 주장은, 어떤 의미에서, 여성운동보다 더욱 가부장제에 위협적이다.

선수의 성별 논란과 약물 복용의 공통점

여자 축구선수, ‘여자팀 축구의 구성원’ 중의 한 명이 여성인가 남성인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이 논란은 그 자체로 당사자는 물론 모든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다. 또한 이 사건은 5천 년 이상 지속돼온 세 가지 오류를 전제한, 어쩔 수 없는 사태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는 사태’라는 의미는 이해할 만한 사건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전제가 워낙 자연스러워서 사람들이 이 논란을 해결 차원에서 읽는다면 인권침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남자 선수가 섞여 있다”는 상대팀과 여론의 문제제기에 의혹을 씻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의학적 확인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전제는, 첫째 인간은 양성으로 구분돼 있다는 통념, 둘째 근력·속도·지구력 등에서 남성과 여성의 능력은 다르기 때문에(남성이 우월하기 때문에) 남자 선수가 여자 선수 팀에서 활약하는 것은 페어플레이가 아니라는 것, 셋째 사회적 논란이나 상대팀의 항의 등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별이 밝혀져야 하지만, 그 방법은 왠지 부정적 이미지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세 번째 논란은 흥미로운 모순이다. 남자냐 여자냐의 구별은 가부장제의 원칙이지만, 한편 이를 확인하는 방법은 가부장적 통념인 여성의 몸에 대한 ‘순결’ ‘보호’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성별 확인의 윤리성 혹은 사회적 합의는 산부인과 신생아실에서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매우 ‘민망하고 욕보이는 일’이지만, 현실에서는 ‘성인 몸의 확인’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모순 속에 살고 있다. 이 모순으로 인해 해당 감독들은 비난과 문책을 받았다.

거의 모든 성별 관련 사건(‘여성 문제’)에서 ‘해결 매뉴얼’은 무의미하다. 성별은 매우 광범위한 구조이면서도 경우에 따라 사건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남성과 같음을, 어떤 경우에는 남성과 다름을, 어떤 경우에는 구별 자체가 문제임을 드러내야 한다. 문제 인식이나 상황 파악 자체도 어려운데, 접근 방식이 판이해서 사람들이 원하는 명쾌한 해결책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 ‘여성 문제’는 주디스 버틀러의 유명한 책 제목대로 매사가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 즉 골치 아픈 문제다. 여성 문제에서 사소한 사안은 하나도 없다. 큰 문제, 작은 문제가 따로 없다. 개별 사안 모두 복잡하다는 의미다.

이번 사건도 그런 경우다. 첫 번째 문제, 즉 구별 자체가 사태의 근본 원인이기 때문에 사회 전반에 시각 교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그 논리가 당장의 해결책(신체를 통한 성별 확인)으로 제시되긴 어렵다. 문제의 성격으로 보면, (남자)선수들의 약물 복용과 이 사건은 ‘같다’. 강함(Strength)을 추구하는 스포츠 경기에서 약물 문제는 더 강한 선수(남성)가 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약물 복용 선수는 이번 여성 축구선수 같은 ‘강도’의 인권침해는 겪지 않는다.

“박근혜 후보는 여성”론과 여자 축구선수

여성 축구선수의 ‘진짜 성별’이 무엇인가라는 논란과 지난 대선 때 박근혜 후보를 둘러싼 ‘여성 대통령론’은 같은 구조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앞으로도 우리 사회에서 이런 비슷한 일이 계속 발생할 것이다. 이 논란은 간단한 것 같지만, 막상 어떤 사람이 여성이고 남성인가, 그리고 그것을 누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는 복잡한 논쟁거리다.

나는 당시 ‘여성 박근혜’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녀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첫 숫자가 ‘2’라는 사실 외에는, 여성과 가장 거리가 먼 여성이다. 그녀는 여성도 국민도 대변하지 않는다. 그녀의 몸은 ‘아버지 박정희’를 매개한다. 이런 현상이 바로 ‘~화신(化身)’이다. 이는 시비, 호오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반드시 인식해야 할 중요한 사실일 따름이다.”(졸저, <페미니즘의 도전> 개정판, 98~100쪽) 나는 그녀가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이라는 ‘사실’을 이와 같이 표현했다.

반면 황상민 연세대 교수는 종합편성채널 프로그램에서 “생식기만 여성”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알려졌다시피 엄청난 설화(舌禍)를 겪었다. 이 경우는 다른 여성 후보라도 문제가 되었겠지만, 특히 (감히) 박근혜 후보에게 성적인 표현을 사용하다니. 그것 자체로 성폭력 혹은 성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여론이 압도적이었다. 이후 그는 지식인 자질론, 프로그램 하차, 교수직 위협 등 곤혹을 치렀다. 그의 ‘고난’은 성별을 성기로 판단하는 가부장적 통념에는 부합했으나 공공 매체에서 그것도 막강한 여성 정치인(‘공주마마’)을 지칭했기 때문이다. 그는 잘못했다기보다 심리학 전공자치고는 너무 무지했다.

이번 축구선수 사건도 비슷하다. 두 사건 모두 우리 사회의 남성 ‘지식인과 지도자’들의 수준을 보여주는 불미스러운 일이다. 가부장 사회에서 남녀는 성기의 다름을 기준으로, 좀더 ‘고상’하게 말하면 출산력 여부로 판단하는 것이 ‘정상’인데, 그것을 공적 영역에서 말해서는 안 된다는 이중 메시지와 이 모순을 해결할 언어가 없다는 것, 이것이 그들의 잘못이다.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프로이트의 말대로 “해부학은 운명”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재현하는지는 해부학처럼 간단하지 않다. 해부학은 운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양성성은 양성애자의 자질?

나 역시 전략적 차원에서 일시적으로는 ‘양성평등’이라는 용어를 간혹 사용한다. 우리나라 여성가족부의 영문 명칭은 ‘Ministry of gender equality of family’다(정확히 말하면, ‘gender equality’가 남녀평등이나 양성평등에 한정되는 단어는 아니다). 사회적 통념 역시 양성평등을 페미니즘(여성주의)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양성평등이야말로 성차별의 근거가 되는 사고방식이다. 인간을 양성으로 구분하고, 남성을 평등의 기준으로 삼아 여성의 이중노동을 강제하는 언어다.

양성평등은 양성(兩性)의 존재를 전제한다. 중·고등학교 생물학 교과서는, 포유류 같은 고등동물은 자웅이체(雌雄異體), 미생물 같은 하등동물은 자웅동체(雌雄同體)라고 가르친다. 물론 전문가들은 잘 알겠지만, 과학적 사실이 아니다. 이는 가부장제가 얼마나 과학을 오염시킬 수 있는지를, 다시 말해 자연과학 역시 가부장제 담론임을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사례다. 자웅이 한 몸에 있는 자웅동체와 양성구유(兩性具有)가 정확히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지만, 양성을 모두 갖춘 인간이 실재한다. 이것은 ‘기형’도 ‘장애’도 아니다. 숫자는 적지만 여성도 남성도 아닌 양성구유자(Hermophrodite)가 태어난다. 양성구유자는 남녀 성기 형태를 모두 갖고 있거나 혹은 불분명하다가 성장기에야 드러나는 등 성징의 발달 과정이 다양하다. ‘남성은 성기, 여성은 젖가슴’이라는 성별의 증거 통념에서, 젖가슴과 성기가 같이 발달하는 인간의 존재는 남녀 구분이 자연의 질서가 아니라 사회적 제도의 산물임을 보여주는 몸들이다. 이들는 비정상이 아니라 남녀 구분 문화의 피해자일 뿐이다.

인간은 남성 혹은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날 뿐이고, 가부장제 사회에서만 인간에게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코드를 부여한다. 그러니 그 유명한, 시몬 보부아르의 말은 부분적으로만 유용하다. “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가 아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여성이나 남성으로 태어나는 인간은 없다. 양성 개념이 필요한 사회에서만 남녀로 태어난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을 남녀로 나누는 것이 정상으로 간주되는 사회에서만 인간은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된다. 성기의 다름이 코, 머리카락, 키의 다름과 왜 그렇게 다르게 취급돼야 하는가.

양성구유자는 성적 소수자나 제3의 성이 아니라 인간일 뿐이다. 인도의 히즈라(Hijra) 집단은 양성구유로 태어났거나, 남성으로 태어났지만 여성으로 살기 위해 거세한 뒤 질을 이식하지 않고 성기가 없는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조선시대 실존 인물인 사방지(士方智)는 남성의 성기를 가지고 태어났으나 여성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영화로도 제작됐다). 그렇다면 히즈라와 사방지는 여성일까, 남성일까?

우리는 인간 신체의 어떤 ‘부위’를 보고 성별을 판단해야 할까? 트랜스젠더의 수술 과정은 우리가 자연적인 것이라고 믿는 생물학적 성별이 사실은 인간의 의지에 의해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남녀가 정말 다른 ‘종’(種)이라면, 그래서 뚜렷이 구분된다면 흔히 성차별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양성성(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조화)은 불가능하다.

정상성 집착 사회의 몸

양성구유자의 존재는 남녀 구분과 차별의 근거가 자연의 질서와 무관하다는 실증이다. 양성구유자까지 논할 것도 없다. 남성과 여성의 몸의 다른 기능으로 가장 먼저 출산력(생식기 모양?)을 꼽지만, 전체 여성의 20% 이상이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그 이상의 숫자가 출산을 거부하는 사회에서 남녀의 구분을 출산 여부로 가늠할 수 있을까. 자궁이 있다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면, 성대가 있는 사람은 모두 오페라 가수가 되어야 한다는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말은 적확하다.

남녀 이분법은 ‘사실’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성 내부의 남성과 남성의 차이, 여성 내부의 여성과 여성의 차이가 남녀 차이보다 크다면 남녀 이분법은 성립할 수 없다. 그리고 실제 세상은 남녀 간의 차이보다 개인차가 훨씬 크다. 사람을 남녀로 억지 구분하려고 하니,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잠재적인 ‘불쾌감과 혐오범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불편, 차별, 부자연스러움, 혐오…, 이것은 연속선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몸에 대한 지식은 대부분 과학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 통념이나 이데올로기, 선입견일 뿐이다. 주지하다시피, 시각장애인들은 손으로 본다. 색깔도 알아맞힌다. 청각장애인들은 후각이 발달한 경우가 많다. 턱수염이 난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저글링 젠더>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실존 인물인 주인공 제니퍼 밀러는 “내가 턱수염을 기르는 것은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젖가슴과 여성의 생식기를 가졌고 여성적인 외모를 하고 있지만, 수염이 난 그녀는 여성일까, 남성일까?

부모와 의사의 실수로 간단한 치료를 놓쳐 40년 동안 시각장애인으로 살던 남성이 개안(開眼, 이 말 자체가 재고돼야 한다) 시술로 시력을 회복한(?) 사례가 있다. 문제는 개안 수술 이후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오랜 세월 동안 그는 몸의 감각이나 손으로 세상을 인지해왔는데, 갑자기 다른 도구(눈)로 보려니 시력이 사라진 것이다. 결국 그는 재수술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는 시각장애인으로 ‘회복’됐다.

환상사지(幻想四肢) 혹은 유령사지(Phantom Limb)는 유명한 이야기다. 팔다리를 절단해 그 부위가 없는 외과수술 환자의 80% 내외가 사지에 통증을 느낀다. 이처럼 몸은 실체라기보다 기억이다. 흥미로운 점은, 자궁을 드러내는 자궁 적출 수술을 한 여성 환자들은 이 증상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있던 신체 부위가 사라져도 기능에 대한 기억이나 감각이 남아서 생기는 환상사지 통증이 여성의 자궁 적출시에는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 특히 자궁은 여성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 가족과 남성의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남의 몸’인 것이다.

이처럼 객관적, 중립적인 몸은 없다. 모든 몸은 사회와 문화가 체현된(Embodied) 몸(Social Body/Mindful Body)이다. 모든 사회에서 남녀 구분 질서가 있는 것은 아니며, 남성성과 여성성의 사회적 가치도 각각 다르고, 남녀 구분의 기준도 다르다.

성기 집착 사회는 정상성에 집착하는 사회다. 유동적인 몸의 경계(건강할 때와 아닐 때가 대표적인 경우다)에 확실성과 ‘보편성’을 주입하는 것은 편집증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소비문화와 외모주의가 위세를 떨치다 못해, 위협적이다. 도심의 대학가나 거리에서 부딪히는 여성들, 특히 젊은 여성들의 ‘일관된 외모’는 나를 놀라게 한다. 얼굴, 옷차림, 화장법의 획일성은 인간의 구별 없이 상호 빙의한 듯하다. 스테레오타입, 모두가 걸그룹 멤버 같다. 이러한 고착된 여성 이미지에 사회 전체가 중독돼 있다.

이처럼 여성의 범주, 즉 여성 정상성(여성다움)의 범주가 좁아지면 당연히 인권침해가 빈발한다. 조금이라도 씩씩하게 생겼거나, 외모에 신경 쓰지 않거나, ‘뚱뚱’하거나, 나이 든 여성들은 여성의 범주에 들지 못하고 모욕당하기 쉽다. 이번 축구선수 사태도 이러한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다. 여성이 30~40대 이후 ‘차려입지 않고’ 외출하면, 중산층/중년 여성의 정상 범주가 극히 좁은 한국 사회에서는 폭력의 피해자가 되기 쉽다. 나는 실제 백화점 등지에서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다.

한국 사회는 모든 면에서 분단화, 양단화, 양극화된 ‘드라마틱한’ 사회다. 남녀 이분법에다 획일적인 문화까지 겹쳐 조금이라도 다르면 곧바로 문화적 처벌이 따라온다. 성별 구분 외에도 채식주의, 휴대전화나 인터넷 사용, 의류 등 모든 면에서 ‘대세’라는 이름의 일방 문화는 의외의 소수자를 낳는다. 예를 들어, 나는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데, 외출시 두려운 문제 중 하나가 혹시 모를 사태의 발생이다. 공중전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타인의 취향’ 존중이나 ‘톨레랑스’ 같은 자유주의적 사고를 그다지 선진(?)적인 문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는 이런 가치를 적용할 대상조차 드물다는 것이다. 다름에 대한 무지, 무시, 무감각은 모든 독립적인 타인(개인, Individuals)을 타자(The others)로 만들어버린다. 타인의 취향을 인정하기 이전에, 인간이 개인으로 존재하기 힘든 사회다. 모두가 우리이거나, 모두가 우리가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인 사회다. 톨레랑스? 관용하고 배려할 다름 자체가 제대로 가시화되기 힘들다.

스포츠 경기에서 남녀 구분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비현실적이라는 점은 누구나 안다. 다만 성별 확인이 불가피하다 해도 다른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여성의 성별을 출산이나 몸의 특정 부위에 관해 언급해야만 알 수 있는가. 남자 같아 보이는 여성 축구선수 논란은 겹겹의 무지가 중첩된 사건이다. 국가정책, 지식사회, 사회운동 등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젠더 사안에 대한 인식이 없다. 무지하니 평소 이에 대한 사유가 축적돼 있지 않은데다 구별 집착이 겹쳐 발생한 ‘해프닝’이다. 그러나 이 해프닝은 에피소드가 아니라 여성의 몸에 대한 인권침해의 상상력을 구성하는 공포정치다. 장애인, 성적 소수자, 이주노동자, 환자, 노인(우리 모두는 나이 든다) 모두 이 ‘확인의 정치’에서 타자가 될 수 있다. 사회 구성원 스스로 타자의 대상이자 타자를 생산하는 주체라는 점에서 논쟁은 계속돼야 한다.

글 정희진 여성학·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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