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2.02 17:35 수정 : 2014.01.07 10:48

소셜 맥거핀. 과잉 적대와 사이비 적대를 가리키는 이 명명은 어찌 보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본래 영화 속 맥거핀이란 ‘탁자 아래의 터지지 않는 폭탄’이며, 긴장감만 고조될 뿐 실질적 피해는 발생하지 않는 가공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셜 맥거핀은 좀 다르다. 이 ‘가짜 폭탄’은 긴장감을 고조시킬 뿐 아니라 때에 따라 실제로 폭발해버린다. 가상의 폭탄이 실체화되는 마법이 일어나는 것이다. 애초에 아무 근거 없이 유포된 소문이 시간이 지나면서 진짜 갈등으로 비화해버리는 일이 왕왕 있다. 아무 문제 없던 두 사람이 ‘갈등설’에 신경 쓰기 시작하면서 ‘설마?’ 하며 서로를 조금씩 의심하게 되고, 전에는 신경 쓰지 않던 행동들이 미심쩍어 보이면서 가시 돋친 말을 슬쩍슬쩍 던져보고, 그러다 정말로 큰 싸움이 나서 영영 갈라서거나 심지어 칼부림을 벌이는, 그런 일은 일상다반사다. 개인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공적 지평에서도 이런 일은 드물지 않다. 그래서 여론과 언론이 무서운 것이다.

확인 가능한 어떤 구체적인 사실을 둘러싼 갈등은 경험적 검증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 문제인 경우 그리 간단히 해결되지 않는다. 반유대주의에 관한 슬라보이 지제크의 언명을 다시 떠올려보자. 유대인은 탐욕스럽고 돈밖에 모르며 잘 씻지 않는다는 편견은, 실제 어떤 유대인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즉 경험적 사실의 끝없는 나열로는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유대인에 대한 반유대주의적 편견은 실제 유대인과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경험의 반영인 것처럼 가장하지만 실은 완전히 자의적인 발명품이 바로 이데올로기다. 그 자의성이 성공적으로 폭로됐을 때만 이데올로기는 무력해진다. 하지만 팩트 차원에서 접근하면 이데올로기는 해소되는 게 아니라 되레 강화되는 결과로 이어지기 쉽다. 팩트 검증은 즉각 ‘포섭과 배제’의 동학을 작동시키는 까닭이다. 그리고 정확히 이것이 이데올로기의 ‘기능’이다. 한국의 악명 높은 전라도 혐오에 관한 다음의 사례는 이데올로기가 어떤 방식으로 대중에게 먹혀들고 생존해왔는지를 간명하게 보여준다.

2003년 3월1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 이른바 ‘애국보수 세력’이 모였다. ‘해방 이후 최대의 우익 집회’라 불린 역사적인 이날의 집회는 ‘반핵반김(정일),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였다. 초대형 스피커를 찢을 듯한 굉음으로 미국 국가 <성조기여 영원하라>가 울려퍼졌고 군중은 한 손에 태극기를, 다른 손에 성조기를 들고 “대한민국 만세, 미국 만세, 유엔 만세!”를 외쳤다. 천주교한민족돕기회 회장 봉두완씨가 단상에 섰다. 그는 엄청난 인파에 고무된 듯 격앙된 목소리로 이철승 자유민주민족회의 총재를 소개한다. “여러분, 이철승씨는 비록 전라도 사람이지만 좋은 사람입니다!”

‘일베’를 보는 프리즘

2013년 봄 ‘일간베스트저장소’(이하 일베)라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한국을 들썩이게 했다. 고 김대중 대통령, 고 노무현 대통령뿐 아니라 광주항쟁 희생자들을 직접적이고 반복적으로 모욕하는 각종 합성사진과 게시물들이 매체 지면을 통해 소개됐고, 일베라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는지도 몰랐던 대다수 사람들은 그 발언의 수위와 발상의 저열함에 전율했다. 일베가 한국 사회에 충격을 준 이유는 기본적으로 군사정권의 학살에 희생된 시민들의 관을 ‘홍어택배’라 부르는 것 같은 엽기적이고 반인륜적인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초적인 면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은 이른바 ‘486세대’보다 젊은 세대가 전라도 차별 의식을 거리낌 없이 표출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장년층 기성세대의 경우 ‘반공·냉전주의에 오랫동안 길들여졌다’는 식으로 배경 설명이 가능하지만, 청년세대의 ‘극우화’는 새로운 설명이 필요했다. 언론의 일베 묘사나 배경 분석이 대부분 이념성에 매몰됐지만 다른 측면에 주목한 시선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현상이 체계적인 정치 대결이라기보다, ‘안티에 대한 안티’를 통한 ‘놀이’의 성격이 강하다고 말한다. 진보 진영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창씨개명 이름 ‘다카기 마사오’라 부르며 비난하는 것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본식 이름 ‘도요다 다이주’를 찾아내 폭로하는 식이다. ‘닭그네(박근혜)’에는 ‘문죄인(문재인)’, ‘쥐명박(이명박)’에는 ‘뇌물현(노무현)’으로 대응한다. 최근에는 ‘간철수(국민 간 보는 안철수)’도 만들어졌다. 이는 보수적 정치집단이 조직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라는 해석이 많다.” -박은하, ‘디시, 촛불, 좌좀·우꼴… 정보교류서 이념논쟁의 장으로 분화’, <경향신문> 2012년 9월7일

같은 기사에서 문화평론가 최태섭(군 복무 중)은 민주화세력에 대한 역반응이란 성격을 강조한다. “386세대는 ‘민주화’를 일종의 훈장처럼 사유했고 민주주의가 어느 수준에서 더 이상 확장하지 못하면서 청년세대는 민주화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인터넷상의 진보·민주주의 조롱은 여기서 오는 역반응이다.” 일베의 유희성에 주목하는 건 현상에 대한 분석으로서 설득력이 있을 뿐 아니라 ‘발생학적 관점’으로 봐도 타당해 보인다. 일베는 ‘일간베스트저장소’라는 이름에도 드러나듯이 다른 커뮤니티의 베스트 게시물을 모은, 이를테면 ‘2차 커뮤니티’다. 한국 인터넷 놀이문화의 절대적인 지분을 차지하는 커뮤니티가 ‘디시인사이드’라는 사이트다. 디시인사이드는 수많은 분야의 갤러리들로 분화돼 있는데, 각 갤러리는 각자 독립적인 분위기와 문화, 색깔을 가지고 있다. 유저들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선 서로 잘 섞여들지 않는다. 그런데 2010년, 이 갤러리들에 올라온 게시물 중 가장 선정적인 것들만 ‘집대성’한 사이트가 탄생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일베였다.

디시인사이드의 갤러리 중에도 당연히 상대적으로 유저가 많고 영향력이 큰 ‘파워갤’이 있다. 야갤(야구 갤러리), 막갤(막장 사건·사고 갤러리), 코갤(코미디 프로그램 갤러리), 정사갤(정치·사회 갤러리) 등이 대표적인데 일베에 가장 영향을 끼친 것도 이 갤러리들이었다. 매체에 의해 일베의 특성이나 독특한 감성으로 이야기되는 것들은 일베 고유의 것이라기보다 대부분 이 갤러리들로부터 이어져온 특징들이다. 예를 들어 ‘홍어’나 ‘전라디언’ 같은 말은 야갤에서 시작됐고, 패륜적 댓글 문화는 막갤의 특기였다. ‘○○녀’ 같은 명명이나 여성 혐오 발언이 기승을 부린 곳은 코갤이었다. 정사갤은 처음엔 진보적인 분위기였지만 점차 진보를 조롱하는 분위기가 ‘대세’가 됐다. 특히 코갤은 ‘병신’을 자처하며 타인을 비방하는 걸 정당화하는 자의식이 강한데, 이런 특성은 고스란히 일베로 흘러들어갔다. 이 갤러리들은 공통적으로 ‘친목질’(일부 유저들끼리만 친하게 지내는 행동)을 금기시한다는 ‘내부 규율’이 있다. ‘친목질’이 커뮤니티를 망하게 한다는 경험칙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일베에도 ‘친목질’에 가까운 행동에 히스테릭하게 반발하는 글이 많다.

‘국정원 게이트’라는 변수

이러한 ‘발생학적 관점’은 일베에 관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해명해준다. 유명 갤러리의 자극성과 유희성을 한곳에 갖추고 있으니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도 당연하다. 특히 일베라는 커뮤니티 특유의 분위기 또는 문화는 의심의 여지 없이 디시인사이드의 몇몇 갤러리로부터 계승됐다고 할 수 있다. 일베 담론에 대한 기존 분석은 이러한 일베 문화의 자생성을 전제한다. 요컨대 일베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인터넷 문화의 하나라면, 일베의 ‘담론’도 자생적인 의견이라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반인륜적 내용이지만 어쨌든 그 역시 사회의 여론 중 일부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논의 틀 자체를 뒤흔드는 변수가 등장한다. 이른바 ‘국정원 게이트’다.

이 거대한 스캔들은 대선 직전인 2012년 12월11일 서울 역삼동에 소재한 한 오피스텔의 ‘대치 상황’이 전국에 생중계되며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이날 국가정보원 직원 김하영씨가 대선 관련 댓글 공작을 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제보를 받고 경찰 수사팀과 민주통합당이 해당 사무실로 직접 찾아갔다. 김씨는 사무실 문을 완전히 봉쇄한 채 40시간 넘게 대치한다. 그녀는 혐의를 지속적으로 부정하는 한편,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이 활동한 증거를 광범위하게 은폐했다.

이후 국정원 사태는 한국의 모든 이슈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블랙홀이 됐다. “국정원 4개 팀이 외부 인력까지 동원해 인터넷 댓글 공작을 벌였다”는 증언이 나왔고, ‘오유’(오늘의 유머), 일베, 트위터 등 대형 커뮤니티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수십 개의 아이디를 만들어 댓글 공작을 벌였음이 드러났다. 검찰과 경찰이 수사에 나섰고, 국정원을 압수수색했다.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대선불복운동도 벌어졌다. 국가기관의 불법선거운동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것이니 대선 결과도 무효라는 주장이었다. 2013년 10월에는 국정원뿐 아니라 국군 사이버사령부도 대선 때 댓글 공작을 벌였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국정원과 공조한 정황도 보도됐다.

야당인 민주당은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등에 항의하며 11월 초순까지 약 100일 동안 천막당사 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천막당사를 접은 지 며칠 되지 않은 11월21일, 국정원의 선거 개입 정황이 추가로 확인되며 다시 장외투쟁에 나섰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 박창신 원로신부가 대통령 사퇴를 거론한 시국미사 발언으로 종교의 정치 개입 문제를 놓고 큰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1년 가까이 이어진 ‘국정원 게이트’ 정국이었다. 경찰 및 검찰의 수사팀에 대한 석연치 않은 압력과 인신공격성 정보가 범람하면서 거대한 음모를 은폐하기 위한 공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게 아니냐는 비판이 거세졌다. 하지만 극우·보수 세력은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등을 활용하며 능수능란하게 대처했고, 속속 드러나는 증거와 정황에도 불구하고 여당과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가설의 붕괴

2013년 11월 말인 현재까지도 사태의 전모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조금씩 사실관계가 밝혀질수록 사건의 규모는 확실히 커지고 있다. 처음엔 백 단위였던 댓글 규모가 이제는 수백만 단위가 됐다. 이 스캔들의 전모가 대체 어느 정도 스케일일지 누구도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국정원과 국군의 여론 조작이 당시 집권세력, 여당 또는 박근혜 후보와 직접적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가장 민감한 지점이기도 하고 입증하기 어려운 부분인 만큼, 앞으로도 명확하게 규명되지 못하고 미해결 상태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국정원과 국군 사이버사령부 같은 국가기관이 전라도 지역민에 대한 혐오 발언,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등 민주화세력의 상징적 인물에 대한 모욕 등을 확대재생산해왔다는 것만으로도 경천동지할 사건임은 분명하다. 이것만큼은 의혹이나 가설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의 영역에 속한다. 이들의 핵심 활동 무대 중 하나가 바로 일베였다는 점은 무엇을 의미할까?

말할 것도 없이, 일베 담론에 대한 분석에서 국가기관-권력의 여론 개입이 반드시 고려해야만 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는 의미다. 더 정확히 말하면, 최근의 우파 여론에서 특정한 유형의 적대들이 과소 대표 내지 은폐되거나, 혹은 특정한 유형의 적대들만 과잉 대표됐을 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자생적 우익 담론’과 대당하는 또 다른 층위의 우익 담론, 이를테면 ‘작위적 우익 담론’을 설정할 필요가 생긴다. 물론 어디까지나 분석의 편의를 위한 추상적 구별이다. 일베에서 유통되는 담론들이 전부 국가기관의 직원이나 댓글 알바에 의해 조작된 것은 아닐 테다. ‘100% 순수한 여론’이나 ‘100% 조작된 여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도’의 문제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 내 이익단체들의 직간접적 여론 개입 전략들과 국가가 조직적이고 은밀하게 벌인 대국민 여론 조작은 질적으로 구별되며, 구별돼야 한다. 최소한 사태가 여기까지 밝혀진 이상 ‘우익 담론의 자연발생 공간으로서의 일베’라는 가정은 기각돼야 한다. ‘자생적 우익 담론’이라는 중요한 전제가 붕괴한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또 다른 넷우익 담론인 반이주노동자 커뮤니티, 그리고 일본의 넷우익과 비교하면서 소셜 맥거핀으로서 일베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분석해보기로 한다. (계속)

글 박권일 칼럼니스트. 대학에서 사회과학학회 활동을 하면서 늘 욕구불만이 있었다. 결국 ‘문화이론학회’를 만들어 당시 폭발하기 시작한 ‘홍대신’을 돌며 마음껏 뛰어놀고, 시네마테크에서 ‘죽 때리고’, 왠지 모를 죄책감에 김수행판 <자본론>을 읽다가, 뜬금없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욕하는 글을 쓰곤 했다. 우석훈과 <88만원 세대>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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