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28 04:00 수정 : 2012.12.28 04:00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한상균 전 지부장, 문기주 정비지회장, 복기성 비정규직 수석부지회장 등 3명이 지난 20일 오전 4시부터 쌍용차 평택공장 인근 송전탑에 올라 \'해고자 복직\' 현수막을 내걸고 고공 농성을 벌이고 있다.이들은 국회 본회의에서 쌍용차 정리해고에 관한 국정조사를 결의할 것과 쌍용차 해고자 복직 문제 해결 등을 촉구하고 있다./뉴시스
“그 때는 너도나도 올라가겠다고 손을 들어서 난감했어요.”

 백순환(53) 전 대우조선 노조위원장은 1991년 2월 7일 옥포조선소 골리앗 크레인에 오르기 전 때아닌 ‘면접’ 심사를 해야 했다. 골리앗 크레인에는 50명 남짓 올라가기로 했는데, 지원자가 훨씬 넘쳤다. “현장조직을 통해서 한 사람 한 사람 개별 면담에 나섰어요. 가족관계가 어떤지 꼼꼼히 살피는 건 기본이고, 노조 활동에 대한 신념이 얼마나 확고한지 등을 종합적으로 관찰하면서 올라갈 사람을 정해야 했어요.”

 노조는 석 달 전부터 회사 쪽과 지리한 협상을 이어왔다. 노조 활동에 대한 징계 해고가 부쩍 늘던 시기였다. 조합활동을 알리는 선전물만 돌려도 사진을 찍어서 징계위에 회부가 됐다. 노조는 징계 해고를 노사 동수로 참여한 기구에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회사는 왜 인사권에 개입하느냐며 펄쩍 뛰었다. 노조를 지키려면 특단의 조처가 필요하다고 마음을 굳혔다. “농성을 하면 금세 공권력이 투입되던 시절이라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어요. 위에 올라가서 철문을 닫아버리면 경찰이 최루가스를 터트려도 안전했거든요.”

 한 달 남짓 버틸 수 있는 비상식량을 챙겨 그와 조합원 50명이 골리앗에 올랐다. 30~40평 되는 넓직한 공간이었다. 무려 104m에 이르는 골리앗 크레인에서 내려다 보면 까마득한 아래 쪽에선 매일 수천 명이 ‘단결투쟁가’를 부르며 밤샘농성을 이어갔다. 회사 쪽은 어안이 벙벙했다. 일주일만에 당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옥포조선소를 찾았고, 노조가 징계 해고에 대한 재심 청구권을 갖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됐다.

 백 전 위원장은 당시 회사안이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골리앗 농성을 더 이상 이어가긴 어려웠노라고 했다. “같이 농성한 조합원 가운데 일부는 회사를 자극하려고 작업물을 들어올릴 때 쓰는 쇠로프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해서 굉장히 위험한 순간이 많았어요. 농성자 수가 많다 보니 그만큼 사고 위험도 커서 늘 조마조마했죠.” 혈기왕성한 조합원들을 살피느라, 돌도 안 된 아이를 업고 골리앗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아내의 마음은 미처 헤아려줄 여유도 없었다.

 그 당시 조선소 파업 농성의 상징은 ‘골리앗 크레인’이었다. 노조 파업에 길어야 2~3일이면 경찰 진압이 가능하던 시절, 골리앗 크레인은 안전한 요새 역할을 했다. 거대한 블록들을 옮기는 골리앗 크레인을 점거하면 당장 조선소 작업 공정이 중단되기 때문에 회사 쪽에도 큰 압박이 됐다. 1990년 4월 25일 현대중공업노조 조합원 70여 명이 82m 높이의 골리앗 크레인에 오른 게 최초 사례다. 13일간 농성을 이끈 이갑용 당시 노조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일명 ‘골리앗 전사’로 불렸다.

1991년엔 지원자 많아 심사 거쳐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전국 곳곳에선 고공 시위가 잇따른다. 울산 현대자동차와 평택 쌍용차 공장 앞 송전탑 위에 오른 노동자들은 저마다의 억울한 사정과 절실한 요구를 고공에서 외치고 있다. 경기도 동두천시청 옥상 무전탑과 충남 아산 유성기업 앞 굴다리에서도 투쟁 깃발이 나부낀다. 올려다 보기만 해도 아찔할 만큼 높은 곳들이 대부분이다. 노동자들은 왜 자꾸만 하늘을 향해 오르는 걸까.

1931년 5월29일, 임금을 깎지 말라는 49명 파업단의 대표로 축대 위의 누각 을밀대에 오른 여성 노동자 강주룡. 누각 뒤편은 12미터 낭떠러지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국내 최초의 고공 농성은 1931년의 일이다. 역사학자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이야기>는 평원고무공장 여성 노동자 강주룡이 그해 5월 29일 새벽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간 사연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회사 쪽이 일방적으로 임금을 깎겠다고 알려온 뒤였다. 노동자들은 파업에 들어갔지만 회사 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에 굶어 죽기로 싸우자는 ‘아사동맹’을 결의하고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건 해고 협박뿐이었다.

 신문에서는 강주룡을 ‘체공녀’라고 불렀다. 공중에 체류한 여자란 뜻이다. ‘조선노동운동 선상에서 보지 못하던 새 전술’이라는 평가도 언론을 통해 나왔다. 그녀는 잡지 <동광> 7월호와 인터뷰에서 “평원고무 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 감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다”며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곧 떨어져 죽을 뿐”이라고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강주룡은 원래 죽음으로 고무공장의 횡포를 세상에 알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죽는다면 사람들이 왜 죽었는지 제대로 알기나 할까 싶었다. 한밤중에 을밀대가 눈에 들어왔다. 죽더라도 저 위에 올라가 우리의 요구를 알려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동이 트자 지나는 사람들이 무슨 사연인지 궁금해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강주룡의 농성은 비록 8~9시간 만에 출동한 제국경찰에 의해 끝났지만 얼마 후 회사 쪽이 임금 삭감 방침을 철회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지붕 아래에서도 그녀의 삶은 내내 처절했다. 스무 살에 다섯 살 어린 남자와 결혼했지만, 남편은 독립군 부대에 들어가 전사하고 말았다. 시댁에선 그녀를 ‘남편 죽인 년’이라며 고발했다. 너무 억울했던 그녀는 경찰서에서 일주일간 단식을 했다. 이후 고무공장 직공으로 일하면서 친정을 돌봤지만 노조 활동을 하면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 파업으로 회사가 새 직공을 모으자, 그녀는 전차와 자동차를 가로막고 오랜 시간 진흙탕 속에서 뒹굴며 싸우기도 했다. 노조 활동으로 옥살이까지하면서 쇠약해진 그녀는 결국 서른둘에 평양의 빈민굴에서 세상을 떠났다.

 강주룡 이후 고공 농성의 역사를 다시 쓴 건 1990년대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이다. 1990년대 초반 조선소 노조들이 골리앗 크레인 위로 올라간 데 이어 1998년 7월에는 이헌구, 정갑득, 윤성근 등 현대자동차노조 전직 위원장 3명이 83m 주조공장 굴뚝의 45m 지점에서 36일간 농성을 벌였다. 회사 쪽이 정리해고 대상자 1538명을 통보한 데 따른 분노가 발단이다. ‘노란 봉투’(해고 통보서)를 받아든 노동자들의 파업은 외환위기 직후 본격화된 대규모 정리해고에 맞선 항전이었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고공 농성의 ‘주력’이 바뀐다. 노조 조직력이 취약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것도 주로 사업장 내부가 아닌 바깥에서 고공 시위를 벌였다. 2001년 1월 서울 한강대교 아치 위에 올라간 한국통신(현 KT) 계약직 노동자 5명은 계약직 차별 금지 등을 외치며 기습 시위를 벌였다. 전화 선로 가설공이었던 이들은 회사가 어려울 때는 계약직도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자며 임금을 깎다가 구조조정 방침이 정해지면 계약직부터 나가라고 하는 데 울분을 터뜨렸다. 비정규직이라는 고용 형태가 어떤 것인지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던 때였다. 이들의 시위는 회사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을 향한 외침이기도 했다.

 오민규 전국비정규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은 “2000년 이후 고공 농성의 70% 이상은 비정규직들이 했다”며 “높은 데서 하기 때문에 농성자 수가 많지 않아도 가능한 데다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용이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규직 노조에 견줘 회사 쪽과 대등한 협상을 벌이거나 파업 등 단체행동에 돌입할 수 있는 힘이 취약하다는 점도 이들을 극한적 방식의 농성으로 내몰았다.

“악에 받쳐서 올랐다”

 고공 농성을 했던 이들은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기대를 안고 올라가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의외였다. 그보다는 울분이 차고 넘쳐 행동으로 이어진 경우가 많았다. 2006년 3월 22일 공장 굴뚝에 오른 권순만(40) 전 금속노조 지엠대우차 창원공장 비정규직지회장도 그랬다. 국외 공장으로 갈 부품 포장을 해온 그가 속해 있던 하청업체가 문을 닫으면서 하루아침에 71명이 해고됐다. 석연치 않았다. 원청업체인 지엠대우차는 이미 노동부로부터 불법파견 판정을 받은 뒤였고, 노조가 활성화된 권씨의 하청업체는 눈엣가시였다. 복직을 요구했지만 회사 쪽은 71명 가운데 20명만 복직시키겠다고 했다.

현대차 사내하청 해고노동자 최병승씨
 권 전 지회장은 “협상 여지는 더 이상 안 보였고 회사 쪽은 노조가 농성하고 있던 천막도 철거하겠다고 하더라. 이성적 판단보다는 악에 받쳐서 올라간 것 같다”고 말했다. 굴뚝에 둘러쳐진 철조망을 절단기로 뚝뚝 자르면서 40m를 올랐다. 굴뚝 위에서 단식까지 감행한 권 전 지회장은, 그러나 그 기간을 정확하게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는 “잊고 싶은 대목이 많아서…”라며 말끝을 흐렸다. 굴뚝 아래에서 집회에 참가한 조합원들이 사지를 붙들린 채 공장 바깥으로 내몰리거나 공장 안에 있던 소방차를 이용해 독한 세제를 타서 물을 쏘는 광경을 보면 순간적으로 극단적인 생각이 들곤 했다. 32일간의 굴뚝 농성은 회사 쪽이 복직자 규모를 종전에 견줘 두 배 늘리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정작 자신은 명단에 포함되지 못했다.

 조직의 힘이 약할수록 고공 농성은 더욱 외로워진다. 대우조선 사내하청 노동자 강병재(49)씨도 자신이 속해 있던 하청업체가 폐업하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그는 지난해 3∼6월 88일간 옥포조선소 남문과 정문 사이 45m 송전탑의 중간 지점에서 지냈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농성할 때와 시기가 겹친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1991년 대우조선노조의 골리앗 농성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골리앗 크레인은 더 이상 아무나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회사 관리자들의 출입구 단속이 까다로워진 데다 중요 장비는 대체로 정규직 노동자들이 다룬다. 골리앗 점거는 곧 공정을 멈추겠다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다른 노동자들의 동의를 구하는 게 필수다.

 그나마 조선소 남문과 정문 사이에 있는 송전탑에 올라간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가 머문 지점은 수리공을 위해 설치한 ‘그레이팅’(옥외 배수구 뚜껑 등에 쓰는 격자 모양의 철물)이다. 20m 정도 높이다. 문제는 바람막이가 될 만한 울타리가 없다는 것이다. “조선소 인근이 바닷가라 그런지 바람이 엄청나게 불 때가 있어요. 사람도 날려버릴 거센 바람이죠. 그럴 때마다 철골을 꼭 부둥켜안고 벌벌 떨어야 했어요.”

 사방이 뻥 뚫려 있다는 건 여러모로 농성을 힘들게 했다. 자다가 무의식 중에 몸이라도 뒤집으면 바로 떨어질 판이었다. 처음에는 뜬눈으로 밤을 새다가 침낭의 가슴과 무릎 쪽을 철골에 끈으로 묶고나서야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용변을 보는 일이 어려웠다. 자칫 잘못하면 송전탑 밑을 지나는 이들에게 훤히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간이변기로 일을 보던 그는 처음엔 어지간하면 덜 먹어서 덜 하는 쪽으로 애써보기도 했다. 두 끼만 겨우 챙겨먹는 식이었다. “큰일을 볼 때는 긴 코트를 걸치고 사람들이 없을 때 몰래몰래 하곤 했어요. 한번은 마침 일을 치르고 있는데 누가 지나가다가 눈이 마주쳤지 뭡니까. 어찌나 부끄럽던지.”

 아직 대우조선에는 비정규직 노조가 없다. 하청노동자 조직위원회만 있을 뿐이다. 밑에서 그를 지켜주는 이들도 많지 않았다. 자연스레 물품 조달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한동안 올려 받던 휴대전화 배터리 대신 무전기가 올라왔다. 여기저기 전화하지 말고 최소한의 의사소통만 하라는 회사 쪽의 의도가 담긴 것이었다. 깜깜한 어둠을 밝혀주던 랜턴도 언제부턴가 사용할 수 없었고, 그는 칠흑 같은 밤을 보내야 했다.

 한 달이면 되겠지 하고 올라간 농성은 88일간 계속됐다. 회사 쪽은 올 연말까지 복직을 약속했지만 그는 요즘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약속을 어길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서다. “(회사뿐 아니라 정규직 노조에게서) 적당히 하고 내려오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가장 서러웠어요. 내려오고 나서 ‘희망버스’가 영도조선소로 가는 걸 보며 나도 좀더 버틸 걸 그랬나 싶더라고요.”

“너무 무서워 다시 내려가고 싶었다”  

 “사장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참 답답하더라고요. TV 뉴스에라도 한번 나오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인근(47) 금속노조 콜텍지회장은 2008년 10월 하늘에라도 올라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어느날 갑자기 국내 공장을 폐쇄한다면서 모든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한 회사와의 싸움이 지리하게 계속될 때였다. 조합원들은 많이 지치고 회사는 꿈쩍도 안하는 걸 보면서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다.

 장소 물색부터 나섰다. 대전 사람인 그는 서울 지리에 약했다. 함께 고공 농성을 벌이기로 한 김혜진 하이텍알시디코리아지회장이 국회와 마주하고 있는 한강 망원지구의 송전탑을 추천했다. 폐쇄회로텔레비전(CCTV)탑은 점거해도 처벌조항이 없어서 좋지만 둘이 오르기엔 공간이 너무 협소했다. 송전탑에 고압전류가 흘러 위험하긴 해도 그나마 오래 지내기엔 더 나아보였다.

 디데이 하루 전인 14일 저녁, 서울로 왔다. 집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서울에 볼일이 있는데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말만 남겼다. 이튿날 새벽 4시, 망원지구 송전탑에 올랐다. 날이 밝으면 경찰의 제지를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잡은 시간이었다. “한 발 한 발 올라가는데 꽤 무섭더라고요. 45m 지점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반쯤 올라가니 내려가고 싶어지더군요. 솔직히 그랬어요. 배낭까지 짊어지고 오르려니 힘이 너무 부쳤거든요. 그런데 밑을 한 번 내려다보니까 그냥 올라가는 게 낫겠다 싶었죠. 너무 아찔하더라고요.”

홍종인 전국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장이 부당노동행위를 한 사업주 처벌, 민주노조 파괴 중단 등을 요구하며 유성기업 아산공장 앞 굴다리에 설치한 철구조물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전국금속노조 제공
 앞서 다른 데에 올랐던 이들은 다들 잘 버티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알았는데, 막상 높은 데 있다 보니 현기증이 자주 났다. 머리 위로는 15만4천볼트의 고압전류가 흐르고 있었다. 비가 올 때마다 젖지 않게 하려고 비닐을 이리 치고 저리 쳤다. 빗물을 타고 고압전류가 흐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열흘쯤 있다가 단식을 시작했다. 한 달 만에 몸무게가 58㎏에서 49㎏까지 줄었다.

 그는 “아무 성과도 없이 몸만 축나서 내려왔다”며 “예상보다 언론 취재도 많이 오지 않고 이 사회에 대한 서운함이 막 커지더라”고 했다. 가뭄에 콩나듯 TV에 나온 모습을 본 건 아무것도 모르시던 부모님이었고, 한걸음에 보약을 지어서 달려오셨다. 단식 중이던 그는 마음만 받겠다고 말씀드리고 이내 고개를 떨궜다. 송전탑 밑에서 시민들이 자전거를 타고 조깅을 하는 평화로운 일상을 보면 괜스레 마음이 더 스산해졌다.

 고공 농성을 벌이는 동기는 점점 다양하게 진화해갔다. 2004년 비정규직법 제정을 둘러싼 논의가 한창일 때의 일이다. 비정규직법이 외려 비정규직을 더 늘릴 것이란 우려에서 관련 법을 철회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치던 때였다. 그 해 11월 이수종 전국타워크레인기사노조 위원장과 김경진 서울경인사무서비스직노조 위원장, 김주익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 사무국장, 김기식 금속노조 현대차아산공장 사내하청지회 조합원 등 4명이 여의도 국회도서관 증축공사 현장 40m가량 높이의 타워크레인에 올랐다.

 그러나 농성 참가자를 모으는 과정은 91년 대우조선 골리앗 크레인 농성 전과 사뭇 달랐다. 대의는 컸지만 실존적 무게는 크게 다가오지 않아서였을까. 올라갈 사람을 정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비정규직노조 대표자들끼리 모여도 선뜻 손을 드는 이들이 드물었다. 타워크레인 기사로 늘 허공 위에 떠서 일을 해온 이수종(44) 위원장이 총대를 맸다. 크레인을 잘 아는 사람이 있는 게 다른 농성자들의 심적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굳힌 것이다. 그는 크레인 농성 경험자이기도 했다. 이미 그 해 5월 4일 타워크레인기사노조 조합원 424명은 “어린이날 가족과 함께 놀이공원에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외치며 타워크레인 87대를 점거한 바 있다.

 일도 농성도 높은 곳에서 해온 이수종 위원장은 요즘도 서울 강서구 마곡단지 4지구 건설현장에서 크레인을 조정하고 있다. 그는 “사람들이 뭘 해도 안 되니까 답답해서 올라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것저것 해보다가 더 이상 할 게 없다는 판단이 들면 마지막에 자기 스스로 고립되는 행동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국회 농성을 하면서 태양열 충전 배터리를 챙겨간 그는 허공에 떠 있을 때 가장 소중한 게 휴대전화라고 했다. 세상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기 때문이다. 309일 ‘85호 크레인’에서 지낸 김진숙 지도위원에게도 그녀의 휴대전화 속 트위터는 농성을 이어가게 한 버팀목이었다.

  

초인이 아니라 나와 같은 사람들

 지금은 아예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패배감에 노조 활동을 접은 이들도 있었고 몇몇은 아예 연락도 닿지 않았다. 몇 해 전 벌였던 고공 농성을 떠올리는 정인열(34)씨의 눈가엔 내내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녀가 서울 마포대교 CCTV탑을 무작정 올랐던 건 2008년 7월이었다. 직접 고용 요구를 놓고 회사와 조인을 하기 몇 시간 전에 일이 틀어진 바로 그 날이었다.

 가만히 앉아있기엔 너무 억울했다. 처음엔 한국거래소 옥상에 올라가 건물에 매달릴 생각이었다. 며칠 전 배삼영 농협중앙회 비정규직노조위원장이 서울 충정로 농협중앙회 건물 10층 외벽에 외줄을 내려 매달렸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 장비를 구하기도 여의치 않았고 거래소 경비를 뚫기도 어려워 보였다. 정씨는 그렇게 하룻밤을 고공에서 지낸 뒤 “올라가 있어도 달라질 게 없다”는 만류로 CCTV탑을 내려왔다.

정인열(30) 증권노조 코스콤비정규지부 부지부장이 지난 16일 서울 마포대교 북단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이 설치된 철탑에 올라가 ‘불법 해고 철회, 정규직 전환’을 촉구하는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스물셋의 나이에 증권거래소 전산망 관리 자회사인 코스콤(옛 한국증권전산)에 들어간 정씨는 ‘아이티네이드’란 하청업체 소속이었다. 처음엔 공인인증센터에서 전화상담 업무를 했고 이후 전산 전공을 살려 대용량 서버 관리를 해왔다. 7년차에 받은 연봉은 2천만 원. 같은 일을 하는 코스콤 정규직 직원의 절반이 채 안 됐지만 크게 불평하지 않았다. 그저 내 ‘스펙’이 모자란 탓이려니 생각했다.

 그녀가 분노하게 된 건 2007년 비정규직법이 시행된 이후였다. 위장도급, 불법파견 관행이 문제가 되자 회사 쪽은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꿨다. 매일 아침 이용하던 전자결재시스템에 아무런 공지도 없이 접속할 수 없게 했고 사무실에는 이전보다 두 배나 높은 칸막이를 친 뒤 정규직 직원들만 그 안에 따로 앉게 했다. “기분 참 더럽더군요. 업무상 의사소통도 해야 하는데 정규직 직원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프로젝트 리더 한 사람으로 제한했어요. 그 때 (같이 일하던 정규직 직원들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 해줬더라도 이렇게까지 오래 싸우진 않았을 텐데….”

 여러 차례 고공 농성과 단식 등을 벌였지만 정씨는 끝내 일터로 돌아가지 못했다. 2008년 말과 2009년 초에는 우울증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상실감이 컸다. 다니던 회사와 완전히 연을 끊고 나서야 마음을 추스린 정씨는 “(긴 농성을 거치면서) 내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했다. 요즘 그녀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담는 월간 <작은 책>에서 일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울산 현대자동차 앞 송전탑에서 농성 중인 최병승씨를 취재하고 왔다고 했다.

 지난해 7월 서울 중구 금속노조 사무실에는 고공 농성 경험이 있는 10여 명이 당시 크레인 농성 중이던 김진숙 지도위원을 응원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직접 오진 못했지만 35개 사업장 200여 명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역사학자 박준성씨는 “과거에는 하늘로 올라가는 게 아주 예외적인 투쟁이었는데 지금은 너무 일반화돼버렸다”며 “극한적인 행동을 보여야만 사람들의 관심을 겨우 끌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역대 고공 농성의 기록을 들춰 보면 의외로 여러 번 올라간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 가운데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 노동자들처럼 첫 고공 농성에서 약속받은 사항이 지켜지지 않아 또 오른 사례도 있다. 그렇다고 고공 농성을 벌이는 이들이 무슨 대단한 초인은 아니었다. 기자가 만난 이들은 대부분 한 발 한 발 오르면서 느끼는 공포감이나 볼일을 제대로 보지 못해 느끼는 수치심 등을 그대로 안은 채 하늘에 올라 있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발을 땅에 딛지 못하고 있는 체공남, 체공녀들이 몇 명이나 될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시대가 됐다”며 “결국 땅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아예 하늘나라로 올라가버리는 사람들이 또 나올까봐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2003년 김주익 한진중공업 지회장이 크레인에서 129일간 고공 농성을 벌이다 목을 매 숨진 이후 올려보내는 이들의 마음도 훨씬 더 무거워졌다.

 2012년 대한민국 노동자들의 시계는 평양 을밀대 지붕을 오르던 강주룡이 살던 1930년대로 돌아가 있다. 아니, 어쩌면 그때 이후 노동자들의 시곗바늘은 한번도 움직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 이 글은 노동자들의 농성 사례만을 다뤘다. 2009년 용산 남일당 참사를 비롯해 철거민이나 다른 분야의 고공 농성까지 포함하면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늘어날 것이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