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2.02 14:02 수정 : 2014.01.07 10:48

김상봉 : ‘거리의 철학자’에서 ‘골방의 철학자’로 존재 이행을 감행한 김상봉 교수는 한국과 베트남에 대한 비교연구를 하고 있었다. 철학자로서 삼성 없는 대한민국의 길을 찾기 위한 실재에의 탐구였다.한겨레 박승화
‘오랫동안 거리를 누벼온 철학자 김상봉은 지금 골방에 있다.’

이 문장은 사실을 표현하고는 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아무 뜻도 담기지 않은 텅 빈 기호일 수 있다. 가령 ‘외국에 오래 머물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최근 귀국해 출근경영을 재개했다’는 문장과 견줘보자. 철학자로서 이름값이 높을지언정, 김상봉은 이건희라는 이름 석 자 앞에서는 한마디로 ‘듣보잡’이다. 설령 그의 존재를 안다 하더라도, 삼성에 대해 치열하게 철학적 비판을 전개해온 그의 말과 글을 제대로 접해본 이는 그중 얼마나 될까. 반면 배임과 조세포탈죄를 확정받고도 실형을 살기는커녕 제 한 사람만을 위한 특별사면까지 챙긴 재벌 회장이, 한 해 절반을 국외 휴양지에서 보내고 온 뒤 첫 출근길에 대뜸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고 흰소리를 해도, 우리는 언론의 대서특필을 통해 그 훈시를 기억하게 된다. 이건희와 삼성에 대해 뭐라도 다른 말을 한다는 건 이렇게 압도적인 비대칭을 감수하는 일이다.

지난봄 김상봉에게 글을 한 편 청하는 전자우편을 보냈다가 보기 좋게 딱지를 맞은 적이 있다. 답은 짧고도 건조했다. “초대는 고맙습니다만, 이제 저를 그만 찾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상봉은 지난해 ‘거리의 철학자’에서 ‘골방의 철학자’로, 보기에 따라서는 극단적일 수도 있는 존재 이행을 감행한 터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든, 누가 그걸 알아주든 말든, 그의 답장은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단호하고 삼엄한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고는 계절이 두 번째에서 세 번째로 바뀌어가던 11월18일, 그를 만나러 광주로 가는 호남선 열차에 올랐다. 한반도 전역에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그는 전남대 교정 깊숙이 자리잡은 문리대 연구동 자신의 연구실에서 스토브를 켜고 있었다. 사람들과 일본어 공부를 하고 막 돌아온 길이라고 했다. 그의 존재 이행의 모양새가 적어도 깊은 동굴 속에 칩거하는 것만은 아니었나보다.

김상봉은 며칠 전 베트남에 다녀왔다고 했다.

“2009년부터 베트남 사회과학원과 꾸준히 학술 교류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기업의 사회적 참여와 한국 민주주의의 근본 문제를 주제로 각각 발표를 했습니다. 베트남에서 철학적으로 가장 관심을 갖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씀드리면, 지금 베트남 사람들은 100년 전 조선 사람들이 일본을 보듯 일면적인 시선으로 한국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한국에 대해 호의적이고 특히 경제 발전에 큰 관심을 보이지만, 여기에서도 그들 고유의 주체적인 태도를 발휘합니다. 한국이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고, 그 이면의 문제와 한계는 무엇인지를 함께 보는 거지요.”

김상봉은 베트남식 민주주의에 큰 관심을 가진 듯했는데, 들어보니 한국과 베트남에 대한 일종의 비교연구였다. 그런데 왜 하필 베트남일까.

“베트남은 중국과도 다르고 북한과는 더더욱 다릅니다. 그들은 철저한 리얼리스트입니다. 그 나라 사람들에게는 오랜 세월 외세와 싸워오며 현실 인식에서 어떤 편견이나 환상, 독단도 없이 오직 사실 자체만을 중시하는 태도가 형성됐습니다. 그다음, 현실에 대응할 때는 철저히 민주적인 의사 결정 과정을 따릅니다. 반대 의견일수록 묵살하지 않고 더 열심히 경청합니다. 그래야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과정을 거쳐 일단 결정을 내리고 나면 놀랍도록 일치단결합니다. 전쟁 영웅인 보응우옌잡 장군의 전술도 이런 민주적인 의사 소통과 의지 결집을 거쳐 나온 것입니다. 천재적인 누군가가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드는 식이 아니고요. 베트남에 가보십시오. 전혀 다른 민주집중제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베트남과의 비교연구를 통해 한국 사회가 나아갈 길을 찾고 있기라도 한 걸까.

나·들- ‘거리의 철학자’를 자처하면서 진보신당의 강령을 기초하는 등 현실정치에까지 깊숙이 참여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거리의 현장에서 사라지셨습니다.

김상봉(이하 김)-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진보신당이 실패한 뒤, 마침 안식년을 맞았습니다. 칩거 모드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사회가 고갈의 시대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대선이 끝나고 ‘멘붕’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죽은 박정희와의 대결에서 절반이 반대한 것은 오히려 희망의 근거입니다. 나는 그보다는 그 희망을 받아안을 세력이 없다는 것에 심각성을 느꼈습니다. 정치적 공간에서는 박정희 편이냐 김대중 편이냐 노무현 편이냐로만 갈려 있고, 학자들은 정치인 서포터 노릇만 하고 있습니다. 독일인들에게 칸트도 없고 헤겔도 없고 베토벤도 없고 괴테도 없고, 오로지 비스마르크와 히틀러 중 하나로 그들의 정체성을 삼아야 한다고 상상해보세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게 현실입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김지하가 아무 설득력도 없이 독재자의 딸을 지지하고 나섭니다. 그 전까지는 진보정당에 참여해 얼마 안 되는 사람들과 함께 사회를 조금씩 바꿔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저런 좌절을 겪으면서 나 자신이 (다시) 철학자가 되기 전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철학자든 작가든 예술가든, 한국인이라면 바로 떠올릴 수 있는 인물들이 우후죽순처럼 나와야 합니다. 그들을 통해 형성되고 공유된 정신적인 척도를 현실에 적용하려는 실천이 아닌 한, 정치는 한갓 축구 한·일전처럼 맹목적인 게임에 불과합니다.

나·들- 편지로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삼성에 관해 말씀을 나누기 위해 찾아뵈었는데, 처음부터 딴 얘기가 좀 길어졌습니다.

-글쎄요. 어쩌면 우리는 이미 삼성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삼성을 얘기하는 건 삼성이라는 개별 기업 또는 그룹만을 문제시하는 게 아니라, 한국의 고유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자본에 의한 인간 지배를 얘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삼성은 그것의 머리인 셈이지요. 그래서 삼성 문제는 한국 사회가 어디에서 어디로 건너가고 있고, 거기에서 삼성이 어떻게 결정적이고 전형적인 결절점으로 작용하는지 간파하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나·들 -베트남에 대해 연구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인가요.

-그렇습니다. 철학자라면 당연히 시대의 징조를 읽어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짧게는 지난 100~200년 동안 한국과 동아시아, 그리고 전세계가 어떻게 움직여왔는지, 길게는 인류 역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탐구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온몸으로 느끼고 그걸 명징한 개념으로 포착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삼성도 베트남도 한국의 철학자가 연구해야 할 중요한 주제이지요. 한국 사회의 무엇이 삼성이라는 괴물을 불러왔는지를 다른 사회와 견주면서 규명해야 비로소 미래를 말할 수 있습니다.

나·들 -철학자의 눈으로 본 삼성은 한마디로 무엇입니까.

- 한마디로 말하라면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삼성은 한국 사회의 가장 지배적인 권력입니다.

나·들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앞에서 선생님은 삼성의 문제가 개별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삼성은 하나의 상징이자 추상명사이고, 거대한 이데올로기나 신화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우리의 사유와 영혼을 지배하고 있고 우리는 거기에 속수무책으로 무장해제된….

-가치로서 최고선이죠. 삼성의 그것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삼성의 가치는 돈입니다. 돈이라는 것, 자본이라는 것은 내적 욕망이 외화된 건데, 한국 사회 구성원들에게 내면화된 특수한 욕망이 삼성과 강력하게 결합한 겁니다. 한국 사회의 특수성은 공동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소사이어티가 없습니다. 소사이어티는 어원적으로 ‘친구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역사적으로 오로지 한비자식의 상명하복, 수직적 통치 단체와 장치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것이 꼭 제도로만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학벌이 대표적이지요. 내가 ‘학벌 없는 사회’ 운동을 해온 것도 그런 문제의식과 닿아 있습니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사회는 없다”고 했던 게 이미 한국 사회에서는 구현돼 있었고, 한국은 그런 면에서 처음부터 신자유주의적인 사회였습니다. 전세계 어디에도 없는 삼성 같은 지배체제가 한국에서 실현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나·들- 조선시대의 두레는 공동체, 소사이어티가 아니었던가요.

-오해입니다. 두레는 향촌 우두머리의 동원입니다. 어찌 보면 새마을운동의 뿌리인 셈이지요.

김상봉이 굳이 베트남 사회에 관심을 두는 사정을 짐작할 듯도 했다. 그의 설명대로라면 사회의 내적 구성 원리에서 두 나라는 확연하게 다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말끝에 다시 베트남을 언급했다.

“한국과 베트남을 비교해보면 비슷한 게 있습니다. 바로 강대국과의 관계 방식입니다. 중요한 건 좌우가 정반대로 비치는 대칭적 거울상이라는 거지요. 한국에 공동체의 전통이 없고, 지금까지도 형성되지 않은 건 뿌리 깊은 사대주의 때문입니다. 베트남은 정반대지요.”

나·들 -사대주의가 한국의 공동체 형성을 어떻게 가로막았다는 겁니까. 그것이 오늘날 삼성 문제와 어떻게 닿게 되는 건가요.

-한국에는 우익이 없습니다. 지배세력들은 매사 외세에 굴종해서 생존하려고 했지, 독립과 자존을 지키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삼국 통일부터가 외세를 끌어들여서 한 거였고, 그것이 이 나라 지배계급, 주류의 생존 전략이 돼버렸습니다. 단결은 외세와 하고, 대신 내부에서는 피지배계급의 단결을 막기 위해 분열의 장치, 반목의 장치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낸 겁니다. 현대사를 보더라도 이승만은 제주도를 빨갱이 지역이라고 버렸고, 박정희는 전라도를 버렸습니다. 학벌 체제는 또 다른 층위의 분열·반목 장치입니다. 이제는 노동자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열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이 나라가 유별나게 경쟁을 강조하는 것도 뿌리는 거기에 있습니다. 본디 국가의 역할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차이가 차별과 불평등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개입하는 것인데, 한국은 국가가 오히려 차별과 불평등을 부추깁니다. 그런 면에서 아직 진정한 국가가 형성되지도 않은 거지요. 그리고 국가가 분열과 반목, 차별, 불평등을 조장해 지배해오던 것을 지금은 삼성이 하고 있는 겁니다.

나·들 -말씀대로라면 삼성은 다분히 한국적인 특수성에 터하고 있는 셈인데, 그런 삼성이 현재 전자 분야에서 세계시장을 선도하는 글로벌 기업입니다. 삼성전자 주식의 절반 이상을 외국자본이 보유하고 있고요. 삼성이야말로 자본주의가 이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최근에 도달한 첨단의 형상이자, 자본주의의 본질적 속성이 아닐까요.

-먼저 짚고 갈 게 있습니다. 외국자본이 삼성에 투자하는 걸 두고 외국의 합리적인 주주가 삼성의 가족 지배체제를 인정해준 것이라고 하는 경제학자들이 있는데, 터무니없는 소리입니다. 내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1에서 논증했듯이 주주는 원래 기업의 소유와 지배에 아무 관심도, 능력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지분이 분산돼 있는 법인(주식회사)은 애초 ‘소유’ 자체가 불가능하니까요. 일종의 무주공산입니다. 그런 맹점을 틈타서 이건희 일가가 한 줌도 안 되는 지분으로 초거대 그룹을 ‘지배’하고 있는 거고요. 본질은 고대나 봉건시대의 가족경제가 현대적 옷을 걸치고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삼성이 자본주의의 어떤 극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프런티어적 측면이 있기는 합니다. 자본주의적 에너지가 고도로 집적돼 있으니까요. 그러나 뭐든지 극단까지 가면 모순이 드러나고 파국으로 향하게 돼 있습니다. 중요한 건 파국을 부른 장본인인 삼성 자신도 그 사태를 비켜갈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삼성이 파국을 맞는다면 이른바 ‘삼성공화국’의 국민은 이건희 일가보다 더 큰 희생을 치러야 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삼성 해체’도 윤리나 정의만을 앞세운 나머지 삼성에서 일하는 노동자나 협력사 노동자뿐 아니라 모든 국민이 겪을 고통을 도외시한 건 아닐까.

“나는 이미 그것에 대해 여러 차례 충분히 말해왔습니다. 삼성 해체는 소극적인 실천입니다. 그것을 파국이라고 하는 건 하나 마나 한 얘기고요. 삼성 해체는 다름 아니라 이건희 일가의 무단 지배를 중지시키는 것이니까요. 삼성 해체는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노동자 경영권으로 가기 위한 필요조건입니다. 파국까지 가기 전에 인간은 현실에 개입할 수 있습니다. 현실은 그렇게 수많은 길들이 교차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가장 유력한 대안이 바로 노동자 경영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들 -노동자 경영권은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어서 현실성이 커 보이지 않습니다.

-실증 사례들이 있는데도 그럴까요.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으로 파악했지만,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가족과 사회, 가족과 국가 사이의 내적 모순입니다. 경제의 주체는 본디 가족입니다. 경제의 속성은 사적이라는 뜻입니다. 이코노믹스의 어원이 ‘오이코노미아’, 즉 가정관리술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본주의 경제는 국가가 후견하지 않으면 굴러가지 않습니다. 사실 마르크스 경제학을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ics)이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독일에서는 경제학을 ‘국민경제학’(Volkswirtschaft)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가족의 사적 이윤 추구와 국가의 공적 개입이 균형을 이룬 것이 독일 경제체제이고, 양쪽을 매개하는 게 바로 독일 노동자의 경영 참여 제도입니다.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들 -자본 간의 내적 경쟁이 극심해지고 이에 따라 이윤율이 떨어지면서 노동자의 일자리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독일이라고 해서 이런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할 텐데, 노동자 경영 참여가 제 기능을 할까요.

-거듭 말하지만, 현실을 철저하게 봐야 합니다. 리얼리스트가 돼야 합니다. 그러려면 공부를 해야 하고요. 다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1980년대 영국에서 탄광 노동자들이 어떻게 됐습니까. 구조조정을 하려는 대처 정부에 맞서 격렬하게 투쟁했지만 결국 노조는 붕괴되고 개인은 파산했습니다. 반면 똑같은 사양산업인데도 독일에서는 달랐습니다. 1951년 처음으로 노사공동결정제가 석탄산업에 도입됐습니다. 완전한 노사동수여서 캐스팅보트조차 없었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석탄산업에서 일자리 40만 개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정리해고되지 않았습니다. 양쪽이 끝까지 함께 문제를 풀어갔기 때문입니다. 꼭 그 하나의 방식만 고집하자는 게 아니라, 여러 사례들을 참조해서 우리는 어떻게 가야 할지 토론하는 게 중요합니다. 쌍용자동차와 한진중공업의 투쟁도 노동자 경영권 요구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덕적으로 돌을 던지는 것으로 진보 진영이 할 일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김상봉의 견해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서, 그가 줄기차게 그런 주장을 하는 동안에도 한국 사회의 현실은 오히려 나빠졌고, 특히 삼성의 지배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당장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시대에는 큰 흐름과 작은 흐름이 시시각각 교차하는 지점이 있는데, 박근혜 정권의 등장도 그렇습니다. 한국적 국가주의 권력과 한국적 자본주의 권력이 충돌하는 것을 예상해볼 수 있습니다. 두 한국적 ‘변태’끼리의 충돌로 새로운 틈이 만들어질 수도 있겠지요. 이를테면 상황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이 이건희 회장을 감옥에 보낼 수도 있을 겁니다. 그 밖에도 여러 변수들이 있습니다.”

나·들- 두 세력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서로 협력할 가능성이 더 크지 않겠습니까. 미국의 신자유주의 세력과 티파티 세력이 그렇듯이.

- 양쪽 모두 타자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서로에게도 마찬가지지요. 가장 강력한 ‘홀로 주체’들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한국 사회는 지배층 내부에서도 공론장이 없고, 오로지 권력 독점에 의한 상명하복만 있으니까요. 여전히 주목할 것은 파국의 징후가 점점 깊어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내 이론 아닌 이론이, 한국 사회는 30년을 넘기는 법이 없다는 겁니다. 봉기의 기억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데, 그 기억이 끊어지기 전에 반드시 밑에서 불사조처럼 들고일어났습니다.

나·들 -그 주체는 젊은이들일 수밖에 없을 텐데요. 하지만 ‘삼포세대’라고 불리고, 또 삼성적인 가치를 내면화한 젊은 세대에게 그럴 힘과 의지가 있을까요.

-젊은이들은 스스로 깨닫게 돼 있습니다. 거칠게 말하면, 좀더 고생하면 됩니다. 지금까지는 부모가 아파트 전세금을 받아서 용돈을 줬지만 그조차 고갈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가족 해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실제 앞으로 5년 안에 배가 고파서 못 살겠다는 젊은이가 크게 늘어날 겁니다. 배고프다는 건 절대 은유가 아닙니다. 더 이상 가족에게 기댈 수 없을 때 새로운 ‘관계’가 생겨날 것입니다. 누구도 혼자서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나는 그것이 한국 사회의 관계 방식이 ‘홀로 주체’에서 ‘서로 주체’로 넘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역시 내가 염려하는 건 그걸 받아안을 세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민중이 뒤집어놓으면 엘리트가 탕진해버린 게 우리 역사입니다. 이제 그 고리를 끊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들 -엘리트라면 진보좌파 진영도 포함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망해야 할 건 박근혜와 삼성뿐 아니라 진보좌파 진영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게 무화될 때 비로소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습니다. 모든 가짜가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여러 가지 이데올로기, 아직도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있는 담론 체계가 붕괴돼야 합니다. 제발 관념에서 내려와 호찌민한테 배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호찌민은 그때그때 바뀌면서도 바뀌지 않고 바뀌지 않으면서 바꿔서 역사를 만들어가지 않았습니까.

김상봉이 ‘거리의 철학자’로 불린 건 앎을 실천하기 위해 현장에 천착했기 때문이다. 그가 삼성이라는 시대적 곤경과 정면에서 대면하고 싸워온 것도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그리고 모든 학문 분과를 통틀어서도 몇 안 되는 ‘반(反)삼성 학자’가 되었다.

나·들 -사건이 우연으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생님이 꾸준히 가져왔던 문제의식이 삼성이라는 실재와 만난 거라고 봐야 할 텐데요.

-그전부터 한국 자본주의 문제를 재벌 경제에 맞춰 사유해왔는데, (삼성에만 유독 호의적이었던)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그 극단이 삼성이라는 걸 또렷이 인식하게 됐습니다. 삼성 문제를 치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2007년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의 비리를 폭로했습니다. 비리의 내용이나 폭로에 대한 대응이 하도 가당찮아 전국의 철학과 교수들과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2010년 칼럼을 연재하던 <경향신문>에서 제 원고가 누락되는 일이 일어났지요.2 나로서는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었습니다. 즉시 <프레시안>으로 ‘칼럼 망명’을 한 뒤 삼성불매운동을 촉구하는 글을 썼고요.

나·들- 삼성불매운동은 선생님의 사유에 비하면 너무 작은 실천 아닙니까. 왜 하필 삼성불매운동을 주장하셨습니까.

-우선 삼성의 작동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삼성이라고 해도 제품이 팔리지 않으면 기업으로서 존속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더 중요하게 생각한 건 나를 비롯해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삼성을 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제품의 사용을 중단하지 않고서야 다른 어떤 실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가장 미세한 자기 내면을 쇄신하지 않고 세상을 바꿀 수 없고, 세상을 바꾸지 않고 결코 자신을 쇄신할 수 없습니다. 삼성불매운동은 홀로 주체가 서로 주체로 나아갈 수 있는 쉽고도 확실한 길입니다.

그의 골방 생활은 언제 끝날까. 끝이 있기는 한 걸까.

“새로운 역사를 받아안는 건 나한테 달려 있습니다. 내가 잘났다는 게 아니라, 각자가 답을 찾아나서야 한다는 뜻입니다. 누군가 ‘우리가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야 하느냐’고 물을 때 ‘여기에 이렇게 길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지금은 밖에 나돌아다닐 시간이 없습니다. 끝이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하루아침에 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글 안영춘 편집장 jona@hani.co.kr

1 김상봉이 2012년에 쓴 책. ‘노동자 경영권을 위한 철학적 성찰’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김상봉은 이 책에서 자본주의의 가장 보편적 기업 구조인 주식회사의 성격을 법률과 철학, 경제학 이론들을 통해 규명하고, 노동자가 주식회사의 경영권에 참여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제시했다.

2 그해 2월, <경향신문>은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를 소개한 김상봉 교수의 칼럼에 대해 수정을 요구했으나 김 교수가 이를 거절하자 일방적으로 칼럽을 게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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