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2.02 11:17 수정 : 2013.12.03 13:44

라디는 자기 안의 에너지를 어떻게든 표현하고자 했다. 사춘기의 라디는 쌈박질과 춤에 매달렸고, 음악에 눈뜨면서 외길을 걸어왔다. 그는 남의 성공을 바라보지 말고 내 안의 욕망을 진지하게 좇는 것이 결과와 상관없이 최선의 삶이라고 말한다.한겨레 박승화
2PM, 2AM, 브라운아이드걸스, 아이유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가창력, 개성 있는 외모, 독창성을 뿜어내는 매력 등등등등. 그런데 벌써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너무 많지 않은가. 대중문화는 이미 재능으로 포화됐다. 오디션 프로그램만 둘러보아도. <슈퍼스타K>에서 우승한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어떤 뜻일까? 대형 음반사의 전속 가수가 된다는 것은? 방송사 프로듀서의 손에 음반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음원을 차트에 올릴 수 있는 가수가 된다는 것은? 그것은 마침내 한 명의 재능 있는 음악가가 자본에 간택됐음을 뜻한다. 재능은 세계가 아닌 예술에 국한된 사소한 개념이다. 음악산업을 지배하는 자본의 힘은 하늘의 선택을 받은 재능을 다시 선택하는 종적 위계질서에서 나온다. 재능을 방송한다는 오디션 프로그램마저 실상 방송을 위해 재능끼리 경합하는 형식을 띤다. 천부적인 재능이라면 오히려 방송사와 음반사가 모시려고 경쟁할 수도 있을까?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다. 자리는 하나지만 재능은 널렸다는 것. 이 비대칭이 대중음악의 현재를 결정한다. 우리가 듣는 음악은 우리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우리에게 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여기, 자기 삶을 바쳐 작은 대조군 실험을 벌인 어떤 음악가가 있다. 자본을 등에 업은 재능의 확증 고리에 포섭되기를 거부했던 15년차 음악인은 과연 어디에 도달했을까? 매체의 방송 권력과 대형 음반사 홍보 자원을 포기하고, 음악의 힘만을 믿은 채 작곡에서 녹음까지 골방에서 홀로 해결하려 전전긍긍했던 젊은 날이 이 음악인을 어디까지 올려놓을 수 있었을까? 그는 2PM, 2AM, 브라운아이드걸스, 아이유가 될 수 있었을까? 어림도 없는 소리다. 그럴 수 없는 일이다. 대신 그는 2PM, 2AM, 브라운아이드걸스, 아이유가 존경하는 음악인이 되었다. 가수들이 팬질하는 가수, 아이돌들의 아이돌, 대중은 얼굴조차 모르지만 대중음악인이라면 누구나 그의 음악을 소장하고 있는 음악인, 그의 이름은 바로 ‘라디(Ra.D)’다.

-이번에 작업한 2AM의 신곡 <그냥 있어줘>가 여러 음원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고 들었다. 축하한다. 2AM과는 어떻게 작업하게 됐나.

라디 <우리 결혼했어요>(MBC)에서 2AM의 조권이 브라운아이드걸스의 가인에게 프러포즈할 음악을 작업하려고 저에게 찾아온 적이 있어요. 그때 조권씨가 같이 작업해보고 싶다고 말했는데 제가 사교성이 없어서 그 뒤 연락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갑자기 프로듀서 방시혁씨에게서 2AM의 새 음반에 참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죠. 집요하게. 하하.

-라디의 영업 전략은 사교가 아닌 음악 안에 있다. 조권에게 라디의 음악을 소개한 사람은 2PM의 닉쿤이고, 닉쿤은 2PM의 우영에게 소개를 받았다. 후에 라디는 조권을 통해 알게 된 가인과도 듀엣곡을 작업하게 된다. 가인과 같은 그룹 멤버인 나르샤는 라디의 음악 <아임 인 러브>(I’m in love)를 아예 리메이크해서 발표했고, 아이유 역시 라디의 음악을 몹시 좋아해서 종종 부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쩌다 10대들이 추앙하는 20대 아이돌들의 아이돌이 됐는가.

라디 10대는 20대를 동경하고 20대는 30대를 동경하는 거겠죠. 아직 스스로 도달하지 못한 나이의 성숙한 감성에 대한 동경이 세대마다 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제 음악이 워낙 좋아서 그런 것도 있을 거고요! 농담이고요, 사실 아이돌 가수가 저를 특별히 더 좋아한다고 느끼지는 않아요. 아무래도 현재 대중음악의 흐름 안에서 제가 하는 음악의 카테고리(솔 기반의 리듬앤드블루스)에 희소적 가치가 있어서 관심을 받는 게 아닐까요?

-라디는 연애의 감성적 지점을 잘 포착해내는 가수로 평가받고 있다. 결혼한 가수라 조금 조심스럽긴 한데, 라디의 연애관 혹은 연애의 경험에 대해 조금 들어볼 수 있을까.

라디 돌이켜보건대, 저는 어린 시절부터 연애에 늘 목숨을 걸었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중학교 2학년 누나랑 첫 연애를 시작했지요. 그 뒤로도 거의 연상을 사귀었고요. 그래서 빠르게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어요. 상대의 눈높이를 충족시키려면 성숙함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거든요. 그리고 매번 불같이 사랑했어요. 열병을 앓듯이. 연애할 때마다 모든 걸 내놓았죠. 너무 집중한 나머지 양다리 같은 건 생각조차 못했어요. 제 노래의 가사 중에는 지어낸 게 없어요. 모두 제가 경험한 사실을 그대로 썼지요.

-지금이야 ‘감성의 장인’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사실 10여 년 전 언더그라운드 시절의 라디는 화려한 기술적 천재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때와 비교해본다면 현재는 훨씬 단순하고 절제된 음악을 만들고 있다. 음악의 기술적 변화 이전에 삶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가 있었을 거라는 추측을 해본다.

라디 어릴 때는 음악을 만드는 재미 자체에 빠져 있었어요. 나 혼자서, 내 골방에서, 튀어나온 결과물을 곱씹는 게 좋았어요. 내 손과 두뇌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서 미친 듯이 음악을 만들었죠. 그리고 늦게 군대를 갔어요. 군악대에 지원했다가 전차병으로 들어갔죠. 한번 쉬어가는 때가 온 느낌이었어요. 삶이 리셋됐다고 할까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고, 평생 사랑할 사람을 만났고, 가족을 절실히 그리워하게 됐어요. 군대에서 돌아왔더니 나를 실험하기 위한 음악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들을 음악을 만들게 되더라고요. 거기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싶었고요.

-확실히 군입대 전까지 음악이 과시적으로 들렸다면, 그 이후로는 과감하게 내려놓은 음악을 한다는 느낌이다.

라디 (음악적인) 다이어트를 했죠. 표현하고 싶은 게 많아서 3∼4분의 조그마한 틀 안에 너무 많은 아이디어를 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덕지덕지 붙이는 음악이 아니라 빼가는 음악, 꽉 찬 음악이 아니라 미완성된 음악, 누군가의 귀에 집어넣을 음악이 아니라 누군가가 들어올 자리를 남겨놓은 음악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을 바꾸게 됐죠. 1집에서 2집으로 넘어오면서 음악이 헐렁헐렁해졌어요. 요새도 음악을 만들면서 가장 고민하는 부분은 여백이에요.

-라디는 작곡·작사와 녹음과 엔지니어링까지 ‘가내수공업’적 독립 제작을 추구해왔다. 그래서 본인의 음반사인 ‘리얼콜라보’를 설립했고. 그런데 몇 년 전 아이유가 소속된 대형 음악기획사에 몸담게 되었다. 제작 철학과의 충돌은 없는가.

라디 회사에 전속된다는 게 사실 두려웠어요. 그래서 군대를 전역한 뒤로도 몇 군데서 받았던 전속계약 제안을 다 거절했죠. 로엔엔터테인먼트 같은 경우에는 저에게 전속계약이 아닌 공동제작을 제안했기에 수락하게 됐어요. 방송·매니지먼트·홍보 같은 부분의 지원 규모를 줄이는 대신 음악적 자율성과 운신의 폭을 보장받은 거죠. 현재 제가 운영하고 있는 레이블인 리얼콜라보의 음악과 창작력을 로엔엔터테인먼트의 물적 기반이 견인해줄 수 있다고 봤어요.

-인터뷰 중 남의 안부를 물어서 미안한데, 같은 소속사 가수가 된 아이유에 대해 조금만 이야기해줬으면 한다. 독자들이 좋아할 거다.

라디 회사에 들어가기 전 아이유가 저를 좋아한다는 말은 몇 번 들었어요. 지금도 그런지 잘 모르겠던데요, 하하. 아이유 콘서트 때 게스트로 초대받아 간 적이 있어요. 평소 집 앞 슈퍼마켓에 가듯이 야구모자, 반바지, 더러운 운동화 차림으로 무대에 올라갔더니 아이유가 제 몰골을 보고 놀라서 얼어붙은 표정을 지었던 기억이 나요. 이 자릴 빌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네요. 그냥 노래만 부르고 내려오면 된다고 쉽게 생각했어요.

-뮤지션으로서 독립제작을 하는 것과 자본을 가진 회사에 전속돼 음악을 만드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라디 독립제작한 2집이 꽤 성공을 거뒀어요. 그래프로 그려보면 무명에서 스타가 되듯이 엄청난 상승곡선을 그리지는 않았죠. 서서히 올라갔어요. 저는 그게 음반시장의 정상적인 모형이라고 봐요. 시작하자마자 급하고 정신없게 꼭대기로 올라가야만 음악으로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인지 의심했죠. 콘텐츠가 좋고 진정성 있는 음악은 사람들이 언젠가 알아준다는 확신을 얻었죠. 현재 저는 16년차 음악인이에요. 오랜 시간 축적해온 것들을 바탕으로 마니아가 먼저 생겼고, 드디어 자생이 가능하게 되었어요. 신인들에게는 그런 공식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그 단계를 앞당기기 위해 자본의 힘이 필요한 겁니다. 그걸 ‘마케팅’이라 부르고요.

-언더그라운드에서 시작해 음악으로 인정받고, 자본의 도움 없이 계단을 밟아 오르듯 꾸준히 성장하는 형태가 일반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산업적 모형이라고 보는가.

라디 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이미 되고 있어요. 제가 그 사례 중 하나고요. 이미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어요. 그 가운데 ‘착시 현상’을 잘 가려서 보아야 해요. 예를 들어 버스커버스커 같은 경우는 논외로 봐야죠. 언더그라운드에서 올라왔고 음악성이 출중한 것도 맞지만, 버스커버스커를 현재의 위치에 올려놓은 건 결국 자본의 힘이거든요. 상금이 5억원이고, 무대는 몇백억원짜리인 대회의 수혜를 받은 거죠. 버스커버스커를 롤모델로 두고 오디션 우승을 노리면서도, 그걸 ‘음악만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사례로 여기는 사람이 요즘에는 꽤 많은 것 같아요. 그건 반만 맞는 이야기죠. 나머지 반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는 거고요.

-올해 초 인터뷰했던 ‘자립음악생산조합’은 산업적 자본이 음악의 근본을 위협하는 상황을 고민하고 있었다. 심지어 독립음악 신의 고향인 서울 홍익대 앞의 클럽조차 자본에 잠식당했다고 여겨 공연장을 직접 마련할 정도로. 자립음악생산조합의 음악인들에 비하면 라디는 그나마 주류에 가까운 음악을 하고는 있지만 비슷한 고민을 해왔을 것 같다.

라디 고민만 한 게 아니었죠. 가내수공업은 기본이고, 자체적인 공연도 기획해봤고요. 모든 걸 혼자서 해야 했어요. 돈이 없었으니까요. 2집 발매할 때는 음악을 다 만들어놓고 판을 찍을 500만원이 없어서 주변에 돈을 빌리려고 돌아다녔어요. 회사 쪽에 투자를 요청하면 하나같이 데이터를 요구해요. 그 음악으로 수익이 얼마쯤 예상되느냐? 그걸 모른다면 뭘 믿고 투자하냐? 자립음악생산조합의 고민도 같은 거겠죠.

-재능이 아닌 자본이 만들어낸 음악, 혹은 그런 산업에 대한 불만은 없었나.

라디 있었죠. 꼴보기 싫고, 더럽다는 생각을 했던 때가.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이미 자본은 예술이 된 마술이라는 느낌.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바꾸어내는 마술처럼. 비꼬는 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요.

-라디는 가수뿐만 아니라 프로듀서로서 재능을 널리 인정받고 있다. 특히 <커플송>은 가수가 아닌 아내와 듀엣으로 불러 화제가 됐다.

라디 그때는 여자친구였죠. 연애한 지 한 4개월 됐을 때였어요. 이거 아내가 오해하지 않게 표현을 잘해야 하는데… 연애 초반에는 에너지가 좀 다르잖아요. 지금도 아내랑 사이는 좋지만요. 아내한테는 장난인 것처럼 녹음시켜서 음반에 실었어요. 저는 장난처럼 작업하면서 장난 같지 않은 결과물을 내놓는 게 좋아요.

-그래서 그 작업이 결혼에 영향을 미친 건가.

라디 하하. 그걸로 발목을 잡은 건 아니죠. 영향이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고요.

-가사만 보면 라디는 연애의 달인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청혼했는가.

라디 아내가 교사로 일하는 어린이집에 찾아갔어요. 피아노가 있길래 제 곡 <아임 인 러브>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죠. 저는 나름 최상의 프러포즈라고 생각했는데 아내는 아직까지도 불만이 좀 있어요. 다 부르고 나서 반지 같은 거라도 내밀 줄 예상했나본데, 제가 노래로 끝냈거든요. 연애하면서 워낙 노래를 많이 불러줘서 그다지 특별한 느낌이 아니었나봐요.

-요즘 청혼할 때 부르겠다고 <아임 인 러브>를 가르쳐달라는 사람이 보컬학원에 많이 찾는다고 들었다. 라디 스스로도 그 노래로 청혼했다니!

라디 덕분에 주말마다 결혼식 축가를 부르고 다녀요. 효자곡이죠.

-청년 세대가 경제난으로 결혼을 미루는 현상이 사회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몇 달 전 인터뷰했던 목수정 작가는 “일단 저지르는 수밖에 없다”는 해법을 제시했을 정도다. 가장 불안정한 직종에 종사하는 음악인이 어떻게 일찍 청혼할 용기를 냈나. ‘목숨 건’ 사랑을 하기 때문인가.

라디 저도 막상 결혼식 이틀 전이 되면서 복잡한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해도 될까? 결혼을 왜 했느냐고 묻는다면 논리적으로 대답하지는 못하겠어요. 사실 굳이 그때 안 했어도 되는 거죠. 지난 연애의 경험을 통해 언제가 아니라 누구와 결혼해야 할지 갈피를 잡았다고 할까요? 삶의 중심에 저를 놓아둔 사람, 결혼할 처지냐는 둘째고 이 사람이면 된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렇다면 결혼해야 하는 거죠.

-결혼생활에 대한 노래는 좀 안 부르나. 언제까지 연애의 순간만을 노래할 건가.

라디 하하, 결혼생활을 노래로 듣고 싶어요? 정말로? 그런 노래를 부른다면 결혼의 아름다운 면만을 추려야 하겠죠. 연애와는 다르게 시시콜콜하고 아름답지만은 않은 생활의 사건들이 결혼의 현실을 이뤄요. 그건 노래보다 블로그에 더 어울릴 것 같네요.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기보다 하나의 강력한 심상을 좇아 노래를 만드는 저에게 결혼은 아주 훌륭한 소재는 아닌 것 같아요.

-라디의 음악에서 단순한 심상으로부터 감성을 효과적으로 조형해나가는 재능이 돋보이는 건 사실이다. 음악은 어떤 방식으로 만드는가.

라디 순간이오. 제가 경험한, 그리고 머릿속에 각인된 특정한 순간을 잡아서 쓰죠.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아요. 음악을 쓰고 어울릴 가사를 붙이거나 가사를 쓰고 어울릴 음악을 붙인다기보다는, 경험에 대한 인상에서 모든 게 동시에 나오는 경우가 많아요. 아니, 나온다기보다 이미 머릿속에 전개돼 있죠. 그걸 수습하고 배치하는 게 남은 일이고요. 짜내서 음악을 만드는 일은 저는 못해요. 저는 연주인이 아니기에 음악은 보조적인 역할을 해요. 제가 만드는 것은 사실 ‘대화’죠.

-고등학교 시절 무에타이 선수였고, 부산 지역에서 주먹으로 꽤 이름을 날렸다고 들었다. 괴상한 일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섬세한 연애 감성의 대가로 등극할 수 있는 건가.

라디 일단 하드웨어적인 이유가 컸죠. 어릴 때 덩치가 크고 힘이 셌어요. 그때는 제가 전국에서 제일 센 줄 알았어요. 기고 날았죠. 좀 세다는 애들한테는 한번 붙어보자고 전화가 걸려올 정도였으니까. 지금도 무에타이는 하고 있고요. 에너지를 쏟아붓는 곳이 바뀌어왔던 것 같아요. 사춘기가 한풀 꺾이면서는 싸움 대신 춤과 날라리짓에 빠졌고, 10대 후반부터는 그게 음악이 됐죠.

-싸움, 춤, 날라리짓, 그리고 여리고 섬세한 음악적 감성이 하나의 근원을 가진 에너지에서 나왔다. 지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라디 푸하하하, 하나의 근원이라고 말하면 이상하고요. 어떻게든 제가 가진 것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고 말해야겠지요. 뭔가 하고 싶은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그때그때 발산했던 거지요. 지금은 제가 가진 에너지의 실체를 스스로 알고, 어디다 쏟아부어야 할지도 아니까 컨트롤할 수 있지만요. 음악은 제 삶이 아니라 제 삶의 수단이에요. 제가 가진 하나의 창구일 뿐이죠.

-사춘기의 뒤틀린 에너지가 음악으로 귀결한 열아홉 살 때, 라디는 문득 부산을 떠나 서울로 혈혈단신 올라왔다. 10대의 방황을 끝낸 뒤로는 15년간 방황 없이 음악 외길을 달렸다. 라디의 방황기에 흔들림 없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던 동세대의 청년들은 그 15년을 방황했을 터다. 입시, 진로 결정, 취직, 이직. 그걸로 끝인가? 방황은 계속된다. “나는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는가?” 질문은 사회적 숙명처럼 삶에 들러붙는다. 자리를 털고 떠나야 할 시기가 주기처럼 돌아온다. 라디는 그렇지 않았다. 사실 나는 열아홉 살 때 막 상경한 라디를 우연히 만났다. 그는 한 번도 서태지가 되고 싶다거나 신승훈이 되고 싶다는 식으로 자신의 꿈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는 어떤 음악을 만들고 싶은지, 어떤 음악을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하염없이 말했다. 그는 음악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어린애였고, 그러면서 라면 살 돈이 없어 굶었다는 말을 웃으면서 입 밖에 내는 기인이었다. 꿈을 안고 상경한 열아홉 라디부터 한 분야의 장인이 된 서른네 살 라디 사이의 시간을 지켜본 나로서는 인간이 꿈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를 자연스레 생각해보게 된다. 꿈은 대개 꿈꾸는 자 바깥에 놓인다. 누구만큼 되고자 끝없이 바라는 사람과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에 매달리는 사람. 그런데 어느 쪽이 진짜 꿈꾸는 자인가. 다음 세대 젊은이들의 꿈은 그중 어느 쪽의 성취를 향하게 되는가. 이제 어느새 라디도 막 스무 살이 된 아이들을 향해 조언할 수 있는 나이가 됐다.

라디 어머니한테는 기왕 음악을 시작한 거 서울에서 최고가 되어야겠다고 말씀드리고 올라왔죠. 사실은 서울 사는 여자친구 가까이에 살려고 올라온 거였지만. 무작정 상경한 터라 음악과 주유소 충전 판매원 일을 병행해야 했어요. 음악을 포기할 생각은 안 했어요.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게 있어요. 한 가지 일을 진지하게 하는 것. 누가 성공했다는 이유로 뭐가 뭔지도 모르는 일을 따라서 좇아가면 안 된다는 것. 사람들이 음악을 잘한다는 평가를 하지만 정작 저는 제가 잘하는 게 음악이 아니란 걸 알았어요. 화성학에 능통하고 기막힌 연주를 하는 사람은 많아요. 저는 배치를 잘하죠. 제일 잘하는 게 뭐냐고 저한테 물으면 음악이 아니라 배치라고 대답해요. 어떤 리듬과 어떤 음계가 어느 자리에 놓여야 하는지를 아는 거죠. 스스로 잘할 수 있는 게 뭔지를 깨닫는 건 음악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할 거예요. 그게 바로 성공 확률을 높여가는 방법이죠. 진지하게 한 가지를 좇으면 보통 실패도 하고 성공도 하게 돼요. 그렇지 않으면 실패도 안 하고 성공도 못하게 되죠. 그건 최선의 삶이 아닐 거예요.

-진지하게 한 가지를 좇는 것. 하지만 라디는 어떻게 진지하게 한 가지를 좇을 수 있었나. 그는 자신이 특별히 현명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고백한다.

라디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죠. 음악이 아니면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인생에서 음악처럼 진지하게 한 것이 없었고요. 음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칭찬이란 걸 받아봤어요. 그 맛을 본 거죠.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두각을 나타내는 일, 사람들이 더 칭찬해주는 일이라면, 그건 그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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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손아람 힙합 그룹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의 멤버로 활동했다. 그룹 이름과 같은 제목의 소설을 써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서울 용산 참사를 소재로 정통 법정소설인 <소수의견>을 썼으며,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해 <너는 나다-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하다>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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