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1.04 19:26 수정 : 2013.12.03 12:43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행한 군인이 없도록….”

1961년 5월, 선글라스를 즐겨 쓰던 어느 군인은 이렇게 말했다. 갓 1년을 넘긴 혁명의 열기를 군홧발로 무참히 짓밟은 이 ‘미래의 독재자’는 그때 겨우 마흔네 살이었다. 1979년 10월 수하의 총에 맞아 비명에 간 그는 ‘불행한 군인’이었을까? 그의 34주기를 맞아, ‘아버지 대통령 각하’란 생경한 말이 떠돌고 있다. 반세기를 넘어, 역사가 고스란히 되풀이된다.

“원해서 나선 길이 아니다. 그저 의무를 이행했을 뿐이다. 국민의 요구를 더는 저버릴 수 없었다. 신께 맹세코….”

2013년 7월, 혁명의 열기를 탱크로 깔아뭉갠 또 다른 군인도 이렇게 말했다. 역시 정복 차림에, 눌러쓴 선글라스가 도드라진다. 나라의 운명을 한 손아귀에 틀어쥔 그는 “나는 영웅이 아니다. 그저 조국과 민족을 누구보다 사랑할 뿐”이라고 한없이 몸을 낮추다가도 “조국이 처한 어려움을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대뜸 목소리를 높인다. 올해 쉰아홉, 이집트군 총사령관 겸 국방장관 겸 제1부총리를 맡고 있는 그의 이름은 압둘팟타흐 사이드 후사인 칼릴 시시다.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민주적 선거를 통해 집권한 무함마드 무르시 정권을 무너뜨린 지난 7월3일 쿠데타 이후 석 달여,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거리엔 시시의 모습을 담은 포스터가 넘쳐난단다. 카페의 벽면에도, 정부 청사의 창가에도 어김없이 그의 얼굴이 내걸려 있다. 인터넷 잡지 <뉴스위크>의 최근 보도를 보면, 포스터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분’ ‘아랍의 독수리’ 따위의 글귀가 아로새겨져 있다. 그의 사진이 박힌 초콜릿 선물 세트가 없어서 못 팔 정도란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도 이미 오래다.

정치군인이 된 경제군인

시시는 1954년 11월19일 카이로에서 태어났다. ‘미래의 군인’이 태어나기에는 썩 좋지 않은 때였다. 그가 태어난 지 2년여 만에 대통령이 된 가말 압델 나세르는 수에즈운하 국유화를 추진했다. 이 때문에 이집트는 영국·프랑스·이스라엘과 한판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가 13살이 되기도 전인 1967년엔 이른바 ‘6일 전쟁’으로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이 벌어졌다. 이집트는 가자지구와 시나이반도를, 요르단은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을, 시리아는 골란고원을 이스라엘에 내줘야 했다. 참담한 패배였다.

이집트가 벌인 ‘가장 최근의 전쟁’은 1973년 10월의 ‘욤 키푸르 전쟁’이다. 시리아군과 연합한 이집트군은 수에즈운하를 거슬러 시나이반도 탈환 작전에 나섰다. 지금도 이집트군이 ‘영광의 승리’로 기억하는 그 전쟁이 끝나고서야, 시시는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그리고 그가 기갑부대 소위로 임관한 이듬해인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통해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전쟁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후 미국은 이집트 군부에 해마다 10억달러 이상을 지원하고 있다. 시시는 실전을 치러본 경험이 없다.

전쟁이 없는 시대에 군인이 된 시시는 ‘전쟁기계’ 대신 ‘슬롯머신’ 노릇에 충실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건 무슨 소릴까? 이집트 사회에서 군부의 ‘힘’을 상징하는 건 총이나 탱크가 아니다. 이른바 ‘군사경제’ 또는 ‘장교경제’로 불리는 영리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막대한 자본이야말로 오랜 군사독재를 가능하게 해준 버팀목이었다.

이집트 군부의 영리활동은 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했던 나세르 정권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국유화 정책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국유화로 생긴 국유자산 운영을 군부가 떠맡으면서 자연스레 돈벌이에 나서게 됐다는 얘기다. 군사경제가 팽창한 결정적 계기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었다. 이후 진행된 군부 인력 감축 과정에서 군복을 벗은 장교들에게 일자리를 챙겨줘야 했고, 그 자금은 미국의 원조로 충당했다.

이집트 군사경제의 실체를 온전히 알 길은 없다. 그저 이집트 국내총생산(GDP·2012년 기준 약 2650억달러)에서 적게는 10%, 많게는 40%에 이를 것이란 추정만 있을 뿐, 그 자체가 ‘군사기밀’인 탓이다. 군부가 생산·유통시키는 품목에는 사실상 제한이 없다. 파스타·생수·올리브유 따위의 생필품부터 평면텔레비전과 냉장고 등 가전제품은 물론, 자동차까지 조립·생산해낸단다. 2011년 제헌의회 선거 당시 사용된 기표소를 제작·납품한 것도 군부였다.

징병제를 통해 확보한 50만 병사의 저임금 노동과 각종 보조금·세제 혜택도 군사경제의 ‘경쟁력’을 배가하고 있다. 군사시설용으로 확보한 부지를 이용한 건설업과 유휴 군용 중장비 렌트업, 군수용으로 나온 유류를 활용한 주유사업까지 알짜배기 아이템이 넘쳐난다. 사업 수완이야말로 이집트 군부가 유능한 지휘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밖에 없다. 이집트 군부는 2011년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 붕괴 이후 국고가 바닥을 드러냈을 때도, 초급장교들에게 매달 2400이집트파운드(약 40만원)가량의 보너스를 지급한 바 있다.

시시는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은 모양이다. 1992년 영국 합동참모대학에서 유학했고,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이집트 대사관 무관 생활을 했다. 2006년 미국 육군대학에서 석사과정까지 마쳤다. ‘엘리트 코스’를 두루 거친 게다. 그리고 2008년 시시는 이집트 제2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 일대를 관장하는 북부군사령관에 임명됐다. 임관 20년을 갓 넘긴 그는 어깨에 별을 2개나 얹게 됐다. 그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이 카이로에 상륙한 것은 2011년 1월25일이다. 타흐리르 광장이 삽시간에 혁명의 열기로 달아올랐다. 들끓는 민심에 군부도 경악했다. 선택을 해야 했을 터다. ‘정권을 지킬 것인가, 기득권을 지킬 것인가.’ 군부의 결론은 분명해 보였다. 시위 시작 불과 18일 만에 무바라크의 30년 독재가 허망하게 무너졌을 때, 타흐리르의 시위대는 “군과 국민은 하나다”라고 외쳤다.

독재자의 빈자리를 냉큼 차지한 것은 노회한 군부였다. 무바라크의 국방장관이던 무함마드 후사인 탄타위는 ‘혁명 직후의 혼란’을 수습하겠다며, 군부 수뇌부 21명으로 최고군사위원회(SCAF)를 구성해 전권을 장악했다. 그 ‘21인회’에 최연소 위원으로 가담한 것은 막 기무사령관에 임명된 무명의 시시였다. 이후 그는 최고군사위의 ‘대변인’ 노릇을 하며 전국적으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무르시 퇴진 운동 틈타 쿠데타

2012년 6월 대선 결선 투표를 앞두고, 무슬림형제단의 집권은 확실해 보였다. 군부는 다시 한번 선택의 기로에 섰다. 권력의 끈을 부여잡을 것인가, 기득권을 안전하게 유지할 것인가. 답은 뻔했다. 곧 협상이 시작됐다. 무슬림형제단 쪽에선 무함마드 무르시 대선 후보가 직접 나섰다. 군부는 시시를 내세웠다.

무르시 대통령은 취임 두 달이 채 안 돼 ‘숙군’에 나섰다. 탄타위 국방장관을 비롯한 3군 수뇌부를 전역시키는 조처를 단행했다. 예상 밖이었다. 아무런 저항 없이 군부는 선선히 물러났다. 모두들 신기해하며 사태의 추이를 지켜봤다. 무르시 대통령은 시시 기무사령관을 새 국방장관 겸 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탄타위는 시시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권력의 뒤편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군부가 자발적으로 나서 진행한 세대 교체였다는 점을 그때 알아챈 이는 많지 않았다. 군부 내에서 벌어진 ‘은밀한 혁명’이었고, 시시의 시대가 왔음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축포였다. 어렵사리 집권한 무르시 대통령과 무슬림형제단이 독재 잔재 청산과 권력 기반 다지기에 골몰하는 새, 시시는 조용히 ‘고지’를 향한 낮은 포복을 이어갔다.

갈 길 바쁜 무르시 정권은 섣부르게 움직였다. 과도하게 대통령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려다보니 곳곳에서 파열음이 나기 시작했다. 시시는 군 내부를 다지는 한편, 재야 세력과 친분을 넓혔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지난 5월 한 군부 행사장에서 시시는 지식인과 언론인을 포함한 재야 지도부와 만났다. 그들은 “행동에 나서달라”고 주문했고, 시시는 “급할 것 없지 않느냐”고 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무르시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성난 함성이 절정에 이른 건 집권 뒤 1년이 채 되지 않아서다.

지난 6월 말, 타흐리르 광장이 두 번째 혁명의 열기에 휩싸였다. 군이 마침내 전면에 나섰다. “48시간 안에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라”는 최후통첩이 전달됐다.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대는 다시 한번 “군과 국민은 하나다”를 외쳤다. 하늘에선 공군 전투기가 ‘하트’를 그려 보였다. ‘때’가 온 것이다.

7월3일 쿠데타는 신속하게 마무리됐다. 카이로 거리 곳곳에 철조망이 쳐졌고, 주요 교차로마다 탱크가 들어섰다. 무슬림형제단은 반격에 나섰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무자비한 탄압이 이어졌다. 7월8일 무르시 대통령이 억류돼 있는 것으로 알려진 카이로 나스르시티에 자리한 공화국수비대 청사 앞에서 군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총질을 해대 5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같은 달 27일에도 비슷한 사건이 재발해 7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당시 목격자의 말을 인용해 “사망자 대부분이 머리에 총을 맞았다”고 전했다. ‘조준 사격’이었다는 얘기다.

무슬림형제단 지지자들의 항의시위가 위태롭게 이어지던 지난 8월3일, 시시는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외국 언론과 공식 인터뷰를 했다. 그는 이날 미국 언론 <워싱턴포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이집트 군부가 마지막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1950년대”라며 무르시 대통령 축출은 ‘쿠데타’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이집트에선 군과 국민이 대단히 특별한 관계로 연결돼 있다”고도 강조했다. 질문의 핵심은, 이미 떠돌기 시작한 시시의 대선 출마설로 모아졌다. 요약해보자.

-대선 출마하나.

이렇게 말해보자.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과업은 어떤 난관에도 이집트가 평화롭게 살도록 만드는 것이다. 정해진 일정에 따라 더 이상의 유혈 사태 없이 다가오는 선거를 제대로 치러내는 게 지금으로선 가장 중요하다.

-그러니까, 출마를 하는 건가.

이해 못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에는 권력에 관심 없는 사람도 있다.

-당신도 그렇다는 얘긴가.

그렇다. 국민의 염원이 곧 내 염원이다. 국민이 나를 믿고 따라준다면, 그게 내겐 가장 중요하다. 국민의 고통이 너무 크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그저 조국과 민족을 누구보다 사랑할 뿐이다. 다만 이집트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집트 군부가 통치하지 않고 병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나.

내 말 잘 듣고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바란다. 이집트 군부는 다른 나라의 군대와 전혀 다르다.

-문민통치를 진심으로 원하나.

당연하다.

시위대에 군경 투입… 무바라크 석방

친무르시 시위대는 카이로의 나스르시티에 자리한 라바 아다위야 사원 앞 광장과 카이로대학 앞 나흐다 광장 두 곳으로 나뉘어 밤샘농성을 이어갔다. 연일 시위가 벌어졌고, 여론이 갈수록 나빠졌다. 시시는 공개 석상에서 “나와 군경에게 폭력과 테러에 맞설 권한을 부여해달라”고 주장했다. 공공연히 친위 시위를 독려한 게다. 친군부 시위대가 타흐리르 광장 쪽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쿠데타 항의 시위가 6주째로 접어든 8월14일 이른 아침, 군부가 다시 움직였다. 친무르시 시위대가 모인 두 광장에 군경을 동시 투입했다. 아비규환이 연출됐다. 애초 ‘50여 명’이라고 알려졌던 사망자 수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 이집트 보건부가 8월16일 집계해 내놓은 자료를 보면, 카이로의 두 곳 시위대 진압과 이후 온 나라를 휩쓴 항의시위 과정에서 숨진 이들은 모두 578명에 이른다. 부상자도 3500명을 넘어섰다. ‘학살’이었다.

시위대를 무참히 짓밟은 군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카이로·알렉산드리아·가자·수에즈·이스마일리아 등 대도시에는 거의 예외 없이 저녁 7시부터 이튿날 아침 6시까지 전면 통행금지령이 내려졌다. 이집트 전역에서 체포된 무슬림형제단 관련자가 삽시간에 2천 명을 넘어섰다. 군부가 무슬림형제단 최고지도자 무함마드 바디아를 체포했다고 밝힌 8월19일, 이집트 법원은 2011년 2월 이후 구금돼 있던 ‘은퇴한 독재자’ 무바라크를 석방시켰다. 반혁명의 완성이었다.

이내 이집트 관영매체들은 ‘양복 입은 시시 장군’의 모습을 흘리기 시작했다. ‘시시 장군 초콜릿’의 폭발적인 인기몰이도 비슷한 시기에 연출됐다. 9월 초부터는 아예 ‘시시 장군 대선 출마 촉구를 위한 3천만 명 서명운동’이 번져나갔다. 지난해 대선에서 결선투표까지 진출했던 무바라크 정권의 마지막 총리이자 공군참모총장 출신인 아흐마드 샤피끄는 이미 “시시 장군이 출마한다면 차기 대선 출마를 포기할 것”이라며 공개 지지를 선언했다. 지난 9월30일 군부 대변인 격인 아흐메드 무함마드 알리 육군 대령은 아랍권 위성방송 <알아라비아>에 출연해 이렇게 여유를 부렸다.

“시시 장군은 대선에 출마할 생각이 전혀 없다. 장군 스스로 여러 차례 그런 뜻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출마를 촉구하는 대중적 캠페인이 나온 것은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시시 장군에 대한 대중의 감정이 그런 식으로 표출되는 것 아니겠나?”

시간이 줄긴 했지만, 야간통행금지령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국가비상사태 해제 여부는 11월 말에나 판가름 난다. 쿠데타 직후 각계 대표 50명으로 구성된 제헌위원회의 활동은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오는 12월3일까지 새 헌법 초안 작성을 마무리해야 함에도, 주요 쟁점에 대해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집트 인디펜던트> 등 현지 언론의 보도를 종합하면, 가장 첨예한 문제는 민간인을 군사재판에 회부하는 문제와 국방장관 임명권을 누가 쥐느냐로 모아진다.

무르시 정권 아래서 만들어진 헌법에도 민간인을 군사법정에 세울 수 있는 ‘예외조항’은 있다. 군을 겨냥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다. 일부 제헌위원들은 이 조항을 더 세밀하게 규정하거나 아예 삭제하는 방안을 내놨지만, 군부 쪽 반발로 논의조차 못하고 있다. 국방장관 임명권 문제 역시, 군부가 향후 두 번의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까지는 군이 국방장관을 사실상 임명하는 기존 관행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상태란다.

이집트 시민·정치 엘리트의 자가당착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이집트 시민·정치를 대표하는 집단은 전혀 딴소리를 하고 있다. 무르시 정권의 ‘독재’를 앞장서 비판했던 ‘구국전선’(NSF) 참여단체 지도자들은 아예 드러내놓고 ‘충성 경쟁’에 나선 모양새다. 미국 중동연구소(MEI)의 칼릴 아나닌 선임 연구위원이 지난 10월19일 이집트 언론 <아흐람> 온라인판에 기고한 글에서 “이집트 시민·정치 엘리트들은 군부를 지지함으로써 자기들이 지키겠다고 나섰던 바로 그 가치를 철저히 배반하고 있다”며 “이슬람주의 정치세력을 뿌리 뽑기 위해 필요하다면 군부독재의 부활까지도 감수할 수 있다는 이들의 주장은 정치적 기회주의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아나닌 연구위원이 ‘지적·도덕적 파산 상태’라고 질타한 이들의 최근 행태를 몇 가지만 들여다보자.

“무함마드 압둘 가르 이집트 사회민주당 대표는 자기 당은 물론 구국전선 차원에서 ‘이집트의 미래를 이끌어갈 지도자인 시시 장군을 전폭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르 대표는 특히 같은 사회주의자로 지난해 대선 1차 투표에서 3위를 차지해 집권 가능성을 보여준 함딘 삽바히에게 ‘당선 가능성이 없으니, 차라리 시시 장군 지지 선언을 하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삽바히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 또한 텔레비전에 출연해 시시 장군의 대선 출마를 지지하고 나섰다. 제헌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암르 무사 전 아랍연맹 사무총장은 ‘차기 대선에서 시시 장군이 압도적으로 당선될 것’이란 촌평을 내놓은 바 있다. 심지어 일부 작가·언론인들은 최근 ‘선거운동과 투표 비용을 들일 필요 없이, 아예 시시 장군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대통령으로 옹립하자’는 주장까지 늘어놨을 정도다.”

그나마 ‘반군부 집회’를 시도라도 하고 있는 건 지난 9월24일 출범한 ‘혁명전선의 길’이란 신생 단체다. 2011년 1월 혁명을 주도한 ‘4월6일 청년운동’과 ‘강한 이집트당’, 좌파 단체인 ‘혁명적 사회주의자’와 무슬림형제단 계열의 ‘정의자유청년단’ 등이 주요 참여 단체다. 이들은 지난 10월26일에도 군부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개악 움직임에 맞서 카이로의 탈라트하릅 광장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집트 민중은 2011년 1월25일 혁명으로 압제 정권과 그들의 법률체계를 무너뜨렸다. 우리는 막대한 희생과 순교자의 피를 통해 쟁취한 자유와 권리에 대한 공세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로이터통신> 등 외신들은 이 단체가 집회에 앞서 내놓은 성명에서 “(군부의 사주를 받은) 과도정부가 추진하는 집시법 개정은 사실상 집회·시위를 원천 차단하려는 술수이자, 혁명 이전의 압제 국가를 복원시키려는 의도”라고 비판했다고 전했다. 이날 집회 현장에선 ‘반테러 집회’도 함께 열렸단다. 쿠데타 이후 이집트에선 ‘테러 반대’가 ‘군부 지지’와 동의어가 돼버렸다.

군부가 추진하는 집시법 개정안은 지난 2월 무르시 정권이 내놓은 것과 마찬가지다. 경찰이 신고된 집회를 취소·연기 또는 시간이나 장소를 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자치단체장이 공공기관 부근에 ‘집회 금지 구역’을 설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뼈대다. 당시엔 ‘기본권 침해’라며 즉각 거리로 내달렸던 ‘재야 세력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10월26일, 일간 <아흐람>은 이들이 내년 초로 예상되는 의회 선거에 나설 후보자 선정 작업에 골몰하고 있다고 전했다. 저만치서, 시시가 웃고 있다.

글 정인환 <한겨레> 국제부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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