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1.04 18:12 수정 : 2014.01.07 10:38

생태주의는 자본주의를 비껴 바라보지 않고 정면에서 응시해야 비로소 간취할 수 있다. 지난 3월28일 서울 정동 덕수궁 대한문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농성장에 선보인 작업화 화분.한겨레 정용일
2011년 11월10일, 부산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아래로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내려왔다. 농성 309일 만이었다. 이날 한국 노동운동사에 길이 남을 그녀의 우렁우렁한 발걸음을 앞서 연 것은 자그마한 상자 하나였다. 밧줄에 매여 그녀보다 먼저 내려온 상자 안에는 방울토마토와 상추, 치커리가 자라고 있었다. 그녀가 농성 100일째부터 길러온 그 푸성귀들은 까마득한 철탑 위에서 직접 살을 비비고 말을 걸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였을 것이다. 여섯 달이 지난 이듬해 4월, 총선이 치러졌다. 이 ‘철의 노동자’는 다소 뜻밖으로 비칠 수도 있는 선택을 했다. 비례대표 정당 후보로 녹색당을 찍은 것이다. 이 또한 푸성귀들에게 살을 비비고 말을 거는 행위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한 그것은 행위 이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김진숙의 선택, 녹색당

“제 삶이 지향하는 바와 가장 맞닿았어요. 물론 진보신당이나 통합진보당을 통해 노동자들의 정치적 역량이 성숙하는 것도 중요하고 그렇게 해서 노동자들의 정치적 요구가 실현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약들을 다 펼쳐놓고 보면 녹색당이 지향하는 바가 제가 꿈꾸는 사회입니다. 궁극적으로 저는 차별 없는 사회를 바라요. 착한 사람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개념 자체가 사라지는 사회를 꿈꿉니다. 앞으로 내다봤을 때는 진보신당이나 통합진보당이 맞지만 더 멀리 봤을 때는 녹색당이 맞아요. 세월이 흘러 일선에서 제가 은퇴했을 때 녹색당에 가입해 텃밭을 가꾸고 있지 않을까 상상해요.”1

김진숙은 목숨까지 걸어가며 한평생 투신했던 노동운동이 정작 자신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거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라고 말한다. 현재 그녀에게 노동운동은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이행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먼 지향은 현실정치의 장에서 녹색당 공약 안에 어느 정도 투영돼 있고, 그 낱낱의 공약들이 조밀하고 유기적으로 완성된 세계는 차별이 사라지고 지배라는 개념이 해소된 체제라고 믿는다. 그 세계의 삽화집에는 어느 나이 든 여성 노동운동가가 텃밭을 가꾸는 풍경도 담겨 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텃밭에는 오래전 그녀가 크레인 위에서 살을 비비고 말을 걸었던 것들이 자라고 있다. 개인의 꿈을 술회하는 형식을 띠고 있는 이 진술을 ‘직관의 언어로 펼쳐놓은 역사철학’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김진숙의 사유를 설명할 수 있는 유력한 이론은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한다. ‘정치적 생태학’이다. 앙드레 고르2는 정치적 생태학의 창시자라고 불린다. 여기서 ‘정치적’이라 함은 한국 사회에서 흔히 ‘기회주의적’이라는 함의로 쓰이는 용례와 전혀 무관하다. 전 사회적 차원에서 구성원들의 권력관계(주로 계급적)가 어떤 물적 토대 위에서 어떻게 작용해 어떤 운동 현상으로 나타나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를 궁구하는 학문적 태도에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이론이 ‘정치경제학’으로 불리고 그의 저서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제목에서도 함축하고 있듯이, 고르의 정치적 생태학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당대 지배체제이자 이데올로기인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핵심에 둔 이론 전개일 수밖에 없다. 고르도 정치적 생태학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를 명백하게 밝혔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본주의 비판에서 출발하여 어쩔 수 없이 정치적 생태학에 이르게 됩니다. 정치적 생태학이란, 거기서 빼놓을 수 없는 필요에 대한 비판 이론을 갖추고, 자본주의 비판을 더욱 심화하고 급진화하는 쪽으로 이끕니다. 그러므로 나는 생태학의 도덕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은 안 하겠고, 차라리 주체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윤리적 요청에 자본주의의 이론적·실천적 비판도 내포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비판에서 정치적 생태학은 없어서는 안 될 하나의 차원을 이루지요.”3

반자본주의로서 정치적 생태학

생태주의적 태도라면 당연히 자본주의와 적대적인, 적어도 대립적인 관계일 거라고 여기기 쉽다. 그렇다면 고르의 저 언술은 그저 ‘지당한 말씀’일까. 그러나 생태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에코 파시즘’은 양쪽 관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그 결과가 얼마나 극단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나치즘은 대공황을 겪으며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에 반발해 출현했으면서 또한 공산주의와도 철저히 적대했다. 그리고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초기부터 생태주의를 표방했다. 얼핏 불가능한 조합처럼 보이지만, 나치즘의 전체주의 이면에는 절대적인 것, 지고지순한 것에 대한 열망이 있다. 자연은 신성한 것이고, 자연의 법칙을 설명하는 과학은 진리다. 우생학은 당대에 가장 진보한 과학 이론이었다. 그 우생학이 게르만 민족주의와 만나 ‘인종 대청소’의 이데올로기로 완성된다. 에코 파시즘이다.

‘생태’ 혹은 ‘녹색’은 다양한 조합으로 많은 개념을 파생하는데, 그 스펙트럼 양끝이 아득히 멀어 보일 정도다. 그나마 이명박의 녹색성장론은 너무 단순무식해서 그 넓은 부채꼴 어디에도 포함되기 어렵다. 그에게 ‘녹색’은 빨주노초파남보 가운데 아무거나 골라잡아 색을 입힌 개발·성장주의일 뿐, 교묘한 이미지 전략 같은 건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렇다면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개념은 얼마나 다를까. 1987년 ‘환경 및 발전에 관한 브룬트란트 위원회’에서 최초로 등장해 유엔 보고서로 채택된 이 개념은 ‘미래 세대가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능력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발전’으로 정의됐다. 그 뒤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 협약이 몇 차례 추진됐지만, 우리 기억에 남은 제도는 탄소배출권 정도뿐이다. 이마저 투기나 다름없는 파생상품으로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다.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온실가스 문제의 최대 수혜주는 뜻밖에도 핵발전이다. 그전까지 핵발전을 둘러싼 전선은 ‘인류를 공멸시킬 위험천만한 에너지’라는 생태주의적 주장과 ‘가장 값싸고 효율적인 에너지’라는 경제주의적 주장 사이에서 그어졌다.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청정 에너지’라는 새로운 주장이 출현하면서 가뜩이나 힘든 싸움을 벌이던 환경론자들을 교란시켰다. 환경 문제를 과학기술의 이슈로만 접근한 결과다. 자본주의를 부분적으로 교정·관리하면서 성장을 지속할 수 있다고 하는 ‘과학적 생태학’은 언제든 곤경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지속 가능한 개발 같은 개념은 과학기술적 판단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의 정치·경제적 판단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생태학은 그 절대강자들에게는 ‘개선 노력’이라는 알리바이를, 전문가들에게는 ‘테크노크라시’라는 또 다른 권력을 제공한다.

나치도 생태주의를 사랑했다?

앙드레 고르의 정치적 생태학이 결코 지당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그에게 생태학은 자본주의를 비껴 보지 않고 정면에서 응시해야 비로소 간취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에 반기를 든다고 해서 저절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20세기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와 치열한 성장 경쟁을 벌인 만큼 치열한 생태 파괴 경쟁도 벌였다. 생태주의 내부에서도 반자본주의가 곧 정치적 생태학은 아니다. 가령 자연을 숭고하게 바라보는 태도는 당연히 자본주의에 반대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윤리적 지상명령만 되풀이할 공산이 크다. 심지어 에코 파시즘도 그 계보도의 한 줄기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 생태학의 차이는 그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이어서가 아니라 경제학이자 사회과학이며 총체적 세계관이 담긴 역사철학이라는 데 있다.

“자본주의 비판에서 출발하여 어쩔 수 없이 정치적 생태학에 이르게 된다”는 고르의 저 말에서 가장 중시해야 할 표현은 ‘어쩔 수 없이’다. 흔히 체념의 상태를 드러내는 데 쓰이는 관용구이지만, 여기서는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에서 나온 전망의 뉘앙스에 가깝다. 기상 전문가가 대기의 흐름을 치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해 ‘어쩔 수 없이’ 폭풍우를 예고하듯이. “불황의 위협, 나아가 세계경제에 무겁게 드리운 붕괴의 위협은 규제가 없어서 생긴 일이 아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재생 불능이라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기능하는 것은 오로지 점점 더 임시적인 허구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4 생산이 더는 축적된 자본 전체에 이윤을 가져다줄 수 없게 되면서 자본은 갈수록 금융자본 형태로 바뀌어 무모하고 규제 불가능한 방식으로 돈을 사고파는 데만 매달린다.

한국 경제의 현실도 전혀 다르지 않다. 멀쩡한 강을 파헤치고 돈을 쏟아부어도 저성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한국은행 발표를 보면, 지난해 삼성전자와 현대·기아자동차가 거둔 순이익(24조8천억원)이 46만4425개 국내 기업 순이익(86조6천억원)의 28.6%를 차지했다. 2009년(14%)보다 2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자본 내부의 이익 쏠림이 그만큼 심각해지고 있다. 두 기업의 독점 심화와 일자리 수는 반비례한다. 시장 지배력이 커지는 데는 노동생산성 향상과 임금비용 하락이 그만큼 역할을 한다. 이 기업들의 독점이 심화할수록 더 적은 노동자가 더 많이 생산하거나, 저임금 불안정 노동자가 더 많아지거나, 노동자가 하던 일을 기계가 더 많이 대체했다는 얘기다.

자본주의 퇴조를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

여기서 생태주의적 실천은 어떻게 일어서게 되는 걸까. 자본주의가 오랜 시간 팽창해온 것은 생산과 소비 양쪽을 모두 지배했기에 가능했다. 자본은 노동자들에게서 노동수단을 빼앗아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공급을 장악함으로써 소비자(노동자이기도 하다)들의 필요를 조종하고 욕망을 창출할 수 있는 힘을 확보했다. 고르는 이것을 ‘필요에 대한 독재’라고 부른다. 자본이 행한 이 모든 것은 ‘자연’ 파괴였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은 자연주의자가 말하는 자연이나 과학주의자가 말하는 그것을 넘어선다. 자본주의에 의해 파괴되기 전의 일상문화, 사물을 이해하는 직관적·경험적 시각과 지식, 소통과 공동체 지향적인 인간관계, 무엇보다 생산과 소비의 주체적 연결을 아우른다. 어쩌면 우리가 흔히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총체적인 무엇이라고 해도 무방할지 모른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내적 모순에 의한 위기가 깊어질수록 소비자(동시에 노동자)에 대한 장악력이 떨어지게 된다. 자본에 얽매어 있던 이들은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자본의 포섭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이제 그들은 필요를 스스로 통제(소비 축소)할 수 있는 토대를 갖기 시작했고, 실업이나 불안정노동 때문에 필요를 통제해야 할 내적 압력도 함께 받게 됐다. 성장주의에서 벗어나 탈성장의 생산양식을 구축해야 하는 압력과 이를 위한 조건도 동시에 커지고 있다. 이른바 지식경제로의 이행과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은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노동과 자본을 배제한 생산관계가 이뤄질 수 있는 영토를 넓혀놓았다. 해커와 카피레프트 등은 그 작은 예다. 고르가 말하는 광의의 자연이 ‘어쩔 수 없이’ 인류 앞에 다시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런 변화가 실현될지, 실현되더라도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는 알 수 없다. 자본주의가 퇴조하는 국면에서 노동자에게 가하는 또 다른 폭력은 개별자들의 실존이 감당하기에 너무 크고 가혹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생태를 파괴하는 방식을 거부하지 않고 성장을 통한 자본과의 구조적 공모와 단절하지 않는 한 그 고통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자본주의의 퇴조가 야만적 방식이 아닌 문명적 방식으로 진행되도록 더욱 급진적인 생태정치적 기획이 요구된다. 가령 고르가 주창한 기본소득제5는 자본주의 이전의 자연을 자본주의 체제에서 제도화하는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2011년, 85호 크레인 위의 김진숙과 전국에서 자발적으로 희망버스를 타고 모인 수많은 이들 가운데 다수는 직관으로든 사유로든 그 길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글 안영춘 편집장 jona@hani.co.kr


1 “사람들에게 빨리 잊혀졌으면 좋겠다”, <오마이뉴스> 인터뷰, 2012년 4월19일.

2 <나·들> 7호(2013년 5월호) ‘큰 이성이 된 지식인의 연애’에서 자세히 소개한 의 저자다.

3 <에콜로지카>,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정혜용 옮김, 생각의 나무, 2008, 11쪽. 이 책은

2007년 고르가 아내 도린과 동반자살을 하기 전에 구상해, 이미 발표한 글 중 자신의 사상이 요약 집중된 7편을 직접 선별해 엮었다.

4 같은 책, 30~31쪽.

5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일률적으로 일정 소득을 지급하는 제도다. 현재 일부 국가에서 부분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선거 당시 공약했던 ‘노인기초연금’도 연금이 아니라 나이 제한을 둔 기본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금은 수급권자가 일정 기간 보험료를 미리 납부해야 하는 데 비해, 노인연금은 조건 없이 국가가 보장하는 소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행 단계에서 소득 제한을 두고 국민연금과 연동하면서 기본소득 성격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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