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1.04 13:58 수정 : 2013.11.11 13:46

김현씨는 2년째 LG 트윈스 배트걸을 하고 있다. 농구 시즌에는 치어리더로 변신한다.뉴시스
프로야구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의 플레이오프(PO) 1차전(지난 10월16일) 전날, 이벤트 회사 팀장에게서 문자가 왔다. 이례적인 일이다.

“드디어 내일입니다. 모두 일찍 출근해주세요.”

정규 시즌 때는 따로 문자가 오지 않지만 중요한 게임이라 그런지 3시간 전까지 출근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1시간30분이나 일찍 출근하라고…. 그렇다고 해서 딱히 할 일이 많은 것도 아니다.

나는 LG 배트걸이다. 하지만 LG 직원은 아니다. LG 구단과 용역계약을 맺은 이벤트 회사의 계약직이다. 경기에 흥을 돋우는 치어리더·북돌이(응원단의 북을 치는 사람) 등도 마찬가지다. 배트걸로 일한 지 올해로 2년째다. 지난해까지 야구 시즌에는 배트걸, 농구 시즌에는 치어리더를 했다. 그 전에는 KIA 치어리더를 했다. KIA 치어리더를 할 때는 KIA를 응원했지만 LG 배트걸을 하는 지금, 난 LG 팬이다.

LG와 두산의 플레이오프 1차전 아침. 일어나서 휴대전화를 보니 문자메시지가 어마어마하게 와 있다. 모두 친구들이 보낸 것이다.

“PO 1차전 표 좀 구해줄 수 없겠니”

“현아, 표 좀 구할 수 없을까?”

“나 야구장에 들여보내주라.”

“너는 돈 받으면서 경기도 보고 좋겠다.”

“미안, 나도 출입증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어!”

‘철없는 것들. ㅋㅋ.’ 서울 잠실운동장으로 가는 지하철에는 경기 시간이 꽤 남았는데도 LG 유니폼과 ‘빨검’ 유광 점퍼를 입은 사람들이 눈에 띈다. 저들은 예매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이겠지? 그들은 추석 귀향 열차표 구하기와 비견되는 플레이오프 표를 구하기 위해 검지가 닳도록 클릭질을 한 사람이고, 가을야구를 현장에서 보는 행운을 거머쥔 사람이다.

주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암표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었고 그마저도 없어 못 살 정도라고 한다. 나는 어찌 보면 ‘행운아’다. 남들은 돈 주고 경기를 보고 싶어도 못 보는데 나는 기자보다 가까이서 선수를 볼 수 있으니까. 배트걸의 자리는 가격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 값어치가 있다. 갑자기 쩌는 내 자부심.

PM 3:00. 잠실야구장 중앙문 옆에 등록카드(AD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는 천막이 설치돼 있었다. 야구 관계자들은 그 천막에서 신분을 확인한 뒤 카드를 받는다. 쉽게 말해 특별 출입증이다. 내가 받은 등록카드에는 ‘LG 트윈스 응원단 배트걸 김현’이라고 적혀 있고 일주일 전에 제출한 증명사진이 첨부돼 있었다. ‘배트걸이 응원단 소속이구나.’ 사소한 깨우침. 중앙문을 통해 들어가는데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이 경기 관람을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LG 트윈스가 11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대기실로 가는 도중 그라운드를 보니 선수들이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었다. 쌀쌀한 날씨지만 땀 흘리는 선수들을 보면서 진부한 문구지만 ‘노력해서 흘린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마음속으로 선수들에게 ‘파이팅’을 외치며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에는 이벤트팀 사람과 치어리더들이 모두 와 있었다. 다들 들뜬 모습이었다. 나는 서둘러 화장을 고치고 구내식당에 갔다. 경기를 하는 선수들만 힘들 것 같지만 매회 배트를 줍고 공을 조달하는 배트걸 역시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한다. 어느 글에서 봤는데, 배트걸은 한 경기당 10km를 뛴다고 한다. 그러니 오늘 하루 열심히 뛰기 위해 배를 든든히 채우는 것이 중요하다. 가을야구에 대비해 옷도 최대한 많이 껴입었다.

PM 5:30. 배트걸의 일은 경기 시작 30분 전부터 많아진다. 특히 플레이오프 때는 모든 일을 한국야구위원회(KBO)가 관리하기 때문에 배트걸이 앉는 의자 하나도 전부 운영본부의 허락을 받고 빌려와야 한다. 시합구도 평소와 다르게 상자째 가져다줘서 4개씩 들어 있는 야구공 비닐을 뜯어내느라 괜한 시간을 허비한다. 마운드에 투수들 로진도 가져다놓아야 하는데….

애국가가 울려퍼진다. 시끄럽던 야구장도 이때만큼은 숙연해진다. 지금 선수들은 오늘 잘할 수 있도록 하느님·예수님·부처님·알라 등 의지하고 싶은 모든 신에게 기도하겠지. 관중도 ‘내가 응원하는 팀이 꼭 이기게 해달라’고 비는 양 눈을 지그시 감는다. 관중의 환호성 속에 시구자가 등장한다. LG의 명예선수이자 열혈 팬인 배우 안재욱이다. 멋진 강속구 시구에 박수가 쏟아졌다. 내가 배트걸을 하면서 좋았던 점은 남자 연예인을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여자 연예인들이 시구를 하지만 얼마 전 대니얼 헤니가 나왔을 때는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내가 어디 가서 대니얼 헤니를 보겠어?

드디어 플레이오프 1차전 LG 대 두산의 경기를 알리는 플레이 신호가 떨어졌다. 양팀 모두 잠실야구장을 홈으로 쓰기 때문에 정규 시즌 성적이 좋은 LG가 1·2차전을 홈구장으로 쓰게 됐다. 정규리그 성적에 따른 어드밴티지다.

1회: 원정팀 더그아웃 앞에서 홈팀 응원

LG 선발투수는 류제국. 류 선수는 올해 입단해 친하지는 않지만 만날 때마다 웃으면서 인사를 받아준다. 초반부터 징조가 좋지 않다. 두산의 첫 타자 이종욱에게 3루타를 맞았다.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 기분이 좋을 때면 웃으면서 혀를 날름거리는데 무표정이다. 연타와 볼넷이 섞이면서 순식간에 2 대 0이 되었다. 두산 더그아웃은 시끌벅적 잔칫집 분위기다. 선수들끼리 하이파이브를 하며 좋아하다.

LG 1회말 공격. 1번 타자 박용택이 타석에 들어서자 관중석에서는 “왜 내 눈앞에 나타나~ 박용택! 네가 자꾸 나타나~ 박용택!” 하며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주제곡을 개사한 응원가를 부른다. 박용택 선수가 안타를 치고 나가고 ‘작은’ 이병규 선수가 초구 홈런을 때려 2 대 2 동점이 되었다.

나는 좋아서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쳤다. 아뿔싸! 항상 뒤늦게 깨닫는데, 나는 ‘3루 쪽 배트걸’이다. 홈팀이 점수를 내고 역전을 하더라도 속으로만 좋아해야 한다. 원정팀 옆에서 홈팀이 점수를 냈다고 좋아하면 눈치를 준다. 간혹 째려보는 선수들도 있다. 그래서 항상 눈치를 보며 좋아하는데 동점 홈런을 때렸을 때는 기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몸이 먼저 반응했다. 재빨리 무표정 모드. 그러나 속으로는 환호성을 질렀다.

공수 교대 때 응원 열기는 양팀 모두 장난이 아니다. 외야에는 큰 깃발들이 펄럭이고 응원단장의 신호에 맞춰 관중이 응원 도구를 들고 일사불란하게 응원을 한다. 3루 쪽 배트걸 자리에서는 원정팀 응원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1루 쪽 배트걸 자리에서는 홈팀 응원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그냥 웅웅거릴 뿐이다. 특히 오늘 같은 큰 게임에서는 더하다. 양쪽 모두 치열한 응원전을 하는 탓일 것이다. 오늘 두산 쪽 응원단은 확성기 소리를 너무 키워서 두 번이나 주의를 받았다.

2~6회: 심판들처럼 우리도 힘들어요

불꽃 튀는 1회를 치르고 몸이 풀려서인지 투수들의 제구력이 좋아졌다. 양팀 투수들은 페이스를 찾고 안정된 투구를 이어나갔다. 류제국 투수가 6회 투구수 문제로 이동현 투수로 교체됐다. 두산 노장 투수 노경은도 6회까지 호투다.

배트걸은 이닝이 끝나 공수 교대를 하거나 파울볼이 많아 주심에게 공이 떨어졌을 때 재빨리 공을 갖다줘야 한다. 잠실야구장은 타 구장과 달리 3루 쪽 배트걸이 심판에게 공을 갖다준다. 운영본부가 3루 쪽에 있다는 이유에서다. 오늘 주심인 최규원 심판원은 평소 상냥한 분이다. 내가 공을 가져다주면 웃음을 띠고 “고마워” 또는 “땡큐”라며 반겨준다. 잠실야구장에서는 이렇듯 3루 쪽 배트걸의 일이 많다. 그래서 1루 쪽 배트걸보다 아르바이트비가 조금 더 높다.

배트걸도 심판만큼이나 애로점이 많다. 쌀쌀한 가을야구 시즌에도 반바지를 입고 2~3시간을 버텨야 한다. 반바지를 입어야 한다고 명문화되지는 않았지만 다들 그렇게 하고 있다. 담당하는 팀이 공격할 때 무조건 서 있어야 하는 것도 힘들다. 우리 팀의 독특한 문화다. 화장실 문제는 말하면 입 아프다.

7회: 농치는 코치들, 으뜸은 이종범

두산 정수빈 타석 때 판정 문제가 불거졌다. 번트 자세를 취하다 배트를 어정쩡하게 거둬 스트라이크로 판정됐다. 두산 감독은 인정할 수 없다며 심판에게 항의했지만 이내 덤덤하게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오늘 LG 3루수 정성훈이 많이 긴장한 것 같다. 평소 같지 않게 실책이 잇따른다. 1회초에 이어 두 번째다. 수비 실책으로 3 대 2, 두산이 리드한다. LG 공격은 병살타가 나오면서 싱겁게 이닝을 마쳤다. 오늘따라 LG 타자들의 배트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람은 차가워졌다. 윗옷은 4벌이나 껴입어서 괜찮았지만 반바지를 입은 다리는 너무 추웠다. 핫팩을 2개나 챙겼지만 차가운 바람에는 무용지물이다. 두산 더그아웃을 보니 난로 주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순간 욱한다. 내가 좋아하는 팀이 지고 있는 것도 서러운데 저들은 난로까지. 하지만 이게 내 일인데 어쩌랴. 홀로 추위와 싸워야 한다.

잠실야구장에는 3루 쪽 배트걸 자리 뒤에 운영본부가 있다. 정수빈의 판정 문제처럼 상황이 모호할 때는 코치님들이 내 자리로 와서 리플레이를 본다. 어차피 홈런 판정 외에 판정이 번복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코치들은 리플레이만 확인하고 자리로 가지만 가끔 “네가 보기에는 저게 아웃 같으냐?”라고 물으며 장난치는 코치들도 있다. 난 원정팀 배트걸이지만 홈팀을 응원하기 때문에 대답을 회피하며 웃곤 한다.

원정팀 중 한화 이종범 코치는 가장 살가운 사람이다. 시합날이면 “밥은 먹었냐” “더워서 경기하기 싫지 않으냐”며 말을 걸어준다. 그의 전라도 사투리도 재미있다.

배트걸의 자리에서 보면 왼쪽 타자들이 잘 보인다. 박용택·이병규처럼 장거리 타자들의 타격 자세는 고니의 우아함과 독수리의 날카로움을 함께 지녔다. 한마디로 멋있다.

9회: 김현수 얄미워, 홍성흔 더 얄미워

두산 김재호가 2루타를 치면서 9회초가 시작됐다. LG는 마무리 투수 봉중근을 세웠다. 봉중근은 마운드에서 연습 피칭을 하고 뒤돌아서서 항상 기도를 한다. 봉중근 선수가 마운드에 오르자마자 LG 팬들의 함성 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함성 소리는 얼마 가지 않아 한숨으로 바뀌었다. 정수빈이 최고 마무리 투수에게 쐐기 타점을 얻었기 때문이다. 스코어는 4 대 2. 두산이 점수 차를 더 벌였다.

야구는 9회말 2아웃부터라고 누가 그랬는가? LG는 9회말에 세 타자가 연속 범타로 물러나면서 가을잔치 첫 경기를 허무하게 놓쳤다. 두산 선수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모두 그라운드로 뛰어나와 기쁨을 만끽했다.

10회: 내년에도 유광 점퍼 입게 해주세요

두산 더그아웃 분위기는 홍성흔이 주도한다. 과장된 액션으로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것이 그의 특기다. 신참 선수들은 주로 소리를 지르며 팀에 파이팅을 불어넣는다. 김현수 선수가 경기 전에 “오늘 날씨 되게 추워 경기하기 싫다”고 했는데 오늘 아주 잘해서 얄미웠다. 평소 플레이오프만 되면 저조한 성적으로 ‘민폐’를 끼치는데 오늘 5타수 2안타에 1타점으로 맹활약했다.

플레이오프 2차전 경기 전 김기태 감독님의 표정이 밝았다. 웃으며 인사를 해주고 가셨는데 오늘 왠지 예감이 좋다. 럼블피쉬의 <예감 좋은 날>이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오늘은 LG에 내리던 비가 그치고 맑은 하루가 되겠지.’ LG 투수 레다메스 리즈의 호투로 11년 만에 가을야구에서 첫 승을 일궈냈다. 팬들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LG트윈스 홈경기만 출근하기 때문에 아쉽게도 3·4차전 두산 홈경기(참고로 두산은 배트걸이 아닌 볼보이가 있다) 때는 TV로 중계를 볼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는 마음껏 소리치며 볼 수 있어서 좋았지만 아쉽게도 모두 지고 말았다. 눈물이 났다. 올해 배트걸 활동도 그렇게 끝났다.

‘2014년에도 유광 점퍼 꼭 입혀주세요. 파이팅!’

글 김현 LG 트윈스 배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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