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1.04 13:48 수정 : 2014.01.07 10:36

나는 노들야학에서 문해교육과 초등과정을 가르치는 ‘청솔반’을 맡아왔다. 청솔반 학생들은 상급반 학생들보다 유난히 열심인데, 초등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장애인의 열악한 교육 현실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노들장애인야간학교 제공
누군가는 내게 “야학을 설립하느라 고생 많이 하셨어요”라고 말을 던지기도 한다. 그것은 교장이라는 직책이 주는 오해이고 편견이다. 노들장애인야학(이하 노들야학)은 장애인운동을 현장 투쟁 중심으로 풀어보려는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이하 장청)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다.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운동을 하는 곳이 많지만 장애인운동을 지향하는 가치와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장청은 다양한 장애인운동의 족보에서 가장 왼쪽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투쟁하는 조직이었다. 그래서 인원도 재정도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장청이 지역 대중사업의 하나로 지역에서 장애인을 만나고 조직하기 위해, 제도 교육을 받지 못한 장애인을 위한 교육 사업으로 시작한 것이 노들야학이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93년 8월8일의 일이다.

나는 2009년 2학기부터 노들야학에서 학과 수업을 다시 시작했다. 나는 노들야학 활동에 발을 들여놓은 1994년부터 수업을 하기 시작해 2003년까지 하다가 그만두었다. 노들야학 내부 일보다 장애인운동의 전반적인 일에 바빠지다보니 수업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약 10년 동안 노들야학 학과 수업을 하다가 6년 쉬고 다시 수업을 시작한 셈이다.

내가 맡은 수업은 청솔1반의 국어2반 수업이었다. 노들야학에는 반이 3개 있다. 문해교육과 초등과정을 가르치는 ‘청솔반’, 중등과정의 ‘불수레반’, 고등과정의 ‘한소리반’으로 나뉜다. 각각의 반 이름은 노들야학을 시작할 때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지은 것이었다.

내 수업은 월요일 1·2교시와 금요일 3·4교시다. 일주일에 두 번, 모두 4시간의 수업을 준비하고 그 시간을 감당하는 것은 노들야학 내 여러 가지 일들과 시도 때도 없이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내 일정을 생각하면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다보니 내가 수업하는 것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과연 ‘빵꾸’ 내지 않고 잘할 수 있을지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지금 장애인운동의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데 수업을 맡겠다고 하느냐”며 “후진기어를 넣고 뒷걸음치려 한다”고 질타하기도 했다.

물론 나도 수업을 빼먹지 않고 잘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노들야학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워낙 다양하다보니 가끔은 시간 조정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온갖 의심과 불안 속에서 나는 수업을 다시 시작했다. 당시 수업할 교사가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야기하면 수업을 다시 맡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시간적으로 많은 부담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노들야학 활동을 처음 시작할 때의 두근거리는 마음을 새롭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업 현장에서 학생들과 직접 소통하며 만나는 시간이 어쩌면 관성에 젖어 있을지 모르는 내 생활에 새로운 힘이 될 거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그것도 잘 맞아떨어졌다.

나와 청솔반은 매우 인연이 깊다. 노들야학 초기에도 주로 청솔반 수업을 했기 때문이다. 한소리반(대입 검정고시)은 내 실력으로는 가르치지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에 교사회의에서 나에게 한소리반 수업을 맡으라는 얘기는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주로 청솔반에서 초등학교 과정의 국어, 산수, 도덕 등의 수업을 맡았다.

그런데 지금 노들야학에서 청솔반은 막강한 인원과 ‘열공’(열심히 공부하기)을 자랑한다. 출석률도 최고다. 노들야학 초창기 청솔반 수업에 나오는 학생은 한두 명이 고작이었다. 그러다보니 학생 한 명을 붙잡고 국어와 수 개념 수준의 산수를 가르치는 식이었다. 당시 청솔반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한 교사도 있었다. 교사가 부족한 마당에 학생도 없는 청솔반을 폐지하고, 대신 한정된 인력으로 불수레반(고입 검정고시반)과 한소리반에 집중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나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학생이 없더라도 초등과정을 폐쇄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했다.

당시에는 활동보조인 제도도 없고, 장애인 콜택시도 없었다. 게다가 노들야학 승합차도 없었기에 학생들의 이동이 큰 문제였다. 이동을 지원할 수 없다보니 중증장애인이 노들야학에서 수업을 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야학에 나오고 싶은데 이동을 지원해주는지 물어오는 중증장애인이 있으면 ‘알아서 나와야 한다’고 할 때가 가장 마음이 쓰렸다. 이처럼 이동이 힘들다보니 청솔반에서 공부해야 할 사람들이 못 나오고 있을 뿐, 학생 수요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여러 가지 이유로 노들야학 초기에는 청솔반이 활성화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확신은 있었다. 앞으로 노들야학에서 가장 활성화될 수 있는 반이 청솔반이라는 것을. 장애인 실태 조사에서도 장애인의 50% 가까이가 초등학교 교육을 겨우 받은 학력이었다. 그래서 청솔반 폐지를 반대했던 것이다. 내 생각은 맞았다. 그 결과 지금 노들에서 가장 막강한 반이 바로 청솔반이다.

청솔1반 국어2반. 청솔반은 수준에 따라 1반과 2반으로 나뉜다. 그리고 과목별로 수준에 따라 또 1반과 2반으로 나뉜다. 청솔1반 국어2반 학생들은 그래도 읽고 쓸 수 있는 실력을 갖고 있다. 2009년 다시 노들야학 수업을 시작했을 때 청솔반에는 선심, 동훈, 준수, 진평, 기옥, 대영이 있었다.

다들 독특한 개성을 자랑하는 학생들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대영은 수업에 잘 나오지 않았다. 특히 날씨가 추우면 나오지 않았는데, 추운 겨울에 밖으로 다니면 병에 걸리기 쉽다는 이상야릇한 강박을 갖고 있었다.

준수는 문자메시지를 가장 잘 보내는 학생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문자로 물어보고, 내 문자에도 답을 잘 주었다. 수업 시간에도 모범적이었다.

동훈도 준수와 마찬가지로 모범 학생이었다. 낮에는 어머니 가게 일을 도와주고 밤에 공부하러 오는, 글자 그대로 주경야독의 모범을 보였다.

선심은 노들야학에서 ‘여사’로 불렸는데 수업 시간에 활동보조가 필요할 정도로 장애가 심했다. 그래도 수 개념은 청솔1반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런데 국어 시간에 읽기를 시키면 목소리가 줄어들어 언제나 큰 목소리로 읽으라고 핀잔을 줘야 했다.

기옥은 시설에서 살다가 ‘탈출’해서 평원재에 살고 있던 신입생이었다. 평원재는 2001년부터 노들야학이 재정적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 노들야학 운영을 후원하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던 사회복지법인 평원재단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자립주택의 이름이다. 평원재단은 서울에서도 장애인 생활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체험홈과 장애인 자립주택이 제도화되지 않았던 2009년부터 장애인 생활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생활할 의지가 있는 중증장애인에게 장애인 자립주택을 제공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기옥은 평원재에 살게 된 첫 번째 행운아였다. 나를 포함해 교실에서 나이가 가장 많아 ‘왕언니’로 통했는데, 농땡이가 만만치 않았다. 수업 시간에는 도대체 집중을 하지 않았고, 교재도 늘 엉뚱한 쪽을 펴놓고 있어 꼭 찾아줘야 했다. 게다가 문자를 보낼 수 있는 실력이 되는데 노력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진평은 말이 별로 없는 학생인데, 결석을 자주 했고 문자를 보내도 잘 ‘씹’었다.

그래도 청솔1반 국어2반 학생들은 노들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열공적이었다. 이를 두고 내가 수업을 잘한 덕분에 나타난 결과라고 자랑했더니, 안소진 선생님이 “원래 그 반 학생들은 청솔반을 거의 전담하는 류승화 선생님 때도 그랬고, 노들에서 가장 열심히 하는 반이에요”라며 나의 자만을 일거에 꺾어버렸다. 슬펐다. 안소진은 특수교사가 되려고 특수교육학과를 나왔으면서도 “제도권 내의 특수교사보다 더 좋다”며 노들야학에서 열심히 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열공은 ‘열심히 공부한다’의 준말이다. 청솔반 학생들은 참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농땡이를 치는 학생도 가끔 있었지만 대부분 시간도 잘 지키고 수업 도중에는 눈에 불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열공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였을까? 청솔반 학생들이 늦은 나이에 열심히 공부해서 불수레반과 한소리반으로 진급하고, 그래서 서울대에 갈 거라는 희망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것이 ‘희망’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국어2반 교사로서 나름대로 열공의 소박한 수업 방향과 목표는 있었다. 청솔반 학생들은 모두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어서 수업에 빠지지 말라고 독려하고 또 집회에 참석하자거나 같이 밥 먹자는 따위의 일정을 알리는 데 단체 문자메시지를 많이 보냈다. 그런데 꼬박꼬박 답장을 보내준 사람은 준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나는 모두가 꼭 휴대전화로 답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실력을 갖추게 만드는 걸 당시 내 절체절명의 학습목표로 세웠다. 서울대에 갈 거라는 미래보다 지금 당장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낼 줄 알게 하는 것이 열공의 목표였던 거다.

열공은 수업에만 있지 않다. 같이 밥 먹고, 수업을 준비하고, 모두 똘똘 뭉쳐 집회나 야학 행사에 참여하고, 서로를 돌아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 등 모든 활동이 열공의 범위에 들어간다. 그런 점에서 청솔1반 국어2반은 최고의 열공 수준이었지만 좀더 단련하고 노력해야 할 부분도 있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청솔1 국어2 열공반은 행복했고, 다시 수업하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