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1.04 13:44 수정 : 2014.01.07 10:36

지난 10월23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마로니에공원에서 장애인 스포츠인 보치아 전국대회가 열려, 정세균 민주당 의원(맨 왼쪽)과 김영종 종로구청장(가운데)이 시구를 하고 있다. 이 대회를 야외에서 연 것은 장애인이 ‘보이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박경석 교장의 신념과 닿아 있다.한겨레 박승화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을 만들어낸다. 보이는 것을 ‘정상적인 것’이라 믿고, 이 믿음에 근거해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이를테면 상식이다. 그러나 상식은 이미 그렇게 비상식적인 것을 지워버린 뒤에 가능하다. 이번 인터뷰에 담은 이는 바로 이 문제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분이다. 평소에 나는 그의 글을 열심히 읽었다. 우연히 발견한 뒤로 그의 이름 석 자가 박힌 글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글은 날카롭게, 말은 구수하게

노들장애인야간학교(이하 노들야학)의 박경석 교장이 그 주인공이다. 대체로 글로 만난 이들은 실제 만났을 때 ‘다른 풍모’를 보여주곤 하는데, 박 교장도 그랬다. 지적이고 날카로운 글과 달리, 그의 말들은 구수하게 경험과 성찰을 곁들여서 듣는 이를 들었다 놓았다 했다. 인터뷰를 하러 와서 한참 동안 그가 펼쳐 보이는 말의 향연에 노닐다가 온 느낌이었다. 나에게 그는 단순한 ‘장애인 인권운동가’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글을 토대로 평가하건대 그야말로 장애인 문제를 장애인의 범주에 머물러 있지 않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가 주로 비판한 것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는 ‘시혜정책’이었다. 흥미롭게도 그는 장애인을 돕는 봉사활동마저 ‘시혜정책’의 일종이고, 결과적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강화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내가 매료된 부분도 바로 이런 관점이었다. 박 교장이 언급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세상을 능력에 따라 분할해서 몫을 부여하는 공동체의 규범이다. 이 규범에 따르면 장애인은 비장애인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특별한 존재다. 얼핏 생각하면 이런 규정이야말로 장애인을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비장애인과 장애인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차이를 절대화하는 거라고 볼 수 있다.

박 교장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문제 삼는 것은 “장애인을 평가하고 선별적으로 복지를 적용하는 정상의 잣대”다. 장애인 등급 자체가 정상인의 범주에 맞춰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얼마나 활동력을 갖는지에 따라서 장애인을 평가해 복지 혜택을 차별화하는 것은 장애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장애인은 모두 같은 처지로 보고 동일한 복지 혜택을 줘야 한다는 것일까. 가만히 들어보니, 주장의 핵심은 이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반복해서 ‘세상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장애인 문제는 세상이 바뀌어야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장애인 문제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모순의 하나라는 의미였다. 장애인 문제를 수동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세상을 어떻게 바꿔나가야 할지 알려주는 바로미터 같은 거라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중심이 확 달라지는 셈이다. 장애인 문제가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순간이동을 하게 되는 순간이다. 장애인 문제를 복지로 축소해서 고찰하는 이들에게 이런 인식은 전혀 다른 관점을 요구한다.

1980년대부터 한국 사회에 만연했던 태도 중 하나가 주요 모순과 주변 모순을 가르고, 전자를 중심으로 운동의 중요성을 평가하는 방식이었다. 민족모순이 중심이냐 계급모순이 중심이냐 왈가왈부했던 논쟁의 유산이라고 할 법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의회정치 같은 ‘중앙정치’를 바꾸는 것이 여성이나 환경, 또는 장애인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보다 더 중요했다. 그래서 노동운동 내에서 여성 차별 문제가 불거질 때면, ‘적전분열’이라는 선정적 용어까지 동원해서 원인을 은폐하려는 태도가 공공연했다. 지금도 이런 생각은 크게 달라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정권 교체를 이루면 모든 것이 달라질 거라는 믿음이 팽배한 것도 사실이고, 지난 선거의 경험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국의 보수주의는 이런 한계를 적절하게 활용해서 국가라는 환상에 대중의 운동을 효과적으로 관리해왔다.

종로 한복판에 야학… ‘나타나는 장애인’

박경석 교장의 발언은 거침없었다. 장애인 스스로도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수동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 확실히 미묘한 문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이는 이중적 측면을 갖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구별되면서 존재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장애인은 비장애인에게 평등을 요구할 수 있다. 이 평등은 모순적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장애인도 주장하는 그 상황에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평등의 불균형성을 어떤 현실적 대책으로 보완한다고 해서 장애인 문제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장애인 지원 대책이랍시고 내놓은 것이 사실은 독이 되는 경우가 많죠.” 그의 비판은 전방위적이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 복지정책의 일환으로 도입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대표적으로 장애인 정책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것이다. 장애인을 자녀로 둔 비정규직 노동자의 경우 자신이 소득원으로 분류되는 바람에 그 자녀는 기초소득생활수급권자로 지정받지 못하는 역설이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국가가 해결해야 할 장애인 복지를 가족에게 떠넘겨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 박 교장의 생각이었다.

그의 문제의식은 국가정책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장애인 비하 분위기에 대해 일침을 놓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 만연해 있는 장애인을 빗댄 조롱의 표현에 대해서도 그는 가리지 않고 촌철살인을 날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발달장애’ 같은 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이나, 장애인을 함부로 일컫는 ‘병신’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물론 당사자는 이런 표현을 장애인을 비하하는 의도 없이 사용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뿌리 깊게 드리운 장애인 차별 의식이 이른바 상식의 저변에 깔려 있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는 지적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그에게 장애인 문제는 곧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장애인을 위한 정책조차 실제 차별을 전제로 일상의 공간에서 ‘비정상적인 것’을 추방해버리는 데 일익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광기를 합리성의 명목으로 지워버리려 했던 근대의 기획이 장애인 정책의 근간에 깔려 있다는 것은 여러 학자들이 문제제기하는 지점이다. 박 교장은 이에 대해 이론적 통찰 못지않게 실천적 차원에서 체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왜 비싼 곳에 노들야학을 두는지 묻곤 하는데, 이렇게 서울의 중심인 종로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말하자면, 이런 생각은 장애인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두려는 ‘정상적인 것’의 범주에 대한 적절한 딴죽이라고 할 수 있겠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려는 세상에 대해 박 교장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장애인’을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나타나지 않으면 인식하지 못한다. 장애인에 대한 특별 대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장애인도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장애인 차별을 없애는 일이라고 박 교장은 말한다. “비장애인이 한 달에 4번 외출하는 경우가 있어요? 장애인은 그럽니다. 그것도 자원봉사자가 도와줘야 그럴 수 있죠.” 박 교장의 논리는 철학적이었다. 자원봉사 같은 대책으로는 장애인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애인의 일상생활이 가능한 사회가 되면 문제될 것이 없다. 장애인 인권 문제가 사회변혁의 문제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특수한 문제가 곧 보편적인 차원으로 전환되는 어떤 지점을 박 교장은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장애인 문제가 장애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체의 문제로 확대되는 것이 이를 통해 가능하다. 장애인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면 비장애인도 훨씬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서 장애인 문제는 과거 마르크스가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해방을 통해 사회 구성원 전체를 해방시키는 노동계급의 존재론으로 드러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이야말로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박 교장의 공적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인이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거나 복지를 통해 공리주의적 해결책을 도모하지 않고, 근본적인 평등·자유에 대한 이념을 통해 장애인이라는 존재 자체를 사회변혁 차원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박 교장의 철학이 터를 잡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스스로 각성… 장애 속에 숨지 마라

어떤 사회에서 보장받는 자유의 수준을 가늠하려면, 그 사회에서 가장 미약한 존재들에게 허락된 자유를 살피면 될 것이다. 가장 미약한 존재들에게도 확실한 자유의 권리가 보장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사회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일 테다. 박경석 교장의 주장도 이런 문제에 가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장애인의 활동권 보장이야말로 그 사회가 어떤 곳인지 정확하게 보여주는 척도 같은 것이라는 의미. 물론 이 사안은 사회라는 두루뭉술한 비인격적인 대상에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 없게 한다. 누가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사회를 바꿀 것인가.

인터뷰하기 위해 그를 기다리는 동안, 장애인 보치아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박 교장은 거기에서 개막연설을 하는 중이었다. “이렇게 아침 일찍 모이시는 것에 놀랐습니다.” 의례적인 인사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보니 박 교장은 장애인 당사자들의 각성도 촉구해야 한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장애인도 내부적으로 천차만별인데, 단결을 요청하면 각자의 차이를 내세워서 장애 속으로 숨어버린다는 말이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이 배어나는 발언이었다. 듣고 보니, 보치아 대회에서 그가 한 연설은 의미심장했다. 정치적 권리를 찾기 위해 집회를 하면 잘 모이지 않는 장애인이 보치아 대회 같은 행사에는 쉽게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장애인 인권운동이 대중성을 띠기 위해 장애인의 요구사항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박 교장은 다른 의미에서 이 문제를 파악하는 것 같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장애인의 의식 변화였다. 주체의 변화가 우선해야 장애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동도 장애인 스스로 조직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장애인 당사자들이 가만히 있으면 누구도 나서서 장애인을 도와주지는 않을 것이다. 서글픈 이야기이지만 사실 아닌가. 2005년 활동보조 서비스 논의가 일어난 배경도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수도관이 터져서 중증장애인이 얼어 죽은 비극적인 사고 때문에 논의가 시작됐지만 과정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시민의 반응도 싸늘했다. 장애인에게 비서까지 대줘야 하는지 묻는 태도에서 장애인 문제에 대한 편견을 읽을 수 있었다. 이런 인식의 변화 없이 장애인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수립하기 어려운 까닭이었다.

장애인 학생 한 명을 위해 학교 건물 전체를 개·보수했다는 어떤 미국 대학의 미담 같은 경우는 한국에서 여전히 요원한 현실이다. 이 조건에서 박경석 교장을 비롯한 장애인 활동가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감춰진 장애인의 존재를 대낮에 현시시키는 것이다. 이들의 문제제기가 있기에 그나마 장애인 권리는 상당한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 이전까지 장애인 대부분은 외출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아예 집에서 나오지 못하는 장애인이 태반이었다. 엄연히 사회를 구성하는 일원이자, 국민의 권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장애인은 적절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장애인을 집안에 가둬놓고 이 사회는 정상적인 것처럼 돌아갔다. 히틀러와 나치는 장애인을 아예 사회에서 제거해버리려고 했다. 유대인만 아우슈비츠에 보낸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장애인이 인종 개량이라는 명목으로 고통을 받았다. 유전공학과 권력이 만나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바탕으로 잘못된 정책을 수립했던 것이다. 장애인을 비롯한 비정상적인 것을 시선에서 사라지게 만들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했다는 것도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근대의 기획은 이처럼 항상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재현하지 않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세상을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으로 분할했다.

“장애인이라는 말조차 낙인효과가 있다”고 말하는 박경석 교장. 그는 일상적으로 장애인을 비하하는 표현을 정치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사적인 장소에서 장애인 비하 표현을 쓸 수도 있겠지만, 공적인 장소에서 이런 표현을 마구 사용하는 것은 본래의 의도와 무관하게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감추기에 급급한 것이 대세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장애인을 비하해서 지칭하는 표현에 대해 말꼬투리를 잡는 것도 이른바 상식의 폭력성을 환기시키는 데 효과가 있을 듯하다. 가장 많이 소외된 이들이 가장 많은 진실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명제다. 물론 그 인식의 결과가 어떤 방식으로 표출될 수 있을지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하튼 장애인이기 때문에 비장애인이라면 보거나 느낄 수 없는 것을 인지하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서로 다른 시선이 모여서 사안에 대한 훨씬 더 총체적인 인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운동은 몸의 전쟁터

박경석 교장이 제시하는 여러 가지 사례를 듣고 있다보니 이런 확신에 점점 더 다가갔다. 보치아 대회에서 장애 정도가 중요하지 않듯이, 장애인도 각자 다른 처지를 극복하고 보편적인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박 교장에게 장애인운동은 단순하게 복지 확대를 요구하는 캠페인 같은 것이 아니다. 그에게 장애인운동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집약하고 있는 몸의 전쟁터이다. 복지가 곧바로 계급투쟁이라고 보기 어렵지만, 장애인운동은 근본적인 계급투쟁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 의미에서 보더라도 그렇다. 노동운동이 노사협상을 위해 사 쪽과 밀고 당기기를 하는 것과 달리, 장애인운동은 곧바로 국가에 권리를 요구한다.

장애인운동이 노동운동보다 훨씬 더 첨예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단순하게 경쟁에 뒤처지는 장애인에게 혜택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경쟁 구도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 박 교장의 생각이었다. 한마디로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라는 것이다. 급진적인 주장이다. 장애인의 몸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를 거부한다. 자본주의적 인간이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다. 오히려 생산성에 장애를 초래한다. 장애의 몸으로 장애인은 자본주의를 고장낸다. 성장제일주의를 내적 이데올로기로 동기화하는 한국에서 용납하기 어려운 요구임이 틀림없다.

히틀러가 장애인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은 겉으로 인종우월주의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동시에 장애인이 생산성 향상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히틀러 같은 파시스트의 입장에서 장애인은 사회의 건강성을 해치는 암적 존재일 뿐이다.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장애인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배제하고 추방하는 것이 과거의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박경석 교장이 지향하는 것은 이처럼 이 사회가 배제하고 추방했다고 생각하는 장애인을 생생하게 현전시키는 것이다. 서울 동숭동 마로니에공원에 장애인들이 서성이게 함으로써, 장애인은 비장애인을 바라보고,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알아본다. 둘의 관계가 처음에는 어색하겠지만 차차 익숙해질 것이고, 이를 통해 다른 세상에 대한 생각이 공유될 수 있다.

너무 낭만적인 생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동안 장애인을 방치하거나 아니면 시혜적 대책으로 미봉하려고 했던 다양한 시도들보다 일상과 장애인을 만나게 해야 한다는 당위는 훨씬 설득력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박경석 교장은 ‘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대표직을 맡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가끔 이 단체가 ‘장애인철폐연대’로 소개된다고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차별 철폐이지 장애인 철폐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웃음을 날리는 그의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무심코 저지른 실수이겠지만, 그만큼 우리에게 ‘장애인’과 ‘차별’이라는 말이 쉽게 조합을 이루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니들을 등급으로 나누면 좋겠니?

장애인은 원칙적으로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다르게 대하더라도 ‘차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장애인을 등급으로 나눠서 혜택에 차별을 두는 것에 대해 ‘반인권적’이라고 질타했다. 실제로 등급 기준이 무엇이겠는가. 말할 것도 없이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정상성과 비정상성으로 나눠 등급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런 기준 설정 자체가 장애인 차별에 대한 인식의 부재를 보여준다는 것.

박경석 교장의 지적에 따르면, 장애인을 등급으로 나누는 것이야말로 장애인 낙인화의 원인이다. 비장애인을 그렇게 등급으로 나눈다면 올더스 헉슬리나 조지 오웰이 묘사한 그 디스토피아적인 전체주의 사회라고 금방 비난받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을 등급에 따라 분류하는 데 문제의식을 느끼는 이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모순이 첨예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거침없이 출현할 수 있는 것일까. 장애에 대한 규정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근대적인 생명정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건강 담론이 대세를 이루고 몸짱·얼짱 신드롬이 휩쓸고 지나가는 이 생명정치의 시대에, 장애인은 본받지 말아야 할 몸의 상징일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적인 문화에서도 장애인은 비하의 표현으로 남용되고 있다. 특히 아시아처럼 사회진화론이 진보사상의 핵심 기제로 작동하는 곳에서 장애인은 부차적이거나 또는 주변적인 존재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다. 구조적 차원에서 낙인효과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조건을 고려하면, 아무리 장애인 복지를 강화해도, 역설적으로 장애인에게 너무 과한 혜택을 준다고 불만을 갖는 이도 있을 것 같다. 사태가 이렇게 되면 장애인조차 자신에게 주어진 혜택을 위해 장애인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마치 세대갈등이 계급갈등을 대체한 것이 오늘날 ‘일베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장애인 문제가 정체성 정치로 흘러가버린다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고 히틀러 같은 관점이 득세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재특회(일본의 반한 우익 단체)와 한국의 일베(인터넷 사이트 ‘일간베스트저장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관점이 이것이다. 사회의 약소자를 지칭해서 세금을 빼앗아가는 쓸모없는 존재라고 낙인찍는 것이 특징인데, 장애인 역시 잘못된 편견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위험성을 감안한다면 박경석 교장이 주장하는 내용은 장애인운동의 정치화를 위해 필수적이라는 생각이다. 정치화하지 않는 운동은 과거의 광주항쟁처럼 반대편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빌미로 작용할 수 있다. 광주를 민주화운동으로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관제성이 강화됐고, 결과적으로 이 때문에 광주의 유산이 기득권처럼 비치게 된 것이다. 보수는 이 지점을 파고들어 민주화운동 내로 포섭하지 못한 광주의 진실을 문제 삼아 선동했고, 이런 선동이 세대론과 결합하면서 광주에 대한 인식을 흔들어놓은 것이다. 정치화의 맥락을 잃어버렸을 때, 운동은 동력을 상실하게 마련이다.

박경석 교장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장애인운동을 대표하는 누구라기보다 지금 현재 최전선에 서 있는 활동가 중 한 명이었다. 그에게 장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과거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 자신과 지금 박경석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지금 박경석은 장애인운동을 밀고 나가는 ‘주체’였다. 그야말로 장애인이라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사회에서 자신의 몫을 주장하는 당사자였다. 장애인이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치를 포기한다면, 그 결과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분할해서 배제하려는 이 사회의 규범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도리밖에 없을 것이다.

장애인 문제 정치화한 장본인

도대체 궁금했다. 이 일을 왜 하게 되었는지. 그를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었던 말이다. 그의 말이 걸작이었다. “줄을 잘못 섰죠.” 사실 이런 말은 나도 익숙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내가 우문을 던진 셈이다. 나보다 박경석 교장이 훨씬 더 절박하지 않았을까. 그에게 정치가 없다면 그는 없는 존재일 것 같았다. “그냥 죽고 싶다는 마음에 몇 년 동안 집 안에만 있었어요.” 웃음을 섞으며 자기가 겪은 심경을 이야기하는 그의 표정에서 어떤 절박성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언뜻 비치는 말투에서 그가 넘어와야 했을 고단한 시간들이 번개처럼 드러나기도 했다. 여하튼, 그가 걸어온 길은 우연이었을지 몰라도, 지금 하는 일은 필연의 결과일 것이다. 장애인 문제를 복지라는 틀에 가두지 않고 정치라는 차원으로 끌어올린 그의 노력은 분명 귀감을 주는 것이다. 물론 그의 말대로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하겠다. 그러나 어떤 특정 체제가 끝나고 다른 체제가 오려면, 지금부터 그것에 대한 전망이 그려져야 할 것이다. 분명한 점은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장애인을 빼놓고 다른 체제에 대한 논의를 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이다. 노들야학에서 배우고 가르치며 이미 그는 그 논의의 씨앗을 조금씩 키워가고 있었다.

글 이택광 영국 셰필드대학 문화학 박사. 경희대 영미어학부 교수. 다양한 문화 분석을 통해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코드를 찾아내는 작업을 한다. 저서로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한국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인상파, 파리를 그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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