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1.04 13:39 수정 : 2013.11.04 13:39

박경석 노들장애인야간학교 교장은 장애인에 대한 ‘시혜’를 거부하고 ‘권리’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그의 휠체어를 뒤에서 밀어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연대이자 후원”이라고 답한다. 그가 “나를 불쌍히 여겨서 노들야학을 후원해달라”고 말하며 크게 웃는다.한겨레 박승화
서울 동숭동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는 장애인 스포츠인 보치아의 전국 대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노들장애인야학의 박경석 교장이 선수들 앞에서 축사를 했다. “집회하면 항상 늦으시면서 오늘은 시간에 맞춰 다 오셨군요. 왜 집회에 늦었느냐 물었을 때 장애인의 속도를 존중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뭐 집회도 운동이고 스포츠도 운동이니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공원 가득 웃음이 터졌다. 정세균 민주당 의원, 김영종 종로구청장의 시구가 이어졌다. 야학 건물로 걸어가면서 박경석 교장은 왜 시구를 안 했는지 물었다. “그런 거야 돈 주는 분들이나 하는 거죠. 돈 받는 입장에서 무슨 시구예요.”

그의 언어는 당당했다. 세련된 유머감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휠체어를 밀어 경사를 오르느라 허리는 살짝 굽어 있었지만 세계관은 조금도 위축된 낌새가 없었다. 그는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혜와 동정의 시각을 거부한다고 누누이 말해왔다. 그래서 솔직히 말할 것이다. 그는 인터뷰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았다. 우리를 30분이나 기다리게 했다. 그것은 존중해야 할 장애인의 속도가 아니라 그냥 무례하게 늦는 자의 속도였다. 그는 나타나서도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불의의 사고로 척추를 다치기 전에도 약속 시간을 잘 지키지 않았다고 한다.

-보치아는 어떤 스포츠인가.

박경석 - 장애인도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정도의 다른 스포츠와 달리 뇌병변을 가진 중증장애인이 주가 되는 운동 종목입니다. 목표 지점까지 공을 가장 가깝게 굴리면 이기는 거고요. 손을 못 쓰는 뇌병변 장애인은 입으로 겨냥해서 공을 굴립니다.

-장애 정도에 따라 급수를 매기는 장애인등급제 폐지 운동을 하고 있지 않나. 장애 정도가 장애인 스포츠 참가 자격에 반영된다면 모순이 아닌가.

박경석 - 우리는 장애인을 평가해 선별적으로 복지를 적용하는 정상의 잣대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보치아에서는 장애가 심하다고 점수를 더 주지 않습니다.

-하하. 스포츠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다.

박경석 - 스포츠는 모든 사람에게 의미가 있지요. 그런데 대부분 종목이 비장애인 중심으로 활성화돼 있어요. 어떤 운동이 각광받는다는 건 그만큼 자본이 투여됐다는 뜻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오늘 대회 시작이 오전 10시였는데 정말 많이 모인 겁니다. 11시에 집회한다고 하면 활동보조인을 기다려서 세수하고 옷 입어야 하는데 어떻게 그 시간에 맞추냐고 항의해요. “장애인의 속도를 고려하지 않는 집행부는 각성하라!” 딱 한 번 약속 시간이 아침 9시였는데 7시에 모여서 전화로 빨리 오라고 저를 재촉한 적이 있어요.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일정이라 KTX를 처음 타보는 사람들이 흥분했던 거지요.

-날도 추운데 왜 실내체육관이 아니라 마로니에공원에서 대회를 열었나.

박경석 -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공간이라는 데 의미가 있지요. 노들장애인야학이 대학로 한복판 마로니에공원 앞에 위치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장애인 인식 개선 사업이란 게 있었어요. 장애인을 바깥에 나들이시켜주는 거였죠. 시혜의 프로그램이죠. 그런데 야학이 마로니에공원에 있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연인들의 키스도 실컷 구경할 수 있고요. 영화로 보는 거랑은 많이 다르거든요.

-대학 재학 중이던 1980년에 해병대에 들어갔다. 서울의 봄에서 광주항쟁 사이의 격동기에 대학을 다닌 셈이다. 돌은 안 들었는가.

박경석 - 저는 인생의 즐거움을 절체절명으로 추구하는 사람이었어요. 배 타는 선원이 꿈이었고 서른 살까지만 잘 놀다 사고로 죽었으면 했지요. 정치·사회적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무관심했죠. 돌을 들어본 적은 있어요. 여자친구가 대학에서 경찰에 포위당했다길래 구하러 간 거였죠. 그리고 당시 대학가에서 군사훈련 거부 투쟁이 있었어요. 저는 훈련소에서 교관에게 구타당하다가 못 참고 맞싸움을 벌였을 뿐인데 징집 거부자로 분류됐어요.

-왜 하필 해병대에 지원했는가.

박경석 - 복무 기간이 짧아서. ‘가오’가 살아서. 당시엔 정치적 성향이랄 것도 없었고 해병대 생활도 개판이었습니다. 상관을 폭행했다가 영창에 들어가기도 했지요. 요즘도 동기들을 만나면 절 꼴통이라고 불러요.

-요즘도 해병대 동기들을 만나는가.

박경석 - 자주는 아니고 가끔 봅니다. 예전에 집회에 나갔다가 해병대 전우회와 마주쳤어요. “야, 여기 무슨 일이냐?” 물었더니, 참여연대에 똥물을 퍼붓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자랑하더군요.

-전역 뒤 행글라이더 추락 사고로 허리를 다쳤다. 괜찮다면 그날 일에 대해 자세히 들어볼 수 있을까.

박경석 - 저는 해병대에서도 수색대에 지원했어요. 멋지게 살다 죽고 싶었죠. 거기에서 스킨스쿠버, 수영, 낙하산 등 놀거리의 기반을 축적했습니다. 전역하고서는 대학교 행글라이더 동아리에 들어갔어요. 대학 선수권 대회가 열렸고, 후배여서 저는 산 위까지 행글라이더를 들고 올라가야 했어요. 다시 들고 내려가기 귀찮아 그냥 타고 내려가려 했죠. 그리고 떨어졌어요. 일어나보니 병원이었어요. 가슴 밑으로 무겁다는 감각은 느꼈는데 금방 돌아올 거라고 믿었어요. 그 감각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가족도 희망을 잃지 않았고요. 사고 뒤 3개월쯤 지나 의사에게 물었어요. “혹시 저는 못 걷습니까?” 의사가 되물었어요. “솔직한 말을 듣고 싶습니까?” 그때 제가 다시 걸을 수 없다는 걸 알았죠.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박경석은 ‘젊어서 놀다 죽자, 멋지게 살다 죽자’가 젊은 날의 신념이었다고 말했다. 그 극단적인 신념이 결국 사고의 원인이 됐고, 죽음 대신 지금의 전혀 다른 삶이 주어진 게 아닐까? 사고를 당한 1983년부터 88년까지 박경석의 삶은 모든 기록에서 비어 있다. 그의 삶 자체가 비어 있던 시기다. 그는 20대 중반의 5년을 방 안에 틀어박혀 보냈다.

박경석 - 장애를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였어요. 첫사랑을 떠나보냈죠. 집구석에서 애국가부터 애국가까지 하루 종일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는 게 생활의 전부였어요. 어머니가 말씀하셨죠. 현실에선 이렇게 살아도 죽어서 천당은 가야 한다.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죠. 처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바깥에 나왔을 때 꼬마 한 명이 어머니에게 “저 아저씨는 왜 휠체어를 타?”라고 물었어요. 어머니가 “엄마 말 안 들으면 저렇게 돼”라고 대답하더군요. 업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엇에 대한 업보라는 말인가?

박경석 - 엄마 말 안 들은 거요. 저도 그때는 엄마 말 안 들어서 그렇게 됐다고 믿었어요. 행글라이더 추락 사고날이 일요일이었어요. 그날도 어머니가 교회에 나가라고 했는데 몰래

대회에 나갔거든요. “엄마 말 안 들으면 저렇게 돼.” 그 한마디를 듣고 몇 달 동안 회개하면서 기도했지요. ‘한 번만 걸을 기회를 주신다면 다시는 교회에 빠지지 않고 걸어 나가겠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자살을 계획했습니다. 엄마 있는 집에서 죽어서는 안 될 것 같아 택시비를 모으기 시작했죠. 성경을 읽으면 용돈을 받았는데 100번은 읽었던 것 같아요. 택시를 타고 고향인 대구의 산으로 가서 소주를 마시고 손목을 끊어 죽자는 게 몇 년 동안 간직한 계획이었죠. 저에게는 해방의 그날이었습니다. 그날을 위해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왜 그날이 오지 않았나.

박경석 - 어느 날 성령이 내려와버린 거죠. 교회 수련회에서 자기 삶을 되돌아보는 글을 써서 읽는 시간이 있었어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여성개발원에 다니던 여자분이 제가 쓴 글의 낭독을 듣고는 영어로 쓰인 책을 선물해줬어요. 저랑 나이가 비슷한 미혼 여성이었죠. 책을 펼쳐보니 첫 장에 이런 말이 쓰여 있더라고요. “나랑 영어 공부 해보지 않을래?” 그분이 매주 토요일에 저를 찾아오기 시작했죠.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죽겠다는 의지가 약해지면서 펜팔도 시작했어요. 편지는 형한테 부쳐달라고 부탁했죠. 어떤 여자한테 답장이 오는데 내용이 굉장히 섹시했어요. 이건 운명이다 싶었죠. 나중에 알고 보니까 형이 교회에서 알고 지내는 여자와 짜고 한 일이었어요. 형이 그 여자랑 결혼하면서 저는 형수님과 펜팔한 셈이 됐죠.

-옛일에 대해 하나만 더 묻겠다. 다른 기록에서 여태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야기를 아까 잠깐 꺼냈다. 사고당한 뒤 첫사랑을 떠나보냈다고. 어떤 일이 있었나.

박경석 -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났어요. 옆집에 살아서 항상 쫓아다니며 함께 버스를 탔어요. 2학년 때부터 사랑을 시작했고요. 대학에 들어가고, 해병대에 입대하고, 사고를 당할 때까지 계속 사귀었죠. 사고 뒤 관계를 지속할 자신이 없었어요. 여자친구는 대구에 있고 저는 서울 병원에 입원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여자친구가 찾아왔어요. 제가 떠나보내려고 문을 안 열어줘도 여자친구는 울고불고 매달렸고요. 2년 정도를 그렇게 만났죠. 어느 날 여자친구가 말했습니다. “집에서 자꾸 선보라고 그래.” 고민이 많았을 테고 제 말에 힘을 얻기 바랐겠죠. 하지만 그때 감이 오더라고요. 지금이 마지막이어야 하는구나. 화를 내면서 그만 나를 떠나달라고 말했습니다.

-연인 한쪽이 중도장애를 얻게 됐을 때 다른 한쪽이 사랑과 동정심 사이에서 헤매다 오히려 이별을 먼저 통보받는 이야기는 영화나 소설에서도 자주 접한다. 실제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박경석은 장애인에 대한 ‘시혜’를 거부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는데, 올해 초 한 강연회에서 아주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청와대의 대통령 앞에서 피켓 들고 시위해도 장애인은 안 잡아가면서, 비장애인은 쉽게 잡아간다. 이것도 시혜다.”

박경석 - 사실 제가 시혜와 동정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활동가입니다. 2001년 이동권 투쟁으로 철로를 점거한 뒤로 법률 지원을 받았는데, 어느 날 저를 변호해오셨던 권두섭 변호사님이 말하더군요. “이제 1위예요. 민주노총의 어떤 위원장보다 재판기록이 깁니다.” 모든 재판에서 저는 유죄판결을 받았어요. 상습범인 거죠. 그런데 판사들은 언제나 저에게 집행유예만을 줬어요. 불쌍하니까. 집행유예 받은 게 대략 8번이고, 지금도 저한테 4개가 동시에 걸려 있습니다.

-그러면 판사들이 자신에게 실형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박경석 - 실형을 줘야죠. 그게 바로 법의 원칙이 아닙니까. 집행유예 받은 사람이 죄를 저질렀을 때 다시 집행유예를 주는 걸 ‘쌍집’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드문 일이에요. 그런데 저는 집행유예를 4개나 달고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 이런 일이 있습니까? 시혜와 동정이죠.

-아까 마로니에공원을 걸을 때 옆에 휠체어를 끄는 박경석 교장을 보며 ‘어디까지가 시혜일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무거운 짐을 든 사람을 도우면 받는 사람도 돕는 사람도 그것을 시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만약 휠체어를 뒤에서 밀어줬다면 그건 시혜가 되는 걸까.박경석 - 그건 ‘연대’죠, 하하. 제가 말하는 시혜의 기준은 개별적인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시혜나 자선, 혹은 보호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건 인간의 가치입니다. 문제는 권력과 자본이 사회가 구성해야 할 권리를 시혜와 동정의 차원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저상버스, 지하철 엘리베이터, 약간의 예산. 당연히 했어야 할 결정,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 당연히 바뀌어야 할 물리적 환경을 시혜와 자선의 관계로 변질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개인적인 시혜에 대한 감정은 개인마다 달라요. 저를 불쌍하게 여겨서 노들장애인야학을 후원해주시는 거, 저는 좋아합니다!

- 노들장애인야학은 어떻게 시작됐는가.

박경석 - 1988년 드디어 집을 나와 서울장애인복지관에 들어갔죠. 살아오면서 장애인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세상에 장애인이 어마어마하게 많았습니다. 감옥처럼 집에 갇힌 삶은 저뿐만 아니라 모든 장애인의 현실이란 걸 알게 됐어요. 사회구조적 문제라는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었죠. 거기서 소아마비에 걸린 정태수란 친구를 만났고, 서울장애인올림픽 반대 투쟁을 하던 박흥수라는 형을 만났어요. 당시의 저와는 달리 두 사람은 정치적 투쟁에 적극적이었죠. 처음에는 두 사람과 거리를 두려고 했어요. 두 사람이 시위를 벌이면 프락치 역할로 몰래 일러바치기도 했죠. 그런데 두 사람이 술을 잘 마셨고, 제 주변에 술을 같이 마실 사람이 없었어요. 어쩔 수 없이 친해지면서 저도 휘말리게 됐습니다. 그걸 전문용어로 약물치료라고 해요. 저는 다시 공부해서 91학번으로 대학 사회복지학과에 들어갔고, 같이 공부를 시작했던 태수는 정립회관 시설 비리 투쟁에 뛰어든 바람에 대학에 떨어졌어요. 인과응보죠. 셋이서 모여 장애 해방을 위한 그날까지 싸우자고 결의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바로 운동에 뛰어든 건 아니었어요. 대학에 들어가고 취직해서 월급도 200만원이나 받게 되면서 잃을 것에 대해 고민해야 했거든요. 생판 못 배운 태수야 가진 게 운동밖에 없었지만. 태수 중심으로 노들장애인야학이 설립됐고, 저는 대학 동기들을 선생님으로 집어넣었어요. 대학 동기들은 우리만 왜 이 블랙홀에 집어넣고 자기만 빼느냐고 비난하고, 태수와 흥수 형은 너만 취직해서 잘 먹고 잘 사느냐고 비난하고. 결국 직장을 포기하고 야학 교사로 시작해 교장까지 맡게 됐죠. 한마디로 코 꿰인 겁니다.

-박경석은 노들장애인야학 교장과 함께 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대표도 맡고 있다. 현재 중요한 투쟁 사안이 장애인등급제와 부양의무제의 폐지인데, 먼저 장애인등급제 폐지에 대해 들어보았으면 한다. 의학적 등급평가를 없앤다면 장애인 복지의 대안적 척도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

박경석 - 등급제의 의미에 대해서부터 이야기해보죠. 등급식으로 운영되는 장애인 복지 시스템을 가진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인간 앞에 급수를 매기는 반인권적 방식이거든요. 성적 소수자, 인종적 소수자에게 그런 급수를 매긴다 생각해보세요. 예를 들어 1급 여성과 2급 여성이 각기 다른 임신출산 지원을 받는다면? 현재의 기계적 등급 구분은 ‘장애인 낙인화’의 핵심적인 기제입니다. 애초 이 제도는 장애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정된 예산에 맞춰 장애인의 권리를 잘라내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개인별로 구체적인 복지 적격을 평가하는 제도로 바뀌어야 해요. 의학적 손상 이외에도 중요하게 고려돼야 할 척도들이 지금은 빠져 있어요. 장애의 성격, 교육 수준, 경제적 수준, 주거 환경 같은 것들. 예를 들어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저에게는 활동보조가 필요하지만, 손가락이 잘린 장애인에게는 필요한 것이 전혀 다르겠죠. 장애인 연금의 경우를 본다면, 2급 장애인 김용준 대법관이 정규교육조차 못 받은 6급 장애인보다 우선돼서는 불합리한 거죠.

-현재의 장애인등급제가 일종의 관료편의주의의 소산이라 보고 그 이유가 예산 제한 때문이라면, ‘장애인등급제 폐지’는 결국 ‘장애인 복지 예산 확대’와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는가.

박경석 - 예산 확대는 필수적이죠. 지금처럼 충분하지 못한 예산으로 등급제를 폐지한다면 오히려 분배의 기준을 두고 혼란이 일겠죠. 현재 장애인 복지 예산 총액이 1조원 근처인데, 5조원 정도라고 하면 상상의 폭이 5배가 되지 않겠습니까?

- ‘장애인운동은 계급투쟁이다’는 뉘앙스의 말을 하거나 글을 쓴 걸 몇 번 봤는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현재의 운동 방향에 그런 관점이 강하게 투영됐다는 생각이 든다.

박경석 - 복지 문제가 곧바로 계급투쟁과 관련됐다고는 볼 수 없겠죠. 전통적 시각에서는 노사 갈등 정도가 계급투쟁의 영역이지만, 저는 장애인운동에 오히려 계급투쟁의 근본적인 동력이 함축됐다고 봅니다. 일본 뇌병변 장애인들은 이미 수십 년 전에 도쿄시청 앞에서 이런 구호를 외쳤어요. “내 신체성이 자본주의를 거부한다.” 장애인운동은 제도의 가치 자체를 바꾸려는 투쟁입니다. ‘경쟁에 뒤처지는 우리를 좀 봐줘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속도에 반대한다’는 거예요.

- 부양의무자 제도 같은 경우에는 무엇이 문제인가.

박경석 - 김대중 정권에서 복지라는 이름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만들어졌고 거기서 부양의무자 기준이 도입됐어요. 이는 장애인 부양 복지의 책임을 가족공동체에 억지로 떠넘기는 제도입니다. 오히려 장애인 가족공동체를 파괴하는 제도가 되어버렸어요. 이런 사례가 있어요. 장애인 딸이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얼마 안 되는 소득원을 가진 자신의 ‘존재’ 때문에 딸이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되지 못한다는 걸 알았어요. 부양의무제 기준이 족쇄가 됐기 때문입니다. 그 기준을 끊어낼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죠. 그래서 그는 목숨을 끊었습니다.

-최근 뜨거운 돌침대에서 자다가 엉덩이에 크게 화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애인운동 김주영 활동가를 비롯해, 지체장애인이 활동보조인이 부재하는 동안 발생한 화재로 사망했다는 기사를 종종 접하게 된다.

박경석 - 활동보조 서비스의 논의는 2005년 12월 독거하던 중증장애인이 난방 수도관이 터진 집에서 얼어 죽은 사건이 일어난 뒤 본격화됐습니다. 당시 선진국에서는 보편화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전국 예산이 15억원 정도인 시범사업이었어요. 서울시청 앞에서 시위를 하는데 시민들이 활동보조 서비스가 뭐냐고 묻더군요. 중증장애인의 신변 처리를 돕는 서비스라고 설명해주면 ‘장애인에게 비서까지 대주란 말이냐’는 반응이 돌아왔습니다. 굳이 그렇게 말하자면 비서가 맞죠. 대기업 회장에게도 비서는 있겠죠. 그 비서는 회장님 똥까지는 안 닦아줍니다. 중증장애인은 그걸 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사람답게 살 수가 있어요. 두 비서의 개념이 전혀 다른 겁니다. 이 서비스가 시행되고도 24시간을 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주영 활동가가 화재 속에서 겨우 5m를 빠져나오지 못해 죽었습니다. 게다가 자부담도 점점 늘고 있습니다. 활동보조 서비스가 필요한 장애인이라면 당연히 경제활동도 어렵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 거죠.

-얼마 전 진중권이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내란 기도 혐의 사건과 관련해 트위터에 ‘발달장애’란 표현을 썼다. 직접 쓴 기사에서 “이석기가 발달장애라면, 우리는 이석기 권리보장 법률을 만들고 있는가?”라고 진중권을 비판했는데,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박경석 - ‘장애인’이란 단어가 이미 낙인화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고 해서, 같은 뜻이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Disabled Person)이라고 부르자는 논의가 있을 정도예요. 저는 흑인을 흑인이라 부르듯이 장애인을 장애인이라 불러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사실 장애인의 신체성에 빗댄 욕설이 굉장히 많지 않습니까. 병신, 고자, 애자, 절름발이 등등. 발달장애도 그렇고요. 그런 욕설 문화로 인해 장애인은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없는 겁니다. 진중권씨에게는 그걸 고려할 만한 감수성이 없었던 것이죠. 사실 ‘발달장애’란 단어를 조롱조로 사용한 <한겨레> 만평도 봤습니다.

-진중권의 어휘 선택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그 스스로 발언의 변을 내지 않았으므로 그를 위한 변론을 한번 떠올려본다. ‘장애인’이 그 자체로 욕설로 쓰일 때는 이미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가치 폄하를 수반하는 것이지만, “이석기는 발달장애다”라는 문장에서 발달장애인의 폄하가 전제됐는지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이 비유의 문맥상 고리는 ‘과거 시점(신체적/시대적)에 머무는 인식능력’일 테고, 진중권이 이석기의 어떤 특징을 비난한다고 해서 그것이 빗댄 대상의 특징까지 폄하하고 있는지는 자명하지 않다. (딱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거북이 애호가라 해도 ‘거북이처럼 굼뜬 놈!’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진중권이 의도와 전달력의 차이를 고려하는 신중하고 섬세한 언어적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박경석 - 진중권에게 장애인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스스로도 ‘병신 같다’는 표현을 종종 씁니다. 그럴 때 특정 집단을 겨냥하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그런 표현이 만연화되면 특정 집단에 대한 사회적 관념이 형성되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의식은 거기에 조금씩 젖어들어갑니다. 즉각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면 가뜩이나 존재감과 목소리가 작은 소수자 집단의 인권은 보호될 수 없습니다.

-한참 듣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박경석의 삶과 세계관은 사고 이전과 사고 이후로 너무 극명하게 갈린다는. 지난 홍세화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했는데, 몹시 궁금하다. 만약 그날 행글라이더를 타지 않았다면, 행글라이더가 추락하지 않았다면, 지금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을 것 같은가. 참여연대에 똥물을 퍼붓는 해병대 전우회 사이에 끼어 있었을까.박경석 - 그랬을 수도 있죠. 반대로 해병대 출신의 장애인학교 교사가 됐을 수도 있고요, 하하.

노들장애인야학에는 실제로 해병대 출신 교사가 재직 중이라고 한다. 올해는 노들장애인야학 설립 20주년이 되는 해다. 많은 야학과 운동조직이 명멸하는 가운데 20년을 버틴 비결이 거기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박경석 - 우리는 목표가 아니라 의지를 공유했기 때문에 살아남았어요. 목표를 향해 달려왔다면 절대로 여기까지 못 왔습니다.

글 손아람 힙합 그룹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의 멤버로 활동했다. 그룹 이름과 같은 제목의 소설을 써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서울 용산 참사를 소재로 정통 법정소설인 <소수의견>을 썼으며,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해 <너는 나다-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하다>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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