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1.04 13:18 수정 : 2014.01.07 10:36

<나·들>로부터 ‘영향력 있는 언론인, 과거와 현재’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한동안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장 먼저 시작된 고민은 언론인에 대한 정의였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언론인으로 볼 것인지, 정작 그들의 영향력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막막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언론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신문·방송·통신·잡지 따위의 언론기관에 관계하여 언론으로써 업을 삼는 사람.’

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풀이다. ‘언론기관에 관계’한다는 것은 무슨 말이고, ‘언론으로써 업을 삼는’이란 건 또 뭔가. 넓게 보면 언론사 사주나 경영자, 기자와 PD, 아나운서 등 언론사에서 일하는 사람은 모두 언론인 범주에 포함된다는 이야기다. 이런 뜻풀이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영향력’ 평가 대상을 그런 식으로 넓히면 그 평가에 대한 객관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영향력 있는 언론인’을 주제로 글을 써야 하는 처지에서 언론인의 범주에 대한 ‘교통정리’는 필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그들이 갖는 영향력의 층위 또한 직군에 따라 각기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언론사를 갖고 있는 사주와 경영자인 사장, 해당 언론에 칼럼을 쓰는 칼럼니스트는 각각의 영향력을 지닌다. 방송사 전·현직 앵커도 마찬가지다. 다만 언론사 사주가 가질 수 있는 영향력이란 해당 언론사 소속 기자나 아나운서의 영향력과는 그 성격이 같을 수 없다.

설명이 다소 길어졌는데, 따라서 이 글에서 ‘영향력 있는 언론인’으로 언급할 대상은 직접 기사와 칼럼을 쓰는 기자·칼럼니스트이거나 방송을 진행·제작하는 아나운서·PD 등으로 제한하려 한다. 물론 아무리 날고 기는 기자와 아나운서의 영향력이라 해도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 세력 집권 이후 막강한 언론권력을 키워 ‘밤의 대통령’으로 불리기에 이른 <조선일보> 사주의 그것과 견준다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독재에 맞선 ‘사상의 은사’ 장준하·송건호·리영희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에 관한 내 개인적 기억은 박정희 정권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정권을 비판·감시·견제해야 하는 언론과 군사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뒤 자기 멋대로 임기를 무한대로 늘려간 박정희 독재정권은 애초부터 불화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장준하·송건호·리영희 선생 등은 가장 비타협적인 태도로 박정희 시대의 폭력에 맞서왔던 언론인, 지식인이다.

독립운동가 출신의 장준하 선생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3년 피란지인 부산에서 종합교양지 <사상>을 창간하며 언론계에 뛰어들었다. <사상>은 이후 제호를 <사상계>로 바꾼 뒤 당대의 지식인 그룹과 함께 이승만 독재정권을 적극적으로 비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쿠데타로 정권을 무너뜨린 뒤 애초의 민정 이양 약속을 지키지 않자 장 선생은 <사상계> 발행인 겸 편집위원으로서 <사상계> 권두언과 기획사설 등을 통해 이런 행태를 앞장서서 비판했고, 이로 인해 숱한 필화 사건을 겪었다.

5·16 쿠데타 직후인 <사상계> 7월호에 실린 함석헌 선생의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제목의 논설은 <사상계> 필화 사건의 시작이었다. 당시 사설에서 함 선생은 “4·19 혁명 때는 민중이 감격했지만, 이번엔 민중의 감격이 없고 무표정이다. (…) 이러다 군사독재가 됐다가는 어쩌나 하는 불안 속에 싸여 있다”고 지적했다. <사상계>에 함 선생의 사설이 실리자 중앙정보부는 장준하 선생을 가장 먼저 연행했다. 장 선생은 <사상계>에서 함 선생과 민중신학자 안병무, 철학자이자 사상가 안병욱, 민중운동가 백기완 등과 함께 박정희 독재정권이 추진했던 대일외교, 베트남 파병 등의 정책을 앞장서서 비판했다.

박정희 정권 시기에 세 번이나 투옥된 장준하 선생은 1975년 1월8일 병마와 싸우는 와중에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발표하며 독재자를 향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박정희 독재정권의 잇단 탄압과 회유로 비판 언론이 힘을 잃던 그 시기에 선혈이 뚝뚝 묻어나는 듯했던 그의 옥중 서한은 단연 돋보였다. 박 전 대통령의 ‘헌법 파괴’ 행위인 유신에 대해 장 선생은 서한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모든 기대와 감격은 그해(1972년) 10월17일 이른바 ‘유신’이란 이름으로 무참히도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국헌을 준수한다고 서약한 귀하 스스로가 그 선서를 헌신짝같이 버리고 헌법기관의 권능을 정지시키고, 헌법제정 권력의 주체인 국민을 강압적인 계엄하에 묶어놓고 ‘국민투표’라는 요식행위를 통해 제정한 소위 ‘유신헌법’으로 명실상부하게 귀하의 일인독재 체제만을 확립시켰습니다.”(<민족·민주·민중선언>, 김삼웅, 254쪽)

박정희 정권에 맞서 장준하 선생이 외롭고 질긴 투쟁을 이어가고 있을 때 병상에 있던 그에게 큰 힘이 됐던 소식은 1974년 10월24일 당시 1등 신문이던 <동아일보> 젊은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이었다. 이들은 10·24 선언에서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자유 회복이 주장되고 언론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며 자유언론을 향한 싸움을 시작했다. 당시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이 송건호 선생이었다.

1973년 <동아일보> 수석논설위원을 거쳐 자유언론실천선언이 나온 이듬해 편집국장이 된 송건호 선생은 1975년 3월15일 동아일보사 경영진이 자유언론 투쟁에 앞장선 기자들을 대량 해고하자, 이에 항의하며 사표를 던졌다. 당시 송 선생은 동아일보사 쪽이 자유언론을 외치며 농성 중이던 기자들을 쫓아내려 하자 “현재의 사태를 수습하는 길은 회사 쪽이 하루빨리 해임 기자들을 복직시키는 것밖에 없다. 그러지 않으면 <동아일보>는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며 회사에 맞섰다. 그러나 동아일보사는 송건호 선생이 사표를 던진 뒤(3월17일) 기어이 정연주 전 KBS 사장 등 자유언론을 외치던 140여 명의 기자 등을 회사 밖으로 쫓아냈다.

송건호 선생은 이후 1977년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만든 월간지 <대화>에서 주필로 얼마간 있기도 했지만, 대개 재야 언론인으로 지냈다. 1984년 해직 언론인들과 함께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만들고 이듬해 월간지 <말>을 창간했다. 1986년에는 전두환 군사정권의 보도지침을 폭로해 이듬해 6월항쟁의 불씨를 제공했다. 그리고 1988년 <한겨레> 초대 사장을 지냈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은 송건호 선생을 ‘대쪽 선비 언론인’으로 회고했다.

“그는 도무지 보통 사람과 다른 특별 대접을 생리적으로 싫어한 소박하고, 소탈하고, 고지식했던 인물이었다. 바로 그 고지식함 때문에 그의 가족은 모진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등록금이 없어 대학 진학을 포기한 따님도 있고, 대학 공부를 중도에 포기한 따님도 있다. 송 선생은 이를 두고 늘 가슴 아파했다. 그렇게 생활이 절박했어도 그는 훼절하거나 권력에 빌붙지 않았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을 포함하여 그에게 군사정권은 무려 14차례에 걸쳐 관직 제의를 했다. 그러나 송 선생은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했다. 지식인의 지조를 자신의 생명처럼 여겼던 것이다.”(<기자인 것이 부끄럽다>, 정연주, 100~101쪽)

리영희 선생은 1957년 <합동통신>의 외신부 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언론인으로는 드물게 영어에 능통하고 국제 정세에 밝았던 리 선생은 박정희 정권 시절이던 1964년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 검토 중’이라는 기사를 써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리영희 선생은 기자, 언론인을 넘어 특히 진보 진영에는 ‘사상의 은사’였다. 1977년 리 선생이 출간한 <우상과 이성> 서문에는 그의 언론관이 함축돼 있다. 그의 뒤를 잇는 언론인이라면 한 번쯤 접해본 문장일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기자로서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리 선생은 박정희 정권이 밀어붙인 베트남전쟁 파병에 비판적인 태도를 고수하다 1969년 6년째 근무하던 <조선일보>에서 해고됐고, 1971년에는 군부독재·학원탄압에 반대하며 ‘64인 지식인 선언’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합동통신>에서 해직됐다. 1972년 한양대 교수로 임용된 이후에도 1976년과 1980년에 각각 두 차례 해직을 당했다. 교수 임용 이후 <우상과 이성> 이외에도 <전환시대의 논리>(1974), <해방 전후사의 인식>(1979), <분단을 넘어서>(1984), <역정>(1988) 등 역작을 남겼다. 1999년 <연세대학원신문>은 교수와 대학원생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우리 학계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국내 학자와 저작을 물었는데, 리영희 선생과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 각각 1위로 꼽혔다.

극우의 이념적 지주 김대중·조갑제

장준하·송건호·리영희 선생 등을 이승만·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선 ‘지사적 언론인’이라고 한다면, 그 뒤 영향력 있는 언론인으로 주목받고 있는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과 조갑제 전 <월간조선> 사장은 전두환 정권 출범 이후 지금까지 보수·극우 세력의 이념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는 언론인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특히 김대중 고문은 <시사저널>의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조사가 시작된 1994년 이후 2004년까지 단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시사저널>은 매년 한 차례씩 각 분야 전문가 1천 명을 대상으로 언론인 영향력 순위를 조사·발표하는데, 김 고문은 2005년 이후에도 10위권에 계속 이름을 올리고 있다. 새누리당으로 대표되는 보수세력과 노인층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김대중 고문은 1965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36년간 재직한 뒤 이 신문의 주필로 있던 2001년 김대중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 실시에 대해 정치적 의도가 있는 ‘언론 탄압’이라 주장하며 항의성 사표를 던졌으나 회사를 그만두지는 않았다. 그 뒤 2002년 3월 주필 자리에서 물러나 편집인 발령을 받았다. 지금은 <조선일보> 고문 자격으로 ‘김대중 칼럼’이란 제목의 기명 칼럼을 쓰고 있다.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의 서슬 퍼런 언론 탄압에 맞서 사표를 던진 일이 없는 김 고문이 김대중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를 언론 탄압으로 규정하고 사표를 제출했던 일화를 이해하려면 1960년대 <조선일보>에 함께 몸담았던 리영희 선생과 김대중 고문의 인연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안티조선’을 주도했던 김동민 당시 한일장신대 교수의 설명이다.

“외신부에서 수습교육을 받던 김대중 수습기자의 일화 한 토막이다. 당시 외신부장은 후에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밝히는 등의 저술 활동으로 젊은이들의 사표가 된 리영희 선생이었다. 북베트남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적화통일을 막고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남베트남을 돕기 위해 미국이 불가피하게 개입했다고 알고 있었던 시절. 그러나 외신은 전혀 다른 관점의 기사를 연일 쏟아내고 있었다. 리영희 외신부장은 수습기자들에게 외신이 전하는 베트남전쟁의 객관적 사실을 설명하면서 외신기사 작성의 정도를 가르쳤다. 그런데 유독 말귀를 알아듣지 않는 수습기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대중이었다. 철저하게 반공정신으로 무장한 김대중은 공산당(베트콩)이 저지른 일인데 아무리 외신이라도 믿을 수 없다며 한사코 고집을 피우더라는 것이다. 리영희 부장은 끝내 그의 편협한 세계관을 교정해주지 못했다.”(<노무현과 안티조선>, 김동민, 163쪽)

김대중 고문은 자신의 칼럼에서 북한에 대한 그의 맹목적 적개심과 미국에 대한 적극적 선호,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통해 진보·개혁 진영으로부터 ‘숭미사대주의자’(강준만 전북대 교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김동민 교수가 지적한 그의 반공주의는 김 고문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유효한 열쇳말이라 할 수 있다.

이념적 지향은 김 고문과 마찬가지로 반공주의에 뿌리를 둔 보수·극우에 가깝지만, 김 고문이 개인적 ‘견해’나 ‘주장’을 싣는 칼럼을 통해 언론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진 반면 조갑제 전 <월간조선> 사장은 기본적으로는 ‘사실관계’에 바탕을 둔 글을 써왔다는 점에서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은 달랐다.

조갑제 전 사장은 1971년 부산의 <국제신보>(지금의 <국제신문>) 수습기자로 입사해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해직된 뒤 상경해 1981년 월간지 <마당> 창간에 참여했다. 언론인으로서, 좀더 구체적으로는 르포라이터로서 조 전 사장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1983년 <월간조선>에 입사한 뒤 책으로 출간한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1986)는 르포문학의 전형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두식 경북대 교수는 자신의 책 <헌법의 풍경>에서 이 책 등에 대해 “지금은 극우파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조갑제 기자가 우리 법 현실의 일부인 고문을 깊이 있게 고찰한 이 두 권의 논픽션은, 저자가 나중에 보여준 눈에 띄는 입장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법률가들이 필독해야 할 훌륭한 책임에 틀림없다”고 말했다.

손석희, 언론 뛰어넘어 지성이 될 수 있는가

조 전 사장은 <월간조선> 편집장을 맡은 1991년 이후 남북 화해를 강조한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친 언사로 비판한 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조국 근대화’를 이룬 역대 최고의 대통령으로 평가하는 데 앞장섰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그의 긍정적 평가는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각에 대한 미화로도 이어졌다. 특히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과 관련해 “친일파보다 친북파가 더 나쁘다”는 따위의 주장을 펼쳐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북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에 대해서는 줄곧 ‘민족 반역자’라는 수식어를 붙인 반면, 미국에 대해서는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을 자주 밝혔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과 관련해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렸을 때 “미국산 쇠고기는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촛불집회 참가자들에 대해서는 “좌파의 선동에 놀아난 정신이상자”라고 지적했다. 최근 검찰의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 수사와 관련해서는 “검찰이 좌파의 주구라는 말이 나올 지경”이라는 표현으로 검찰을 비난했다.

2005년 이후 <시사저널>의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조사에서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는 인물이 앵커 출신 손석희 JTBC 보도부문 사장이라는 사실은 언론 지형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2000년대 이후 신문시장의 열독률 하락이 본격화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대중의 선호는 신문·잡지 등 인쇄매체에서 영상매체 등으로 옮겨가고 있다. 손 사장이 2005년 영향력 조사에서 부동의 1위였던 김대중 고문을 제치고 1위를 했을 때만 해도 <시사저널>은 이를 “1994년 조사 이래 최대 사건”이라고 평가했으나, 지난 9월 발표한 올해 조사 결과를 보면 10위 안에 포함된 언론인 가운데 방송계 인물은 손석희, 길환영(2위), 민경욱(5위), 김종국(6위), 최일구(8위), 우원길(9위), 백지연(10위) 등 모두 7명이었다. 신문사 관계자는 방상훈(3위), 김대중(4위), 홍석현(7위) 등 3명이 전부였다.

다만 장준하·송건호·리영희 선생이 단순히 언론인을 뛰어넘는 ‘시대의 지성’ ‘사상의 은사’로 불린 지식인이었고, 김대중 고문과 조갑제 전 사장 역시 보수·극우 세력의 이념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 영향력 있는 언론인으로 꼽히는 인물들과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대중에게 친숙한 오늘날의 ‘영향력 있는 언론인’은 훗날 어떤 이름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최성진 <한겨레> 토요판팀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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