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1.04 12:55 수정 : 2014.01.07 10:35

교학사 <고등학교 한국사>를 비판하는 쪽이 이 교과서에서 찾아냈다고 하는 왜곡·오류 사례는 모두 298건이다. 이쯤 되면 거의 한 쪽에 1개꼴로 지적한 셈이다. 이런 사태를 두고 합리적 추론을 해본다면 첫째, 시간에 쫓겨 짜깁기 수준으로 급하게 책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작심하고 책의 내용을 의도한 방향으로 몰아갔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한 나라의 국사 교과서가 되려는 책에 대해 외부 검증 절차가 있었을 텐데 그 기능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봐야 할까. 실제로 문제의 교과서는 지난 8월30일 국사편찬위원회의 검정 심의를 ‘무사히’ 통과했다. 명확한 건 왜곡과 오류투성이라는 비난을 받는 교과서 한 권이 덩그러니 나와 있다는 사실뿐, 당사자 누구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또 하나, 추론할 수 있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비판하는 쪽의 시각이 처음부터 잘못됐을 경우다. 어차피 역사의 상당 부분은 관점과 해석의 영역이라고 하지 않던가. 권위에 기대어 표현하자면,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는 1961년 발간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했다. 역사는 시대와 사회의 제약을 받는 역사가의 관점에 의해 평가·비판받는 학문이고,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 과정이 뒤따른다는 걸 전제로 한다. 카는 “역사가가 사실을 기계적으로 편집하는 역사를 쓰거나 현재의 목적을 위해 과거 사실을 주관적으로 왜곡하는 오류를 범하는 행위를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역사 기술의 상대성과 가변성을 전제하는 카의 이 말은 교과서를 만든 쪽이나 비판하는 쪽 모두 상대를 비판할 때 써먹기 좋은 말이기도 하다. 역사·시민사회 단체와 언론이 교학사 교과서를 ‘뉴라이트가 만든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라고 비판한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식민지 근대화론1보다 한 수 더 떠, 한국이 발전·성장을 이룬 시기로 묘사한 반면 독립운동사는 축소 기술했다는 것이다. 반면 교과서를 만든 쪽에서는 기존 교과서가 좌파 시각에서 쓰여 식민지 수탈론2-독재-민주화 투쟁 등 ‘자학사관’3을 퍼뜨려 자유민주주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나·들>은 또 다른 시각을 찾아보기로 했다. 한국인이 아니면서 한국현대사에 정통한 연구자라면 맞춤할 듯했다. 후지이 다케시 박사에게 연락했다. 그는 학부 때부터 지금까지 한국 근·현대사를 전공한 일본인이면서, 국내의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연구실장을 맡고 있다. 적어도 그는 일제 식민지와 대한민국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좌우 이념을 떠나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적임자다. 교학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을 어떻게 봐야 할까. 역사가의 관점은 어떠해야 할까. 역사 교육은 어떻게 이뤄져야 할까. 지난 10월23일 역사문제연구소에서 그를 만났다.

절대권력만 강조… 원칙조차 없다

나·들 - 교학사 교과서에 문제가 있다면 무엇을 꼽겠습니까.

후지이 다케시(이하 후지이) - 현재 이 교과서에 대한 비판의 초점이 ‘친일·독재 미화’인데, 정작 교과서를 보면 친일·독재가 두드러지지 않아요. 뉴라이트의 입장이라면 신자유주의와 경제성장이 우선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로지 과거 회귀, 냉전과 반공 시각에서 근·현대사를 설명하고 있어요. ‘뉴라이트’가 아닌 ‘올드라이트’ 교과서라고 하는 게 타당합니다. 공산주의는 나쁘고, 자유민주주의는 우월하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만든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이 위대하다는 시각이거든요. 이 관점에서는 독재와 유신, 쿠데타, 민주화 탄압과 민간인 학살 등을 비판할 수 없어요. 그러니 그것들을 반공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서술한 거죠.

나·들 - ‘올드라이트’라고 했는데, 생소합니다.

후지이 - 올드라이트 역사관의 특징은 경제를 중심에 두는 뉴라이트와 달리 지도자, 절대권력을 강조합니다. 그들의 이념적인 틀은 경제성장주의가 아니라 단순한 반공주의죠.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대립 구도를 설정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했다는 논리입니다. 즉, 대한민국 역사는 공산주의에 대항한 자유민주주의의 승리 역사가 되는 거죠.

나·들 - 교학사 교과서를 과거 뉴라이트 대안교과서4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후지이 - 대안교과서와 비교하면 수준이 질적으로 떨어집니다. 대안교과서의 주축은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와 낙성대경제연구소였어요. 해석에서는 문제가 있지만 경제사 분야에서는 나름대로 연구 수준이 높죠. 반면 교학사 교과서는 원칙조차 없어요. 경제사 부분에서 대안교과서를 일부 가져다 쓰긴 했는데 전반적으로 엉성해요. 잘못 인용한 것도 있고, 틀린 부분도 많고요.

나·들 - 일본 우익이 만든 후쇼사 교과서와 비교하면요.

후지이 - 후쇼사보다도 수준이 낮아요. 후쇼사는 일본인에게 자긍심을 갖게 할 목적으로 만들었는데, 교학사 교과서는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의 안티로만 존재하니까요. 과거 이들은 금성 교과서를 자학사관이라고 비판했는데, 자학사관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교학사 교과서가 자학사관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한국의 근·현대사가 거의 다 외부(냉전과 공산주의)의 힘에 의해 움직였다고 보는 시각이니까요. 이 교과서에 따르면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건 공산주의더군요. 남한은 주체적이지 않았고 수동적으로 대응했을 뿐이라는 거죠.

나·들 - 이런 교과서가 나온 이유가 뭘까요.

후지이 - 무엇보다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교과서를 썼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쓰게 된 것 자체의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교과서에서 수준 높은 지식을 제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자신들의 주장만 잘 드러나면 아무렇게나 만들어도 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교학사 교과서 중심엔 한국현대사학회가 있다. 2011년 뉴라이트 교과서포럼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경제학·행정학·교육학 등 다양한 전공자들이 현대사를 학문적으로 연구할 목적으로 만들었다. ‘이승만 마니아’인 유영익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상임고문으로, 교학사 교과서 집필자인 이명희 공주대 교수와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전·현직 회장으로 활약 중이다. 한국현대사학회는 그동안 “한국의 역사학계가 지나치게 좌편향적”이라며 “한국 근현대사 교육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역사학계에서 이 단체의 위상은 어떨까. 후지이 연구실장은 “한국사 연구자들이 전혀 없거나 있어도 극소수”라며 “대표 저자들도 엄밀히 따지면 현대사 연구자는 아니다”라고 했다.

과거 속 다양한 가능성 안에 미래 있어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 유영익 위원장에 이어 이배용 건양대 석좌교수를 한국학중앙연구원장에 임명했다. 우파 교과서와 우파 학자 요직 기용을 통해 우파 중심의 역사관을 주입시킴으로써 현 정부의 정통성과 안정적인 미래 권력을 확보하려는 의도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후지이 연구실장은 “이런 상황에서는 역사 서술이나 해석 자체가 곧바로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어서 해석의 다양성 확보가 어려워질 수 있게 된다”며 “상대쪽에서 곧바로 써먹을 수 있는 내용을 제공할 만한 우려가 있는 해석을 안 하게 된다거나, (연구) 프로젝트나 기획서 같은 것을 쓸 때도 영향을 주게 된다는 점에서 다양한 역사 연구와 교육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역사와 역사 교육이 정권이나 국민교육 일환으로 악용돼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학생들에게 다양한 시각과 가능성을 열어주는 과정이 역사 교육이라는 것이다.

나·들 - 역사 교육은 어떤 식으로 이뤄져야 할까요.

후지이 - 역사가와 교사의 자율성을 인정해줘야 합니다. 이들이 학생들에게 다양하고 충분한 자료를 제시하면 학생들이 이를 토대로 다양한 해석을 하게 하는 쪽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어떤 사건과 관련해 어떤 가능성들이 존재했는지, 그 가능성들이 결국엔 어떻게 정착·실현·소멸됐는지 탐구하고 해석하게 하는 과정이 역사 교육이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현재를 상대화하는 것이 역사 교육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고요.

나·들 - ‘현재를 상대화한다’, 어떤 의미인가요.

후지이 - 현재는 과거의 어떤 조건들 속에서 우연히 생겨난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현재도 과거에는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여러 미래들 가운데 하나였죠. 그런 것처럼 미래는 현재의 단순한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지금과 다른 새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단 현재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사학이라는 것은 미지의 미래를 만들기 위해 현재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우회로로 과거를 활용하는 학문이니까요. 과거 속에는 다양한 미완의 미래들이 있습니다. 지금 실현된 모습이 전부 혹은 최적이 아닐 수도 있죠. 역사 교육 역시 과거 속에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했고, 실현되지 않았지만 잠재적 미래가 그 안에 있었다는 것, 역사에서 그런 미래들을 발견하고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게 만드는 게 역사 교육의 목적입니다.

나·들 -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세요.

후지이 - 독립운동 과정을 예로 들어볼게요. 당시엔 단지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는 것뿐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다양한 노력이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만 강조하면 이 다양한 노력이 역사적으로 모두 조명받지 못하게 돼요. 당시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은 대한제국의 주권을 되찾는 것에서 나아가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고 했어요. 독립 이후 어떤 국가,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인지 고민하고 시도했던 흔적이 통째로 사라지는 거죠. 독립운동 과정에서 노선 대립도 이 맥락에서 생겨난 것인데, 이것도 무시되고 대한민국 건국으로만 수렴된다면,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의 다양한 꿈과 욕망이 모두 사라지는 거죠.

해방 직후 남북한에서는 좌·우파를 막론하고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정치·사회 운동이 민중의 광범한 지지를 받으며 전개됐다. 아나키스트 세력과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세력도 존재했다. 대표적으로는 여운형의 ‘건국동맹’,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 김구의 ‘한국국민당’, 송진우·김성수 등 민족주의 우파 계열의 ‘한국민주당’, 안제홍·김규식 등의 중도세력이 만든 ‘국민당’을 비롯해 민족주의 세력의 고려민주당·조선민주당·한국국민당, 좌파 계열의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 등 좌·우파를 넘어 새로운 국가 건설을 향한 꿈들이 한반도 내에서 커가고 있었다.

영웅을 필요로 하는 나라가 불행

후지이 연구실장은 요즘 한국의 민주주의와 민주화에 주목한다. 1987년 민주항쟁의 결과물이 결국 박근혜 정부 탄생으로 이어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그 원인을 “한국 사람들이 민주화로 국가는 바꿨지만 사회를 바꾸지 못한” 데서 찾는다. 정권 교체 이후 사회와 생활 속에서 민주주의와 민주적 절차를 고민하지 못한 결과라는 얘기다. “일상에서 직접 민주주의를 경험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거든요. 또 한국은 민주화 이후에도 권위주의를 청산하지 못했고, 심지어 386세대도 독재체제 아래서 몸에 밴 권위주의를 충분히 극복하지 못해서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박근혜 정부가 탄생한 측면이 있죠.”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교학사 역사 교과서의 문제점으로 과거 회귀, 냉전과 반공 시각으로 근·현대사를 설명하다보니 역설적으로 자학사관에 빠졌다는 점을 꼽았다. 그가 ‘뉴라이트’가 아닌 ‘올드라이트’ 교과서라고 평가하는 이유다. 그는 “앞으로 1950년대 후반 경제성장을 대안으로 한 반공 논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연구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역사문제연구소가 10월24일부터 11월28일까지 진행하는 연속강좌로 ‘역사적 민주주의 제도 밖에서 보는 민주주의의 역사’를 주제로 삼은 건 이런 맥락에서다. “지금 한국 사회를 보면, 다시 민주주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민주주의 회복뿐 아니라 왜곡된 역사 교육과 역사 교육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훌륭한 지도자를 바라지 않으면 됩니다. 훌륭한 사람을 지도자, 즉 대통령으로 뽑아야 민주주의가 실현된다는 발상부터 버려야 합니다.”

이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갈릴레이의 생애>에서 갈릴레이가 말한 “영웅이 없는 나라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영웅을 필요로 하는 나라가 불행하다”와 일맥상통한다. 그는 “한국과 일본에선 여전히 영웅을 바라는 심리가 있는데, 박정희 경제성장 향수에 취한 이들이 박근혜 후보를 선택했다”며 “이런 상황 자체가 사실은 너무나 불행한 것”이라고 했다. 역사학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열린 자세로 자료를 충실히 겸손하게 보는 태도를 꼽았다. 해석은 그다음인데, 이 과정에서 다양성이 존중돼야 한다고 그는 설명했다. “역사를 암기 과목이라고 하는데, 실은 역사학에는 답이 없습니다.”

후지이 연구실장과 인터뷰하기 전만 해도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의 “역사의 기록은 속일 수 있어도 역사적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명제가 옳은 게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인터뷰 뒤안길, 후지이 연구실장의 “역사적 진실은 없다”는 말이 더 깊이 새겨졌다.

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1 일본의 식민지배가 결과적으로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이다. 1980년대 이후 뉴라이트 계열의 안병직·이영훈 서울대 교수가 대표적 학자다.

2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한 이후 조선 땅에 행한 경제 관련 기반시설이나 정책이 조선의 경제 발전이나 행복 증진을 위함이 아니라 조선을 근대화해 수탈하기 위함이었다는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한 이론이다.

3 ‘대한민국 성공신화의 주역들을 친일파, 분단 주범, 독재자로 몰면서 폄하하고 나아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모독한다’는 것이 자학사관론의 핵심이다.

4 5년 전 뉴라이트 계열의 ‘교과서포럼’에서 발간한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정식 교과서가 아니라 일반 출판시장에 출간된 단행본이었다.

우토로서 한국과 통한 후지이 다케시

후지이 다케시 연구실장은 일본인으로 한국사를 전공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일본 교토대에서 한국근대사를, 오사카대 대학원에서 한국현대사를 전공한 그는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6년부터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해온 그는 지난 2월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에 임명됐다.

그가 한국사를 전공한 계기는 일본에서 했던 학생운동과 닿아 있다. 국제연대를 꿈꾸며, 재일조선인과 식민지배의 역사에 눈뜨게 됐다. 대학교 1학년 때 방문한 교토 남쪽 우토로 마을의 기억은 스무 살 일본 청년에게 큰 울림으로 남았다. 우토로는 1941년 교토 군비행장 건설을 목적으로 일제에 의해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 1300여 명의 집단 합숙지로, 해방 이후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일본인이 왜 왔느냐고 비난받을 줄 알았는데 환영해주더군요. 매번 찾아뵐 때마다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줘서 고맙다’고 맞아주셨죠.” 그는 “우토로 주민들을 만나면서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우토로 방문은 수시로 이어졌고, 재일조선인에 대한 갈증으로 확대됐다. 운동권 시절, 그가 외친 구호는 ‘일본 제국주의 타도’였고 자연스레 식민지배 역사에 관심 갖게 됐다. 대학교 3학년 때 전공으로 한국근대사를 선택한 건 당연했다. 때마침 1992년 일본 자위대의 해외 파병 문제가 불거졌다. 일국 평화주의를 추구하던 일본이 자위대를 캄보디아에 처음으로 파병하게 된 것이다. “일본 정부의 입장은 세계 평화에 무임승차할 게 아니라 피 흘려 공헌해야 한다는 논리였죠. 반면 저는 어떻게 국제연대를 확대·강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습니다.”

2000년 한국에 와 성균관대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한국현대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됐다. “1998년 어학연수 때 다양한 한국인들과 어울리면서, 현대사를 모르면 지금 눈앞에 있는 이들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일본에는 한국현대사 연구자가 없었으니, 당연히 한국에 와야 했지요.”

그의 전공 분야는 한국의 1940~50년대 정치사와 사상사다. 지난해 박사 논문을 토대로 해방 이후 8년 동안의 한국 상황을 담은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를 펴냈고, <번역과 주체> <다미가요 제창> 등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그는 “현대사 자료들 속에서 지금 상식과는 다른 모습들을 발견할 때 역사 연구의 즐거움을 느낀다”며 “앞으로도 한국현대사를 재조명하는 연구자로서 역할을 충실히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1950년대 후반 민족주의가 쇠퇴하고 경제성장을 대안으로 한 반공 논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연구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가 7년째 몸담고 있는 역사문제연구소는 1986년 역사 연구와 연구 성과의 보급을 통해 사회의 민주화와 통일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설립됐다. 일본인으로 역사단체의 책임연구자 역할을 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쌓은 성과들이 인정받은 것 같아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과 책임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일본인 한국사 연구자로서 어려움은 없을까. 그는 “한국 역사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한국인과 달리 백지 상태여서 자료를 볼 때 겸손해지고, 다양한 시각에서 역사를 볼 수 있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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