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0.07 16:48 수정 : 2013.10.07 16:48

프로파이터의 꿈을 키우는 젊은이가 있다. 열심히 도장을 다니며 수련한 덕분에 실력이 나날이 향상돼, 드디어 경기에 나갈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이제 남은 건 대회에 출전해 진가를 발휘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메이저 대회사들이 그가 ‘숨은 진주’임을 알까.

전세계를 상대로 활동하는 메이저 대회사들이 세계 곳곳에서 프로파이터의 꿈을 키우며 실력을 쌓고 있는 무명 선수를 일일이 파악하고 발굴하기란 불가능하다. 선수 스스로 어떻게든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존재를 각인시켜 대회사들 눈에 띄는 수밖에 없다. 더욱이 격투기는 올림픽 등 다른 메이저 스포츠에서 명성을 쌓은 선수들의 대회 출전을 선호한다. 화제성과 의외성 등으로 흥행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에겐 생소하겠지만, 격투기엔 ‘부커’란 직업이 있다. 무명의 실력자를 찾아내는 일을 한다. 쉽게 설명하면, 프로복싱의 프로모터 같은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복싱의 프로모터와 조금 다른 건 선수 개개인의 매니지먼트를 겸하는 경우, 선수 개인의 뒤치다꺼리를 다 해주는 경우, 경기 일정만 잡아주는 경우 등으로 세분화돼 있다는 사실이다.

‘갑’ 대회사에 선수 조달

부커의 가장 큰 업무는 대회사와 선수를 연결하는 일이다. 큰 대회사는 대회 이슈와 일정, 그리고 스폰서 업무를 처리하기에도 벅차다. 규모가 크다고 소문난 대회사도 실상 직원 수는 그리 많지 않아 직원들이 살인적인 업무량을 처리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대회사들은 부커로부터 경기에 기용할 선수를 추천받는다. 아무리 그래도 대회의 성공과 흥행의 근간인 선수 영입을 딴 데 맡겨도 되는 걸까 싶지만, 대회사 처지에서는 부커를 활용하는 게 더 유리할 수 있다. 부커는 전세계에 숨은 ‘다이아몬드 원석’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소문만 무성한 선수보다는 실력을 제대로 갖춘 선수를 기대할 수 있다.

무명 선수가 프로파이터가 되기 위해서는 실력을 갈고닦아 부커의 눈에 띄는 것이 거의 유일한 길이다.
선수가 링에 올라가 경기하기까지 부커, 세컨드, 스태프들의 유기적인 협조가 이뤄져야 한다. 특히 대회사와 선수를 연결하는 부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대회사들이 부커를 이용하기 시작한 데는 초창기 격투기 대회사 탄생의 아이러니도 숨어 있다. 세상에 자신의 강함을 알리고 싶었던 그레이시 유술계는 작지만 젊은 대회사 SEG와 손잡고 1993년 UFC를 출범시킨다. 초창기에는 현재와 같은 종합격투기의 모습이 아닌 각 무술 계파와 이른바 ‘스트리트 파이팅’에 강한 인물들이 무제한으로 경기를 치러 강자를 가리는 식의 이종격투기적 성격이 더 강했다. 물론 그레이시 유술은 크게 아쉬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기존에 자리를 잡고 있던 많은 마셜아츠(태권도·합기도·쿵후·유도 등의 무술) 쪽은 사정이 달랐다. 마셜아츠 쪽은 미국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강함을 강조하며 입지를 다져왔는데, UFC 대회에 출전했다가 자칫 패배하는 경우 지금껏 쌓아올린 이미지에 금이 갈 것이고, 이는 곧 도장 전체의 생존과 연관된 문제라고 인식했다.

첫 대회에서는 무술 도장 출신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당시 일본에서 활약하던 판크라스(일본 종합격투기 단체) 출신의 켄 셤록은 <블랙벨트>라는 잡지를 보고 직접 연락해왔다. 그의 매치업 상대는 일본 K1에서 소개받은 제럴드 골드였다. 나머지 선수들은 매치메이킹 개념도 없이 출전했다. 우려한 대로 호이스 그레이시 선수의 첫 상대인 복싱선수 출신 짐머슨은 그라운드를 전혀 할 줄 몰랐고, 테이크 다운을 당한 뒤 곧바로 기권했다. 정통 격투기대회 출신 선수들은 움직임이 달랐다. 이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그레이시 유술은 승승장구했다. 이를 계기로 유사한 이벤트들이 생겨나면서 이벤트 규모도 중요하지만, 점점 출전 선수의 수준이 가장 중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됐다.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 바로 부커 시스템이다.

메달리스트는 부커 시스템 예외자

2~3개월의 출전 선수 선별 기간은 매우 중요하다. 대회사는 아무리 프로라지만 선수를 고르는 데 전문성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또한 대회사가 직접 선수를 고르는 과정에서 피해를 보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격투기 대회에서 이벤트사, 즉 대회사는 이른바 ‘갑’의 입장이다. 최상위에 위치한 대회사가 이벤트를 준비하고 부커는 부가적인 여러 콘텐츠와 소규모 이벤트 등을 만들어내는 일을 한다.

부커는 대회사가 이벤트를 준비할 무렵 이들로부터 연락을 받아 경기에 출전할 선수들을 본격적으로 찾아내 프로필을 만든다. 이를 토대로 대회사 쪽은 선수를 선별한다. 이 과정은 보통 이벤트가 열리기 석 달 전쯤에 시작된다. (격투기 대회는 빠르면 3개월, 길게는 6개월에 한 번 개최한다.) 대회사는 부커에게 받은 선수 프로필을 가지고 대전 상대와 비교해 경기가 어떤 그림으로 만들어질지 고심하며 최종적으로 선수를 낙점한다. 부커를 통해 낙점된 선수의 체육관이나 팀으로 출전 통보를 하면 이때부터 선수는 본격적으로 대회 출전 준비를 하게 된다. 하지만 대회사가 최종 낙점한 선수를 강력한 이미지로 포장해 사전 홍보를 했는데, 실상 경기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 때문에 이벤트사는 부커에 경기 전 출전 선수의 철저한 관리 역할까지 맡긴다.

현재 대회사가 신뢰를 갖고 일을 맡기는 부커들은 20명 내외로 추산된다. 부커는 자신의 언어 능력을 고려해 전문적 용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국가의 팀들과 연계를 맺는 경우가 많다. 브라질을 전문으로 하는 부커와 러시아·우크라이나 등을 전문으로 하는 동구권 이벤트 회사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무술도장들과 연계되는 부커, ‘격투 왕국’이라고 할 수 있는 네덜란드를 담당하는 부커들이 있다. 몇몇 부커는 국가와 지역을 분할해 서로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범위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도 부커 팀이 있는데, 이들은 주로 국내 선수들의 해외 경기를 주선한다.

선수 홍보와 기자회견, 팬미팅 등을 위한 스케줄과 내용 조율도 부커가 방송사·이벤트사 등과 협의해 진행한다. 김동현 선수(왼쪽 두 번째)의 첫 UFC 출정 기자회견 모습, 러시아 출신 이종격투기 선수 예멜리아넨코 표도르(왼쪽 두 번째). 대회 입장식을 마친 선수가 부커를 따라 움직이는 모습(위부터).
이런 부킹 시스템에도 예외가 있다. 올림픽이나 엘리트 아마추어 체육 출신 선수들이다. 이들은 기존 격투기 선수와 달리 엘리트 체육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금전적 보상을 많이 바란다. 이 때문에 부킹 시스템을 이용하기보다 대회사가 직접 선수들과 출전 관련 협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명예를 획득한 메달리스트의 경우 굳이 격투기 무대에 나서지 않아도 될뿐더러 혹여 출전을 하더라도 상당한 준비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간혹 이런 과정을 무시하고 경기에 출전하려는 몇몇 회사가 선수나 이벤트사에 호기를 부리면서 접근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특히 격투기에서 부커 시스템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스포츠마케팅 기법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기본 구조를 갖고 있다. 이는 20여 년간 그런 룰을 독자적으로 만들어가면서 생존해온 종합격투기 업계의 구조적이며 태생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부커 간 경쟁 의식은 상당히 강한 편이다. 하지만 원수처럼 지내더라도 질서를 해치는 존재가 생겨나는 등 중요한 문제가 터지면 의외로 결속력이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부커 시스템을 거치지 않은 선수들은 경기에 출전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부커들은 이미 수많은 국내외 대회사들과 무수히 많은 실적을 쌓아왔다. 새로운 누군가가 실적 없는 선수를 경기에 출전시킨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팀이나 무술도장 네트워크 거느려야

이벤트사가 어떤 선수에 대해 직접 문의해오는 경우도 있다. 이때는 해당 부커가 추천받은 선수들의 스케줄이나 몸 상태 등을 고려해 출전 여부를 결정짓는다. 이렇게 한 명의 출전 선수가 결정되면 상대 선수를 고르게 되는데 여러 선수들이 고려 대상이 된다. 이때에도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선수들은 뛰어난 기량을 갖추지 않은 한 선정되기가 매우 힘들다. 무엇보다 대회를 며칠 앞둔 상황에서 생기는 부상 등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다친 선수를 대신할 만한 선수를 찾는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관객이 이미 경기 티켓을 구매한 뒤라면 이들이 납득할 만한 수준의 경기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대회사가 부커를 선호하고 부커가 거느리는 팀이나 무술도장을 선호하는 이유다.

부커는 이런 불상사(?)가 발생해도 자신이 갖고 있는 네트워크를 통해 부상 선수의 도장 내부에서 이미 알려진 실력파 선수를 내세울 수 있다. 심지어 때로는 이렇게 변경된 대진에 관객이 더 열광하기도 한다. 이는 부커가 출전 선수에게 언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두꺼운 선수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빈자리를 메워주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촉박한 경기 일정 탓에 취업비자가 나올 수 없는 상황이라든지, 체중 감량을 할 수 없는 경우다. 이럴 땐 다른 팀을 담당하는 부커에게 출전 선수 추천 의뢰가 가기도 한다. 간혹 대리 출장 선수들이 홈런(?)을 치기도 하지만 이는 그렇게 녹록한 일은 아니다.

부커는 선수 발굴 말고도 경기에 필요한 제반 사항을 돕는 역할을 한다. 가장 큰 임무는 원활한 커뮤니케이션 유지와 선수의 취업비자 획득, 세금 문제 해결이다. 특히 선수들이 자신의 힘을 이용해 금전적 수익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비자 획득 문제가 중요하다. 단순비자로 들어온 선수가 취업 활동을 할 경우 재입국 금지, 추방 등의 규제 조처가 내려지는데다 대회 주최사 역시 세무조사 등 불상사를 당할 수 있다. 흥행비자는 대부분 3개월 단위로 발급된다. 세금 문제에서는 경기가 개최된 국가와 국내 세무서 간의 협약이 있는지도 중요하다. 조세조약국이 아니면 이중으로 세금을 내야 한다. 이런 업무는 평생 운동만 하고 살아온 선수들에게는 생소할 수밖에 없어 부커가 처리해주는 것이다.

가짜 부커들도 있다. 이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달콤한 유혹을 할 때가 많다. 국내시장 규모에 비해 규모가 큰 해외시장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선수들의 심리를 이용해 자신이 대형 이벤트사와 선이 닿아 있고 대회에 보내줄 수 있다고 접근한다. 가짜 부커인지 알기 위해서는 이들의 접근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세계는 단순하게 아는 사람이 대회사 내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대회 출전이 이뤄지지 않는다. 이벤트에서 수억원대 계약금을 받아줄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경우도 많은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사기성이 농후하다고 볼 수 있다. 어떤 형태로든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선수에게 거금을 안겨주는 대회사도 없거니와 엘리트 스포츠 출신이라고 해도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아닌 이상 대회사가 크게 흥미를 갖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사이비 부커를 만나지 않으려면?

일반적으로 사이비 부커들은 이벤트사와 관련이 없으면서도 관련이 있는 것처럼 접근해 불법 계약서를 만들고, 이벤트사 쪽에 자신이 계약 대리인 행세를 하는 양다리 걸치기 방법을 쓴다. 요즘 들어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심심찮게 이런 일이 벌어진다. 다음 UFC 진출이 확실시되는 한 선수는 아무 상관도 없는 세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UFC 쪽에 대리인을 자처하며 동시에 서류를 접수하는 바람에 UFC 쪽이 뒤늦게 제반 사항 전체를 중단한 사례가 있다.

부커들의 보수는 세금을 뗀 개런티에서 20% 남짓 금액을 공제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다만 나중에 선수가 성장해 개런티가 늘어나면 받는 금액에 비례해 10%가량 수익이 보장되기 때문에 대부분 공제 비율을 낮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게 대회사를 설계하는 은밀한 설계자, 이들이 바로 부커다.

글·사진 천창욱 어려서 프로레슬링을 탐닉하면서 삶이란 피와 땀과 쇼가 뒤섞인 것임을 직감했다. 프로레슬링과 종합격투기 전문 해설자로 활약하면서, 최무배 선수를 한국인 최초로 프라이드(PRIDE)에 출전시키고, 김동현 선수를 UFC에 최초로 출전시키는 등 세컨드 활동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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