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0.07 14:58 수정 : 2013.10.07 14:58

지난 4월, ‘꿈 전도사’라는 이름으로 꿈같은 강연료 수입을 올리던 어느 유명 여성 강사가 논문 표절 의혹에 휩싸여 세상 한 귀퉁이가 소란하던 때였다. 머릿속에서 인문학자 서동진(계원예술대 교수)의 이름이 연관검색어처럼 떠오른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2009)라는 책으로 한국 사회의 자기계발 이데올로기를 계보학적으로 탁월하게 분석한 그는, 이후 많은 이들에게 마치 ‘자기계발 비판 전도사’처럼 인식돼온 게 사실이다. 글을 청했더니, 아닌 게 아니라 피로감을 토로했다. 여기저기서 그 사건에 관한 글을 써달라고 요청해왔지만 모두 거절했노라고 했다. 고맙게도 <나·들>의 요청은 물리치지 않았다.

서동진의 글1이 실린 5월호를 펴낸 뒤, 이름이 익은 한 독자한테서 전자우편을 받았다. 정기구독을 시작하기 전에 발행된 과월호들을 신문사까지 찾아와 얻어갈 만큼 <나·들>에 큰 관심을 보이던 독자였다. 그런데 서동진의 글에 몹시 화가 나서 이내 구독을 중단할 태세였다. 처음엔 맥락을 종잡을 수 없었지만, 차츰 짚이는 데가 있었다. 그는 자기계발과 관련한 비판을 인간이 꿈을 좇는 행위에 대한 비판으로 오해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 유비(類比)의 오류가 있었다고 해도, 자기계발 의지와 꿈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어 보이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서동진의 책에서도 그것에 관한 단서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자기계발 담론과 비판 담론

“그것(자기계발 의지)은 ‘반공훈육사회’를 비판하며 시민이 스스로 자기 꿈과 참여를 실현할 수 있는 세계를 꿈꾸었던 자유주의자들과의 행복한 만남을 통해, 신세대 혁명에 기대어 모두 똑같은 생각을 주입하는 학교사회를 비판했던 자유주의자들과의 즐거운 조우를 통해, 튀는 인재를 기죽이고 진취적인 기업가정신을 질식시켰던 대기업병 중증 환자로 경제체제를 비판하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전문가와 기업가, 경영자들의 축복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체제는 국가의 기획이자 자본의 전략이었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주체성을 만들어냈던, 즉 1980년대 이후 한국 사회를 잠식했던 그리고 이제는 지배적인 자기의 윤리가 되어버린 자유의 꿈, 자기계발에의 의지가 만들어낸 산물이기도 했다.”

좋은 자기계발이 있다면, 정치·자본 권력으로부터 자기계발의 헤게모니를 되찾는 것이 중요해진다. 고양 원더스와 그곳 사람들은 이에 관해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367~368쪽

이 글에서는 ‘꿈’이나 꿈에서 파생한 표현이 여럿 등장한다. 이 표현들은 어떻게든 자기계발 의지와 밀접한 관련을 보여주는 징후다. 서동진은 자기계발 이데올로기가 권력에 의해 주형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한국 근현대사를 거치며 시민들이 품어온 자유를 향한 ‘꿈’과 만나지 못했다면 주체들에게 지금처럼 윤리 차원으로까지 수용될 수 없었을 거라는 점도 함께 언급한다. 그는 미셸 푸코의 ‘통치 이성’(Governmental Rationality) 개념을 빌려 “권력은 자유를 통해서 작동한다”고 정언한다. 통치 이성은 결코 개인을 일방적인 훈육 대상으로 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자유주의가 주입식 교육을 비판하고 자기주도적 학습을 강조하는 건 오히려 자연스럽다. 이때 자유는 개인에게 자신을 주체로 인식하도록 하는 일종의 판타지다.

그러나 자유에의 꿈이 자기계발 강사들의 성공 담론으로 상품화돼 대량 유통된다고 해도, 우리가 기억하는 꿈의 원형이 저 유명한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킹 목사의 꿈이 가닿으려 한 엘도라도의 첫 기착지도 다름 아닌 자유의 땅이었다. 그렇다면 한때 킹 목사의 꿈이자 한국 시민사회의 꿈이기도 했던 그 자유를 이제 어찌할 것인가. 서동진은 자유에의 의지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인다. “반성과 비판이 이뤄지기 위해 갖춰져야 할 근본적인 조건은 자유이다. 결국 자유로부터 물러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문제는 자유를 지지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에 관한 새로운 물음, 새로운 ‘자유의 정치학’을 통해 자유를 유지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2

딜레마에 빠진 것처럼 보였던 자유는 그리하여 다시 그 늪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당위와 마주하게 된다. 서동진에게 자유는 ‘폐기’가 아니라 ‘재구성’을 위한 대상이다. 그러나 그는 재구성 이후 자유의 상까지는 제시하지 않았다. 그것은 책을 쓴 목적이 아니기도 할 것이다. 그가 이렇게 자유라는 개념에 꽤나 커다란 괄호를 쳐놓은 뒤 벌써 4년이 흘렀다. 그사이 그 괄호는 얼마나 채워졌고, 유동화된 자유는 어떤 형상으로 얼마나 재구성됐을까. 혹시 그나마 남아 있던 자유에의 의지, 즉 꿈만 퇴화한 것은 아닐까. 실제로, 사회 전반에서 자기계발 담론에 대한 피로감이 커지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감이 강해지면서 자기계발 비판 담론도 관습적으로만 인용된 측면이 없지 않다. 어쩌면 그도 딱 그 수준에서 ‘소비’되며 피로감을 느낀 건지도 모른다.

이런 현상은 주로 청년 문제를 다룰 때 도드라진다. 대학이, 기업이, 사회가 요구하는 스펙을 쌓기 위해 청춘의 낭만 따위는 멀리한 채 토익을 공부하고,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온갖 자격증을 딴 다음에 무보수나 다름없는 인턴 생활을 열정으로 감내하고 마침내 성형수술까지 하는 등 창의와 혁신에 대한 부름에 자발적으로, 그러나 이미 정해진 경로를 신실하게 따랐지만 결과는 청년실업이나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이었다는 플롯의 개인사들은, 그것이 엄연한 현실임에도 너무 보편적이기에 현대판 신파가 되고 말았다. 서동진의 각별한 주문과 달리, 자기계발 비판은 그런 무기력함에 대한 현장부재증명(알리바이)으로 불려나가고는 했다. “모든 게 이명박 탓이냐”는 지난 정권 때의 우스개처럼, 만연한 현실은 비판 담론의 클리셰로 이어지기 쉽다.

비자유마저 의지로 선택하게 하는 희망

자기계발 비판 담론이 한창 인용되던 2011년, 아이러니하게도 그보다 훨씬 뜨겁게 타올랐던 것이 ‘희망’이라는 추상명사로 표상된 그 무엇이다. 여기서 희망은 한진중공업 부산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이어가던 김진숙을 응원하기 위해 전국의 시민들이 버스를 타고 다섯 차례나 현장에 집결했던 ‘사건’이자 ‘현상’의 관형어다. 나는 당시 이런 문장이 담긴 글을 한 편 썼다. “‘희망’이라는 말은 묘해서, 뜻은 더없이 밝고 환하지만, 그 말이 딛고 선 현실은 정작 잿빛임을 스스로 방증한다. 희망은 ‘비현실’과 ‘유예된 현실’ 사이에서 유동하는데, 그러나 그것이 발화하는 순간, 유예된 현실 쪽으로 다가서려는 의지의 정향이 작동한다.”3

자기계발 담론과 그에 대한 비판 담론의 관계에 견줘 자기계발 담론과 희망 담론의 관계는 좀더 복잡하다. 얼핏 하나의 계열체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의 실상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당시 희망버스에 대한 비판 가운데는 구조를 직시하는 엄격한 과학적 실천이 아니라는 비판도 있었다.4 그런 관점에서 보면 자기계발과 희망은 둘 다 일종의 ‘자기착취’ 혐의를 지게 된다. 자기착취는 주술적인 희망 고문을 동력 삼아 결국 현실을 고착하거나 심지어 강화하는 구실을 한다. 그러나 자기계발과 희망은 엄연히 다르다. 자기계발은 ‘자유’조차 외부로부터 주입된 지상명령을 따르는 것이라면 희망은 ‘비자유’마저 의지로 선택하는 것이다.

이택광(경희대 교수)은 그해 희망버스에 대해 인상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희망버스는 ‘김진숙’이라는 안티고네에 공감하는 주체들의 출현이다. 안티고네는 누구인가? 두 오빠 중에서 에테오클레스만을 장례 치르도록 허락한 왕 크레온의 명령을 어긴 오이디푸스의 딸이다. 들에 버려진 폴리네이케스의 주검을 거둬 장례를 치른 그의 행위는 실정법을 어긴 자연법의 상징으로, 양심과 법의 명령 사이에서 전자의 편을 든 까닭에 처형당한 존재다. (중략) 희망버스는 객관적 인식으로 본다면, 아무런 해결책을 만들어낼 수 없는 과잉의 정치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이 ‘국가’에 대한 대책 없는 자기주장이라는 측면에서 ‘순수 정치’로서 의미를 가진다.”5

지기계발과 희망은 어떤 관계일까. 자기계발 비판 담론이 주목받던 2011년에 희망버스가 ‘발진’한 것은 우연일까. 자기계발 비판은 따지고 보면 현실을 바꾸려는 희망의 실천인지도 모른다.한겨레 류우종, 박승화.
이택광이 강조한 것은 안티고네로 상징되는 ‘특이한 주체’다. 희망버스는 노동운동 의제에 대한 공감(만)이 아니라 김진숙이라는 개인이 의미화된 것이다. 그의 분석이 현상 전체를 포괄할 수는 없겠지만, 공감의 대상이 김진숙이라는 독특한 개인이 아니었다면 희망버스는 가능하지 않았을 거라는 그의 말마따나 이후 쌍용차 희망텐트 등 ‘희망’이라는 관형어를 단 많은 기획들은 희망버스만 한 반향에 이르지 못했다. 물론 그 결과가 곧 특이한 주체의 부재에 따른 것으로 단정하는 건 무리다. 희망버스에 대한 학습효과가 이후 같은 구조의 노동 의제에 대한 관심을 떨어뜨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특이한 주체에 대한 공감이 무엇인가다.

대중문화의 팬덤 현상 같은 것일까. 당시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아래에서는 아이돌 공연장의 풍경과 비슷한 장면이 목격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사랑해요 김진숙, 우윳빛깔 김진숙” 같은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팬덤에는 주체적 실천이 없다. 팬들의 행위는 타자에 대한 감정의 자기지시적인 반응에 그친다. 김진숙에 대한 공감은 자신의 처지, 특히 불안정 노동에 대한 존재론적 동일시라는 점에서 다르다. 따라서 그녀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행위는 곧 자신을 향한 행위이기도 하다. 그 실천은 그렇게 자기를 긍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부정의 성격을 띤다. 실정법(현실)을 받아들이기만 했던 자신을 발견하고 그런 자신을 거부하려 한 것이다.

자기계발 비판 담론이 주목받던 시기에 희망버스가 ‘발진’한 것은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자기계발 비판을 강제된 자유에 대한 현실 비판이자 그것을 내면화한 주체의 자기부정적 폭로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안에는 이미 희망이, 다시 말해 유예된 현실로 다가가려는 의지의 정향이 내포된 것이다. 그리고 실천은 기본적으로 상황에 대한 대응이기에, 그 희망은 이미 실천을 시작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자기계발 비판은 현실에 대응하려는 희망의 실천이라는 정식도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다. 한 번의 실천이 곧 새로운 세계를 형성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실천은 존재를 다시 형성시킨다. 물론 그것도 한 번에 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것이다.

권력으로부터 되찾아온 자기계발

인간의 삶은 온전히 구조로 환원되지 않는다. 구조의 지배를 받지만 그 구조 또한 인간의 실천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것을 바꾸기 위한 실천의 근본적인 조건은 서동진 말대로 자유다. 희망버스에 대한 공감의 밑절미에도 ‘우리 모두의’ 자유가 놓여 있다. 그렇다면 자기계발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인간에게 자기계발은 생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일궈가는 과정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것은 학자의 학문일 수도 있고 장인의 기능일 수도 있다. <생활의 달인>(SBS)이라는 TV 프로그램 주인공들 가운데 다수는 생활보다는 생계 방편으로써 기능의 달인이지만, 그들의 능력을 보면 모든 노동은 예외 없이 전문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들 스스로 특화시킨 신체는 감동적이다.

좋은 자기계발도 있다는 걸 부정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정치·자본권력으로부터 자기계발의 헤게모니를 되찾아오는 일이 아닐까. 의미 있는 자기계발과 의미 없는 자기계발을 나누는 결정권을 누가 쥘 것인가. 그 결정에 따른 체계적인 차별과 그 결과로서의 양극화를 어떻게 시정할 것인가. 극소수의 성공자에 대한 막대한 보상이 아닌, 다수의 ‘미달자’에게 꿈과 희망을 지키면서 지속 가능한 삶을 꾸려갈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현실적인 실천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고양 원더스와 그곳 사람들이 유력한 답을 제시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선수들은 신체 영역에서 자기계발을 위해 하루하루 치열하게 산다. 그들에게 프로선수가 될 가능성이 크지 않은 현실은 오히려 그들이 자기계발의 진정한 주체로 설 수 있게 하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프로에서 단 한 번만이라도 공을 던지고 싶다는 희망은 물질이 가장 큰 목표인 프로 세계의 그것과 동행할 수 없다. 원더스 구단의 목표는 프로에서 배제된 선수들에게 ‘마지막 도전 기회에 도전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용을 길러내기 위한 개천’ 정도가 가장 현실적인 평가이겠지만, 구단 스스로 프로팀 승격을 바라지 않고 독립구단으로 남으려 하는 것은 선수에게 자기계발 기회를 제공하기보다는 성과에 올인하는 기존 프로 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자신만의 꿈이 있기에 그들은 자유로운 강팀이다.

글 안영춘 편집장 jona@hani.co.kr

1 ‘자본의 알리바이, 자기-계발’, <나·들> 5월호(제7호) 나들 인문사회학.

2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376~377쪽.

3 ‘그 버스의 행선지는 ‘희망’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11년 7월호.

4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은 “희망버스는 진보의 재앙”이라고 했고, 김기원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자본주의 시장체제가 아니다”라며 희방버스를 비판했다. 이들은 모두 진보계 인사로 분류돼왔다.

5 ‘김진숙 그녀, 자본주의의 안티고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1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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