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0.07 14:40 수정 : 2013.10.07 14:40

어느덧 야구인생 9회 말이다. 이미 승부는 기울었다. 프로야구 드래프트에서 낙방하고 2군에서조차 방출당한 초라한 성적표. 수없이 흘린 땀방울은 바람과 함께 증발해버린 지 오래다. 25.4cm밖에 되지 않는 프로의 마운드는 이제 인생 최고 높이의 목표가 됐다. 나의 열정은 영원한 2.5군인가?

햄스트링 부상을 당한 고양 원더스 여정호 선수가 투구를 중단한 채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한국 최초 독립야구단 고양 원더스에는 야구인생의 9회 말을 맞고 있는 선수들이 모여 있다. 낙방하고 방출된 프로야구계 ‘낙오자’들에게 원더스는 마지막 열정을 불사르는 곳이다. ‘열정은 기회로’ 귀결된다는 이 구단의 캐치프레이즈를 가슴속에 품은 채…. 하지만 절박함은 제각각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선수들은 그나마 형편이 낫다. 그들이 휘두르는 수만 번의 프리배팅과 그들이 던지는 수만 번의 피칭은 머잖아 1회부터 출전할 기회를 가져다줄지 모른다. 고령의 선수라면 말이 달라진다. 그들은 9회 말이라도 출전할 기회가 쉽지 않다. 한마디로 열정을 기회로 바꿀 시간조차 부족한 것이다.

그러나 원더스에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오늘도 그라운드에서 땀방울을 흘리는 선수가 있다. 전성기를 맞고 있어야 할 29살 나이지만 프로에 입성하겠다는 열정 하나로 공을 던지고 있는 좌완 투수 여정호다. 요즘 그의 땀방울은 더 굵어지고 있다. 올해 선배 1명을 포함해 9명이 프로구단에 발탁돼 한껏 꿈에 부풀어 있기 때문이다.

고양 원더스가 퓨처스 리그(프로야구 2군 리그) 교류경기 원정을 간 9월12일, 경기도 고양 홈구장에서 여정호 선수를 만났다. 그는 허벅지 햄스트링 부상으로 잔류군에 있었다. 야구복이 아닌 훈련복을 입고 있던 그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마침 두산-기아 2군 경기가 막 끝난 터라 구장 주변은 팬들로 ‘장날’을 맞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산과 기아 2군에는 1군에서 내려온 ‘스타’가 몇몇 포진해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팬클럽은 당연히 없죠. 팬레터 한 번 받아본 적 없으니까요. 초콜릿은 한 번 받아본 경험이 있네요.”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인터뷰를 시작하고 5분이 안 돼 그라운드에서 들려온 고함 한마디에 깨졌다.

“야, 거기서 뭐해.”

“인터뷰 때문에…. 코치님에게 말했는데요.”

“빠질 거면 말을 해야지. 기다리는 선수들이 있잖아.”

“죄송합니다.”

고함의 주인공은 팀 트레이너였다. 부상 선수들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트레이너는 그가 사라진 것을 보고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팔꿈치 부서진 ‘배팅볼 투수’

여정호 선수의 프로행을 막은 건 9할이 부상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부상만 없으면 프로에 갈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정도다. 인터뷰 장소로 택한 1루 쪽 관중석은 선수라면 낯설어야 하지만 그에게는 익숙한 자리일 것이다. 부상으로 고생한 시절 묵묵히 경기를 지켜보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까지 수술대에 오른 횟수만 5번. 2006년 동국대 편입 뒤 팔꿈치 관절경 뼛조각 제거 수술을 시작으로 2009년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 그 뒤 바로 뼛조각 제거 수술, 발목 골절 수술 그리고 2010년 발목 재수술 등 팔꿈치에 3번, 발목에 2번 칼을 댔다. 지긋지긋한 부상의 연속이었다. 인터뷰 당시에도 부상 중이었다.

최악의 해는 2009년으로 기억한다. 연이어 수술대에 3번 올랐으니 치를 떨 만했다. 일본 프로야구단 지바 롯데 트라이아웃 때 오버페이스를 하는 바람에 투수에게 생명줄과 같은 팔꿈치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부상을 무릅쓰고 과욕을 부렸을까? 이유는 ‘눈물 젖은 빵’에 있었다.

2008년 동국대 졸업 뒤 두 번째 프로야구 드래프트(첫 번째는 고졸 뒤)에서 좌절을 맛본 그는 대학 감독의 권유로 우리 히어로즈(현 넥센) 배팅볼 투수로 ‘입사’하게 된다. 야구선수에게 입단이 아닌 입사라는 말을 쓴 이유는 그가 선수가 아니라 훈련보조요원, 즉 직원으로 야구를 했기 때문이다.

“타자나 코치들이 요구하는 대로 변화구·직구 등을 던져주는 것이 배팅볼 투수예요. 저기 마운드에 투구 기계 보이죠. 기계와 같은 일입니다. 하지만 더 서러운 것은 배팅볼 투수는 선수 계약이 아니라는 거예요.”

선수가 아닌 직원으로 야구를 계속하던 그에게 일본에서 들려온 트라이아웃 소식은 희망과도 같았다. 하지만 불행으로 바뀌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1차 불펜피칭을 통과하고 2차 청백전 때 무리한 것이 화근이었다. 메이저리그 출신 명장 보비 밸런타인 감독이 직접 보고 있어서 더욱 긴장했다.

“공을 던지는데 팔에서 ‘뚝’ 하는 소리가 났어요.”

곧바로 귀국해 진찰받은 결과 팔꿈치 인대 파열이었다. 그 유명한 ‘토미존 수술’을 받았다. 프로 입단 가능성은 한없이 멀어졌다. 원상회복만 된다면 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의료진의 반응이 신통치 않았기에 더욱 기운이 빠졌다. 수술 뒤 힘들 것이라는 말은 부모에게도 하지 못했다. 인터뷰 당시 그는 수술 부위를 보여주며 회한에 잠기는 듯했다.

“지금도 팔이 완전히 굽혀지지 않아요. 투구에는 문제가 없지만….”

팔꿈치보다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술 뒤 재활 때 2차 부상을 입었다. 몸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달리기를 하다 왼쪽 발목이 부러진 것이다. 한창 꽃필 나이인 25살, 그는 강속구를 던질 왼쪽 팔과 왼쪽 다리를 모두 잃었다.

“정말 하늘이 무너진 듯했어요. 한 고비를 넘겼는데 다른 고비가 찾아올 줄 미처 몰랐어요. 그때 야구를 그만뒀으면 부모님에게 이렇게 미안하지는 않았을 텐데…. 저 때문에 고생하시는 부모님 얼굴을 뵐 낯이 없습니다.”

슈퍼스타들도 부상 때문에 꿈을 꺾는 경우가 많다. 1980년대 고교야구 스타로 혜성처럼 나타나 프로야구 신인왕을 거머쥐었던 MBC 김건우 선수, 롯데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우승 주역 염종석 선수 등이 사고와 부상으로 불운하게 은퇴한 대표적 선수들이다. 하지만 그는 스타가 아닌 까닭에 은퇴라는 말은 사치였다. 부러진 날개로 날지언정 열정까지 버릴 순 없었다.

“아프다고 생각하다보니 나약해지는 것 같았어요. 상태가 호전되자 목발에 의지하지 않고 참고 다녔어요. 부상이 악화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때는 정신력의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정신력으로 버텨온 몸은 잔부상을 가져왔다. 중요한 순간 허리 부상으로 도중하차했다. 어쩌면 그의 강인한 의지가 의지를 꺾는 모순을 낳았는지 모른다. 그는 잔병치레가 많다고 했다.

하와이 독립리그… 2.5군의 비상

2003년 프로야구 드래프트에서 부산상고(현 개성고)는 한 명의 선수도 지명받지 못했다. 그 속에는 여정호 선수도 있었다. 지역 라이벌 부산고에 비하면 참담한 성적이었다. 당시 부산상고가 워낙 약체였기 때문이다. 현재 고등학교 동기들은 모두 야구를 그만뒀다. 프로야구에서 뛰는 부산상고 동문 역시 손에 꼽을 정도다. 그나마 이름 있는 선수는 두산 이혜천, 삼성 윤성환·채태인, 롯데 이승화 선수 등 모두 선배다.

후배들이 연습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여정호 선수. 부상 기간이 길었던 만큼 그라운드가 아닌 관중석에 앉는 날도 많았다.
“부산상고 동기 중 야구하는 사람은 제가 유일해요. 고등학교 졸업 뒤 다들 야구를 포기했죠. 저 포함해서 3명 정도만 대학에 갔는데 그 친구들도 야구를 그만뒀어요. 지금은 다들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2년간 지루한 재활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부산중 동기인 전병두(현 SK) 선수는 상종가를 치고 있었다. 2003년 드래프트에서 두산에 2차 1지명으로 가능성을 인정받은 전 선수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국 대표 선수로 발탁됐고, 전성기 SK의 일원으로 맹활약 중이었다. 동기의 활약은 자극제가 됐다.

“재활 운동을 해보면 아실 거예요, 얼마나 포기하고 싶은지…. 주위 친구들이나 동기들 모두 군대에 가고 야구 외적인 일을 하니까 동요가 됐죠. 그때마다 부모님이 ‘기죽지 말라’고 다독여주시고 병두도 전화해서 힘을 보태줬어요. 마음속으로 ‘나도 할 수 있다’고 다잡았어요.”

그는 화려하진 않지만 잠시 성취의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재활을 마친 2011년, 한국인 에이전트가 메이저리그 입단 테스트를 권유했다. 투구하기에는 100% 몸 상태가 아니었지만 메이저리그 진출 유혹을 뿌리치진 못했다. 결과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2곳 모두 낙방. 그를 본 외국인 스카우터는 ‘빅리거감’이 아니라고 말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한국 프로야구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선수를 메이저리그에서 받아줄 리 만무했다. 그 뒤 스카우터의 추천으로 독립리그팀 하와이 나코아 이카이카에서 뛰게 됐다. 하지만 여기에도 사연이 많았다.

“하와이 공항에 내렸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에이전트는 관계자가 나와 있을 거라고 했는데…. 공항에서 노숙을 하고 다음날 부랴부랴 운동장으로 갔어요. 말은 안 통하지, 감독은 큰소리치지, 바로 마운드에 섰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더군요.”

그는 처음에 ‘덩치 큰 선수들에게 홈런을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주눅 들었지만 코치의 조언으로 자신감을 갖게 됐다. 흔들리는 투수에게 모든 감독이 한결같이 주문하는 ‘네 공을 믿고 한가운데 던져라’라는 그 말이었다.

“그런데 정말 내 공이 먹히더라고요.”

자신감을 갖게 된 뒤 볼을 컨트롤하는 능력도 갖게 됐다. 팀의 신임을 얻으며 중간계투와 마무리로 나서 30경기 가까이 소화했다. 시즌 성적 1승1패10홀드, 2점대 방어율. 준수한 기록이자 이역만리에서 찾은 희망이었다.

드디어 입성한 프로도 부상으로 날리고

50, 11, 27.

여정호 선수에겐 잊을 수 없는 3개의 숫자다. 모두가 프로 유니폼을 처음 입은 NC 다이노스와 연관된 것이다.

월 100만원 정도 받으며 미국 독립리그에서 고생한 뒤 멕시칸리그 진출을 위해 미국에 머물 때였다. SK 김경태 코치가 NC의 트라이아웃 소식을 전해왔다.

“내일이 트라이아웃인데 오늘 전화가 온 거예요. 한국에 가야겠는데 비행기 표 살 돈이 없어서 세일 표를 간신히 구했어요.”

그는 프로로 가기 위한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미국 독립리그에서 뛰며 공에 대한 자신감도 붙은 상태였다. 청심환까지 먹어가며 열정적으로 공을 던졌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불펜피칭 때 146~147km 나왔으니까 말 다했죠. 10개 좀 넘게 던졌을 때 ‘그만’이라는 사인이 났어요. 무조건 합격하고 싶다는 생각이 초인적인 힘을 부른 것 같아요.”

그날은 부산에 계신 부모까지 아들 모습을 보러 오셨다. 대학 졸업 뒤 4년 만에 아들 피칭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버지가 ‘미국에서 괜한 시간 보낸 것 아니구나’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는 합격 통지를 받고 운동장 한켠에서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27년간 뒷바라지를 한 부모에 대한 미안함과 꿈에 그리던 프로 유니폼을 입는다는 감격이 교차했다.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숫자는 NC에서 받은 프로 첫 배번인 50번이다. 그는 지금 고양 원더스에서도 50번의 배번을 달고 있다.

“50번은 잊을 수 없는 숫자예요. 다시 프로에 가겠다는 일념이 이 번호에 담겨 있죠.”

그의 프로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또다시 부상 악재가 다가온 것이다. 전남 강진에서 시작해 미국 애리조나 스프링캠프 때까지 줄곧 허리에 이상을 느꼈다. 코치들 몰래 진통제를 먹으면서 버텼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슬렁슬렁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코치들은 “너 어디 아프냐”고 물어왔다. 그때마다 부상을 숨겼지만 곧 탈이 났다. 부상은 그를 시즌

시작부터 잔류군으로 향하게 했다. 잔류군 경기에서도 좋지 않은 피칭이 이어지자 어느 날 매니저에게 전화가 왔다.

“내일 구단에서 전화 올 거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다음날 구단의 최후통첩이 왔다.

“함께하고 싶었는데 미안합니다.”

그는 11월27일 방출당했다. 잊을 수 없는 숫자가 2개 더 생긴 날이었다.

고양 원더스 홈구장 뒤 공터에는 부러진 방망이들이 쌓여 있었다. 선수들이 부러트린 방망이는 프로 진출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비정한 야구판, 퇴로 없는 선수들

프로야구판은 미국 경제학자 로버트 프랭크의 말처럼 20 대 80 사회를 넘어 ‘승자독식 사회’다. 다른 것이 있다면 부의 세습이 없다는 것뿐이다. 한 해 프로야구 드래프트에 참가하는 고졸·대졸 선수는 700여 명, 이 중 10% 정도인 70~80명만 프로 무대를 밟는다(2014년 프로야구 드래프트에는 10구단인 KT가 15명을 선발해 총 105명이 지명됐다). 여기서 1군에 입성하고 슈퍼스타가 될 확률은 한 자릿수로 떨어진다. 프로에 입성했다고 방심하면 바로 낙오다. 한국야구위원회(KBO)에 등록된 1·2군 선수는 9개 구단

총 600여 명(1군 200여 명). 매해 70~80명의 선수가 입단하고 그 수만큼 방출된다. 그리고 그들은 드래프트를 받지 못하는 선수들처럼 ‘야구 실업자’가 된다.

모든 스포츠가 그러하듯 야구도 나이나 연차, 부와 상관없이 실력에 의한 선의의 경쟁을 하는 공정한 게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2군에도 들지 못했다면 기회조차 없는 것 또한 야구판의 현실이다. 한마디로 퇴로가 사라지는 것이다. 엘리트 체육을 지향하는 야구판에서 낙오된 선수들은 백지상태로 ‘야구가 없는 사회’로 쫓겨난다. 한국 야구계는 낙오자들의 열정에 대해 아무런 기회도 주지 않는다.

여정호 선수만큼 불행한 야구인생을 경험한 선수는 숱하게 많을 것이다. 다만 그가 특별한 것은 그가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열정을 불사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 한복판에 한 개인이 사재를 털어 만든 독립구단이 있다.

KBO는 ‘700만 명 관중 시대’ ‘10억원 연봉 시대’가 열렸다고 홍보한다. 하지만 독립구단 선수들은 기껏해야 1천만원의 연봉 아닌 ‘생활비’를 받고 열정을 기회로 바꾸기 위해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땀방울을 흘린다. 프로야구장의 화려한 축포 소리를 들으며 눈물 젖은 빵을 먹고 ‘패자부활전’을 준비하는 것이다.

‘열정에 기회를’ 마지막 승부

여정호 선수가 고양 원더스를 찾은 것은 NC에서 방출되고 SK 테스트에서 낙방한 뒤였다. ‘여기서도 안 됐는데 다른 팀에 가봐야 안 될 것’이라는 자포자기 심정이 밀려들었다. 그러던 차에 김성근 감독이 있는 원더스에 무작정 찾아갔다. 팀이 전지훈련을 떠나기 이틀 전이었다. 지독한 훈련으로 유명한 김 감독 앞에서 마지막이고 싶은 테스트를 받았다.

“미국 독립구단에서도 던졌기 때문에 어쩌면 저에겐 독립구단이 편하죠. 무엇보다 그땐 야구만 할 수 있다면 어떤 구단이든 상관없었어요.”

그는 원더스가 없었다면 유니폼을 영영 벗든가, 아니면 또다시 미국 독립구단을 노크했을 것이다. 그에겐 원더스가 프로를 향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이제부터라도 관리만 잘한다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줄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현재 중간계투 보직을 맡고 있다. 모든 투수가 선발을 꿈꾸지만 그만은 중간계투 보직이 좋다고 말한다. 의외였다.

“선발투수들은 닷새에 한 번씩 공을 던지지만 중간계투는 매일 던질 수 있거든요. 하루라도 공을 안 만지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부상은 원더스에서도 그를 괴롭히고 있다. 팔꿈치와 발목은 완쾌됐지만 어깨 근육통을 달고 산다. 그래서 투구 폼이 안 좋아지고 힘으로 공을 던지려다보니 또 다른 부상에 시달린다. 지금 겪고 있는 햄스트링 부상도 두 번째다. 그만큼 경기에 나설 기회도 줄어들었다.

“제가 몸 관리를 잘못한 측면이 크죠. 트레이너님이 항상 몸이 안 좋으면 말하라고 하는데 저는 의욕이 앞서서…, 그냥 참고 던지거든요.”

올 시즌 1패만 기록 중인 그는 중간계투로 나올 때도 큰 점수차로 지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에게 프로의 길은 다시 멀어지는 것일까?

“제 실력이 많이 부족해요. 하지만 부상만 조심하면 충분히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감독님께서 야구를 너무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좀더 배우고 싶어요. 공 하나라도 프로에서 던지는 것이 제 마지막 소망입니다.”

그는 김성근 감독이 강조하는 “지금 이 실력으로 1군에 갔을 때는 1군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초심으로 돌아간다.

1984년생인 그는 외국인 선수를 빼면 팀 내 최고참이다. 몇 달 전 선배인 이승재(NC) 선수가 프로로 데뷔하며 쑥스럽게 물려받은 자리다. 팀 내 최고참으로 어린 선수들을 다독이고 부상을 치료하느라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1살 어린 후배가 주장을 맡고 있고 저는 부주장 격이라고 해야 하나요. 대부분 후배들이라 기술적 조언보다 정신적 조언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후배들은 어리다보니 흔들릴 때가 많거든요.”

그에게 야구를 계속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준 허민 구단주에 대한 생각도 남달랐다. 특히 선수 출신이 아니면서도 미국 독립리그에서 뛰고 있는 활약상에 고무된 표정이었다. 야구선수가 봤을 때도 쉽게 도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데 그걸 해내는 모습은 더없이 감동적이다.

“야구를 제대로 배운 사람도 아니고, 더구나 너클볼은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어쩌면 저보다 더 열정적이고 더 나은 정신력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프로 입성은 꿈의 실현이자 부모님 뵐 낯

인터뷰 말미에 ‘야구는 무엇이냐’며 상투적 질문을 던졌다. “여자친구”라는 답이 돌아왔다. 잊을 수 없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그에게 프로란 무엇일까. “꿈의 실현이자 부모님 뵐 낯”이라고 말한다. 자신에게는 꼭 가고 싶은 무대이고 부모에게는 힘들게 뒷바라지해준 것에 대한 보답의 의미다. 그는 1년 안에 그곳에 가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다. 프로에 대한 열망은 그뿐만 아니라 독립구단에서 뛰는 모든 선수의 바람이다. 황혼이 밀려드는 고양 야구장에선 훈련시간이 끝났는데도 배팅·피칭 연습에 한창인, 열정만큼은 1군인 선수들이 미래의 꿈을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

글 김원일 기자 nirvana@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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