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0.07 14:16 수정 : 2013.10.07 14:16

젊음과 낭만의 대명사인 서울 홍익대 인근 서교예술실험센터 앞에선 매주 화·금·일요일 이색적인 좌판이 펼쳐진다. ‘개인주의 야채가게’다. ‘1인 가구의 건강한 식사’를 표방한 만큼, 말 그대로 개인의 한 끼 식사를 위한 소량의 채소와 과일을 싼값에 판다. 하지만 외관상으로 이 상점은 보통의 채소가게와는 사뭇 다르다. 매장도, 휘황찬란한 간판도, 판매용 리어카와 매대도 없다. 상점의 내부라곤 1평(3.3m²) 남짓한 작고 초라한 꽃무늬 돗자리 위에 놓인 고추, 마늘, 양파, 당근, 파, 바나나, 토마토 등 품목별로 5~6개의 채소와 과일이 전부다. 돗자리 옆 칠판에 ‘마늘 50원, 양파 500원, 대파 350원, 풋고추 200원, 청양고추 50원, 가지 450원, 단호박 1/4 750원, 토마토 400원, 바나나 300원’이라고 쓰인 가격표가 이곳이 상점임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호객 행위도 없다. 이 상점의 주인은 더 예사롭지 않다. 여전히 소녀티가 묻어나는 20대 여성 시각예술 작가인 유재인(29)씨다. 그는 “감자 2개, 대파 1뿌리, 마늘 5개 등 한 끼 식사를 위해 낱개로 구입해야 하는 개인을 위한 채소가게”라고 소개했다.

마늘·청양고추 50원, 양파 500원, 바나나 300원…

“작업실에서 몇 해 홀로 음식을 만들어 먹다보니, 대파는 항상 썩어서 버리게 되더라고요. 카레를 할 때면 감자와 당근, 양파를 봉지째 사야 했고요. 1만원어치 재료비를 사놓고 절반 이상 버리는 게 불합리했어요. 나홀로족에게는 1천~2천원어치 필요한 만큼만 살 수 있는 채소가게가 절실합니다. 음식을 해먹지 않는 원인이 단순히 게을러서가 아니라 다른 데 있었던 거예요.”

무엇보다 상호가 기발하다. 그는 “가게 이름 지을 때, ‘혼자 사는 젊은이를 위한’ 의미를 잘 드러내는 상호를 가장 먼저 고민했다”며 “환경과 1인 가구, 특히 88만원 세대의 고충을 담은 가게이자 유재인이 만든 예술작품”이라고 말했다.

유씨가 ‘개인주의 야채가게’를 구상한 건 3년여 전부터다. 2010년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그가 조그만 작업실을 마련한 것이 계기가 됐다. “과년한 딸이 취직도 안 하고 빈둥대자 어머니의 잔소리는 최고조에 달했죠. 작업을 핑계로 작업실에서 하루 대부분을 보냈고, 직접 끼니를 해결해야 할 때가 많았어요.” 당시 그는 미술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근근이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수입이 많지 않은데다 월세까지 내야 하는 가난한 예술가인 탓에 매끼를 1천원 선에서 해결해야 했다. 편의점에서 파는 삼각깁밥이나 컵라면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여러 달을 지내니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다. 결국 밥으로 대체했지만, 반찬까지 챙겨 먹는 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채소 구입비가 만만치 않아 대부분 김치로 때웠고, 평소 좋아하던 볶음밥·카레라이스·자장밥·오므라이스 등을 해먹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음식 한 끼 해먹자고 7천원어치 채소를 사는 게 사치였다”는 그는 “라면에 필요한 대파 1뿌리를 위해 한 단을 살 수밖에 없는 현실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 9월6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익대 거리에 위치한 서교예술실험센터 앞 ‘개인주의 야채가게’에서 유재인씨가 채소와 과일을 진열해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박완서 선생님은 지구에 있는 존재 중 오직 인간만이 쓰레기를 만든다고 지적했고, 배우 김혜수씨는 인터뷰에서 옷을 안 사입은 지 10년이 넘었다고 하더군요. 감히 제가 쓰레기를 만들고 음식 재료를 함부로 버려서 되겠는가 싶었어요. 해결책이 뭘까 봤더니, 개인이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재료를 구입해서 요리할 수 있는 소비 시스템이면 되겠더라고요.”

‘개인주의 야채가게’는 쌉싸름한 경험의 산물인 것이다. 그는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며 살지 말자는 거죠. 마트에서 대량으로 판다고 그렇게 살아갈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구매 시스템을 만들어보자는 일종의 제안이기도 하고요. 우리도 싱싱한 재료를 필요한 만큼 사서 건강한 한 끼 식사를 해먹을 권리가 있음을 알리고 싶었어요. ‘개인주의 야채가게’를 계기로 그런 소비 시스템이 만들어지면 더 바랄 게 없어요.”

자본주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부추긴다. 우리나라 전체 가구 수의 4분의 1이 1인 가구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현실을 배려하는 판매 시스템은 미흡하기만 하다. 그 역시 “소비자의 물품 구매처가 대형마트 중심으로 옮겨가면서 1+1 제품이 저렴한 것처럼 인식되지만, 실은 나홀로족에겐 쓸모없는 서비스에 불과하다”며 “1인 가구 처지에서 보면 오히려 낭비와 과소비를 부추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개인주의 야채가게’엔 나홀로족에겐 하나 사면 하나를 더 주는 곳보다 ‘하나를 10명이서 나눠 살 수 있는 곳’( 1 나누기 10)이 더 절실하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4인 가족 위주 장보기 시스템에 불만

‘개인주의 야채가게’를 본격적으로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건 공공미술회사의 인턴 계약이 종료된 지난해 말이다. 대학 졸업 3년차에 접어들면서 어떻게든 유재인이라는 이름을 내건 작업과 그 성과물을 내야 한다는 절실함도 한몫했다. 운 좋게 지난 6월 말 서교예술실험터 공모전인 ‘소액다컴’(소액으로 작은 예술 프로젝트를 지원해주는 사업)에 응모해 선정됐다. 비록 50만원이라는 적은 지원금이지만 그에겐 단비와 같았다. 이런 지원금도 받지 못한 채 작업하는 친구들이 주위에 널렸다. 가게는 한 달여 준비 끝에 7월26일 정식 오픈했다. 애초 계획대로 100일간 한시적으로 운영한 뒤 11월3일 폐점할 계획이다.

“프로젝트 기간이 끝나면 ‘개인주의 야채가게’의 흔적도 사라지는 게 아쉽네요. 특허라도 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아이디어가 너무 좋은데….”

유재인씨는 “나홀로족도 건강한 한 끼 식사를 만들어 먹을 권리가 있다”며 “대파 1뿌리, 감자와 양파 1개를 사기 위해 1단, 1봉지를 사야 하는 소비 시스템은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왼쪽 아래 사진은 페이스북을 보고 찾아온 소이로씨가 채소와 과일을 구매하는 모습. 오른쪽은 ‘개인주의 야채가게 선언문’.
“그렇긴 하지만 돈을 벌려고 시작한 것도 아니고…. 가게를 열고 난 뒤 취지에 공감하는 분이 예상보다 많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그만큼 나홀로족이 많고, 합리적 소비를 못하게 하는 시스템에 대한 불만이 많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직접 해보니 한계도 있더라고요. 돈이 되지 않아 상업적으로 성공할 만한 모델은 아니더군요.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개인주의 야채가게’의 취지가 널리 알려져 전국 어디서든 낱개로 채소와 과일을 살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제 취지에 공감하는 분이 많다면 다 함께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 형태로 지속적으로 운영해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요.”

‘개인주의 야채가게’는 철저하게 유씨의 개인 프로젝트인 만큼 채소와 과일을 사서 파는 것은 물론이고 회계와 마감, 홍보물 제작,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관리 등의 업무를 모두 그가 관장한다. 기자가 찾아간 9월6일도 가게 문을 열기 한두 시간 전에 장을 본 뒤 돗자리를 깔고 판매할 물품을 정리하는 일을 도맡아했다. 포스터와 홍보 브로슈어, 스티커 역시 그가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넣은 것이었다.

‘개인주의 야채가게’만의 차별 전략은 ‘키트’다. 음식 조리에 꼭 필요한 채소를 1인용으로 묶은 일종의 세트 메뉴다. 뭐든지사총사(대파·마늘·양파·고추), 카레(감자·양파·당근·양송이), 월남쌈(당근·양파·오이·깻잎), 쌈채소(상추·깻잎·고추·마늘), 해독주스(토마토·양배추·브로콜리·당근·바나나·사과), 샐러드(양상추·치커리·적양배추·오이·파프리카·방울토마토), 구지가(龜旨歌, 감자·가지·단호박·토마토·옥수수 등 구워 먹는 채소) 키트 등이다. “음식에 필요한 채소를 한꺼번에 팔면 좋겠다 싶었어요. 마트에서 김밥 재료를 한꺼번에 파는 것처럼 말이죠.” 유씨는 “그렇게 하니까 반응이 좋았고, 해독주스와 샐러드 키트는 특히 여성에게 인기가 많았다”며 “음식에 필요한 여러 종류의 채소를 한꺼번에 사는 것보다 경제적·실용적이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가게의 매출과 수익은 미미한 편이다. 영업시간이라고 해봤자 일주일에 11시간(화·금요일 저녁 6~9시, 일요일 정오~오후 5시)이 전부이고, 품목도 적은 탓이다. 많이 팔린 날은 2만원, 공친 날은 1천~2천원 남짓이란다. “순수익이 가장 많았던 날은 3천원이었어요. 수박을 판 날인데, 2만원짜리 수박을 4등분해서 500원을 붙여 팔아 여기에서만 2천원이 남았어요. 재료 구입비와 재고 등을 감안하면 순수익이 거의 없어요. 마트의 대량소비 시스템에 반한 프로젝트이다보니 인근의 서교시장이나 상수역 인근 과일가게에서 판매 물품을 구입하고 있기도 하고요.”

판매가 책정 원칙이 ‘1/n+100원’인 것도 마진이 낮은 원인이다. ‘개인주의 야채가게’에서는 10개가 들어 있는 양파망을 3천원에 샀으면 1개당 300원 원가에 100원의 마진을 더해 400원에 판매하는 것이 원칙이다. 현재처럼 유씨가 직접 구입한 5천~2만원어치 채소와 과일을 파는 시스템에서는 순이익이 하루 1천~2천원을 넘을 수 없다. 그는 “올여름엔 유독 비가 많이 와서 가게를 열지 못하기도 했고, 판매가 저조한 날도 많아 타격이 컸다”며 웃었다. 실제 ‘개인주의 야채가게’의 매출과 수익은 어떻게 될까. 유씨는 “9월 초까지 채소와 과일을 산 금액은 24만6천원, 판 금액은 21만2천원으로 3만원가량 적자”라고 말했다.

800원 채소 산 첫 손님 “효율적 소비”

현재와 같은 적자 구조가 ‘개인주의 야채가게’의 한계가 아닐까. 상점의 첫째 목적은 수익 창출이고, 상업성이 담보되지 않을 때는 포기하는 게 맞다. “수익성이 문제이긴 해요. 소량 판매 시스템일지라도 물품의 종류와 양이 풍부하고, 이를 찾는 소비자가 있다면 승산이 없는 건 아니라고 봐요. 어쨌든 어릴 적 소꿉장난하는 것 같아 매번 들떠요. 지금은 페이스북(facebook.com/yacheguail)을 통해 고객과 소통하면서 얻는 재미와 만족감이 더 큽니다.” 유씨는 오픈 한 달 전인 6월27일부터 페이스북 페이지에 판매 품목과 가격, 정산 내역, 공동구매 정보, 운영 일지 등을 직접 기록해오고 있다.

다행히 지난 8월 이후부터 단골 고객이 하나둘 생겼다. 일부러 들러 물건을 사가는 이들도 있다. 이미 ‘개인주의 야채가게’ 페이지를 받아보는 사람이 300명, 트위터 팔로어도 700명을 넘겼다. 페이스북 댓글을 보면 “지역에도 이런 가게가 있으면 좋겠다” “아이디어가 참신하다”며 격려하는 글들이 눈에 띈다. 매상이 가파르게 늘지 않아도 ‘개인주의 야채가게’에 공감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만으로도 그는 절반의 성공이라고 생각한단다.

이날 첫 고객은 페이스북을 보고 찾아온 소이로(29)씨였다. 한참 동안 가게를 구경하던 소씨는 “한 번쯤 이런 가게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는데, 정말 있다고 해서 깜짝 놀라 찾아왔다”며 “소비자로서는 낭비를 줄이고 경제적·효율적 소비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며 반가워했다. 이날 소씨는 청양고추 4개, 마늘 4개, 토마토 1개를 800원에 구입했다.

기자는 “저 때문이라도 오늘 매상이 좋을 것 같지 않아요? 느낌이 좋다”며 들뜬 기분으로 유씨에게 물었다. “글쎄요~.” 그의 시큰둥한 반응 때문이었을까. 이후 가게를 찾는 손님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 길을 지나던 여성 몇몇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거나,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이게 뭐예요?”라고 묻고 지나간 것이 전부다.

“호객 행위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워낙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서요.”

“바나나 1개 얼마죠? 2개 제가 살게요. 출출한데, 우리 같이 먹어요.”

“네, 600원요.”

유씨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그는 “주 고객층이 젊은 여성이기 때문에 채소보다 과일이 더 잘 팔린다”며 “바나나, 토마토, 포도, 사과, 참외를 1개씩 사가는 소비자가 많은데 바나나가 가장 인기가 많다”며 웃었다.

11월 3일 실험 종료… “전국 골목에 생겼으면”

유씨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가게를 비우는 9월29일 가게 운영을 도맡아하기로 한 일일 호스트가 방문했다. 친구 사이인 최소담(23)·이로사(23)씨인데, 이들은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알게 됐고, 재밌을 것 같아서 호스트를 자청했다”며 “가져온 물건들을 열심히 다 팔아 최대 매출을 기록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소담씨는 “페이스북을 보고 취지에 전적으로 공감했다”며 “이런 형태의 가게가 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쉽게도 폐장 때까지 이들 외에 손님의 발길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매상 역시 기자가 일일 호스트를 위해 바나나 2개를 더 구입한 것이 전부다. 판매액도 2천원에 그쳤다. 안타까워 몸이 단 기자와 달리 유씨는 담담했다. “이 실험을 통해 그 필요성이 널리 알려지고, 전국적으로 골목골목에 ‘개인주의 야채가게’라는 이름이 지속될 수 있게 하는 게 이번 프로젝트의 목적이라서 크게 개의치 않아요. 앞으로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더 연구하고 고민해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언론의 주목을 받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기자가 찾아와 인터뷰를 해준 것만으로도 놀라운 경험이고 영광이에요.”

인터뷰 내내 침착하고 진지했던 유씨가 환하게 웃었다. “행사 마지막 날인 11월3일에 진행되는 ‘오늘은 집단주의- 마스터 셰프 오브 단칸방’이라는 행사에 많은 분들이 참여해줬으면 좋겠어요. 함께 간장과 채소를 섞어 장아찌를 만들어 나눠갖는 행사인데, 뒤풀이로 맥주 파티도 열 거예요. 프로젝트를 마친 뒤엔 그동안 페이스북에 올린 매상일지와 일기 등을 엮어 조그마한 책으로 묶어보려고 해요.”

유씨의 실험은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인 것으로 보였다.

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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