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0.07 13:38 수정 : 2013.10.09 19:55

“키는 몇이야? 몸무게는? 머리는 무슨 색?” 모르는 번호로 갑작스레 걸려온 전화를 받아보니 인력파견업체의 지부장이다. 통성명을 하기도 전에 외모에 대한 질문이 쏟아진다. 정신없이 답변하다보니 전화가 툭 끊겼다. “낼 일하자.” 30분 뒤 지부장에게 단조로운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보조출연 일을 찾는다는 말을 다른 보조출연자에게 전했더니 어떻게 전화를 해온 모양이다. 이 바닥에서 무슨 인간관계를 기대하나 싶다. 지부장은 문자메시지로 스케줄을 알려주고, 보조출연자는 문자메시지로 출퇴근을 보고할 뿐이다. 아차, 그래도 급여는 물어봐야지! “돈? 돈은 간단해. 시급 5천원이고 일한 시간이 총 8시간 넘어가면서부터 시간당 7500원. 식대는 5500원에다 밤 12시 넘으면 차비 7천원 나간다.” 귀찮다는 듯 대꾸하던 전화는 또 그렇게 툭 끊겼다. 일단 번호를 저장했다. 이름난에 그저 ‘ㄱ예술’이라고 적는다.

8월22일- 정장 1벌·캐주얼 3벌

04:00 ‘딩동’ 문자메시지 알림음이 울린다. “일어났어? 늦지 않게 나올 수 있지?” 인력파견업체 지부장이다. “루비반지 06시30분 KBS 별관 밝은정1 캐3 확인 요망.” 드라마 <루비반지>의 보조출연자들은 ‘밝은 정장 1벌’과 ‘캐주얼 의상 3벌’을 준비해서 아침 6시30분까지 KBS 별관에 집합하라는 얘기다.

06:00 KBS 별관 로비가 수십 명의 사람들로 북적인다. “<지성이면 감천>은 이쪽으로 오세요!” “<굿 닥터> 지금 출발합니다!” 현장 반장들의 구령이 우렁차다. 사람들은 구령에 따라 여행용 캐리어나 옷가방을 들고 부산히 움직인다. 나 같은 드라마 보조출연자들이다. 이들은 ‘ㄱ예술’ ‘ㄴ기획’ ‘ㄷ예술’ 등 인력파견업체 소속이다. 메이크업에서 의상까지 스스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커다란 짐가방이 필수다.

로비 한쪽에서 날카로운 욕설이 들려왔다. 젊은 남성 출연자가 반장 앞에서 잔뜩 풀이 죽은 채 고개를 숙이고 서 있다. “너 어디 소속이야? 뭐? 10분 일찍 왔는데 화장실에 있었다고? 그래서 어쩌라고 이 새끼야! 너 때문에 다들 출발 못한 거 안 보여?” 꼭 끌어안은 옷가방이 애처롭다. 하지만 애초에 변명 따윈 통하지 않는다. 나와 저 남자는, 드라마 촬영을 털끝만큼도 지연시키면 안 되는, 부속품일 뿐이다.

8월26일- 에어컨 틀 돈은 안 나옵니다

08:00 <루비반지>의 보조출연자 15명이 구형 봉고차 두 대에 나눠 타고 KBS 별관을 나선다. 겨울이라면 체온이라도 모으려고 더 가까이 붙겠지만, 몇십 년 만에 왔다는 폭염 아닌가. 서로의 땀 냄새가 서로를 척지게 만든다. 그 냄새가 좋다고 찾아온 모기가 몸 곳곳을 물기까지 했다. 참다못한 누군가가 “에어컨 좀 틀어주세요”라고 볼멘소리로 호소했다. 50대가 훌쩍 넘어 보이는 운전기사는 머뭇하다 미안한 듯 말했다. “회사가 주는 기름값은 주행거리 기준이야.” 없는 처지는 매한가지라 서로 더 이상 재촉하지 않는다.

인력파견업체를 통해 ‘조달’되는 드라마 보조출연자 들은 일회용 소모품처럼 취급된다. 이들은 일상적으 로 욕설을 듣는 등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지만, 보조 출연이 생업이다보니 무조건 참는 수밖에 없다. 촬영 장에서 가장 긴 시간은 ‘대기시간’이다.
09:00 경기도 변두리의 한 찻집. 촬영 현장에 칼같이 도착해도 사실 보조출연자들이 정확하게 그 시간에 필요한 건 아니다. 보조출연자는 그저 언제든 부품으로 끼워맞출 수 있게 감독 눈에 띄는 장소에 있어야 할 뿐이다. 대부분의 시간은 대기하는 시간이다. 평소에는 폐지를 주워서 앉을 자리를 마련하는데, 오늘은 다행히도 봉고차에 돗자리가 있었다. 그늘을 찾았다.

지루한 시간이지만 마냥 늘어질 수는 없다. 곧 욕설과 재촉이 압박을 가해온다. 군대식 위계 서열이 뚜렷한 촬영 현장에서는 언어폭력이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야! 너랑 너, 나와. 빨리빨리! 저기 빨리 앉아. 아니, 거기가 아니잖아!” 현장 스태프가 촬영에 투입된 보조출연자들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반말은 기본이고, 우악스럽게 팔을 끌어당기는 것쯤은 일상다반사다.

12:00 “아니, 대체 사람을 왜 이런 식으로 대해요? 돈 안 받아도 좋으니까 그냥 갈래요.”

웬일이지? 한 20대 여성 보조출연자가 불쑥 현장을 떠났다. 자신은 본업이 있는 사람이고 경험 삼아 왔는데, 열악한 대우에 질려 더는 못 있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 같은 사람은 현장에서 극소수다. 대부분 불평 대신 체념을 선택한다. 보조출연으로 생계를 잇거나, 언젠가 감독 눈에 띄어 단역이라도 맡으려는 사람이 대다수다. 반장이 50대로 보이는 여성 출연자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누나한텐 이게 무지하게 좋은 직업이지. 안 그래? 누나가 그 나이에 그렇게 예쁘게 꾸미고 다닐 데가 어디 있다고.”

여성 출연자는 “그럼 고맙지, 이 나이에 불러주는데…. 많이 좀 불러줘”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필요할 때 나와서 몸으로 시간만 때우면 돈이 나오잖아. 대단히 전문적인 능력이나 생각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8월28일- 오전엔 신라군, 오후엔 백제군

현대극 촬영 현장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사극 촬영 현장의 분위기는 한층 더 거칠다. 대규모 군사 동원 신이 빈번한 사극 촬영 현장에는 보조출연을 본업으로 삼는 중·장년의 실직자가 많다.

여성 보조출연자 김주연(30·가명)씨에게 ‘사극은 어떠냐’고 물었다. “사극이 하고 싶다고? 사극도 재미 붙이면 매력적이지. 현대극하곤 아주 분위기가 달라. 야, 너 머리 좀 한번 까봐. 아니 아니 뒤로, 그렇게. 거긴 완전 쪽머리를 해야 하거든.”

그녀는 지인이 지난겨울 KBS 사극 <대왕의 꿈> 촬영장에서 겪은 일을 넌지시 들려주었다. “한겨울에도 엑스트라들은 짚신에 얇은 한복을 입고 야산을 오르내린대. 사극 하면 주로 전쟁 신이잖아. 인원이 모자라서 신라군 옷을 입었던 사람들이 백제군 옷으로 갈아입고 반대편에 서서 또 찍었다더라고. 어떤 날은 말이 얼어 죽는 바람에 주연배우가 낙마 사고를 당한 일도 있었어. 말 사체를 산속에 방치할 수 없어서 보조출연자들이 그 무거운 말을 어깨에 둘러메고 내려왔대.”

김씨는 올여름 KBS 사극 <천명> 촬영장에서 겪은 경험도 얘기해줬다. “더위에 쓰러지지 말라고 포도당 알약까지 나눠주더라. 옷은 대체 언제 빨았는지 모를 만큼 더러워. 의녀들이 쓰는 모자가 있는데 이마 쪽이 때가 타서 새까맣더라. 어떤 사람은 옷을 잘못 입었다가 피부병에 걸리기도 했어. 치료비가 더 깨졌지.”

대규모 인원이 필요한 장면이 많은 사극에는 반장들이 가끔 노숙자를 불러모으는 경우도 있다. “서울역에 가면 전봇대에 사극 엑스트라 구한다는 공고가 붙어 있어. 몇몇 악덕 반장들은 밥 먹여주고 재워준다고 노숙자를 유인해서 일당 3만원만 주고 나머지 돈은 몇백만원씩 자기들이 챙긴다고 하더라.”

9월6일- 나의 에너지는 카페인

촬영은 밤새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인력파견업체는 현장에 ‘핫식스’나 ‘레드불’ 같은 에너지음료를 상자째 가져다놓는다. 보조출연자에게 소리 지르며 욕설하는 현장 스태프도 대다수는 인력파견업체 등을 통해 온 비정규직이다. 이들은 에너지음료에 커피를 번갈아 마시며 철야 작업을 버틴다.

몽롱한 상태에서 일하다보니 사고도 잦다. 장비를 옮기던 스태프 한 명이 뜨거운 커피를 쏟았다. 손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주변 사람 몇몇이 “병원에 가야 하는 것 아니냐”며 걱정했지만 그의 표정은 단호했다. 그는 물에 적신 수건을 화상 부위에 감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자기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해야지 뭐. 병원 갈 시간이 어디 있어.” 한 반장의 말이다.

23:00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시장. 골목에서는 스태프와 주민 사이에 팽팽한 신경전이 펼쳐졌다. “거기 카메라 쳐다보지 마시라니까 자꾸 보고 그러세요!” “어머님, 카메라 앵글에 걸리는데 조금만 들어가시겠어요?” 부자연스럽게 등장하는 이들 때문에 스태프가 여기저기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처음에는 신기해하던 시장 상인들 중에서 결국 큰소리가 나왔다. “아, 장사도 안 돼서 죽겠는데 뭘 찍겠다고 자꾸 오라 가라야!”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40대의 김용석(가명) 반장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말했다. “촬영 때문에 넓은 사거리 같은 데를 통제해야 할 때가 있거든. 하루는 폭주족놈들이 보란 듯 굉음을 내면서 쓩쓩 지나가는데 어찌나 열이 받던지. 우리 스태프가 차 타고 따라가서 결국엔 잡았잖아. 또 한번은 촬영하는데 취객이 촬영장에 난입해서 훼방을 놓더라고. 고깃집 데려가서 소주 한 병 시켜주고 나오니까 잠잠해지더라.”

9월9일- ‘와리가리’에서 ‘셔터질’까지

배우들이 대사를 주고받는 동안 배경에 등장하는 보조출연자는 잠시도 쉬어서는 안 된다. 인파를 표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왔다갔다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현장 은어로 ‘와리가리’라고 한다. “움직여!” “뛰어!” “빨리빨리”라는 반장의 구령에 맞춰 보조출연자들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정신없이 걷는다. 감독의 요구에 따라 수차례 촬영이 반복되기 때문에 ‘와리가리’는 몇 시간씩 이어지기도 한다. 발이 부르트고, 목이 탄다.

의상이 제공되지 않는 현대극은 보조출연자들이 상황이나 배역에 맞는 옷을 준비해야 한다. “니들이 이따가 기자로 들어가는 애들이지?” MBC 드라마 <스캔들> 촬영장에서 의상 점검을 하던 반장이 나를 비롯한 보조출연자들을 훑어보며 물었다. 그의 시선은 한 여성 출연자의 치마 정장에서 멈췄다. “야, 넌 왜 이거 입고 있어? 기자가 무슨 치마냐? 아까 그 바지 도로 입어!”

복장 상태만 점검하는 게 아니다. 반장은 또 다른 30대 여성 출연자를 바라보며 기가 막힌 듯 비아냥댔다. “이야~ 무슨 쓰리랑 부부냐?” 특정 개그우먼을 빗댄 외모 비하였다. “지금이 무슨 쌍팔년도도 아니고 머리는 또 이게 뭐냐? 촌스럽게. 옷은 다른 거 없어?” 여자는 애써 덤덤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옷은 다른 거 없는데…. 저, 머리라도 묶을까요?”

“니들 다시 와봐! 지금 주연배우들 바스트신(머리에서 가슴까지 촬영)만 따로 찍는데, 대사할 때 얼굴에 플래시가 터져야 해. 계단 밑에 서서 플래시 좀 계속 터뜨려. 아니, 그렇게 말고. 위로 높이 올려야지!” 이번에는 반장이 보조출연자들을 우악스럽게 계단 밑으로 떠민다. 주연배우들의 바스트신이 장시간 촬영되는 동안, 무거운 소품용 카메라를 높이 쳐든 보조출연자들의 팔은 ‘셔터질’을 하며 부들부들 떨린다. 그 와중에 들려오는 주인공 여배우의 목소리. “감독님, 저 앞머리가 너무 확 내려와서… 한 번만 다시 찍을게요!”

9월11일- 주점에서 음악도 없이 클럽 신

14:00 경기도 고양시의 한 상가 주점. 주점에서 클럽 신을 찍을 줄은 몰랐다. “배우들 대사를 녹음해야 해서 음악은 못 틀어주는 거 알지? 처음 잠깐 틀었다가 사운드를 죽일 거야. 그래도 춤은 계속 춰야 해!” 드라마를 볼 때는 설마 춤추는데 음악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어쩌랴. 보조출연자들의 유일한 무기는 뻔뻔함과 당당함이다. 반장은 그 와중에도 카메라 주위를 맴돌며 양손 검지로 얼굴에 스마일 표시를 만든다. 계속 웃으라는 얘기다. 다른 보조출연자들이 휴식을 취할 때조차 나와 앞사람은 계속 무반주로 춤을 춰야 했다. 배우들만 따로 찍는 장면에서 우리 두 사람의 뒷모습이 카메라 앵글에 걸렸기 때문이다.

9월13일- 잘나가는 드라마는 음식부터 다르다

21:00 서울 동대문구의 한 장례식장 앞. SBS 드라마 <주군의 태양>의 보조출연자 수십 명이 관광버스에서 우르르 내린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인원 한 번 안 자르고 가는 게 신기하네.” 인건비에 민감한 드라마 현장에서 대규모 인원을 끝까지 데리고 가는 경우는 흔치 않다.

“상에 있는 소주랑 맥주는 까면 안 돼요.” 스태프의 당부와 함께 밥상 둘레에 앉은 보조출연자들은 생각보다 상이 푸짐해서 놀랐다. 흰쌀밥에 육개장, 마른안주와 떡, 김치, 오징어무침에다 삶은 돼지고기까지 등장했다. “음식은 먹어도 돼!”라는 반장의 말에 어안이 벙벙하다. “이게 일상적인 상황이냐”는 물음에 옆자리 남성 출연자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글쎄, 다른 데서 상갓집 장면 찍을 땐 이렇게 많이 주지 않았는데…. 역시 잘나가는 드라마라 다르긴 달라.” 앞자리 여성 출연자도 한마디 거든다. “시청률이 잘 나오니까 그렇지. 저번엔 주연배우가 스태프하고 엑스트라 전부한테 뷔페식 밥차 쏜 거 알아요?”

9월18일- 명절에 나와? 내일은 쉽니다

‘부재 중 전화 2통’. 내일이 추석인데도 지부장의 전화는 끊이지 않는다. 대다수 지부장들은 보조출연자의 체력이나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다. 여러 업체에 프로필을 등록해놓은 보조출연자가 지부장들이 주는 대로 무리한 스케줄을 소화하다 과로로 쓰러지는 경우도 있다.

“낼 사극 가자. 2박3일.” 한밤중에 또다시 지부장의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추석 연휴에는 스케줄을 받을 수 없다고 미리 연락해뒀는데 소용이 없다. 명절에 인력난이 극심한 모양이다. 나는 드라마 감독이나 기자를 꿈꾸고 있는 언론사 지망생이다. 언젠가는 드라마 촬영장에도 휴일이 보장되기를 바라며, 답문을 썼다. “내일은 쉽니다. 추석 잘 보내세요.”

글·사진 김효정 언론사 지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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