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0.07 13:24 수정 : 2013.10.09 19:50

영화 는 섹시한 ‘여배우들’을 모아 놓고 전혀 섹시하지 않은, 역설적으로 그 섹시함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동’을 수행하는 배우들을 보여준다.
<아티스트 봉만대>. 처음 들었을 때, 영화 제목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영화 제목임을 알았을 때, 그리고 봉만대가 그 에로영화의 ‘거장’ 봉만대이자 동시에 이 영화의 감독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잠시 멍했다. 한마디로 ‘이건 뭐지’라는 멘붕이 왔다. 뻔뻔한 것이 아니면 장난일 거라고 생각했다. 농담 삼아 만든 영화였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뜻밖이었다. 영화는 그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진지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에 담지 못하는 것을 담아낸 것 같았다. ‘노출 19금’이라는 딱지는 이 영화에 그 ‘무엇’인가를 은밀하게 기대하는 관객의 욕망을 상징하는 것일 테다. 그러나 영화를 펼치는 순간,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야한 장면’보다도 그냥 벗은 여배우들이 나온다. 시종일관 여배우들은 헐벗고 있다. 그런데, 그 상황은 전혀 ‘섹시’하지 않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카메라는 돌아가고 대본 없이 떠든다

봉만대 감독의 말은 걸작이다.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어요.” 이 말에 모든 것이 함축돼 있다. 맞는 말이다. 섹시한 여배우들을 모아놓고 에로틱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별 의미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봉 감독은 이런 상식의 논리를 이용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논리를 전복한다. 이런 전복의 묘미가 이 영화에 있다. 여하튼, 이 영화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낯설다’는 표현이 적확할 것이다. 이 영화는 한마디로 ‘낯설다’. ‘낯설다’는 것은 새롭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말에 동의하기 어려운 이들이 있을 수 있겠다. 그냥 보기에 진부한 내용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영화에 이상한 점이 있다. 영화라고 말하는데, 영화를 찍는 과정이 나올 뿐이다. 거창하게 말하면 메타픽션의 구조이겠지만,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리얼리티 TV 양식이 고스란히 영화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여기에서 단순히 이 영화를 리얼리티 TV 양식을 벤치마킹한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든다. 특이하게도 <아티스트 봉만대>는 한국 예능 프로그램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냥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영화 속 영화. 이런 액자소설 구조는 사실 흔하다. 그러나 그 구조를 구성하는 뉘앙스가 이상하게 낯설다. 그것은 한국 예능 프로그램이 만들어낸 세속적인 논리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여배우들’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러나 카메라는 그 ‘여배우들’의 사생활이나 섹시함을 비추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스토리텔링이다. ‘여배우들’은 행동하지 않고 이야기한다.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처럼 ‘여배우들’은 영화라는 무서운 왕을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이야기를 멈추면 그는 화면 안에 들어올 수 없다. 심지어 화면 바깥에 있더라도 이야기를 해야 영화에 담길 수 있다. 이상한 영화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잡설이 영화의 기본이긴 하지만, 그의 영화는 최소한 허구성을 앞세운다. 잘 짜인 잡설이 난무한다. 그런데 <아티스트 봉만대>는 즉흥적이다. 누군가 이야기를 나누는데, 맥락이 어긋나기 일쑤다. 편집을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일까? 용기인가 호기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본 없이 그냥 찍었어요.” 쿨한 대답이 왔다. 얼핏 분위기는 홍상수 영화 같다. 그런데 진실은 다르다. 홍상수 감독은 결코 대본 없이 영화를 찍지 않는다. 대본 없이 찍은 것 같지만 사실상 대본이 있다. 타란티노 영화도 마찬가지. 대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대본에 기초한다. 그런데 <아티스트 봉만대>는 대본 없이 찍었다. 실험영화도 아니고. 그런데 황당하다기보다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카메라는 돌아가고 배우는 떠든다. 대본이 없다보니 ‘여배우들’이 직접 끼워넣은 에피소드들이 날것처럼 떠돈다는 느낌이었다. 즉흥연기는 물론이고 자신의 사생활이 묻어 있는 잡담도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다. 곽현화는 감초 같은 역할을 했다. 특별히 ‘연기’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의 ‘고생’이 눈에 훤히 드러나는 장면들이 꽉 차 있다. 성은은 애절한 캐릭터였는데, 실제 그렇진 않은 것 같았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연출된 캐릭터가 성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이파니의 발견은 신선했다. 예능 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췄던 그가 최초로 참여한 영화였다. 그렇게 처음 들어선 영화가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거라니 부담스러울 것도 같았다.

“사실은 부담스러웠죠”라는 솔직한 이파니의 대답. 그런데 왜 했을까? “귀여운 여배우가 되기는 쉬워도 섹시한 여배우가 되기는 어렵잖아요?” 심오한 답변이 돌아왔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귀엽다는 것과 섹시하다는 것이 같을 순 없다. 아마 이파니도 자신을 규정하고 있는 섹시함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섹시한 여배우’가 갈 수 있는 선택지는 대체로 정해져 있다. 대부분 ‘이미지 세탁’을 통해 섹시 본성을 걷어내고 새로운 이미지를 갖고자 하는데, 이파니는 반대의 경로를 택한 것 같았다.

자본친화적 영화판 폭로하는 에로

그러나 결론은 아니다. “이 영화는 에로영화가 아니라 지적인 코미디영화”라는 봉만대 감독의 정의는 영화를 보는 순간 알 수 있다. 그럼 이 영화를 에로틱하게 광고한 것은 전적으로 낚시였을까. 그렇진 않다. 봉만대 감독이 누구인가. 에로영화를 만들어온 ‘고수’다. 이런 감독이 거창한 명분을 달고 다시 에로영화를 만들 이유는 없다. 거기에 자기 이름을 내걸어서 말이다. 쉽게 말하면, 이 영화는 봉만대의 자의식을 보여주는 영화다. 한마디로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한 영화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여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봉만대라는 남성 감독을 위한 대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여배우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여배우들’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기대하는 그런 ‘여배우들’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의 문제는 영원한 이야기의 주제다. 섹슈얼리티를 빼고 인류사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재생산 이외에 다른 의미에서 섹스를 발전시킨 동물이다. 따라서 섹시하다는 것은 동물적인 것과 관계없다. 오로지 인간적인 것이 섹스다. 오히려 섹시한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능력이다. 섹시한 것을 동물적인 것과 연관짓는 것은 판타지에 불과하다. 봉만대의 영화가 보여주는 것도 이 문제다. 섹시하다는 것이 이데올로기 문제임을 <아티스트 봉만대>는 드러낸다. 어떻게?

이 영화는 ‘섹시한 여배우들’을 창조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섹시함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지 촬영 스태프와 감독의 업계 비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처음 계획은 실패하고 감독은 교체된다. 드디어 봉만대 감독이 나타난다. 그가 하는 일은 어떻게 하면 저예산으로 에로틱한 영화를 찍을지 골몰하는 제작자의 이해관계를 실현하는 것이다. 제작자는 오직 경제논리로 영화에 접근한다. 감독은 이런 제작자의 경제논리를 어떻게 영화의 논리에 끼워맞출 것인지 고민한다. 그 틈에 끼어서 여배우는 오락가락한다. 이 과정에서 애환이 소환된다. 성은의 캐릭터가 자아내는 연민은 이 때문이다. ‘옷을 벗는다’는 것과 ‘섹시한 여배우가 된다’는 것은 전혀 관계가 없다. 전혀 다른 문제다. 옷을 벗지 않아도 섹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옷을 벗기는 행위는 시퀀스의 진행을 위한 맥거핀에 가깝다. 맥거핀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면서도 이야기를 진행하는 데 필요한 필수적인 요소를 지칭한다. 대체로 치정 살인극에서 남성은 맥거핀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 역할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위치에 남성이 있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치정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결정적 동력이다. 감독이 잘리고, 그 감독은 부당한 대우에 항의한다. “감독조합에 고발한다”는 말이 나오지만 영화는 순조롭게 다시 제작에 들어간다. 감독이 교체돼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영화. 여기에서 무엇인가 이 영화의 의미를 되새겨볼 기미가 있다. 말하자면, 이런 구조 자체가 영화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다. 노동분업과 그것을 통해 노동통제가 가능한 것이 영화라는 말. 작가주의 영화에 대한 감독의 꿈은 이런 영화의 본질을 바꾸기 위한 것이라는 뜻.

그래서 흥미롭게도 이 영화는 자본친화적 영화의 속성을 반대급부로 폭로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면에서 <아티스트 봉만대>는 흥행을 목적으로 한 영화라고 보기 어렵다. 처음부터 영화는 흥행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냥 봉만대 감독이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동남아시아의 리조트에 가서 ‘여배우들’과 휴가를 보내고 온 것을 찍어서 보여준다고 해도 믿을 판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모든 것이 이미 세팅돼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봉만대 감독은 처음부터 이런 분위기를 예측했을 것이다.

인터뷰 도중 이택광 교수(왼쪽 두 번째)와 손아람 작가(왼쪽 네 번째)가 여배우들과 포즈를 취했다.
한국이 아니면 나오기 어려운 영화가 바로 <아티스트 봉만대>다. 어떤 의미에서 그럴까? 이 영화는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카메라워크나 전개 방식이 예능 프로그램이다. 독일과 영국에서 흥행한 <빅브러더> 같은 구석도 없지 않지만,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처럼 ‘연출’과 ‘편집’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리얼리티 TV라고 한다면 핵심적인 것이 ‘리얼’에 있다. 물론 이 ‘리얼’은 문화적인 것이고, 특정한 시기나 시대에 따라 실질적 차원이 달라진다. 감각은 언제나 변화한다. 그 감각을 인지하는 것도 바뀐다. <아티스트 봉만대>는 리얼리티 TV가 가진 속성을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연출’과 ‘편집’의 혼합성으로 옮겨놓는다.

“에로영화인 줄 알고 보신 관객께 죄송합니다”

영화인가, 예능인가, 리얼리티 TV인가? 어떤 것을 콕 집어서 이 영화를 규정하기 어렵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있지만, 또한 그래서 무엇인가 다른 것이 되었다. 이 영화를 만들 때 봉만대 감독의 심정은 어땠을까. 관객을 속이고 싶었을까. “관객에게 죄송해요. 에로영화인 줄 알고 보실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서….” 말꼬리를 흐리는 것이 봉만대 감독의 특징. 그는 정확하게 무엇을 설명하진 않았다. 그냥 느낌으로 그랬다는 투였다. 예를 들어 에로영화를 왜 처음 만들었는지 묻자, “실연의 상처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생뚱맞은 대답이다.

이런 그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아티스트 봉만대>에 묻어 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인간 봉만대에 대한 찬사로 가득한 오글거리는 장면으로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봉만대는 여기에서 큰 역할이 없다. 그는 말 그대로 감독으로 영화에 등장한다. 물론 이것이 영화라고 생각한다면, 봉만대는 장면에 등장하든 등장하지 않든 영화 내에 있다. 그가 찍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 안 감독과 영화 밖 감독은 둘 다 봉만대다. 장면에 나오지 않더라도 그 장면을 보는 장소에 봉만대는 있다. 영화 공간의 구조에 대한 훌륭한 텍스트일지 모른다. 영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즐긴 감독이 바로 히치콕이다. 히치콕을 흉내 내서 감독이 직접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는 것은 흔한 광경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다른 것이, 봉만대가 영화를 찍는 장면을 보여준다. 히치콕은 ‘이것은 영화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영화 안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객관의 눈’이라고 불리는 카메라의 시선을 드러내기 위해 영화 안에 자신의 모습을 담았다. 봉만대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그는 영화를 지극히 주관적인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는 마치 관찰 카메라처럼 카메라를 다루었다. ‘여배우들’은 거기에서 연기를 했지만, 사실 연기가 아닌 것이었다. 어디까지 연기고 아닌지 알 도리가 없다.

봉만대는 히치콕에 도전한 것인가. 아마 이런 질문을 던지면 그는 웃을 것 같다. 그런 것 따위 생각하지 않았다고. 어쩌면 봉만대는 에로영화를 만들고 있는 감독으로서 자신을 한번 정리해보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가 이파니를 설득한 논리에서 유추할 수 있다. 이파니가 방송인으로서 자기 정립에 고민하고 있을 때, 봉만대 감독은 섹시한 여배우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단다. 어차피 미모는 나이를 먹으면 퇴색한다. 여배우에게 최대의 적은 바로 나이다. 봉 감독의 조언은 노골적이지만 뼈아픈 것일 수 있다. 그래서 무엇인가 다른 것을 찾아야 한다는 거고 이파니가 ‘여배우’를 선택하게 만든 것이다.

흥미로운 존재는 곽현화다. 개그우먼에 만족하지 않고 그는 ‘여배우’를 선택했다. 그런데 도무지 여배우의 정형성마저 그에게 무의미한 것처럼 보인다. <아티스트 봉만대>에서 곽현화의 활약은 뛰어났다. 이전에 출연한 영화보다도 훨씬 나았다. 아니 제대로 물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의 제목이 <아티스트 봉만대>이지만, 곽현화를 위한 영화이기도 했다. 그가 배우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조금 보였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인위성을 걷어내니까 연기가 나온 것일까. 본인은 연기를 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사실 카메라 앞에서 움직이는 것이 연기일 수밖에 없다.

독일 철학자 발터 베냐민은 이런 영화의 속성을 누구보다 일찍 발견했다. 영화와 연극의 차이를 언급하면서 베냐민은 영화의 특징으로 ‘카메라 앞에서 배우가 연기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무대가 아닌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함으로써 배우는 관객을 볼 수 없다. 게다가 이 연기는 편집을 통해 언제든지 변형될 수 있다. 베냐민은 이 상태야말로 예술에 드리워진 아우라의 퇴조로 이해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 조건은 새로운 예술의 조건이기도 하다. 창작에서 제작으로 바뀌는 ‘복제’ 과정은 과거의 예술에 종언을 고했지만, 그렇다고 예술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조건 중 하나가 영화의 제작 방식이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배우는 언제나 이미 그 시선을 내장한다. 카메라는 항상 배우를 따라다닌다. 심지어 사생활 영역에서도 그 배우는 카메라를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곽현화의 ‘연기’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자연스러운 연기는 이미 그에게 내재돼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 이 영화는 참으로 편하게 찍을 수 있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물 만난 곽현화, 연민의 성은, 여배우 이파니

<아티스트 봉만대>가 주는 낯선 느낌은 너무도 익숙한 장르와 소재를 가지고 관객이 바라는 것과 다른 대상을 던져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감독의 시선과 교차하는 ‘여배우들’의 뒷담화는 이런 측면에서 흥미로움을 배가한다. 비슷한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재용 감독이 일찌감치 ‘여배우의 수다’만을 엮어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최근에 아예 <뒷담화>라는 영화도 만들었다. 따라서 형식적 의미에서 <아티스트 봉만대>가 어떤 특이한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차분하게 다른 영화가 성취한 논리를 답습한다.

도대체 이 낯선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연민’과 ‘공감’이라는 전혀 이 영화와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다. 이상하게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슬프다는 관객의 평이 많았다. ‘여배우들’에 대한 연민은 필수다. 아니나 다를까 봉만대 감독은 인터뷰 중에 비슷한 말을 슬쩍 비쳤다. 성은을 왜 캐스팅했는지 묻자 나온 대답이었다. 그에게 쏟아졌던 부당한 비난에 대한 하나의 항변이 이 영화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에서 성은의 캐릭터는 분명 ‘연민’을 자아낸다. 물어보니, 다분히 의도된 연출이었다. 이것이 연출이었다는 사실에서 봉만대 감독의 제작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예능 프로그램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것을 통해 볼 수 없는 것이 이 영화에서 드러난다. ‘여배우들’은 허구의 캐릭터이면서 동시에 실제다. 영화에 출연하는 모두가 실명이다. 실명으로 연기를 한다는 것, 이 부조리한 상황이 이 영화를 낯설게 만든다. 마치 역할극처럼 이들은 연극을 한다. 대본도 없다.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내용으로 영화를 찍는다. 왜 이런 모험을 하려고 했을까. 이 궁금증은 하나의 대답을 이끌어낼 수 없었다. 다양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이들은 영화에 참여했다.

성은은 ‘에로배우’라는 이미지를 벗어던지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 영화의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은은 역설적으로 ‘에로배우’라고 덧씌워진 자신의 이미지를 이용해서 이 영화에 참여한 것이다. 일종의 동종 요법. 성은뿐만 아니라 이파니나 곽현화도 마찬가지다. 물론 곽현화는 나머지 둘과 다른 이미지다. “섹시 개그우먼이라는 것이 정말 좋다”고 말하는 곽현화 아닌가. 이파니나 성은은 이런 곽현화에 비하면 어둡다. 그래서 조합이 잘 맞은 것인지도 모른다.

성은은 이 영화에서 ‘에로배우’의 다른 면을 보여줬다. 그것은 무엇도 아닌 카메라 앞에서 연기노동을 펼칠 수밖에 없는 노동자의 모습이었다. 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유행했던 ‘사랑의 프롤레타리아’라는 작명법이 떠오른다. 노동력을 파는 노동자와 몸을 파는 여성을 동격에 놓았던 파리 예술가의 상상력은 ‘에로배우’에 대한 탐탁지 못한 시선과 겹쳐져 미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섹시한 ‘여배우들’을 모아놓고 전혀 섹시하지 않은, 역설적으로 그 섹시함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동’을 수행하는 배우를 찍어놓은 것이 <아티스트 봉만대>다.

이 흥미진진한 영화는 참으로 한국적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에로영화와 예능 프로그램과 리얼리티 TV와 VJ물이 뒤섞인 듯한 이 영화가 의외로 철학적 통찰을 준다는 것이 신기하다. 장르가 뒤섞이는 이 지점에서 봉만대라는 감독은 없다. 그러나 그를 매개로 ‘여배우들’이 있다. 이들은 우아하거나 섹시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 단계에 놓인 평범한 여성으로 자신들을 논한다. 이른바 ‘섹드립’을 남발하고, 남자 이야기를 마구 쏟아내고, 아슬아슬한 수위에서 사생활을 이야기한다. 역시 진짜와 가짜가 헷갈린다. 한참 보고 있으면 진짜인 줄 아는데, 영화라는 것을 감지하면 퍼뜩 정신이 들게 해놨다.

폐부를 찌르는 상식적 철학

영화를 보는 내내, 콘티도 없이 찍었다는데 어떻게 저렇게 완벽하게 편집했을까 싶었다. 거짓말 같았다. 편집하기가 쉽지 않은데, 봉만대는 천재인가. “네, 천재라고 생각해요.” 뻔뻔한데 귀엽다. 봉씨라는 이유로 ‘에로영화계의 봉준호’로 불린다는데, 크게 어울리는 것 같진 않다. 그는 ‘봉테일’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디테일에 집착하는 감독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큰 그림을 그려놓고 자유롭게 찍는 느낌이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느낌은 홍상수인데, 전혀 그렇지 않다. 홍상수 감독이 치밀한 계획 아래 계획하지 않은 것 같은 영화를 만들어낸다면, 봉만대 감독은 정말 아무런 계획 없이 영화에 착수한다.

영화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 그냥 자기가 좋아서 만들다보니 이런 영화가 나왔다는 식으로 말하는 감독의 태도가 무책임할 수 있다. 설령 그랬더라도 뭔가 유세를 떨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유세라는 것이 ‘나는 천재’라는 자화자찬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이번 인터뷰의 특징이었다. 오해 마시라. 다분히 이런 봉만대 감독의 답변은 위악적인 것이다. 무엇이 그를 위악적으로 만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가 밝힌 것은 군복무 기간에 겪었다는 실연의 아픔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걸 설명하기는 곤란하다.

그의 철학은 상식적이었지만, 폐부를 찌른 것이 있었다. 변화를 주려면 멈춰서 잠깐 활동을 중단하면 된다는 것이다. 습관을 바꾸면 삶이 바뀐다. 그러려면 지금 움직이는 것을 멈춰야 한다. 연예인이든 배우든,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려면 대중의 눈앞에서 사라져야 한다. 맞는 말이다. 굳이 연예인이나 배우에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금 현재의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일이다. 그것이 진정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길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티스트 봉만대>는 봉만대 감독뿐만 아니라, 출연한 이들 모두를 멈추게 만드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무엇인가를 기대한다면 누구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그 기대를 버리고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이들을 따라가서 보자면, 이 영화는 봉만대 감독을 비롯한 ‘여배우들’을 위한 영화다. 둘 사이는 떨어질 수 없다. 봉만대 감독은 욕심을 부렸다. 비슷한 작업을 더 하자고 꼬드겼다. 같이 팀을 만들어서 계속 가자는 것이었다. “월급 줘요”라는 싫지 않은 공방이 오갔다. ‘에로영화의 거장’으로 불리던 봉만대 감독. 그런데 그가 에로영화를 빙자한 다른 영화를 찍었다는 사실보다도, 무엇인가 다른 것을 추구하기 위해 이런 영화를 찍었다는 진실이 중요할 것이다. 거기에 섹시한 ‘여배우들’이 동참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들도 내면 깊숙이 그 갈급함이 있었다는 뜻이니까.

글 이택광

영국 셰필드대학 문화학 박사. 경희대 영미어학부 교수. 다양한 문화 분석을 통해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코드를 찾아내는 작업을 한다. 저서로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한국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인상파, 파리를 그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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