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9.01 15:56 수정 : 2013.09.02 13:48

“다들 일베를 별종 취급 하는데, 사실 내 안에도 있거 든요, 일베가.”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를 가끔 ‘눈팅’했다는 박석원 (가명·27·대학 4년)씨는 일베에서 쓰는 용어 ‘김치녀’에 대 해 공감을 표한다. 그는 일베가 쓰는 비방 말투와 소수자 증 오, 극우 이념 등은 수긍하지 않지만 유독 여성관에는 일베 의 사고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명품을 소비하고 남자를 이 용하는 일부 여성의 행태에 대해 비방 대열에 간접적으로 동참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성에게 대놓고 ‘김치녀’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다만, 김치녀를 응징하는 일베 글을 읽을 때면 통쾌함을 느낄 뿐이다. 그 안에도 일베적 사고방식이 자리하는 것일까?

 

일베적 욕망은 일베에만 있을까? 사진은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제’에서 노 전 대통령 지지자가 김한길 민주당 대표를 완력으로 막아서는 모습.뉴시스
맹목적 공격과 폭력 그리고 마음

일베는 인터넷상의 일탈 문화에서 출발해 자신의 정치 색과 사회색을 덧칠해 유희로 표출한다. 그들이 창조한 몇 몇 용어- ‘노운지’, ‘슨상님’, ‘홍어’, ‘좌좀’, ‘민주화’, ‘김치녀’- 에서 그들의 욕망을 읽어볼 수 있는데, 적대적인 사람들에 대한 맹목적인 공격과 폭력, 증오다. 극우 이념적 측면에서 고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등 정치인과 광주 민주화운 동, 북방한계선(NLL), 대북 지원 등이 주요 공격 대상이다. 이는 모두 북한과 관련 있거나 음모론이 제기되는 인물과 사건이다. 정치적 문제와 달리 소수자에 대한 왜곡된 분노 와 자신들의 피해의식도 표출한다. 여성, 외국인, 호남 출 신 사람들이 오히려 특권을 누린다는 것이다. 그들은 여성 배려 정책, 즉 여성 할당제나 여성 주차 공간, 여성 도서관 자리 배정 등 일상에서 나타나는 ‘특권’에 분노하고, 외국 인에 대해서는 자국민의 일자리를 빼앗고 강력 범죄를 일 으키는 대상으로 낙인찍는다. 이는 ‘장애인증’(자신의 육체 적·비육체적 결함을 게시판에 드러내는 것)에서 볼 수 있 듯이, 자신들도 소수자인 일부 일베인의 독특한 피해의식 에서 기인한다. 비난·비방은 자신들이 누려야 할 것을 점점 여성과 외국인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잘못된 현실 이해에서 비롯된다. 일베는 회원끼리도 공격한다. 언제 어디서나 공 격하고, 공격의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일종의 마녀사냥식 공격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릇된 욕망을 인터넷 공간으로 한정할 뿐이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유희이기 때문이다. 가끔 몇몇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 결집을 시도하지만 그들 은 일베 안에서 ‘밴’(강제탈퇴) 당하기 일쑤다.

이런 일베적 욕망은 일베에만 있을까? 현실에도 무수 히 많은 ‘일베스러운’ 사건이 있다. 일베는 기껏해야 인터넷 공간에서 적대자들이 반응하는 모습과 방식을 보고 희열 을 느끼지만 현실에서는 일베스러운 욕망, 즉 적대자에 대 한 맹목적인 공격과 폭력 그리고 그런 마음이 곳곳에 자리 한다. 그 대상은 소수와 다수를 가리지 않는다. 일베를 비 난하는 사람들이 하는 행동 역시 일베스러운 것도 사실이 다. 유명 사이트들이 연합해 일베를 턴 ‘일베대첩’과, 특정 단어를 썼다는 이유로 ‘일베충’으로 집단 이지메하는 것 등 이 대표적인 예다.

트위터에는 아래와 같은 ‘우리 안의 일베’를 비판하는 글이 있다.

‘일베충은 그렇게 싫어하면서 ‘너 김치녀니?’ 따위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좋아요’를 누르는 건 앞뒤가 안 맞는다.’

‘네이버 메인 기사 댓글 90% 이상이 악플이다. 안티와 혐오가 일상이 되어버린 삶이 참으로 딱하다.’

‘김치녀’ 문제를 지적한 글이 지적하듯이, 우리 사회 소수자인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성은 진보와 보수가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내 안의 일베’에 대해 고백한 대학생 김씨는 “일베는 거지들이 부자들 걱정해주는 사이트” 라며 “○○(장애인을 비하하는 표현)짓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지만, “김치녀를 응징할 때 드는 쾌감”을 즐기고 있다. 김씨는 자신의 정치 성향을 보수라고 규정했지만, 가부장적 성향 때문에 여성 비하 대열에 동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일베가 공격하는 여성 배려 정책 비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여성 중 특정한 김치녀를 상대로 한 공격과 증오에 은연중 동참할 뿐이다. 그는 이런 자신을 보며 ‘내 안의 일베’를 느낀다.

진보·보수 가리지 않고 ‘김치녀’ 동감

여성에 대한 일베스러운 행태는 진보 성향인 정기후(가명·37·바리스타)씨에게서도 볼 수 있다. 정씨가 한국 여성을 김치녀라고 공감할 때는, 그 여성이 백인 남성에 환상을 가질 때고 그 공간은 술집이다. 그는 백인 남성에게 말 한마디 걸려고 애쓰는 여자들을 보면 ‘에이, 김치×’라고 혼잣말을 한다. 하지만 여성을 비하하기는 해도 책임을 전가하지는 않는다. 자격지심을 느낄 뿐이다. 그는 명품을 좋아하는 여성을 볼 때도 같은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 역시 김씨처럼 현실이나 인터넷에서 자신의 여성관을 표출하지 않는다.

“일베에서 김치녀라는 말에 많이 공감하는 이유는 여성들이 백인 남성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거나, 내 여친에게 명품 사줄 능력이 안 되는 처지가 억울해서거든요. 어떻게 보며 서양 남성에 대한 열등감에서 오는 자격지심이죠.”

김치녀 혐오가 남성들이 주로 갖는 감정이라면,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 현상)는 한국민 모두가 가질 수 있고 오래전부터 지속되어온 감정이다. 인터넷에 성행 중인 수많은 안티 다문화 사이트만 봐도 대놓고 활동하는 수를 파악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인 혐오는 일베만의 문제가 아니라 광범위한 현상이다. 2009년 성공회대 연구교수였던 인도인에게 “아 더러워, 어디서 왔어. 이 냄새나는 ××야”라며 욕설을 퍼부어서 논란이 되었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김원일 기자 nirvana@na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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