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28 02:03 수정 : 2012.12.28 02:03

‘헝그리 정신’의 시작

 종합격투기와 입식타격기 스타일의 킥복싱 대회 등 오늘날 많은 이들을 열광시키는 격투기 종목은, 알고 보면 오래전부터 지극히 간단하며 납득하기 쉬운 규칙으로 각광받아온 종목이다. 고대 올림픽의 판크라티온에서 시작된 이래 복싱은 근대사와 더불어 성장하며 오늘날의 입지를 다졌다. 올림픽을 통해 유도와 레슬링, 그리고 아마추어 복싱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격투기 종목은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소시민이 도전해 명예와 부를 쟁취할 수 있는, 이른바 꿈의 결정체였다. ‘세계 챔피언’이라는 생소한 단어가 시민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데는 한국 최초의 챔피언 김기수 선수의 역할이 컸다. 함경도 북청에서 1·4 후퇴 때 남으로 내려와 여수에 정착한 그는, 1966년 장충체육관에서 니노 벤베누티(이탈리아 권투선수)를 물리치고 최초로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그 후 고도 경제성장과 함께 격투기 스포츠도 각광받기 시작했다. 그때 인기를 끈 격투기는 복싱과 프로레슬링이다. ‘하면 된다’와 ‘할 수 있다’를 내세우던 정부 정책과 어느 정도 맞아떨어져 꾸준한 성장을 할 수 있었다. 세계 챔피언이라는 영웅이 탄생하자 그를 동경하는 지원자가 엄청 몰리면서 선수층도 두터워졌다.

이어 양정모 선수가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레슬링에서 올림픽 최초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한국이 격투기 종목 강국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데 한몫했다. 1986년과 88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안게임과 올림픽도 호재였다. 특히 86년 아시안게임 복싱 종목은, 판정 문제로 잡음이 있었으나 12개 전 체급을 제패하는 믿기 어려운 결과가 나올 정도로 메달박스이자 효자 종목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격투기 종목은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의 입지전적 스토리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한국의 모든 스포츠는 강인한 정신력으로서, 죽어도 지지 않겠다는 ‘헝그리 정신’을 되뇌어왔다. 헝그리가 정신적으로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금전적으로도 헝그리했고, 인생의 배움에서도 헝그리했다. 나아가 실제로 ‘굶어가며’ 운동해야 하는 극심한 체중감량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천창욱 격투기 해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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