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9.01 15:16 수정 : 2013.11.11 14:17

“중산층에게 복지 재원 마련을 위해서 세금을 더 내라 고 한다면 일단 나부터 안 낼 것 같아요. 복지 혜택을 받은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은데 굳이 내 돈을 내야 하는지 망설여 지지 않겠어요?”

“세금을 더 내라고 하기 전에 일반 회계에서 낭비가 되 는 항목을 얼마든지 줄일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국방 예산 이라든가….”

지난 8월 19일 저녁,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사회복지 모금회 강당에선 한 ‘증세론자’의 강연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박근혜 정부의 세법개정안: 진짜 세금폭탄이었 나’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강연에는 150여 명이 모였다. 불 과 닷새 전쯤 공지된 이른바 ‘번개 강연’이라는 점을 감안하 면 세금 논쟁에 대한 시민의 뜨거운 관심을 압축적으로 보 여준 현장이었다.

오건호 공동운영위원장이 지난 8월 19일 저녁,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사회복지모금회 강당에서 ‘박근혜 정부의 세법 개정안: 진짜 세금폭탄이었나’라는 주제로 번개 강연을 하고 있다.
관심이 쏠린 데는 강연자의 흥미로운 주장도 힘을 보 탰다. 흔히 야권과 시민단체 등에서 주장해온 세금을 더 깎 아달라는 얘기가 아니었다. 외려 ‘세금을 더 내자’는 강연자 의 역설에 청중은 하나둘씩 의구심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미 지난 정권에서 고소득층과 대기업의 세금을 많이 깎 아주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힘없는 서민들에게 세금을 더 내라는 건가” 등.

마이크를 잡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질문에 답하는 이는 오건호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이다. 그는 최근 불붙은 세금 논쟁에서 진보·개혁 진영 가운데 보기 드물게 중산·서민층의 증세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정부·여당을 상대로 ‘세금폭탄’이라는 정치 공세를 편 민주 당에 연일 쓴소리를 날리고 있다. 그가 ‘풀뿌리 증세운동’1 에 팔을 걷어붙인 이유는 뭘까. 번개 강연이 열리기 사흘 전 인 8월 16일, 그가 연구실장으로 몸담고 있는 글로벌정치경 제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났다.

세법 개정 ‘세금폭탄’ 공세… 왜곡된 담론

이번 세금 논쟁은 지난 8월 8일 정부 세법 개정안이 윤 곽을 드러내면서 불거졌다. 핵심은 연간소득 3450만 원 이 상 봉급쟁이 434만 명의 세 부담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내 년 1월부터 연간소득 3450만 원에서 7천만 원 사이의 봉급 쟁이들이 종전보다 평균 16만 원의 소득세를 더 부담하게 하는 방안이었다. 매달 1만3천 원꼴이다. 이런 증세 효과는 근로소득 공제항목 가운데 의료비와 교육비 등의 공제 방식 을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로 바꾸기로 한 데서 발생한다.2

일명 ‘유리지갑’에 대한 증세 방침이 알려지자, 순식간 에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특히 야당의 ‘세금폭탄’ 공세는 봉급쟁이들의 조세 저항을 부추겼다. 결국 세법 개정안 발 표 나흘 만에 박근혜 대통령이 ‘원점 재검토’ 지시를 내렸 고, 세 부담 증가 기준선은 연간소득 5500만 원으로 조정 됐다.3

“(한 언론 기고에서) ‘월 1만 원의 거대한 장벽’이라는 표 현을 쓰셨더라.”

“월 1만 원이라는 돈은 액면가로 보면 그리 큰 액수가 아니다. 그런데 1만 원이 내포하고 있는 정치적 가격을 매기 면 엄청나다. 꼿꼿하던 박근혜 대통령도 하루아침에 백기 를 들고 나올 정도 아닌가. 1만 원의 힘을 정치적 언어로 해 석하면 ‘조세 저항’인 셈이다.”

오건호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대학과 대학원에서 사회학 을 전공했다. 박사과정을 마친 뒤 2001년 봄부터 민주노총 정책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노동운동의 미래 전략으로 ‘사회공공성’ 개념을 입안하고 이것 의 공론화를 위해 힘썼다. 2004년부터는 민주노동당에서 심상정 의원 보 좌관, 원내 정책전문위원으로 일한 바 있다. 정규직·정부·기업이 국민연금 보험료를 더 내서 저임금노동자에게 혜택을 주게 하는 ‘사회연대전략’을 제 안했으며, 시민 스스로 복지 재정 확보에 주체가 되자는 취지로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운동을 했다.

“정부 원안에 찬성했다는 뜻인가.”

“법인세 개편안이 미미했다는 아쉬움은 있다. 특정 대 기업을 주로 지원하는 핵심 비과세 감면 혜택을 줄이는 등의 조처가 미흡했기 때문이다. 다만 소득세 개편에서는 (소 득 재분배 효과가 떨어지는) 역진적 소득공제 방식을 정비 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근로장려세제나 자녀장려세제 혜 택을 고려하면 연봉 4천만 원 소득자를 기준으로 누진적 증세 효과를 발휘하는 방안이었다.”

그가 설명하는 정부 원안에 따른 세 부담 증감은 이렇 다. 우선 전체 근로소득자 1548만 명 가운데 연봉 4천만 원 미만인 1189만 명(76.8%)은 종전보다 세제 혜택을 더 받는 다. 대신 나머지 359만 명(23.2%)은 누진적으로 세 부담이 늘어난다. 그중에서도 연봉 7천만 원까지는 연간 16만 원이 늘어나고, 고소득층으로 갈수록 최대 865만 원까지 증가 하도록 설계됐다. 그는 “세금폭탄이라는 여론이 들끓으면 서 수정안이 나왔고, 결과적으로 세금을 더 내야 할 비율 은 13%(205만 명)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며 “이런 정도의 증세로는 ‘보편복지’를 구현하자고 주장하기 어렵다”고 일 축했다.

고소득층 제기할 문제, 왜 중산층이 대변하나

“민주당의 세금폭탄 공세가 잘못됐다고 보는 건가.”

“분명한 왜곡이 있다. 세금폭탄은 원래 부자들이 맞는 거다. 서민들은 폭탄 맞을 만큼 세금을 많이 내지 않는다. 게다가 연봉 4천만 원 소득자가 어떤 사람들인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노동자 평균 임금을 훌쩍 넘기는 이들이 월 1 만 원가량 더 내는 게 폭탄은 아니지 않은가.”

‘세금폭탄’이라는 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된 것은 노무현 정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택 보유자의 2%를 대상으 로 도입된 종합부동산세를 두고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이 정치 공세를 벌일 때 주로 활용했다. 한나라당은 2011년에 도 민주당의 무상복지정책이 세금폭탄이라며 반발했다.

“여·야가 바뀌었지만 조세 저항은 똑같이 격렬하다는 뜻으로 들린다.”

“예전에 (민주당이) 세게 당했으니 복수하겠다고 칼을 갈아온 건지.(웃음) 심지어 이번에는 ‘세금 원자폭탄’이라고 까지 이야기하더라. 종부세 때는 2%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 지만 이번에는 적용되는 층이 넓으니 ‘원자폭탄’이라는 주 장이다. 과도한 비유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1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노년유니온’,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세상을 바꾸는 사회복지사’ 등 4개 복지 시민단체는 지난 8월 24일부터 ‘사회복지세 도입’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앞서 8월 8일에는 관련 청원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2 소득 전액에 세금을 매긴 뒤 지출액 일부를 환급해주는 세액공제와 달리, 소득공제는 소득 에서 의료비와 교육비 등 공제 대상이 되는 지출액을 빼서 그만큼 줄어든 소득을 기준으로 세 금을 매긴다. 소득공제로 하게 되면, 같은 금액의 지출을 하더라도 높은 세율을 적용받는 고 소득층이 더 큰 혜택을 받게 된다. 따라서 이번 개정안은 고소득층에 대한 세 부담을 늘리는 동시에 중간 계층에 대해서도 일정 부담을 지우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3 세법 개정안이 수정되면서 줄어드는 세입 감소분은 연간 4400억 원에 이른다.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