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8.06 12:33 수정 : 2013.08.07 17:58

스피드광들이 F1 그랑프리 대회 개회를 기다리고 있 다. 최고 시속 300km로 굉음을 일으키며 달리는 스포츠 카를 보며 짜릿한 전율을 느끼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들이 정작 300km의 속도보다 더 흥분을 느끼는 것은 다른 곳 에 있다. 바로 2012년 월드챔피언 세바스티안 베텔(독일·레 드불 레이싱 소속)이 흑인 레이서 루이스 해밀턴(영국·메르 세데스 AMG 페트로나스 F1 소속)를 추월할 때이다. 스피 드광들은 빨리 달리는 속도감보다 다른 사람을 추월하는 경쟁에서 더 짜릿함을 느낀다. 과다경쟁을 부추기는 속도 가 차량 충돌로 끝나는 결말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속도를 더 높여라.

자본주의의 시간은 끝없이 속도로 변환된다. 겉보기에 느리게 보이는 것들조차 무서운 속도를 감추고 있다. 연작.
여기는 영국의 한 고속철도 역이다. 고속철도가 둥글 고 얇은 막처럼 생긴 시계 다이얼을 강타하며 질주하는 모 습을 담은 광고판이 걸려 있다. 고속철도는 남근을, 시계 다이얼은 처녀막을 연상시킨다. 마치 남근은 ‘지구를 관통 하는 이상적인 화살’이자 ‘테크놀로지 세계의 생식기관’이 라고 말하는 듯하다. 속도는 남자들의 뜨거운 막대기에 가 스를 충전시키면서 성적 권력의 언어로 속삭인다.

이런 속도는 파시스트를 숭배하고 파시스트와 결탁하 게 한다. 특히 과다경쟁의 측면에서 그렇다. 다국적 기업은 다른 이데올로기를 허용치 않는 파시스트적 권력이다. 자 본주의 시장의 선두주자가 다른 경쟁자들을 빠르게 몰락 시키며 궁극적으로 전 지구적 지배를 추구한다. 자신의 앞 길을 방해하는 환경단체는 파괴하고 획일화를 강요하는 것 처럼.1

 

실제로 속도는 빨라졌나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의 설립자인 클라우 스 슈바프는 몇 해 전 약육강식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그 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시대는 지났고 빠른 자 가 느린 자를 잡아먹는 시대”라며 ‘완육속식’(緩肉速食) 시 대를 천명했다. 세계 최연소 라디오 방송국 소유주 제이슨 제닝스도 2001년 출간한 자신의 책에 비슷한 취지의 글을 실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역시 미래의 계층을 ‘빠른 자’ 와 ‘느린 자’로 구분했다. 이렇듯 자본주의에서 ‘빠름’은 자 본가들의 미덕이 되고 그 이면에는 효율성과 속도경쟁을 주입하려는 자본의 논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속도를 구현하는 최종병기 는 이제 우리 신체의 일부가 된 스마트폰일 것이다. 최근 상 용화된 롱텀에볼루션 어드밴스(LTE-A) 스마트폰 광고는 속도경쟁의 축약판이다. “1초당 최대 이미지 17장과 이북 8 권, 음원 5곡, 동영상 1편을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이 광 고는 ‘1초의 가치’를 내세우며 감성을 자극하지만 결국에는 ‘빠름의 끝’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다운로드 속도 가 느린 스마트폰이나 2G폰을 가진 사람을 ‘속도의 루저’로 격하시킨다.

눈 깜짝할 사이인 1초가 자연에서는 빛이 지구를 7바 퀴 반을 돌고 세슘이 91억9263만1770번 진동하는 경이로 운 시간이지만, 인간에게는 기껏해야 10여m를 달리고 공 을 40여m 던지는 아주 미미한 시간일 뿐이다. 하지만 기술 의 발달은 인간이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는 속도를 갖게 했 고 쉴 틈 없이 정보의 소유와 처리를 강요하고 있다.

1990년대 초 주요 통신 수단은 ‘삐삐(호출기)’였다. 그 리고 지금은 무선 인터넷이 가능한 스마트폰(3G)으로 바뀌었다. 그사이 발신만 되는 ‘시티폰’, 수신과 발신이 모두 되 는 PCS폰(1G), 문자메시지를 가능하게 했던 2G폰(피처폰) 이 기술발달의 속도에 밀려 사장됐거나 사장되고 있다. 지 금 대세를 이루고 있는 LTE 스마트폰은 3G폰보다 데이터 전송 속도가 5배 이상 빨라진 것으로 다운로드 속도가 최 대 75Mbps이다. 그리고 최근 이동통신사들이 광고하는 LTE-A 스마트폰은 최대 150Mbps로 기존 LTE폰보다 2 배 빠른 속도를 구현할 수 있다고 한다. 150Mbps 속도가 실 감나지 않는다면 가정에서 쓰는 유선 인터넷과 비교하면 쉽 다. 가장 빠른 광랜이 100Mbps를 구현하는데 견줘 LTE-A 는 광랜보다 수치상 1.5배 빠른 전송속도를 갖고 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현대인들은 광랜보다 빠른 속도 로 전보다 빠른 검색과 빠른 소통, 빠른 일처리가 가능해졌 다. 달리 말하면 스마트폰 사용자들이 남보다 더 많은 시간 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시 간이 부족하다고 하소연한다. 항상 새로운 정보에 쫓기고 과거보다 더 바빠졌다고 말한다. 이렇게 살뜰이 절약한 시 간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김원일 기자 nirvana@hani.co.kr

1 제이 그리피스의 <시계 밖의 시간> 2장을 정리해서 각색한 것이다. 영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그리피스는 “자본주의 시간은 짜릿한 전율을 느끼게 하지만 무섭고, 굉장히 멋있지만 파시스트적이며 남근성을 갖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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