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8.06 12:20 수정 : 2013.08.07 22:37

‘이런!’

내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휴대전화와 오랜 기간 ‘불화’를 겪었다기에는 너무 평범해 보인다. 티셔츠에 반바지, 백팩을 멘 그는 앳된 얼굴에 동그란 안경, 발랄한 표정의 보통 청년이다.

지난 7월 9일 오전 서울 서강대 정문 앞. 그와 첫 대면하기까지의 과정은 다소 지난했다. 휴대전화 한 통으로 손쉽게 인터뷰 약속을 잡아온 ‘기자질’의 습성에 견줘 그랬다.

그는 서강대 철학과 대학원생 소영광(27)씨다. 영광씨를 만나기로 한 건 그가 휴대전화를 거부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였다. 우리나라의 휴대전화 보급률은 이미 2010년에 100%를 넘어섰다. 휴대전화를 쓸 수 없는 영유아 등을 감안하면 휴대전화가 두 대 이상인 사람도 적잖다. 휴대전화가 일종의 ‘신분증’ 1 역할을 하는 시대에 스스로 휴대전화를 거부하는 사람은 드물다. 더구나 그는 정보통신산업의 주요 소비층으로 간주되는 20대 청년이다.

휴대전화를 쓰지 않던 시절 그는 공중전화를 주로 이용했다(왼쪽). MP3 플레이어와 시계, 수첩, 펜, 전화번호부 등을 필수 소지품으로 챙겨 다녔다(중간). 기본 애플리케이션 몇 개만 떠 있는 영광씨의 스마트폰(오른쪽).한겨레 박승화
스마트폰 들고 나온 탈휴대전화 취재원

영광씨가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은 건 2010년 말이라고 했다. 철학자 김영민 선생(전 한신대 교수)과 함께 3주에 한 번씩 모여 인문학 공부 모임을 하던 중이었다. 몇 달 전 김 선생은 <나·들> 기자에게 “도원결의라도 한 것처럼 함께 공부하던 학생 5명이 차례로 휴대전화를 쓰지 않더라”고 귀띔한 적이 있다.

“간혹 저처럼 휴대전화를 쓰지 않는 학자들이 있긴 하지만… 소군처럼 20대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쓰지 않는 경우는 저도 처음 봤습니다. 휴대전화를 쓰지 않으면 다르게 살게 되는 조짐이 있습니다. 관계를 맺는 방식이 달라진다고 할까요. 그렇다고 학생들에게 쓰지 말라고 한 건 아닌데….”

영광씨를 만나는 과정이 오래 걸린 건 그를 소개해준 김 선생도 휴대전화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연락은 대부분 이메일로 주고받아야 한다. 유선전화 연락은 꼭 필요할 때만 오후 3~5시에 할 수 있다(그가 지정해준 시간이다). 기획 취지를 설명하고 영광씨의 이메일과 소속 학교를 알기까지 3~4일이 걸렸다. 이후 영광씨에게 보낸 이메일에 답장이 오지 않자, 초초해진 나는 학과 사무실로 전화를 걸고 말았다.

“저… 사정이 이런데 연락할 방법이 있을까요?”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드릴게요.”

헉! 영광씨는 휴대전화를 다시 쓰고 있었다. 낭패다. 그렇다고 물러설 순 없었다. 도대체 그는 왜 휴대전화를 다시 쓰게 된 걸까. 오히려 궁금증이 더 늘었다. ‘패전기’를 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를 만났다. 접촉한 시점부터 만나기까지 꼬박 열흘이 걸렸다.

대학원 입시 때문에…불가피한 선택

대학 안에 있는 한 커피전문점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평소 보기 드문 풍경이 하나 펼쳐진다.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전화는 내 것 단 한 개였다. 보통은 자리에 앉은 사람 수만큼 휴대전화가 테이블에 오르기 마련이다. 그는 스마트폰 접속에서 잠시라도 멀어지면 불안해한다는 이른바 ‘노모포비아’(No Mobile Phone Phobia)들과는 한참 거리를 두고 있는 것 같았다. 한 조사 2에 따르면, 지난해 스마트폰 중독자의 스마트폰 사용 시간은 하루 평균 7.3시간이다.

“휴대전화는 어디 있나요?”

“아… 바지 주머니에 있습니다.”

“평소 습관인가요?”

“여럿이 만날 때는 더 그렇고, 심지어 둘이 만나서 대화할 때도 스마트폰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폰 한 번 보고, 친구 얼굴 한 번 보고 이런 게 일반화된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되면 진지한 대화가 오가기 힘들고, 대화 리듬도 깨지고…. 저는 누구랑 만날 때 상대방의 눈을 빤히 쳐다보는 편인데 친구들은 그걸 부담스럽다고 해요.”

스마트폰에서 전송되는 사진으로 얼굴을 대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정작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는 일은 낯설어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영광씨의 휴대전화는 2009년형 아이폰 3G다. 아이폰의 첫 화면은 무척 황량했다. 애플리케이션이 많이 깔려 있지 않았다. 연락처와 계산기, 시계, 이메일, 사파리 등 기본형으로 깔려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친구들은) 제가 너무 진지하대요. 그런데 이런 지적을 할 때도 ‘진지하다’는 표현 대신 ‘느끼하다’고 해요. 저더러 느끼하대요.(웃음) 우리 또래에게 ‘진지하다’는 이미 죽은 말인 것 같아요.”

2010년 말부터 시작된 그의 탈휴대전화 생활은 지난해 10월 강제 종료됐다. 대학원 입시를 치르기 위해선 불가피하게 휴대전화가 있어야 했다. 아예 입학지원 원서를 낼 때부터 휴대전화 번호를 필수로 기재하도록 돼 있었다.

“그때 난감했어요. 휴대전화 번호를 내지 않으면 입시 관련 공지나 변동사항 등을 알 수 없거든요. 모든 사람이 휴대전화를 사용한다고 간주하고 만든 시스템으로, 휴대전화가 없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폭력일 수 있잖아요.”

결국 휴대전화를 다시 쓰기로 했다. 마침 아이폰 기종을 업그레이드하려는 선배가 구형 아이폰을 물려줬다. 대신 그는 휴대전화를 아주 제한적으로만 사용하기로 했다. 요금제부터가 달랐다. 음성통화와 문자메시지 서비스를 위주로 한 ‘TTL 요금제’를 쓰고 있다. 와이파이 환경이 아닌 곳에서 3G로 인터넷 접속을 하기 어려운 요금제다.

“주로 문자메시지를 사용하는 정도입니다. 3주 전쯤 카카오톡을 처음 깔았어요. 조교 업무도 보고 있는데, 조교장이 공지사항을 보내야 하니 깔라고 해서.”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철저하게 휴대전화와 거리를 두게 된 이유는 뭘까. 내친 김에 그의 휴대전화 이력부터 들어보기로 한다.

고딩 때 첫 휴대전화…“ 그땐 수백 통 문자질”

올해는 휴대전화가 개발된 지 40년이 되는 해다. 1973년 4월 3일, 미국 모토로라의 마틴 쿠퍼가 만든 휴대전화 ‘다이나택’은 무게가 약 1kg으로 묵직했고, 배터리 사용시간도 35분에 불과했다. 일명 ‘벽돌 전화’라고 불렀다. 다이나택은 10년 뒤인 1983년 당시 판매가 기준으로 약 4천 달러에 판매됐다. 스마트폰 중독을 염려하는 지금과 달리 그때만 해도 휴대전화는 아무나 쓸 수 없는 사치품이자 중독될 만큼 쓸 수 있는 성능도 아니었다.

국내에서 휴대전화가 활발히 보급되기 시작한 건 1990년대 후반이다. 휴대전화에 관한 영광씨의 첫 기억도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학교 1학년 때다. 폴더형 애니콜 단말기가 출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전에는 크기가 크고 값이 비싼 것만 나왔는데 애니콜 폴더가 나오면서 휴대전화를 갖고 다니는 친구들이 생겼어요. 저는 익산(전북)에서 살았으니까 서울 학생들은 더 많이 가지고 다녔을 겁니다. 기능은 별로 없고 단지 전화만 되는 때였지만…. 그냥 신기해서 우르르 몰려가 전화기를 만져보는 정도였어요. 아! 그런 건 있었죠. 휴대전화가 있는 사람은 뭔가 주목받고 인정받게 되고….”

2002년 한-일 월드컵 열풍이 불면서 휴대전화를 구입한 친구가 확 늘어났다. 월드컵을 겨냥한 휴대전화 업계의 대대적 마케팅이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영광씨는 부모님에게 휴대전화를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쓴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약간 ‘까진’ 느낌이랄까, 그런 게 있었거든요. 학생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시절이라 금욕주의적 측면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영광씨에게도 2003년 생애 첫 휴대전화가 생겼다. LG 싸이언 폴더폰이었다. 갑자기 휴대전화를 장만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다니던 교회의 중·고등부 회장을 맡았다. 모임 참석자들과 연락을 수시로 주고받아야 할 필요가 생겼다.

“휴대전화가 생기니까 사람들과 연락하는 방식이 많이 바뀌더군요. 즉각적으로 응답이 오니까요. 그전에는 주로 이메일이나 (MSN 따위의) 메신저로 했거든요. 특히 그때 메신저가 유행이었는데, 메신저 쓸 때는 만남 자체가 우연했어요. 제가 접속할 때 친구가 안 할 수 있는 거고…. 이메일도 수시로 확인하는 게 아니라 어떨 때는 하루 건너 확인하기도 하잖아요. 어느 정도 시차를 두고 메시지가 서로에게 읽히니까 가슴 졸인 적도 많았어요. 친구가 읽을 때까지 제 마음이 변할 수도 있는 거고….(웃음)”

유일하게 휴대전화에 푹 빠져 있던 시절이다. 하루 수백 통씩 ‘문자질’을 했다. 머리맡에 두고 잠자고 일어나자마자 집어 들었다. “제가 고딩 때 너무 많이 쓴 바람에 지금 휴대전화와 거리를 두려는지도 모르겠어요.(웃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통해 문장력을 길렀다면 이해하시려나요?”

여자친구를 처음 사귄 것도 휴대전화가 생긴 직후였다. 여학생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교회였다. 집 거실에 있는 컴퓨터는 여동생과 함께 쓰기 때문에 은밀한 이야기를 주고받기 어려웠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는 관계를 형성하는 데 휴대전화만큼 유용한 수단은 없었다.

아이러니한 건 휴대전화가 생기고 나서 교회 모임 날짜를 잡기 어려워졌다. 휴대전화가 없을 때는 한번 약속을 정하면 번복하기 어려웠다. 웬만한 사정이 생겨도 약속 장소에 나가곤 했다. 그런데 휴대전화가 생기고 나니 이런 저런 사정으로 약속이 바뀌거나 미뤄지는 경우가 더 많아지는 것이다. 휴대전화는 약속을 깨는 수단이 되곤 했다. 휴대전화를 장만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휴대전화가 외려 걸림돌이 돼버린 셈이다.

영광씨는 휴대전화를 많이 쓰고 연락하는 친구가 많아질수록 고독감이 뒤따랐다고 한다.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는 일이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하는 유일한 방식이던 시절의 일이다.

“문자를 보냈는데 답이 없거나 서로 관계가 소원해져서 친밀하게 문자를 주고받을 수 없는 사이가 되면 그게 그렇게 서글퍼지더라고요. 또 휴대전화가 인간관계를 ‘다 대 다 관계’로 만드는 측면이 있잖아요. 그래서 몇몇 친한 친구들끼리 결속력을 높이기 위해서 무전기를 사서 써본 적도 있어요. 근방에 사는 애들끼리 대형마트에 가서 무전기를 사서….(웃음)”

고3이 되자 ‘뮤직폰’이 출시됐다. 인터넷에서 음악을 다운받아 들을 수 있는 휴대전화가 등장한 것이다. MP3 플레이어와 CD 플레이어 등이 위협받던 시기다.

“뮤직폰으로 갈아탔나요?”

“아뇨, 그때만 해도 휴대전화를 자주 바꾸면 사치한다는 인식이 강했거든요. 지금이야 그런 분위기는 없어졌지만. 대신 그때도 주목받고 싶어 하는 친구들은 많이 바꿨어요. 학생들은 교복을 입어야 하니까 자기 개성을 드러낼 방식이 거의 없잖아요. 휴대전화가 그런 인정 욕구를 어느 정도 해소해준 것 같아요.”

휴대전화와 본격적인 ‘불화’를 겪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입학한 뒤이다. 학부에서도 철학을 전공했다. 영광씨의 휴대전화기는 폴더폰에서 슬라이드폰으로 업그레이드돼 있었다.

“대학 1학년 때 김영민 선생님의 수업을 처음 들었어요. 휴대전화를 안 쓰시는데 그 이유가 인상적이었어요. 휴대전화가 타인과의 소통을 오히려 더 가로막고 나 스스로의 나르시시즘을 채워주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셨어요. 다시 말해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문이 아니라 세상을 구경만 하는 창이 될 뿐이고, 더 나아가 거울 역할만 남아서 자기 자신만 들여다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구경만 하는 창”… 대학 때 거리 두기

곧바로 휴대전화를 버리진 않았지만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전화기를 휴대하고 다녔지만 본인이 먼저 문자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하는 일은 되도록 줄여갔다. 대신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가족과 연락을 주고받는 일은 계속했다.

“어느 순간 휴대전화가 내 생활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쪽으로 생각이 미쳤어요.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나한테 연락해오면 자꾸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답해야 하잖아요. 문자를 주고받기 시작하면 완료할 때까지 계속 신경 써야 하는데 그런 게 공부의 흐름을 깨는 것 같아 싫었어요. 스팸 문자 혹은 원치 않는 타인과의 통화에 응해야 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휴대전화 없는 삶을 결행하게 된 출발점은 ‘사고’라는 우연이었다. 실수로 휴대전화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액정이 박살났다. 휴대전화를 새로 구입하지 않았다. 2010년이 저물어가는 무렵이었다.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에게 먼저 동의를 구했다. 다행히 이해한다는 답변을 들었다. 거의 매일 만나 약속을 이어갔기 때문에 여친과의 만남이 삐걱거릴 일도 별로 없었다. 연락은 공중전화로 했다. 휴대전화 보급 확산으로 무용지물이 돼버린 공중전화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 말고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10년 전만 해도 전국적으로 14만 대가 넘던 공중전화가 이제 8만 대가 채 안 된다. 내년에는 7만 대까지 줄이는 게 정부 목표다. 공중전화에 인적이 뜸하다 보니 공중전화 부스가 마약공급책의 은닉처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부러 전화카드를 쓰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동전 넣는 공중전화 부스 찾는 게 더 어려웠던 것 같아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아날로그가 운치 있는 것 같아서요.(웃음)”

가끔 여자친구에게 손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집어넣기도 했다. 그가 손편지를 보내면 여자친구도 같은 방식으로 답장을 써서 주었다.

“가족들은 뭐라고 하지 않던가요?”

“부모님은 어릴 때부터 저를 자유방임으로 키우셨어요. 원래 제가 좀 독특한 아이라는 걸 알고 계셨고요.”

휴대전화가 없다 보니 경조사가 전달되는 속도가 각기 달랐다. 집안에서 누가 돌아가시면 어머니는 영광씨의 여자친구에게 연락을 취했다. 일종의 비상연락망이었다. 그가 여자친구와 같이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에 마련 된 자구책이었다.

대신 기쁜 일은 늦게 전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여동생의 출산 소식을 몇 달 뒤에야 알게 된 적도 있었다.

“정기적으로 부모님과 연락을 주고받았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늦게 알게 됐죠?”

“부모님이 손주보다 제 안부가 더 궁금하다 보니….(웃음) 집안의 안 좋은 일에는 제가 꼭 참여해야 하지만 즐거운 일에는 빠져도 크게 문제 안 되니까요.”

“저는 불편한 게 없는데 주변 사람들은…”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그는 소지품을 누구보다 꼼꼼히 챙겨 다녔다. 여러 가지 기능을 하던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아버렸으니 당연했다.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할 게 시계였어요.” 휴대전화를 들고 다닐 때는 액세서리에 불과했던 시계가 본연의 기능을 되찾은 셈이다. 세미나를 함께 하는 등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을 일이 있는 친구들의 연락처는 간단한 전화번호부를 만들어 지갑에 넣고 다녔다. 언제든지 메모할 수 있는 수첩과 펜, MP3 등도 필수 소지품이 됐다. 친구들이 스마트폰의 ‘맵’ 애플리케이션으로 길찾기할 때 그는 약도를 들고 다녔다.

“지금도 어디 갈 일이 생기면 가끔 약도를 그려서 들고 다녀요. 낯선 장소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만남이나 사건이 여행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요즘은 명소와 맛집 등에 대한 정보를 다 꿰고 가기 때문에 그런 낭만이 사라진 것 같아요. 정작 중요한 것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요.”

“다른 불편한 점은 없나요?”

“실시간으로 정보를 얻고, 실시간으로 할 일을 처리하는 데 큰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사실 저는 불편한 일이 별로 없습니다. 아마 제 주변 사람들은 할 말이 많을 것 같아요.(웃음) 저를 즉석에서 불러내거나 음성 통화할 수 없었으니까요.”

영광씨는 물론이고 그와 함께 인문학 공부를 하던 친구들도 지금은 다시 휴대전화를 쓰고 있다. 대부분 자의에 의한 선택이 아니었다. 어떤 이는 대학원 조교를 맡으면서, 또 다른 이는 연락이 안 돼서 답답하다는 어머니의 강요에 의해서였다.

“그 어떤 소통 수단도 거부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그저 휴대전화를 쓰지 않겠다는 것이었는데…. 이게 무슨 국가에 대한 저항을 표현하려는 것도 아니었는데…. 휴대전화를 안 쓸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그럴 수 있는데, 사회적으로 지위가 취약한 사람일수록 벗어나기 어려운 것 같아요. 취업준비생이라거나 직장인 가운데서도 사회생활 초년생들은 언제든지 윗사람의 호명에 응답해야 하니까요.”

아이폰을 바지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요즘, 문서 파일이나 동영상 등을 다운로드 받는 웹사이트에 접속하기 위해 친구의 휴대전화를 빌려야 하는 일 따위는 더 이상 없다.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면서 편리해진 일 가운데 하나다.

영광씨는 올해 대학원생이 됐다. 이미 스마트폰을 통한 의사소통에 익숙해진 같은 과 동료들을, 지난해 10월 겨우 구형 아이폰을 쓰기 시작한 그가 따라잡기란 여러모로 벅차다. 영광씨는 대학원 입학으로 새로 만난 친구들과 친해지려고 몇 달 전 페이스북에 가입했다. 그러나 그의 ‘페북질’은 석 달 만에 끝났다.

“정보가 정말 빠르게 오가더군요. 덕분에 각종 공연에 갈 수 있는 계기가 많아져서 얻은 것도 많았어요. 그런데 페북에 장문의 글을 올리고 댓글도 좀 길게 달았더니 친구들 반응이 안 좋더라고요. 세 문장을 넘기면 지쳐서 그만 읽게 된다는 거죠. 긴 글을 올리려면 블로그에 하라더군요. 저도 적성에 맞지 않았어요. 서로 과시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주고받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요’를 누르는 것도 반응을 획일화하는 것 같아서 좀 불만인데, 한편으로는 이걸 못 받으면 소외받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이미 또래끼리는 이메일은 물론 문자메시지를 주고 받는 것도 어색해한다. 대화 대부분은 카카오톡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탈휴대전화 넘사벽’ 또 올지도 모르죠

“카톡은 휴대전화 번호가 저장되면 다 친구로 뜨잖아요. 저는 그런 게 싫더라고요. 연락이 단절된 사람들과 다시 관계를 맺어야 하고, 단체 채팅방이 열리면 ‘알림’ 수십

개가 한꺼번에 떠버리니 당황스럽죠. 알림을 꺼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알게 됐지만.”

그렇다고 과 동료들과 보조 맞추는 일을 멈출 생각은 없다. ‘문자 보낼 때 최대 100자를 넘기지 말라’는 등 친구들의 조언을 머릿속에 각인하고 있다. “실제 대화에서도 배워야 할 화법이 많더라고요. 제가 인터넷 채팅 용어를 잘 몰라서 그렇다고 하대요. 처음 만났을 때 ‘덕질이 뭐냐?’고 물어야 한다는 것도 최근에 알게 됐어요.(웃음)”

영광씨는 지금 쓰고 있는 아이폰의 수명이 다하면 휴대전화를 다시 구입할 의사가 없다고 했다. 물론 앞으로 또 어떤 넘지 못할 벽이 그의 의지를 꺾게 될지 모르지만. 이 때문에 그의 지인 가운데 일부는 새로운 방식으로 휴대전화를 쓰고 있다고 한다. 연락을 주고받고 싶은 가족이나 지인 20~30명만 휴대전화로 연락하고, 다른 이들에게는 휴대전화를 쓰지 않는다.

“저는요… 휴대전화가 사람들의 행동이나 생활양식을 너무 많이 변형시키는 것 같아서 싫어요. 지금은 휴대전화가 신체의 일부가 돼버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미 내 몸의 일부가 됐다고 하면 더 이상 이것에 중독됐다고 말하기도 어렵지 않나요?”

글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일간지 기자 ‘크루소 되기’

7개월 만에 종료

“넌 이 세상 최고의 기계였어! 이젠 안녕~.”

한 종합 일간지 10년차 기자인 김철훈(가명·34)씨가 스마트폰과 이별을 고한 건 2012년 3월의 일이다. 그는 당시의 ‘비장한’ 심경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주변에선 “신기하다”며 난리가 났다. ‘최첨단 디지털 시대의 로빈슨 크루소가 되려는 것이냐’는 비아냥도 섞였 다. 신문기자라는 직업을 고려하면 이별은 파격이다. 자고로 ‘기자 질’이란 무엇인가. 세상 돌아가는 일을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따라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결심을 굳힌 데는 스마트폰을 쓸수록 정작 나는 바보가 돼가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깊어지려는 순간 이 오면 무의식적으로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쌍둥이 남매의 아빠가 된 일은 결정적 계기가 됐다. ‘폰질’에 푹 빠져 있던 어느 날,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라? 내가 ‘폰질’만 하는 아빠로 기억되면 어쩌지?”

곰곰이 돌아봤다. 그는 애플 아이폰이 국내 보급된 직후인 2010 년 초 스마트폰족이 됐다. 이후 2년 동안 스마트폰은 그를 줄곧 따라다녔다. 아니 그가 스마트폰을 따라다녔다. 그는 “단 10초라 도 여유가 생기면 본능적으로 만지작대는 수준이었다”고 털어놨 다. 일어나자마자 날씨를 검색하는 일로 시작해서 잠들기 전 페이 스북에 새 소식이 있는지 확인하는 일까지. 스마트폰은 마치 몸의 일부 같았다. 운전하면서도 신호 대기에 걸리면 버릇처럼 스마트 폰을 끄집어냈다. 교통사고를 내지 않은 게 신기할 만큼 위험천만 한 일이었다.

보란 듯이 ‘피처폰’을 사러 갔다. ‘스마트폰 시대’에 피처폰을 구입 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일반 휴대전화 매장에서 피처폰을 달라고 했더니, “요즘 그런 기종은 취급 안 한다”는 퉁명스러운 답변이 돌 아왔다.

수소문 끝에 전자제품 전문 매장으로 달려갔다. 매장 한구석에 처 박혀 있던 피처폰 하나를 집어 들었다. 먼지를 살짝 떨어줘야 했 다. 바로 구매를 결심했다.

손안에 들어온 피처폰은 뭔가 많이 어색했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 이라서 그런지, 불과 몇 년 전 쓰던 기종인데도 낯설기만 했다. 그 래도 제품 만족도는 예상보다 높았다. 스마트폰이 ‘전화 통화가 가 능한 소형 컴퓨터’라면 피처폰은 ‘진정한 전화기’였다. 늘 불만이던 통화 품질은 훌륭했고, 금세 방전돼버리던 배터리는 하루 종일 빵 빵했다. 8만 원을 넘기던 휴대전화 요금도 3만 원대로 떨어졌다.

철훈씨를 둘러싼 풍경도 확 달라졌다. 스마트폰과 결별한 다음날 아침의 일이다. 눈도 뜨지 않은 채 머리맡의 스마트폰을 집어 올리 려다 ‘아차’ 싶었다. 약 20초간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10년간 하루 2갑씩 피우던 담배를 끊은 적이 있다. 그때처럼 금단현상이 밀려 오면 어쩌나 싶어 두렵기도 했다.

불편함과 두려움은 불쑥불쑥 찾아왔다. 하지만 처음 한 달 동안 은 외려 ‘해방감’이 더 컸다. 기상 후 첫 일과던 날씨 검색은 텔레 비전 뉴스를 시청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예쁜 기상 캐스터가 10분 단위로 날씨 예보를 하는가 하면, 화면 오른쪽 밑에는 도시별 날씨 상황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1시간가량 전철을 타야 하는 출근길이 가장 큰 고비였다. 평소 습관대로 무의식적으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할 수 있는 건 아

무것도 없었다. 시계를 한번 보고 수신된 문자메시지를 한번씩 들춰볼 뿐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보니 사람들 대부분이 3.5인치 스마트폰에 눈동자를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래, 저런 중독자들보다는 내가 낫잖아?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거야!”

조간 신문을 펼쳐 들었다. 가판대에서 돈을 주고 신문을 사려니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30분 만에 신문 2부를 꼼꼼히 다 읽었다.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오늘 할 일, 앞으로 신경 써야 할 일 등을 차분히 떠올려봤다. 아무것도 보거나 읽지 않고 깊은 생각에 빠진 것도 실로 오랜만이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정리되는 것도 나오고, 좀더 뒤엉켜 확장되는 것도 있었다. 왠지 모르게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업무에 누수가 와선 안 되는 법! 긴급하게 기사를 전송할 때를 대비해 ‘와이브로 에그’를 구입했다. 인터넷을 급하게 연결해야 할 때 유용하게 썼던 스마트폰 테더링 서비스를 더 이상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때때로 모바일 뱅킹과 웹서핑, 페이스북·트위터 등을 아무데서나 맘대로 하고 싶은 욕구가 불끈불끈 솟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욕구는 억누르면 그만이었다. 소모적인 웹서핑을 하는 대신 책을 더 많이 읽고, 시덥잖은 카카오톡 채팅하는 대신 쌍둥이와 더 많이 눈을 마주치리라. 스마트폰 없는 삶은 그만큼 풍요로워질 거라 믿었다.

그러나 ‘이별’의 달콤함은 사랑의 유효기간 만큼이나 짧았다. 한달쯤 지났을까. 철훈씨를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이 자꾸 생겼다. ‘나 홀로’ 스마트폰 쓰지 않는 생활은 간혹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그를 몰아붙였다. 스마트폰이 없어 ‘국민 메신저’(카카오톡)를 쓸 수 없던 그는 때때로 소통의 단절을 겪어야 했다. 대학 동창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청첩장에 나온 식장을 찾아갔다가 낭패를 본 일도 있다. “아무도 없더라고요. 알고보니 이 친구가 결혼식 일주일 전에 파혼했는데 카톡으로만 공지가 돈 거였어요.”

직장 상사의 눈치도 슬금슬금 보게 되었다. 오후에 취재원 만나고 있을 때 회사에서 전화라도 걸려오면 초긴장 상태가 되기 일쑤였다. 속보가 뜨면 취재 지시를 받게 된다. 스마트폰이 있을 때는 그 자리에서 바로 검색해보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지만 피처폰으로는 어림없었다. 다른 후배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묻거나 취재원과 만남을 중단하고 다시 노트북이 있는 기자실로 돌아와야 했다. 슬슬 걱정이 밀려왔다. 철훈씨가 스마트폰과 이별한 동안에도 스마트폰은 빠른 속도로 업그레이드되고 있었다. 네이버 N드라이브는 스마트폰 카메라와 N드라이브 업데이트를 연동시킨 애플리케이션을 출시했고, 애플은 4G가 가능한 ‘뉴 아이패드’를 출시했다. 같은 출입처의 한 기자는 갤럭시 노트를 장만해 S펜으로 취재하고 있었고, 그가 다니는 신문사에서 발행한 신문 지면에는 MS폰이 새롭게 무장해 탄생할 거라는 기사가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저도 나름 얼리어답터였는데…. 1년쯤 뒤엔 이런 최첨단 기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게 아닌가 싶더군요.”

스마트폰과의 재결합을 암시하는 핑곗거리는 하나둘씩 늘어갔다. 해외출장 갈 때면 무료 혹은 국내 시내전화 요금으로 통화가 가능했던 인터넷 전화 애플이나 길찾기를 수월하게 해주는 구글맵 등을 못 쓴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뒤늦게 찾아온 ‘금단 현상’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 됐다. 어느덧 출퇴근길 철훈씨 머릿속은 온통 스마트폰 생각뿐이었다. ‘검색하고 싶어! 기사 읽고 싶어! 트위터하고 싶어!’

그렇다고 곧장 스마트폰의 노예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타협이 필요했다. 유심칩을 빼고 책상 서랍 깊숙이 쑤셔넣은 스마트폰을 꼭 필요할 때만 ‘아이팟’처럼 사용하기로 했다.

‘탈(脫)스마트폰족’이 되려던 철훈씨의 몸부림은 어이없게도 7개월 만에 타의로 종료됐다. 지난해 9월 철훈씨가 속해 있던 부서의 장이 바뀐 뒤였다. 부서 내 모든 기자가 실시간으로 스마트폰과연동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업무를 처리하도록 사내 시스템이 바뀌었다.

그는 요즘 다시 출근길 전철 속에서 스마트폰을 잡고 산다. 업무상 봐야 하는 기사 검색을 마친 뒤엔 굳이 보지 않아도 될 연예·스포츠 뉴스까지 기웃거린다. 철훈씨는 예전으로 완전히 돌아간 자신을 위로하며 오늘도 출입처 기자실로 향한다. “그래! 이 세상은 스마트폰을 쓰지 않도록 내버려 두는 곳이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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