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8.06 11:33 수정 : 2013.08.07 17:57

나는 그 사람의 삶이 그를 설명한다고 믿는다. 그의 삶 은 인생의 방향을 트는 중대한 기로에서 점심 메뉴를 고르 는 사소한 문제까지, 그가 매 순간 결정해온 선택들의 총합 이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그를 추동하는 ‘무엇’이 무엇인가 에 따라 달라질 테다. 나는 그 ‘무엇’을 욕망이라고 부른다.

간호사 시절 암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며 분노와 슬픔, 좌절을 몸 안에 담았고, 마침내 에서 ‘노수진’이라는 인물로 불러냈다.
며칠 전, 내가 생각하는 ‘나’는 누구인지 써달라는 청 탁을 받았을 때,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인류가 동굴에 둘러앉아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기 시작했을 때부터 시작 됐을 이 골치 아픈 질문에 대한 답을 단 며칠 만에, 원고지 십수 장으로 정리해 보내라니. 그간 인터뷰 등을 통해 떠들 어댄 ‘나’만 해도 차고 넘치는 마당인데.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쓴다면 무엇을 얘기해야 하나, 어디까지 얘기해야 하 나, 얼만큼 솔직해야 하나…. 덕택에 나는 긴 시간, 얼굴이 벌게져서 내 안을 돌아다녀야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즐거운 탐사는 아니었다. 습작 시절 부터 지금까지 일기를 쓰듯 해온 일이건만, 할 때마다 어렵 고 서툴다. 번번이 허둥대고, 때로 어리둥절하며, 종종 불 쾌하다. 종잡을 수 없는 것들이 튀어나오는 미로에 빠지게 되는 탓이다. 천국을 지나면 지옥이, 빛이 번득이고 나면 진창 같은 어둠이 나를 삼킨다. 어느 순간 분노가 들불처럼 덮쳐오고, 다음 순간엔 상처받은 어린애가 어둠 속에 옹크 린 채 시선을 맞대온다. 그 모든 것을 통과하고 나면 어김없 이 맞닥뜨리게 되는 괴물이 있다.

내 소설 속 인물들은 대부분 그 괴물의 몸에서 태어났 다. 착하면서 나쁜 놈, 뜨겁고도 차가운 놈, 오싹하게 섹시 한 놈, 비겁하면서 무모한 놈, 미친 데다 이상한 놈. 성별, 성 격, 외모, 성장 환경, 직업, 삶의 방식 등은 제각각 다르지 만 그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욕망하 는 자’이다. 인생이 바뀌기를 바라거나, 지금 이대로 영원하 기를 원하거나, 살고 싶어 하거나, 죽고 싶어 하거나, 세상 을 향한 응전을 꿈꾸거나, 세계로부터 숨고 싶거나. 심지어 2009년에 출간한 소설 <내 심장을 쏴라>의 주인공 이수명 은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겠다는 욕망에 목 졸려 죽어가는 인물이었다.

가장 최근에 태어난 인물은 <28>의 화자 중 하나인 간 호사 노수진이다. 초고에는 없던 캐릭터이고, 정상적으로 작업이 진행됐다면 끝까지 등장하지 않았을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초고를 끝낸 후 찾아든 길고도 강고한 슬럼프만 아니었다면.

책 끄트머리, 작가의 말에도 밝혔지만 나는 지리산으 로 들어간 후에야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바이 러스에 매몰된 나머지 인간의 이야기가 쪼그라든 탓이었 다. 쓸 맛이 안 나 쓸 수 없었다는 얘기다. 책에는 밝히지 않 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빨간 눈 괴질’의 최전방에서 ‘행 동’해줄 인물이 없었다.

아마 나는 소설을 시작할 때부터 노수진이 필요하다 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재야의 장의사’라는 엉 뚱한 인물을 등장시켜 우격다짐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려 들 었다. 그는 선량한 사람이었으나 욕망이 없었다. 선의에만 의지한 행동은 의미 있는 갈등(최소한의 대립을 만들어낼 수 있는)을 만들지 못하며, 갈등 없는 상황은 변화를 끌어 오지 못하고, 변화가 없으면 이야기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 한다. 정체된 이야기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다. 작가가 세 상을 향해 하고 싶은 말, 이야기의 영혼에 가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망이 없는 자는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적어도 내 소설에서는 그렇다.

슬럼프는 자초한 재앙이었다. 대체 왜 그랬을까.

한 인물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다는 건 그의 기억과 역사와 주변 인물과 특정 시공간이 함께 불려온다는 걸 의 미한다. 노수진이 등장하면 무엇이 불려올지,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바로 나였다. 나를 닮은 인물이나 유사한 시 공간이 아니라 나 자신, 욕망과 절망과 죄책감 사이에서 난 파당하던 나의 20대 시절이 불려올 터였다. 나는 나를 소 설 속으로 밀어 넣고 싶지 않았다. 젊고 컴컴하고 미치도록 길었던 그때의 삶이 수진을 통해 되살아나는 게 싫었다. 잘 지켜왔다고 믿었던 작가로서의 냉정함이 ‘나’로 인해 무너질 까봐 두려웠다.

새벽마다 안개에 휩싸인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노수진을 대체할 인물을 찾았다. 정작 머리에 떠오르는 건 상처 를 들쑤시는 기억들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 취직하던 해에 어머니가 쓰 러졌다. 만성간염에서 간경화로, 끝내는 간암으로 발전해 간 3년 동안, 어머니는 수 없이 중환자실과 병실을 오갔다. 나는 어머니의 병실에서 응급실로 출근하고, 응급실에서 병실로 퇴근하며 어머니의 병시중을 들었다. 그 와중에, 비좁은 병실에 쪼그려 앉아 퇴근하고 들를 아버지의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했다. 아직 어린 동생들을 챙기는 일도 내 몫이었다.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가고, 통증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진통제의 힘으로 잠들고 나면, 나는 병원 서쪽 은행나무 언덕으로 나갔다. 깡마른 몸에 복수가 차서 배 만 불룩한 어머니가 보행기를 끌고 걸어가던 곳, 보행기에 기대서서 하염없이 지평선을 바라보던 늙은 은행나무 밑 으로.

나는 그곳에 옹크려 앉아 밤만큼이나 어두운 시간을 버텼다. 그때 내 안에는 무엇이 있었던가. 분노와 슬픔과 절 망의 껍질 속에서 욕망이라는 괴물이 자고 있었다. 내 인생 만 책임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스물다섯 살 나이만큼 의 짐만 질 수 있어도. 아니, 도망칠 수 있다면. 당신 손으로 밥 한 끼 챙겨보지 않는 아버지에게서, 날마다 조금씩 죽어 가는 어머니에게서, 누나 혹은 언니를 엄마로 여기는 동생 들에게서.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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