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8.06 11:28 수정 : 2013.08.08 17:40

“미래에 끝까지 살아남을 존재는 사이코패스가 아닐까요?”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존재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이 묵시록은, 그것을 흥미진진한 소설로 주조해낸 정유정 작가를 만난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물론 잠깐 지나치면서 나눈 말이지만, 여운은 컸다. 세계관 같은 것이 읽히는 대목이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생각하는 세상은 우리가 느끼는 현실보다 더 암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정유정은 소설보다 얌전했지만, 그렇다고 실망을 주진 않았다. 기대한 것보다 소설에 대한 뚜렷한 입장을 들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업계 비밀’인 셈인데, 소설 창작 노하우를 거침없이 이야기했다. 대개 이는 소설 쓰기를 즐기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쓰는 것이 재미있고, 자신의 소설에 자신감이 넘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나 정유정의 과거는 그렇지 않았다. 등단을 위해 수없이 공모전의 문을 두드렸지만, 좀체 열리지 않았다.

정유정은 자신을 ‘뻔뻔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남성적’이라는 평가와 ‘짐승 같다’는 평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건 ‘전형적인 여성성’이다.
현실과 경쟁하는 환상적 현실

간난신고를 거친 뒤, 그는 마침내 소설가로 데뷔할 수 있었다. 그를 스타덤에 오르게 한 <7년의 밤>은 ‘작가 정유정’의 탄생 이후에 태어났다. 물론 <7년의 밤>이 처녀작은 아니다. 작가가 되기 전까지 파지로 사라진 숱한 작품이 있을 것이다. 그중 ‘재활용’하는 것이 있을까? 그러나 그가 고백하는 소설 창작의 방식은 이런 추측을 무색하게 했다. “처음 쓴 문장이 퇴고 후에도 그대로 있으면 실패작이에요.” 표정은 단호했다. 그의 소설이 어떻게 박진감을 획득할 수 있는지 궁금했기에 집요하게 물었다.

“처음에는 그냥 캐릭터에 대해 쓰고 싶은 것을 힘껏 쏟아내요.” 길게는 6개월 정도 취재한 뒤 캐릭터 만드는 과정을 3개월가량 거친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소설의 시작일 뿐이다. 캐릭터 묘사가 끝난 뒤 비로소 작가는 이야기를 다듬는다고 한다. “구상 단계에서 큰 서사 구조만 생각해놓죠. 그리고 디테일을 내키는 대로 적어나갑니다.” 그의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촘촘한 디테일은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7년의 밤>에 나오는 야구에 대한 정보라든지, 최근작 <28>에 등장하는 전염병에 대한 의학 지식은 전문가를 방불케 했다. 야구는 워낙 야구광이라서 그렇다 쳐도, 어떻게 전염병까지 꿰뚫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미 알려졌지만, 그는 간호사 출신이다. 그래서 이번 소설에도 간호사가 등장하겠지만, 그렇다고 전염병에 대한 전문성을 확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넌지시, 몇몇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서 바이러스를 새롭게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지만, 있을 법한 바이러스를 허구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이 소설에서 그려지는 상황은 그냥 허구일 뿐이에요. 현실적으로 바이러스를 이렇게 짧은 시간에 진단할 수 없다고 해요. 최소 3개월 이상 걸린다는 거죠. 소설에서는 시간을 오래 끌 수 없기 때문에 금방 찾아내는 것으로 설정했어요.” 그는 소설이 현실을 직접적으로 반영해야 한다는 강박은 없었다.

어떤 이들에게 이런 입장은 뭔가 불편함을 끼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소설의 현실’은 ‘현실적인 것’과 별개였다. “제 소설의 현실은 모두 재구성된 거예요.” 그는 냉철하게 말했다. 손아람이 ‘남성적인 작가’라고 정의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소설이 현실을 담아내는 그릇이라기보다 현실과 경쟁하는 또 다른 세계라는 생각이 정유정을 지배하고 있었다. “처음 쏟아낸 캐릭터와 디테일을 서사에 맞게 오랜 시간 퇴고합니다.” 소설 쓰는 과정이 마치 영화 찍는 과정 같았다.

필요한 모든 원본을 찍어놓은 뒤에 편집한다는 말이었다. 영화감독처럼 자신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위해 초고를 이리저리 뜯고 붙이고 잇는다고 했다. 그에게 소설의 목적은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기보다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는 데 가까웠다. 그의 소설을 읽어본 이들은 공감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환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설은 박진감과 사실성으로 꽉 차 있다. “거기에 시체가 있었다고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체를 독자에게 바로 던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가의 말은 똑 부러졌다. 치밀한 묘사로 독자에게 사물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야 한다. 

소설을 쓰기보다 제작하는 사람

그의 소설을 읽으면 묘사의 생생함에 치를 떨게 된다. 그만큼 그는 묘사에 끈질기다. 처음 내가 받은 느낌은 자연주의 미학이었다. 그러나 자연주의가 도달하는 허무주의 따위에 그는 관심 없었다. 어쨌든, 강렬한 메시지가 있었다. 단순하게 권선징악으로 정리할 수 없는, 인간의 양면성 같은 것에 대한 발언이 강렬한 묘사 뒤에 숨어 있었다. 아니, 역설적으로 그 메시지를 위해 묘사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독자를 어르고 달래서 끌고 가는 목적은 딱 한 번 작가의 묵직한 주장을 설득시키기 위한 것이죠.” 말하자면, 그는 묘사를 위한 묘사 따위를 추구하지 않았다. 그의 묘사에는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은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서사를 완성하기 위한 분투이다. 디테일을 쏟아낸 뒤 서사의 목적에 맞춰 차례로 편집한다는 말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소설은 쓴다기보다 ‘제작한다’고 말하는 것이 낫다. 시작하기 전에 창작노트를 수북이 만드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심지어 영화처럼 콘티도 짠다고 했다. “저는 엄청난 길치예요. 낯선 공간에 대한 인지력이 떨어져요. 그래서 아예 허구의 공간을 소설에서 만들어내죠.” 마치 윌리엄 포크너의 가상마을인 ‘요크나파토파’처럼, 그의 소설도 자기만의 마을이 있다는 말이다. 흥미로운 전언이었다. <7년의 밤>은 아예 지도까지 첨부해놓았다. 이런 까닭에 그의 작품은 종종 장르소설로 받아들여진다.

그런 평가가 달갑지 않다고 했다. “장르소설을 쓰는 것보다, 재미있으면서도 묵직한 주제를 전달하는 작품을 쓰고 싶었어요”. 욕심도 많은 작가지만, 생각해보면 누군들 이런 꿈을 꾸지 않겠는가. 요즘은 체력이 달려서 권투를 하고 있단다. 모든 일상이 소설 쓰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았다. 원래 글 쓰는 작업은 무료하고 지루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고백을 보더라도, 이 경쾌한 작가가 매일 마라톤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소설 쓰기를 달리기에 비유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정유정도 글 쓰는 작업에 대한 인내심을 이야기했다. 사실 잘 참아내는 사람이 가장 잘 쓴다. 틀린 말이 아니다. 글은 집중력이다. 집중력을 발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인내심이다. 작가로서 정유정이 어떻게 글을 쓰는지, 우선 다른 작가들이 무척 궁금할 것이다. 그런데 ‘업계 비밀’을 막 누설해도 되는 걸까? 가만히 들어보니 누설해도 될 것 같다. 그 ‘비밀’은 이미 많이 알려진 작가의 작업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그의 방식은 의외로 고전적이었다. 안영춘 편집장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정 작가의 작업 방식은 컴퓨터의 워드 프로세서가 없다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원고지로 글을 쓸 때, 일단 완성된 원고를 편집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쓰기 전에 일정하게 그림을 그려놓아야 완성시킬 수 있었다. 타자기로 글을 쓰더라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읽은 에세이집에서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시를 반드시 타자기로 쓴다고 했다. 그래야 시 쓰는 맛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미국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지적한 것처럼, 워드 프로세서는 글 쓰기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말 그대로 글 쓰는 과정(프로세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워드 프로세서의 기능이다. 글 쓰는 과정은 곧 생각하는 것 자체이기도 하다. 생각을 그대로 단어(워드)로 옮기는 기계가 워드 프로세서인 것이다. 글을 빨리 쓸 수 있는 장점뿐만 아니라, 워드 프로세서는 글을 이리저리 이어 붙여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편리성도 제공한다.

“물론 그렇지만, 창작노트를 통해 인물을 사전에 구성하는 것은 다르다”고 작가가 부가설명을 했다.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이 하나로 만난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하기야 시나리오처럼 콘티도 미리 그려봐야 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을 테다. 여성인데 어떻게 격투나 범죄 장면을 적절하게 그려내는지도 궁금했다. 엄청난 상상력 덕분일까? 대답은 의외였다. 실제로 그런 장면을 상상하면서 여러 번 시뮬레이션해본다고 했다. “반복적으로 비슷한 동작을 해보면서 적절한 묘사를 찾아요.” 다소 머쓱한 표정으로 그는 싸우는 흉내를 내보였다.

치밀하고 잔인한 묘사… 암울한 삶 반영?

여성이지만 남성을 더 잘 이해한다는 것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었다. “여성이니까 남성에 더 관심이 많은 것 아닐까요?” 옳은 말이다. 하지만, 여성이니까 남성에 대해 모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관찰을 열심히 하는 편이죠. 예를 들어 코를 파다가 들켰을 때 누군가 보여주는 표정 같은 것을 기억했다가 나중에 써먹어요.” 비상한 기억력이라고 하자, 다른 것은 잘 기억하지 못한단다. 기억력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는 겸손이다. 이해가 된다. 보통 작가가 사물을 기억하는 방식은 이미지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정유정은 그 부분에서 ‘작가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할 만했다.

내가 만나본 소설가들은 죄다 관찰력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위인들이었다. 정유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묘사에서 강박을 느낄 정도로 디테일이 강했다. 디테일이 강하다 보니 사물이 사방팔방 펼쳐져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야기 구조보다 묘사의 디테일이 정유정 소설의 장점이자 단점인 것 같았다. 그의 특징은 치밀한 묘사에 있었다. “소설 작업은 건축공학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그에게 소설은 그냥 쓰는 것이라기보다 구성하는 것에 가까웠다. 공학도처럼 그는 언어를 벽돌 삼아 자신의 집을 짓는 것이었다.

지칠 만도 한데, 그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에 “소설 쓰는 것이 삶의 의미”라는 대답을 들려줬다. 진부한 대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들어보니 소설은 운명 같은 것이었다. 1980년 광주항쟁의 현장에 그는 있었다. 그에게 소설을 쓰게 만든 힘은 그 체험이 결정적이었다. 함평에서 광주로 유학온 그는 전남도청에서 최후의 항전을 펼치던 시민에 대한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기원 같은 체험이라고 해야 할까.

“하숙집 주인 아저씨가 마당에서 번개탄으로 불을 피워 대학생 오빠들과 함께 삼겹살을 구워 먹고 도청 앞으로 갔어요.” 영화의 대사 한 구절처럼 그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밤이 이슥토록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좀비영화의 한 장면처럼 사람들이 완전히 사라진 동네는 고요했다. 텅 빈 공간에 그는 홀로 남겨져 잠을 청했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았다. 갑자기 멀리서 ‘탕탕’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알던 사람들이 모두 죽을 것이라는 예감에 여고생 정유정은 공포에 휩싸였다. 대학생 오빠 방에 들어가서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였다.

마음을 달래려고 읽기 시작했다. 몇 장 읽으면 잠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장을 덮고 창문을 보니 어느새 동이 터오고 있었다. 그때 그의 가슴에서 뜨거운 불덩이 같은 것이 솟아올랐다고 한다. 소설의 결말과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겹치면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북받쳐 어린 정유정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때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소설은 예쁘장한 문장으로 꾸며진 정원 따위가 아니었다. 야수가 뛰노는 정글이나 사바나 같은 분위기의 소설이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최후에 대한 예감이 항상 그의 소설을 지배하는 것 같았다. 이런 원초적 체험이 그의 소설을 냉철한 자연주의로 이끄는지도 모른다. 그의 소설에서 인간은 수많은 사물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간호사 경력도 한몫을 했죠.” 덤덤한 어조로 정유정은 자신의 20대를 서술했다. 암울한 청춘 시절이었다. 어머니가 병환 중이어서 오롯이 20대를 병간호에 바쳐야 했다. 그가 근무하는 병원에 어머니가 입원해 있어서, 출근하면 항상 어머니를 봤다. 그리고 곧 이어진 어머니의 부재. 어머니가 항상 누워 있던 병실 침대가 낯설게 보여서 간호사를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응모하는 작품들은 족족 떨어졌다. 자기에게 재능이 없다는 생각에 엄청난 패배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낙선한 까닭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제 작품이 낯설었나 봐요.” 맞는 말이다. 그의 작품은 분명 일반적인 한국 작가의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문체는 하드보일드였고, 묘사는 치밀하고 잔인했다. 일말의 감정 이입도 없었다. 독자에게 이미지를 던지는 맹렬한 문장들만이 그의 소설을 구성하는 느낌이었다. ‘남자 같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챈들러의 하드보일러… 천명관의 야수성

문단 활동은 어떻게 할까? “바빠서 할 수 없어요.” 친한 작가 몇몇을 제외하고 별로 만나는 경우는 없다고 했다. 문단 활동에 미련이 없는 눈치였다. “그냥 소설 쓰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나아요.” 소설로 말하겠다는 것인데, 크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그에게 ‘좋은 소설’은 지금 문단에서 운위되는 종류는 아니었다. 방에서 부엌까지 가는 장면을 몇 문단씩 적는 것이 훌륭한 묘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의 흐름이죠.” 그가 생각하는 묘사는 사건의 전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묘사는 사건을 밀고 가기 위해 필요했다. “작가가 마지막에 한마디 던지기 위해서 그렇게 길고 긴 묘사를 끝까지 해내는 겁니다.” 그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특징은 평소 그가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이기도 했다. 누구 소설을 좋아할까? 짐작했지만, 레이먼드 챈들러 같은 영미소설을 좋아한다.

그의 소설은 한국 문학에서 중심적 기류에 놓여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높은 인기에 비해 적은 주목을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선이 굵은 그의 소설은 영미 장르 소설의 미덕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 주제 의식도 제시하려는 쪽에 속했다. 단순한 오락물은 아니라는 뜻이다. 작가가 윤리적인 메시지를 주는 것에 대해 그는 힘주어 강조했다. 국내 작가로는 천명관을 좋아한다. 야수성이라는 관점에서 천명관도 정유정에 못지않다. 막상막하.

“공포감을 별로 느끼지 않아요.” 이 말을 내뱉을 때, 그는 무표정이었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도 그처럼 말할지 모른다. 가학적이고 잔인한 장면을 묘사할 때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다. 그는 맹렬하게 끝까지 쓴다. 마치 바로크 미학의 잔인성을 보는 것 같다. 예수가 자신의 상처를 벌려서 보여주는 가학성이 그의 소설 미학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시각성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서사를 중시하는 한국 문단에서 그의 작품은 환영받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 묘사는 서사에 복무하기 위한 것이다. 서사를 밀고 가기 위해 그의 묘사가 필요하다. 복선 같은 것이 묘사를 통해 깔리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무엇인가 그로테스크한 구성을 만들어내지만, 또한 독자의 흥미를 충분히 자극하는 구석이 있다. 묘사만 쫓다가 길을 잃을 수도 있지만, 그렇기에 책장을 넘겨서 앞부분을 다시 읽어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게 된다. 실마리가 어디에서 암시되었는지 찾아보려는 열혈 독자도 있을 법하다.  

몸속에 꿈틀대는 5·18의 추억

보물지도처럼 그의 소설은 시각적 기호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기호에 뚜렷한 상징성이 부여된 것은 아니다. 이 기호는 작가의 위치에서 보면, 처음 설정한 기원적 서사를 가리키기 위해 나름대로 규칙을 지키고 있다. 이런 이유로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현실은 더 이상 현실성을 고스란히 간직하지 못한다. <28>은 1980년 광주항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자아내지만, 그렇다고 ‘광주 이야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역설적으로 이 작품은 여고생 정유정이 겪은 역사적 체험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정유정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소설이 읽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광주에서 처참한 죽음이 이어지고 있는데, 텔레비전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노래가 흘러나왔어요. 당시 가수 이은하가 ‘밤차’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정말 화가 나더라고요.” 눈앞에서 펼쳐지는 학살의 경험과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돌아가는 현실이 그의 하드보일드를 완성시킨 요소인 것이다. 어린 시절 체험이 곧 그의 소설 원천으로 강렬하게 자리 잡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했다. 보통 어린 시절부터 작가를 꿈꾸기는 하지만, 정유정처럼 구체적이고 선명한 기원을 가지고 기억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외면당한 경험이 그를 작가로 키운 셈이다. 따라서 정유정에게 역사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은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5·18 관련 자료집을 참조했지만, 소설에 크게 반영하지는 않았어요.” 이미 1980년 광주는 체험으로 그의 내부에 들어와 있었다. 체험은 단속적이고 분절적이다. 방향을 잃고 떠도는 체험은 현기증을 유발한다. 이것을 복원해내는 과정은 경험의 재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소설은 바로 체험의 현기증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의 소설이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디테일은 체험의 현재성을 되살려내려는 분투인 것 같다.

물론 그의 소설에서 어떤 대안 같은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대안보다는 작가의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이 정유정 소설에서 바랄 수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려는 건 너무 무거운 주제의식보다는 누구나 알지만, 잘 모르는 것들이다. 이런 메시지를 독자들이 찾아내기를 정유정은 바랐다. 이것이 희망인 것일까?

정유정은 확실히 다른 생각을 하는 작가였다. 그런데 이 ‘다른 생각’은 억지로 하려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체험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특이성을 소설로 표현하려 했다. 이 특이성의 주체야말로 미학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에게 소설은 삶 자체였다. 이렇게 말하기는 쉽지만 진짜 그렇기는 어렵다. 어떤 슬픔도 어떤 기쁨도 정유정의 소설에 이르면 소용없는 일이 된다. 독자가 정유정에게 열광하는 것은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학적이고 잔인하지만, 그 광경을 통해 독자는 무관심의 차원을 발견하는 것 같다. 묘사를 좇는 박진감과 돌연 먼 하늘의 풍경처럼 떠오는 서사의 결말은 독자에게 다른 한국 소설에서 느낄 수 없는 낯선 경험을 선사한다. “외국 소설 보는 것 같다”고 하니, 웃는다. “외국 소설을 많이 읽어서 그런 모양이네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의 감성은 분명 범상한 것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화가 나면 샌드백을 친다는 정유정. 어떤 여성 작가가 소설 쓰다 스트레스 받으면 샌드백을 칠까? 소설을 쓰기 위해 삶을 단순화하는 작가는 요즘 집에서 작품을 쓰지 못해 암자에 간다고 한다. 집에 있으면 집중이 잘 안 된다는 것인데, 그에게 나타난 중요한 변화인 것 같다. 예전에는 집이 훌륭한 집필 공간이었지만, 이제 그것이 다르게 느껴진다는 말이니까.

시체조차 서사의 역할을 하다

집필 공간을 옮긴다는 것은 소설에서 중요한 요소일지도 모른다. <28>을 ‘희망의 소설’이라고 말하는 그의 심리에서 이런 변화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희망’이라는 말이 ‘이런’ 소설을 쓴 작가의 입에서 나와 놀랐다. 자신의 공포가 녹아 있는 것이 분명한 소설에서 그는 무슨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모두가 나와 다른 무엇이 되어버린 고립의 상황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적막한 사물의 상태야말로 우리에게 희망일지도 모른다. 모든 인류가 멸망해버린 지구가 홀로 자전하는 것을 상상할 때, 비로소 희망은 시작되는 것 아닐까?

그 상상은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죽음에 대한 근대적인 발견을 소설에 담아낸 것이다. 죽음 앞에서 평등한 인간의 모습은 결과적으로 현실의 위계를 넘어선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운명의 여신이 공평하게 우리를 심판한다는 점에서 상대방이 나보다 부당하게 이득을 취해 잘나가더라도 그것은 그렇게 시기할 일이 아니다. 언제나 운명은 정의롭기 때문이다. 정유정의 소설은 이런 의미를 전달한다. 인간과 사물은 모두 같은 지위를 갖는다. 인간이기를 멈추고 하나의 무생물로 변해버린 시체조차 서사의 전개에서 정당한 역할을 한다. 이것이 정유정의 메시지가 아닐까? 그가 말하는 희망은 이 메시지 자체가 아닐까? 그에게 소설이 희망인 것처럼 말이다.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글 이택광 영국 셰필드대학 문화학 박사. 경희대 영미어학부 교수. 다양한 문화 분석을 통해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코드를 찾아내는 작업을 한다. 지은 책으로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한국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인상파, 파리를 그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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