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8.06 11:19 수정 : 2013.08.08 17:38

정유정은 자신을 ‘뻔뻔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남성적’이라는 평가와 ‘짐승 같다’는 평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건 ‘전형적인 여성성’이다.
시민군은 광주 중심부의 전남도청 광장을 점령했다. 뜻을 같이하는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며칠 만에 수가 크게 불어났다. 정부군은 광장 대신 도시 전체를 봉쇄하는 쪽을 택했다. 오후부터 광장에 불길한 소문이 떠돌았다. 오늘밤 에 밀어닥칠 분위기라는. 그때 소녀는 열다섯 살이었다. 학 교에 다니려고 함평의 부모님 집을 떠나 광주에서 지내고 있었다. 소녀는 하숙집 현관 앞에 앉아 주인 아저씨가 앞마 당에서 번개탄에 불을 올리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 었다. 옆방 대학생 오빠가 석쇠 위에 삼겹살 덩어리를 나란 히 올렸다. 두 사람은 소주병을 번갈아 들며 서로의 잔을 채워주었다. 대화는 거의 오가지 않았다. 해가 떨어지자 트 럭 한 대가 문 앞에 다가와 섰다. 짐칸에는 부려놓은 짐처럼 마을 사람들이 어깨를 맞댄 채 몸을 쭈그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불씨를 서둘러 재우고 짐칸에 올라탔다. 두 손에는 횃불과 몽둥이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트럭은 바로 도청 광 장을 향해 떠났다. 어디선가 개 한 마리가 목 뺀 울음으로 길게 울었다. 그리고 소리마저 마을을 등졌다. 침묵과 소녀, 마을에 남은 건 둘뿐이었다.

소녀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자리를 펴고 억지로 드러 누웠다. 몇 시간을 안절부절못하고 몸을 뒤틀었다. 그때 멀 리서 총성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손목을 틀어 시계를 바라 보았다. 바늘은 딱 10시를 가리켰다. 총성은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아침에 모두 살아 돌아와 있을까? 소녀는 생각 했다. 이게 깨어날 수 있는 꿈이라면 그렇겠지. 소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방을 나와 현관으로 이어지는 침침한 복도 를 소리 죽여 걸었다. 대학생 오빠가 쓰던 방의 문틈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손잡이를 당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장님처럼 손으로 벽을 더듬어 형광등 스위치를 찾아 올렸 다. 방은 깨끗이 정리돼 있었다. 가지런히 걷힌 이불, 연필 한 자루 올려놓지 않은 책상. 책장에는 크고 작은 책이 빽 빽하게 꽂혀 있었다. 손에 잡히는 책을 아무거나 빼 들었다. 표지가 누렇게 뜬 낡은 판본이었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 아간 새>. 활자는 세로줄로 인쇄돼 있었다. 총성이 더욱 격 렬해졌다. 소녀는 놀란 토끼가 수풀로 뛰어들 듯이 활자 속 으로 도망쳤다. 그렇게 마지막 장에 도달하고 말았다.

고개를 돌려 창가 쪽을 바라보았다. 바깥은 볼 수 없었 다. 주인 아저씨가 도청 광장으로 떠나기 전 솜이불을 창틀 에 둘러서 못질해놓았기 때문이다. 행여라도 소녀 혼자 남 은 집 안에서 불빛이 새어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소녀 는 창가로 다가갔다. 이불의 모서리를 들춘 틈에 얼굴을 바 싹 들이대고 상황을 살폈다. 시야 끝에서 하늘이 불그스 름하게 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벌써 동이 트는 것이다. 문 득 깨달았다. 언제부턴가 총소리가 멈췄다는 사실을. 진압 이 끝났다는 뜻이다. 생존자가 나뿐일지도 몰라 불현듯 새 벽의 여명처럼 가슴이 타올랐다. 뜨겁다 못해 터질 것 같았 다. 그 안에서 부글부글 끓는 용암이 쏟아져 나올지도 몰랐다. 눈물이 흘러내리고 턱이 덜덜 떨렸다. 소녀는 풀썩 주저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자기도 모르는 새 목청이 쉬 도록 오열하고 있었다. 늘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고 다녔 다. 간혹 동네 어른들은 물었다. 왜? 그런 질문에는 대답하 기 어려웠다. 그냥 작가가 되고 싶었을 뿐이니까. 울음이 마 침내 잦아들었다. 소녀는 코를 훌쩍였다. ‘이게 이유야. 이 새벽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돼. 바깥세상 사람들에게도 이 새벽을 똑같이 안겨줘야만 해.’ 다짐대로 정유정은 썼다. 시 계를 되돌린 것처럼 꼭 닮은 새벽의 여명을. 33년이 흘렀다.

작가 정유정이 입으로 쏟아낸 이야기에 그녀가 즐겨 구사하는 하드 보일드 문체를 입혀보았다. 표현은 되도록 그대로 따 옮겼다. 정유정 은 전라도에서 평생 살았고 완벽한 사투리를 구사한다고 전해 들었 다. 광주학살의 현장에 있었고, 소설 <28>에도 그 영향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 첫인상은 크게 실망이었다. 하드보일드한 남도 사 투리로 밀고나올 줄 알았는데 얌전한 표준어를 썼기 때문이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손아람 힙합 그룹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의 멤버로 활동했다. 그룹 이름과 같은 제목의 소설을 써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용산참사를 소재로, 정통 법정소설인 <소수의견>을 썼으며,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해 <너는 나다-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하다>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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