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8.06 10:52 수정 : 2013.08.07 22:04

“저도 무척 궁금해요, 아빠가 어떤 분이신지.”

20대 후반인 그녀는 조심스럽게 전화번호를 건넸다. 30년 가까운 시간과 불과 서너 시간이 하나의 천칭 위에 올려질 수도 있는 걸까. 내 짧은 인터뷰로는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줄 재간이 없다. 그녀의 아버지가 얼마 전 국가정보원(국정원)을 퇴직했다는 ‘정보’를 입수할 때 들던 기대감은 이내 부담감으로 돌아왔다. 그들의 부녀관계는 긴 세월 서로에게 그토록 비밀스러웠을까. 아니면 취조실 유리창처럼 한쪽에서는 볼 수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볼 수 없는 비대칭 관계였을까. 아무려나, 내 목표는 전 국정원 직원을 통해 본 국정원 내부의 소상한 이야기였다. 거기에 아버지로서의 일대기가 덤으로 딸리면 고마울 따름이었다.

한겨레 자료
“이 인터뷰 국정원도 알고 있다”

“규정에 따라 이 인터뷰는 미리 보고하고 하는 겁니다. 언론에 접촉하려면 퇴직자도 규정을 지켜야 해요.”

내가 그녀 아버지를 인터뷰한다는 것을 이미 국정원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렇게 알았다. 그가 그 얘기부터 꺼낸 것이 적어도 인터뷰에 대한 거부감이나 경계심을 드러내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의자를 바짝 당기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상태였다. 첫인상에서 도드라지는 건 없었다. 몸집은 딱 그 세대 평균치였고, 표정은 부산한 일을 마친 뒤 손을 닦고 난 사람처럼 한갓져 보였다. 시사 만화 캐릭터와는 달리 검은 안경을 쓰지 않았다. 장마철이어서만은 아닐 것이었다. 입성도 검은 양복이 아니라 캐주얼복이었다. “현직에 있을 때도 우리 ‘회사’1는 자율복장이었습니다.”

그는 1970년대 후반 7급으로 입사해 지난해 서기관(4급)으로 퇴직할 때까지 30여 년을 그곳에서 일했다. 그사이 그는 세 번 승진했고, 회사 이름은 두 번 바뀌었다. 중앙정보부(중정·1961)에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1981)로, 다시 국정원(1999)으로 이름이 바뀌기 전에는 매번 한국 사회에 큰일이 벌어졌다. 중정은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한 세력이 갖다붙인 이름이었다. 그때로부터 18년 내내 대통령이었던 이가 자신의 심복인 중정 우두머리의 총격을 받아 숨지고 군사쿠데타와 광주시민 학살이 잇따라 일어난 뒤 처음 이름이 바뀌었다. 또 한번은 그 대통령 생전에 정치적 숙적이자 중정에 납치됐다 구사일생한 피해자가 4수 끝에 대통령이 된 뒤였다. ‘신장개업’에는 매번 그렇게 깊은 속사정이 있었다. 회사는 최근 다시 개혁 요구를 거세게 받고 있다.

스물일곱 청년은 어느 날 신문에 난 모집공고를 보았다. ‘세기문화사 일반직 7급 공무원 공채’2 강원도 철원에서 복무하다 제대해 경상도 어느 지역에서 9급 공무원으로 1년째 일하고 있을 때였다. 군 복무 시절 2시간마다 철책 경계 근무를 들어갈 때면 빠짐없이 영어 단어와 한자를 10개씩 적어 가서 외우던 청년은 시험이라면 자신 있었다. 야간 열차는 새벽 어스름에 그를 서울역에 내려놓았다. 세기문화사 쪽에서 전화로 일러준 대로 전철을 타고 청량리역까지 간 다음 다시 이문동 가는 시내버스로 갈아 타고 시험장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이름만 보고 무슨 과학기술과 관련 있는 기관인 줄 알았어요. 말로만 듣던 ‘그곳’이라는 건 여기 와서야 알게 됐어요. 고향 있을 때 가끔 서울에서 내려와 술 사고 올라가는 선배 몇이 있었어요. 중정에서 일한다고 했는데, 권총을 차고 있었어요. 내가 그 대단한 곳에서 일하게 된 거지. 입사해서 알아보니 그 선배들은 정문 지키는 방호원이더라고.”

방호원이라면 기능직이다. 기능직은 공무원 사회에서 차별의 표식이다. 그래서 기능직이 권총 차고 민간인을 만났다는 에피소드를 당시 중정의 위세를 가늠하는 사례로 참조하는 건 차별의 문제와 닿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본질적 사안은 중정과 외부의 위상적 관계다. 방호원이 어깨에 힘주고 권총을 내비치며 고향 사람들과 수작하는 모습과 여성 정직원이 오피스텔에 숨어서 몰래 댓글 다는 모습이 30여 년의 시차를 건너 머릿속에서 겹쳤다. 어쩌면 중정은 국정원으로 정확히 그만큼 변했는지도 모른다. 생뚱맞게 드라마 <아이리스>(KBS2)의 이병헌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 궁금해졌다.

“드라마는 드라마지요. 우리가 무슨 일 하는지 알고 싶으면 회사 홈페이지 들어가보세요. 다 나옵니다.”

세기문화사 합격… 중정 7급 공채

스마트폰으로 접속해봤다. 주요 업무로 △안보수사 △대북정보 △방첩 △산업보안 △대테러 △사이버 안전 △국제범죄 △해외정보가 열거되어 있다. 주요 업무가 그 정도이니 비주요 업무까지 더하면 훨씬 늘어날 것이다. ‘직원 수가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그는 “모른다”고 했다.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기밀이어서일까. ‘1만 명쯤 될 거라던데…’하고 어림으로 그물을 던지자, 그는 “그렇게는 안 된다. 국내외 지부 다 합쳐도 그 절반 이하 수준일 것”이란 즉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얼추 셈이 나왔다.

그래도 비밀정보를 다루는 기관인데, 자기들 하는 일을 있는 대로 다 공개했을까 싶었다.

“나도 전체를 알 수는 없어요. 우리 회사 조직은 ‘팀’이 있고, 그 위에 ‘과’가 있고, 다시 ‘단’이 있고, 끝으로 ‘국’이 있어요. 근데 ‘차단의 원칙’이 있어서 옆방에도 안 들어가게 돼요. 볼일 있으면 인터폰 눌러서 밖으로 사람을 나오게 해요. 하다못해 결혼식 축의금 봉투 하나 전달할 때도. 그러니 옆팀이 하는 일도 대강 짐작만 할 뿐 소상히 알 수 없어요. 알 필요도 없고, 알아봐야 골치만 아프고. 내 것만 잘하면 됐지.”

국정원의 직원 채용 경로는 여러 갈래였다. 그는 ‘공채’ 출신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공채와는 조금 달랐다. ‘정규 과정’이라는 게 따로 있었다. 둘 다 7급으로 채용하지만, 공채는 결원이 생기면 수시로 뽑는 것이고, 정규 과정은 해마다 정기적으로 뽑는 것이다. 훈련 과정은 공채는 6개월, 정규는 1년이다. 특전사 훈련 같은 체력훈련이 절반(막걸리 내기 축구 시합 같은 것도 포함된다), 어학·세계사·사상교육 같은 교양 훈련이 절반이란다. 두 과정은 원세훈 원장 때부터 하나로 통합되었다.

“차별이라… 글쎄요. 고위급으로 승진하는 건 대부분 정규 과정 출신이니까….” 그는 “군대로 치면 공채는 삼사(육군3사관학교), 정규 과정은 육사(육군사관학교)”라며 “뽑는 비중은 반반이지만 걔들이 죽 올라간다”고 말했다. 9급도 뽑는데 여성이 많다고 했다. 수시로 전문직 특채도 이루어진다. 이들을 모두 합치면 전체 직원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나머지 3분의 1이 기능직이다. 그런 식으로 성골, 진골, 육두품이 갈린다. 신분 변동은 전혀 불가능할까? “글쎄, 나처럼 ‘빽’이 없으면 몰라도….” 빽이 존재한다면 그 빽이 향하는 선호 부서도 있을 것이다.

“감찰실이지.”

수사 분야나 해외 분야도 아니고 내부를 감시하는 자리가 가장 인기 있다는 것도 뜻밖이었다.

“감찰실장을 1급에서 2급으로 낮췄는데도 국장조차 꼼짝 못해요. 그쪽 일이 직원들 비리를 캐고 다니는 거니까. 거기 다녀오면 승진도 잘 되고. 신입사원 들어오면 불러다가 ‘비밀을 보장할 테니 간부 성격에 대해 있는 대로 얘기해봐라’면서 꾀어요. 약은 놈들은 ‘모른다’고 잡아떼지만 어리숙한 놈들은 넘어가지. 같은 직원의 뒷조사하는 게 할 짓인가 싶어서 그 자리를 꺼리는 사람도 더러 있긴 해요.”

승진 기준이 어떻기에 감찰실이 승진에 유리하다는 걸까.

“물론 성과도 따지지요. 간첩 몇 ‘마리’ 잡았느냐, 이런 거. 첩보가 A급이냐 B급이냐 C급이냐 평가해서 승진 심사에 반영하고, 성과급도 차등 지급해요. C급은 신문에 난 얘기, A급은 불순분자 신원과 활동 정보 같은 거. S급도 있어요. 진짜 간첩, 종북좌파, 마약사범 첩보…. 연예인들 마약 현장 사진 찍어서 검찰에 넘기는 것도 S급이에요. C급 정보는 승진에도 도움이 안 되고 돈도 못 받아요. 그렇게 서로 경쟁을 붙이니까 같은 팀 안에서도 화목이 잘 안 이뤄지는 부작용도 있긴 해요.”

“가장 보람 있었던 일? 그거야 당연히 정년퇴직한 거지.”

그는 ‘뭐 그리 빤한 걸 묻느냐’는 투였지만, 듣는 사람은 다소 맥이 풀렸다. 아무리 드라마와 현실은 다르다고 하지만, 하고 많은 것 가운데 정년퇴직이라니. 하지만 내 생각은 곧 ‘왜 하필’에서 ‘하기야’로 바뀌었다. 그의 34년도 물리적 시간만으로는 온전히 측량할 수 없지 않을까. 회사의 역사와 함께 여러 차례 정치적 격랑을 거쳤거나, 심지어 생사를 오갔을 수도 있다. 삶의 고압선 구간을 끝까지 통과한 사람이라면 무엇보다 그 과정의 완수에 큰 뜻을 두기 마련일 것이다.

우리도 가장이고 국정원도 직장이다

“최고권력자가 바뀌면 고위직 상당수가 한꺼번에 옷을 벗는 게 관행이었어요. 그름이 있는 직원들도 그때 함께 내보냅니다. 그 와중에도 빽 있는 사람은 좋은 자리로 가고. DJ(김대중)가 집권할 때 가장 혼란스러웠어요. ‘박통’(박정희) 때부터 시작해서 전부 경상도였잖아요. 부장·원장도 경상도, 간부들도 경상도…. 호남 출신은 수십 년 동안 억울했지. 대통령 재임 기간이 5년밖에 안 되니까 서두른 거지. 호남 사람들이 많이 올라갔어요. ‘노통’(노무현) 때도 그쪽 사람들이 많았지. 호남에서 밀어준 덕에 억지로 대통령이 됐으니까. 혹시 ‘국사모’라고 아세요?”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국가정보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DJ 정부 때 강제로 퇴직당한 국정원 직원들이 만들었다. 이들은 국가를 상대로 복직 소송을 내는가 하면 국정원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집단행동 끝에 소송에서 이겼다. 대다수가 복직했지만 50대는 대개 복직 1년 뒤쯤 명예퇴직을 선택해 돈으로 보상받고 떠났다.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한다는 이들이 국가를 상대로 벌인 집단행동은 낯설었지만, 그들도 사람이고 국정원도 직장이었다.

그의 입사 동기 몇십 명 가운데 정년을 채우고 퇴직한 사람은 그를 포함해 한 손에 꼽아도 손가락이 남아돌 정도라고 했다. 10년 먼저 떠난 사람, 5년 먼저 떠난 사람…. 더러 세상을 먼저 뜨기도 했고, 또 더러는 문제가 있어서 강제로 그만두기도 했고, 적성에 안 맞아서 제 발로 나간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는 계급 정년에 걸려 명예퇴직했다. 그는 주로 본사에서 행정과 기획 쪽에서 일했고, 지부 근무 때는 ‘경제 방첩’을 맡기도 했다. 관내 기업의 보안을 점검하고 교육하는 일이 주업무였다. 대테러 업무도 잠깐 맡았다. 30여 년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을 터.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느림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동기 중에는 1, 2급까지 올라가서 그만둔 사람들도 적잖아요. 빨리 올라간 사람들은 당시엔 좋았겠지. 근데 한 단계 올라갈수록 자리는 계속 줄어들거든. 나는 동기들보다 진급이 늦었어요. 술 좋아하고 진급에 연연하지 않다 보니까. 게다가 때맞춰서 계급정년이 늘어났고…. 나는 빽이 없으니까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때마다 잠시 지부에 내려갔다 왔어요. 2년씩 두 번.”

강제로 옷 벗을 일은 없었던 그도 정년이 5~6년 남았을 때 명예퇴직을 신청하려고 했다. 연금받을 수 있는 연한도 채웠겠다, 더 있어 봐야 진급할 것도 아니겠다, 늘 하던 일 똑같이 되풀이하는 것 말고는 없을 것 같았다. 나가서 뭐든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내가 엉엉 울면서 말렸다. ‘애들 학교나 졸업하거든 그때 가서 관두라’면서.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년까지 왔다.

“나는 내가 전설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보다 가족들이 가장 좋아해요. 그렇게 일했으니 이제 좀 놀아도 된다고 봐요.”

하지만 그의 전설이 내겐 어딘가 밋밋하게 느껴졌다. 좀더 긴박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그를 다그쳤다.

“김재규 부장이 박정희 대통령 시해했을 때가 가장 큰 고비였지요.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부장 얼굴을 직접 본 것도 몇 번 안 됐을 때예요. 보안대 하사관들이 중정 사무실마다 자리를 꿰차고 직원 동태를 감시했고, 책상은 모두 모포로 덮여 있고 조직 전체가 마비 상태였어요. 그러니 할 일이 없어서 만날 술만 마시고 다녔어요. 다 때려치우고 절에나 들어갈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고향에 계시는 친형님이 말리더군요.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꾹 참고 기다리면 다시 좋은 날이 올 거다’라면서요. 결과적으로 참길 잘했죠.”

실제로 ‘좋은 날’이 왔을까. 1980년 당시 신군부 최고 실세던 전두환 장군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석 달간 맡으면서 조직이 정상화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장세동3·박세직4 같은 실세가 원장 할 때는 복지에도 많이 신경을 써 줘서 직원들 사기가 높아졌다. ‘북풍 공작’ 사건으로 권영해 전 안기부장5이 검찰에 불려갔다가 연필칼로 자해 소동을 벌인 사건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그는 “꾸준히, 그럭저럭, 무난하게” 흘러온 것 같다고 했다. 내부에서 34년을 지내온 이의 인식과 감각은 공작 정치와 사찰, 고문 등으로 점철됐다고 기억하는 외부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내부 시선으로 본 역대 원장들은 어땠을까.

“나는 박세직씨가 기억나요. 사람 틀도 좋았고, 인기도 많았지요. 우리는 적어도 국방부 장관이나 법무부 장관 출신같이 힘 있는 사람이 원장으로 오기를 바라죠. 그래야 밖에 나가서 제대로 활동할 수 있어요. 원장은 아버지 같은 존재예요. 아들이 나가서 사고를 치는 한이 있어도 ‘절대 지지 말라’고 가르쳐야지. 행정 관료 출신이 오니까 만날 ‘밖에 나가서 사고 치지 말라’는 말만 하더라고.”

밖에서 사고 치지 말라던 행정 관료 출신 원장은 뇌물과 대선 공작이라는 큰 사고를 치고 지금 영어의 몸이 되어 있다. 지방공무원하던 이가 대통령 최측근이라는 이유로 4년 넘게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댓글 공작이나 시켰으니 직원들 자존심이 상했을 법하다. 부아가 치밀어올랐을지도 모른다.

“MB(이명박) 정권 때 간첩 몇 마리나 잡았습니까. 간첩이 없어서 못 잡은 걸까요.”

요즘은 경비원이 막아… 직원들은 칼퇴근

그는 조직 본연의 임무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상기 인물은 국정원 직원임을 확인함’이라고 찍힌 신분증을 갖고 다녔다. 그런데 원세훈 원장이 오면서 누구나 똑같은 출입증으로 바뀌었다. 밖에서 ‘비노출 활동’을 하라는 뜻이었다. 그전에는 외부 활동에 꼭 필요한 사람은 감찰실에 요청하면 명함에 ‘수사관’ 표시 같은 것을 할 수 있었는데 그조차 못하게 했다. 그래도 이름 석 자와 휴대전화 번호만 달랑 적혀 있는 국정원 명함은 건네받는 이를 묘하게 긴장시키는 효과가 있지 않은가. 그는 “모르는 소리”라고 했다.

“요즘 그런 출입증이나 명함 보여주고 어딜 들어가려고 하면 경비원이 먼저 막아요. 그래서야 무슨 정보 활동을 하겠습니까.”

그의 이야기는 갈수록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구도로 흘러갔다. 예전에는 간첩을 잡으면 검찰수사 없이 그대로 기소했는데, 요즘은 간첩 잡아봐야 모두 ‘혐의 없음’으로 풀려난다. 10년, 20년 지난 옛 사건들도 강압수사였다면서 뒤집어져서 세금으로 돈까지 물어준다. 검사나 판사 중에도 종북좌파가 있기 때문에 자꾸 그런 일이 생기는 것 같다. 심지어 반체제 종북좌파들이 국회에까지 들어가 온갖 얄궂은 짓만 일삼으면서 밥그릇이나 챙기고 있고….

“국정원 영어 표기가 뭔지 알아요? NIS예요.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우리가 간첩 잡고 첩보하는 기관이지 무슨 서비스 기관이라는 건지, 원.”

최근 다시 논란이 되고 있는 국내 파트 폐지 여부에 대해 그의 입장은 명확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검찰이나 경찰은 좀도둑 잡는 데지. 간첩부터 시작해서 종북좌파, 마약사범, 대테러까지 할 수 있는 건 우리 회사밖에 없어요. 가뜩이나 탈북자들이 사고를 많이 치고 있잖아요. 수시로 중국 드나들면서 북한과 접선하는데 우리 아니면 어디서 커버하겠어요. 국내 파트 없애면 나라가 뒤집어지지.”

‘좋았던 시절’ 이야기는 마침내 회사 내부의 세대 문제로 향했다.

“요즘 입사하는 친구들, 학벌은 참 좋아졌어요. 솔직히 능력도 있고. 윗사람이 뭐 찾아와라 하면 몇 분 만에 뚝딱 만들어서 올리고. 늙은 우리는 망신살이 뻗지. 근데 국가관이라든가 사명감은 우리 때보다 약한 것 같아요. 그냥 직장이야. 신분 보장 되겠다, 복지 좋겠다, 일등 신랑감이지. 그래서 무슨 고시처럼 된 것 같기도 해요. 근데 예의가 없어. 우리 땐 한 시간 먼저 나와서 윗분 커피 다 타놓고 했는데, 오전 9시 5분 전에 자기 커피만 달랑 들고 들어오면서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오후 6시 되면 ‘먼저 가보겠습니다’ 하면서 칼퇴근하고.”

개인주의적인 인재들이 몰리는 국가 최고 정보기관으로서 국정원의 국제적 수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결정적일 때마다 북한 정보에 먹통이 되는 국정원의 잇단 허방치기를 염두에 둔 것이기도 했다.

“우리가 북한에 못 들어가니까 중국에서 첩보를 수집하는 한계가 분명히 있기는 해요. 하지만 미국이라고 해서 특별히 북한 정보에 뛰어날까 싶어요. 북한전문가라는 사람들이 10년 전 해외 언론에 나온 얘기를 허구헌날 되풀이하는 걸 보면 그래도 우리 회사가 수준이 높은 거지. 첨단 장비도 갖추고 있고. 홍보가 안 돼서 그렇지, 경제 스파이도 많이 잡아요. 여차 하면 국가 경제에 몇조 원씩 손해 날 일들인데. 홍보를 제대로 해야 돼요. ‘국정원이 아직 살아 있구나’ 하고 국민이 느낄 수 있도록.”

“부주는 3만 원… 나, 퇴직자잖아”

‘아빠가 어떤 분인지 궁금해요.’ 딸의 기대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웬만큼 충족될 듯했다. 그래도 몇 가지 추가 질문이 필요해 보였다. 가족은 그가 그동안 무슨 일을 해왔는지 얼마나 알고 있을까.

“국정원 수사관 정도로 알지 자세한 건 모를 거예요. 그래도 어린이날이면 가족 초청 행사에 자주 데려가고는 했지. ‘여기가 아빠가 일하는 국정원이라는 곳이다’라고 말해줬어요. 그 자리에는 가수 싸이도 오고 주현미도 오고 했어요. 가족 노래자랑도 하고.”

요즘 젊은 직원들은 국가관과 사명감이 부족하다고 했는데, 아버지는 회사와 가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어느 쪽을 선택할까.

“당연히 가족이지요. 가족이 있어야 회사도 있고, 국가도 있는 거지. 회사가 먼저라고 답할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 사람들도 진심은 그렇지 않을걸요.”

그는 딸이 그동안 자신이 기대한 대로 되지 않아 불안하고 안타깝기도 했지만, 지금은 믿음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이제 딸도 아버지를 그런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자리를 일어서려는데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너무 멀어서 가기는 어렵고, 3만 원만 부주해줘. 나, 퇴직자잖아. 계좌번호 문자로 남겨주고…. 아, 직원이 상을 당했다네요.”

돌아오는 길에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6가 다시 읽고 싶어졌다. 이튿날 그녀한테서 전화가 왔다. “사오신 수박 맛있게 잘 먹었다”면서.

글 안영춘편집장 jona@hani.co.kr

1 국정원 사람들은 자기 조직을 그렇게 부른다. 2 오랫동안 쓰인 ‘세기문화사’라는 가명은 10년 전쯤부터 ‘○○○○ 부대’ 식으로 바뀌었다. 3 13대 안기부장(1985년 2월~1987년 5월) 4 16대 안기부장(1988년 12월~1989년 7월) 5 21대 안기부장(1994년 12월~1998년 3월).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북한 당국이 김대중 후보에게 호의적이라는 내용의 오익제씨 편지를 의도적으로 공개하고 재미동포 윤홍준씨에게 김 후보를 비방하는 기자회견을 열도록 지시했다. 6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인 사람들도 어느 집단에 속하면 집단적 이기주의자로 변한다는 것을 개인과 집단의 행동양태를 통해 분석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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