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7.03 17:24 수정 : 2013.07.15 20:25

300만 원, 600만 원, 1200만 원, 2000만 원….

청년들은 희망을 꿈꾸는 대신 빚을 지고 산다. ‘88만 원 세대’니,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니 하는 절망 섞인 말은 책이나 언론에서 그냥 갖다 붙인 비현실적인 단어가 아니다. 청년들에게는 현실을 관통하는 슬픈 자조다.

한때 등록금·취업 걱정은 소수의 몫이었다. 대학 캠퍼스에서는 잔디밭에 누워 책과 연애로 낭만을 노래했고, 거리에서는 돌과 화염병으로 시국을 고민했다. 그들 대부분은 ‘쌍권총’ 학점을 차도 졸업만 하면 직장을 골라 갔다.

하지만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를 겪은 뒤 대학생의 상황은 180도로 바뀌었다. 부모는 정리해고나 명예퇴직 대상이 되었고, 학생들은 얼어붙은 취업시장을 실감해야 했다. 입학하자마자 학자금을 대출받으려고 은행으로 향했다. 그리고 일찌감치 취업 공부에 나섰다. 토익·토플 점수 등 ‘스펙’을 쌓기 위해 열을 올렸다. 도서관은 새벽까지 불이 켜졌다. 안정된 직업인 교사가 되기 위해 사범대나 교육대로 편입을 준비했다. 공무원 시험 학원으로 몰려들었다. 재수·삼수라는 용어는 입시보다 취업과 자주 어울렸다.

청년 부채는 학자금 대출에서 시작해 구직비·주거비 대출로 점점 쌓여가며 20~30대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사진은 토닥토닥협동조합·금융정의연대·서울시 청년일자리 허브가 지난 6월 3일 연세대에서 ‘청년부채 실태조사’ 개시에 앞선 행사 모습.
금융감독원의 ‘20~28세 청년 대출 현황’ 자료(2012년 5월)를 보면 청년들이 지고 있는 총 대출금은 8조8천억 원이었다. 2만 명에 육박하는 청년이 채무 불이행자이며 상환되지 않은 금액은 7조 원에 근접한다. 채무 불이행자가 가장 많은 금융기관은 전체의 78%인 저축은행이다. ‘신용’이 낮을 수밖에 없는 청년들은 학업과 생계를 위해 제1금융권이 아닌 고금리의 제2금융권을 노크했다.

이 자료는 2만 명의 청년이 신용불량 상태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등록금 1천만 원 시대에 학자금 대출과 취업 재수·삼수 시대에 ‘구직비’(구직 과정에서 드는 비용) 대출은 필수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렵게 취업한 뒤에도 한참을 ‘청년 부채’ 갚기에 바쁘다.


학자금·구직 빚 떠안고… 고시촌의 하루

청년이 빚을 내서 학업하게 만드는 사회는 정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학자금 대출 없이 정상적인 대학 생활을 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학자금 대출을 받은 학생은 2012년 113만여 명으로, 4년 새 2배 가까이 늘었다.

서울대생 김용석(가명·26)씨는 700여만 원의 학자금 대출을 갖고 있다. 1, 2학년 때에는 부모가 학자금을 마련해주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3학기째 대출을 받고 있는데 대출이 늘 때마다 불안감도 커진다. 집안에 기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서울대생이라도 취업에 대한 부담은 마찬가지다. 취업을 못하면 빚은 계속 늘어난다. “일확천금을 벌지 않는 한 빚을 계속 안고 갈 수밖에 없는 구조죠.”

한 가정에 대학생이 두 명이면 부모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진다. 실질임금이 떨어지는 현실에서 마냥 빚을 내기도 어렵다. 임시방편으로 군대를 가거나 한 명이 휴학한다. 하지만 일시적 ‘1가정 1대학생’은 길어야 2년이다. 지방에서 유학 온 학생이라면 더욱 어렵다. 서울에 집이 있는 학생과 달리 그들은 매달 수십만 원의 생활비까지 감당해야 한다.

최근 외무고시 공부를 접은 휴학생 이기범(가명·27)씨가 그런 사례다. 그는 휴학하고 1년 6개월 동안 서울 신림동 고시촌을 전전했지만 남은 건 집에서 끌어다 쓴 생활비 빚뿐이다. 지금이야 집안 보조라고 생각하지만 부모가 경제력을 잃을 때 갚아야 할 빚으로 생각한다. 복학을 준비하는 그에겐 학자금 대출 600만 원이 기다리고 있다. 졸업까지 2학기가 남았으니 내년이면 1200만 원이 된다. 취업 때까지 생활비도 대출에 기대야 한다. 빚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캐피탈 쪽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의 여동생도 학자금 대출만 2천만 원이다. “저보다 동생이 더 문제죠. 졸업하고 빨리 취업해야 할 텐데….”

학자금 대출은 청년들에게 족쇄가 된다. 대졸자 10명 가운데 3명이 대출을 받고 있으며 이들의 평균 채무액은 900여만 원에 이른다. 대출금 갚는 데는 평균 4년여 걸린다. 졸업과 동시에 이들은 구직전선에 내몰리고 ‘묻지마 취업’을 한다. 그리고 원금 상환을 위해 빠듯한 생활을 해야 한다.

구직비 역시 무시 못한다. 한 달에 100만 원이 드는 고시원 생활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학원비 내고 고시원비 내면 100만 원도 빠듯하다. 그들은 앞날의 희망을 보고 허리띠를 졸라 매지만 모두 합격자의 영광을 안을 수 없다. 신림동 고시촌에는 직접 ‘고시비’를 마련해 고시생이 된 사람들도 있다. 1~2년 하다 보면 바닥을 드러내는 돈, 그래서 돈 문제로 고시를 접는다.

자영업하다 사업을 정리하고 고시촌에 들어온 권오현(가명·32)씨는 앞으로 빚을 낼 계획이다. 경기가 안 좋다 보니 간신히 버티다 새로운 길을 찾아 여기까지 왔다고 토로한다. “사업을 했는데 돈 회전이 안 됩니다. 올스톱이죠. 계속 지출만 늘어갔어요. 돈 있는 사람만 버티는 구조죠.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그는 사업 초기에 4천만 원을 빚졌다. 처음에는 제1금융권에서 빌렸다가 대부업체로 돌렸다. 사업을 접으면서 저축·보험 등을 정리해 빚을 털었다. 그는 다음달 경찰공무원 시험에 도전한다. “정리할 때 공부할 돈은 남겨뒀어요. 그래서 여기에 있죠. 그 돈도 이제 마지막이네요.” 그는 이번 시험에 떨어지면 경찰공무원을 포기할 생각이다. 집안일을 도우며 고시자금을 마련한 박철상(가명·33)씨도 마찬가지다. 올해로 벌써 5년을 공부했지만 결과는 기대 이하다. 수험생활이 길어져 학교도 올해 제적될 것 같다며 침울해했다. 모은 돈도 바닥을 보이고 있다. “안정적인 고시 준비는 올해가 마지막입니다. 올해 떨어지면 일과 공부를 병행할 수밖에 없어요.”


호모데비토르, 빚을 진 인간들

호모데비토르(Homo Debitor), 빚진 인간을 말한다.

이탈리아의 아우토노미아(자율주의) 사상가 마우리치오 라자라토는 2011년 쓴 책 <부채인간>에서 부채와 권력관계를 상세히 소개한다. 한국 학생들은 20대에 생애 최초 학자금 대출을 받을 때, 취업하면 상환하겠다는 계약서를 쓴다. 각서 아닌 각서다. 라자라토는 이런 행위를 신자유주의 통치 이념과 연관시키고 ‘부채의 권력작용’이라고 규정한다. “부채를 상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미래를 담보 잡는 행위”라는 것이다. 부채를 진 인간들은 빚을 갚기 위해 노동에 매진하고 매달 빚을 상환하는 모범적인 인간이 된다.

하지만 한번 진 빚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두 번째 빚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학자금 대출을 모두 상환할 때가 되면 청년들 앞에는 결혼이 기다리고 있다. 집을 장만하기 위해 학자금 대출보다 더 큰 빚이 들어간다. ‘10년 거치 20년 상환’이니 하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로또에 당첨돼 한번에 빚을 청산할 수 있는 경우는 하늘의 별 따기다. 고스란히 20년간 다시 빚진 인간이 된다. 자녀 교육을 위한 사교육비도 빚으로 충당한다. 빚의 덩치는 학자금 대출 때와 비교도 안 되게 커진다.

“부채의 논리는 세계화 과정 속에서 사회계급을 통치하는 정치적 논리”로 진화했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빚진 인간을 유지시키기 위해 결혼해서 아이 낳고 집 사고 교육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각종 복지정책을 ‘복지 포퓰리즘’이라는 말로 끊임없이 방해한다. 은행도 맞장구를 친다. ‘월급이 너무 적다고요? 괜찮아요! 빚을 얻어서 집을 사세요. 그럼 집값이 올라가고, 그 집을 담보로 또 다른 대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 때 미국 은행들이 빚을 조장하던 수법이다. 그러나 빚을 못 갚은 채무자는 “자신의 육체나 아내 혹은 자신의 자유와 생명을 저당 잡힌다.”

라자라토는 말한다. “결국 우린 아무것도 될 수 없으며, 다만 부채만 평생 지고 살아야 하는 사회 체제 속에 산다는 의미이다. 돈을 상환하지 못하는 것은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권력 장치의 문제임에도….”

 

학자금 대출 갚고 나니 또 다른 빚이…

이제 직장인의 빚 속으로 들어가보자. 2012년 자료를 보면, 30대 가구주의 부채는 평균 4500여만 원으로, 연령대별 자산 대비 부채 비중이 가장 많은 나이다. 이는 소득 대비 비용 지출이 크다는 것을 반영하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직장생활 2년차 김미진(가명·24)씨는 운 좋게 일찍 직장을 구했다. 학자금 대출은 없지만 현재 월급으로 근근이 생활을 연명한다. 그는 생활비 때문에 마이너스 대출을 받고 있다. 다행히 직장을 다니고 있어 상환 능력이 있지만 쌓이는 돈은 없다. 월급은 적은데 지출하는 돈이 만만치 않다. 월 150만 원 받아 월세 50만 원, 생활비 50만~60만 원 빼고 나면 저축할 돈은 소소하다. 언제 긴급 자금이 필요할지 몰라 장기저축은 거의 들지 못한다. 소액 단기 저축만이 가능하다. 쌓이는 돈은 적고 나갈 돈은 매달 많아진다. 마이너스 인생이다. 그녀는 “물가는 오르는데 월급은 고정상태예요. 지금 직장도 2년째 임금 동결이에요.”

직장을 다닌다 하더라도 대기업이 아닌 한 풍족한 생활은 먼 나라 이야기다. 주거비와 생활비 때문이다. 사회 초년생 땐 목돈이 없으니 월세를 살 수밖에 없다. 전세를 얻기까지 ‘짠돌이’ 소리를 들어야 한다. 내 집은 언감생심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슈바베 계수(주거비 비중)를 보면 20~30대 청년 가구만 상승했다. 엥겔 계수(식료품비 비중) 역시 마찬가지다.

직장생활 10년차에 가까운 박주미(가명·35)씨는 더 힘든 사례다. 10년간 여러 영화사를 옮겨 다니며 연봉을 불렸지만 남은 건 생활비 빚이 든 마이너스 통장이다. 그녀는 첫 직장에서 인턴생활할 때 빚을 처음 경험했다. “지방에서 올라와 생활하다 보니 생활비가 많이 들 수밖에 없었어요. 초기 연봉이 너무 적다 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어요.” 지방대 출신인 그녀는 처음엔 월세로 시작했다. 평균 40만~50만 원. 생활비가 늘어남을 뜻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월세 인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빚이 더 늘어나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그녀의 직업도 빚을 지는 데 한몫했다. “영화 쪽이 일반 기업보다 복리후생 면에서 체계적이지 못해요. 회사의 흥망성쇠가 영화 한 편으로 결정될 때가 많죠” 그녀는 회사가 망해 월급도 못 받고 나온 적이 있다.

청년의 빚은 학자금 대출로 시작해 결혼과 함께 고착화된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집값 때문이다. 지난해 신혼부부 1인당 평균 결혼 비용은 남성이 7500여만 원, 여성이 5200여만 원이었다. 집 마련하는 데 드는 비용이 대부분이다.

광고회사에서 일하는 정지훈(가명·32)씨 역시 집 때문에 고민이 많다. 현재는 빚이 600만 원인데, 저축으로 모아둔 돈이 있지만 빚을 갚지 않고 있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한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래서 매년 갱신하는 거죠.” 그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결혼과 집이다. 여자친구를 생각할 때면 답답함이 밀려온다. 월세를 사는 그는 결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걱정이다. 신혼집을 마련할 큰돈이 없기 때문이다. “결혼하려면 대출받을 수밖에 없어요.” 빚은 억대로 늘어날 것이다. “아이가 생기면 또 대출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요. 양육·교육이 한두 푼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제 삶에서 빚은 동반자라고나 할까요.”

 

토닥토닥협동조합·금융정의연대가 나섰다

정지훈씨 말처럼 이 시대에 부채는 동반자다. 20대에 시작된 빚은 30대를 거쳐 40대까지 꼬리표처럼 따라온다. 자신이 원해 빚을 지는 것이 아니라 빚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도 빚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인식은 부족하다. 사회는 부채를 철저하게 개인 문제로 치부하고 갚기를 강요할 뿐이다. 정부는 기껏해야 저리의 대출을 주선해주고 채무 상환을 연장해주는 선에서 역할을 멈춘다. 서러운 부채, 나만의 ‘잘못’일까?

최근 청년들의 연대은행 토닥토닥협동조합과 서울시 청년일자리허브, 금융정의연대 등이 청년 채무자의 권리와 인권 찾기에 나섰다. 이들은 부채에 저당 잡힌 청년층의 실태를 파악함으로써 청년 부채의 악성화 경로를 추적하고 합당한 대안을 모색할 계획이다. 첫 번째 작업으로 6월 한 달간 실태조사를 했으며, 이달 악성채무자들을 선정해 2차 심층조사와 인터뷰를 한다.

설문조사 요원으로 활동하는 강홍구(26)씨는 “비정상적으로 비싼 등록금, 대학 안 나오면 차별받는 사회, 부모의 재력 여부에 따라 빚지는 현실이 문제”라며 “이런 상황에서 네 책임이니까 네가 모든 것을 해결하라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년들의 사회 참여, 더 나아가 연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가 남들 공부할 때 자신은 피해를 보더라도 설문조사 요원으로 활동하는 이유다. 마치 ‘청년들이여,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글 김원일 기자 nirvana@hani.co.kr

이 글에 나온 20~30대 인물의 사례는 토닥토닥협동조합 등이 실시한 ‘청년부채 실태조사’에 참여한 사람들을 직접 인터뷰한 것이다. 박주미·정지훈씨 사례는 지인의 도움을 얻어 발굴했다.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