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7.03 16:44 수정 : 2013.10.01 16:15

 

1980년대 시작된 새만금 방조제 사업은 반대 여론에 부딪혀 중단과 진행을 여러 차례 반복하다 2006년 물막이 공사가 끝났다. 그러나 갯벌 메운 땅을 어떻게 쓸지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한겨레 김태형
원자력발전소(원전)와 방사성폐기물처분장(방폐장)은 한사코 사람 많은 곳을 피해간다. 현재 가동 중이거나 가짜 부품 비리로 가동이 일시 중단된 23기의 원전은 전남 영광과 경북 울진·월성 등 모두 인적 드문 바닷가에 ‘은둔’하고 있다. 고리 원전은 행정구역상 대도시 부산에 있지만, 이곳 도 실제로는 한적한 바닷가다. 1978년 4월 가동할 당시(경남 양산군 장안면)에는 훨씬 오지였을 것이다. 지금 건설 중이 거나 건설 예정인 13기도 모두 기존 원전 지역이거나 강원도 삼척과 경북 영덕처럼 외진 곳들이다. 유별난 낯가림이다.

  원전이 바닷가에 있는 건 엄청난 양의 냉각수가 필요 한 사정과 닿아 있다. 그러나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이기에 원전이 특정 지역 바닷가 몇 곳에 몰려 있는 이유를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전세계 모든 원전이 바다를 끼고 있는 것도 아니다. 민물 수량이 풍부하면 내륙도 가능하다. 라인강 옆에 서 있는 프랑스 페센하임 원전이 그렇다. 원전 부지 선정에는 지질 조건도 중요하다. 지반이 원전의 거대한 무게를 감당하고 지진에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한반도 남쪽에 서는 그런 지반이 유독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몇 곳에만 집중 분포할까.

  서울은 전국 전력생산량의 17%를 사용하지만 자급률은 3%에 그친다. 자체 발전소는 당인리 화력발전소가 유일하다. 서울에서 소비하는 전력은 대부분 남부 지역과 강원도에서 초고압 송전선을 타고 온다. 서울에 원전이 없는 건 과학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부적합해서일까. 원전의 경제적 효과를 오래 연구해온 일본 마쓰야마대학 장정욱 교수(경제학과)는 외려 “서울에 원전을 건설하자”고 제안한다.1 한국의 원전 마피아를 겨냥한 풍자 성격이 다분하지만, 적어도 그의 논거는 그들이 되뇌는 과학기술과 경제 논리를 오롯이 따르고 있다.

  서울은 수량이 풍부한 한강을 끼고 있고 초고층 빌딩 숲에도 끄떡없을 만큼 지반도 튼튼하다. 당국 말대로 원전 외벽이 절대 안전한 강도라면 테러나 군사공격에도 취약하지 않다. 특히 원전 건설비용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송전선이 거의 들지 않고 원거리 송전에 따른 전력 손실도 없어 경제성이 획기적으로 커진다. 방사능이 전혀 없다는 냉각수로 지역난방을 일거에 해결하는 건 덤이다. 이런 효과만으로 원전 몇 기 몫은 감당할 수 있다. 수혜자 부담 원칙까지 고려하면 여의도 국회 주변이 최적지다. 방폐장 입지로는 정부과천청사 부지가 있다. 바로 뒤 관악산은 전문가라는 서울대 교수 63명이 2004년 방폐장 건설을 제안한 곳이라 지질에도 문제가 없을 터이다. 과학기술, 특히 경제 논리로 따져 서울 일대는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갖춘 셈이다.

  그러나 서울에 원전이 들어설 가능성은 0%다. ‘확률 제로’라는 건 과학기술의 영역도 아니고 경제의 영역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이 어느 영역에 속하는지 보여주는 단서가 있다. 현재 서울의 전선 지중화율은 54.8%에 이른다. 도심에서는 고압 송전탑은커녕 전봇대도 찾아볼 수 없다. 해마다 거액을 들여 전선을 땅에 묻는 첫째 이유는 미관이지만, 그 효과는 시각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서울 사람에게 전기는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라 스위치가 붙은 벽 뒤, ‘거기 항상 있는 것’으로 감각된다. 발생과 경로는 인지 범위를 벗어나 있다.

    

 ‘공익 탈’ 쓴 중앙·다수·자본의 패권주의 

  

  밀양 송전탑 사태는 핵발전 관련 쟁점 가운데서도 예외적인 사례다. 첨예한 대립과 갈등은 거의 대부분 원전과 방폐장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송전탑은 핵 이슈에서도 언제나 변방이었다. 원전과 방폐장이 핵의 안전성 문제와 직접 마주치게 되는 데 견줘, 송전탑은 속성상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핵을 분열시켜 만들었든, 석유를 태워 만들었든 물의 중력 에너지를 이용해 만들었든, 한번 전기로 탈바꿈한 에너지에는 꼬리표가 붙지 않는다. 꼬리표를 떼어낸 전기는 무표정한 얼굴로 송전선을 타고 송전탑을 지나쳐 갈 뿐이다.

  그러나 밀양 사태는 어느 면에서 외려 때늦었다. 송전탑이 논란의 한가운데 서면서 비로소 핵을 둘러싼 한반도 남쪽의 인문지리적 지도가 완성된 것이다. 핵분열로 만들어진 전기는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를 거쳐 어디로 흘러들어가 소멸되는가. 그 과정에서 애먼 누가 희생되고, 또 누가 눈먼 이익을 챙기는가. 하나의 선과 여러 개의 점에 불과해 보이던 송전선과 송전탑은 핵으로 매개되는 권력의 계보도를 보여주는 조영제였다. 밀양을 통해 확연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핵에너지의 핵심 논리는 결코 과학기술이나 경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이런 진실의 징후는 이미 감지되어왔다. 1986년부터 30년 가까이 조리돌림을 당해온 방폐장 부지 선정 과정을 보자. 정부는 언제나 과학기술적 검증도 하기 전에 부지부터 선정했다. 인천시 옹진군 굴업도는 1994년 12월 부지로 선정됐다가 활성단층 징후가 발견되면서 10개월 만에 취소됐다. 당시 정부가 밝힌 선정 이유는 ‘굴업도가 견고하고 치밀한 응회암이 분포해 역학·구조적으로 안전하고, 생태계 오염 가능성이 없어 기술적으로 적정하다’는 것이었다. 2005년 주민투표 끝에 선정된 경북 경주는 진입 동굴의 암질 등급이 예상보다 낮은 것으로 확인되면서 준공시기가 2010년 6월에서 2012년 12월로, 다시 2014년 6월로 두 차례 연기된 상태다.

  과학기술이나 경제 논리가 아니면 무엇일까. 흔히 말하는 공익일까. 공익의 논리는 종종 과학기술이나 경제 논리를 넘어서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자동화 기술이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을 우려가 있다면 도입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논리는 자동화가 가격 인하로 이어져 소비자 다수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또 다른 공익 논리와 경합한다. 현실에서는 노동자의 절체절명의 실존보다 소비자의 실체 없는 효능감이 대부분 승리한다. 그리고 이 승자의 논리야말로 서울과 수도권에 원전 관련 시설을 들이지 않아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유사 공리주의적 허구와 정확히 포개진다.

  ‘원전 시설은 사람을 피해 간다’는 앞의 언설은 사람들 간의 위상 차, 다시 말해 ‘누가’와 ‘누구를’의 문제를 교묘히 피해간다. ‘사람이 많은 곳’이라는 양적 표현도 이면에는 수치로 환산되지 않는 패권주의를 감추고 있다. ‘소수자’가 약자의 위치에 놓인 존재이듯이 ‘다수자’는 지배적인 위치를 점한 존재다. 지구 위의 반은 남자, 지구 위의 반은 여자여도 남성은 다수자, 여성은 소수자다. 서울 사람들이 전깃줄과 전봇대에 미학의 잣대를 갖다 대며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전기를 써댈 때, 머리 위를 가로지르는 76만5천 볼트 고압선과 시야를 가리는 140m 높이 철탑을 두렵게 바라보아야 할 밀양 사람들에게 전기는 ‘끝도 없이 삶을 휩쓸고 지나가는 것’으로 인지될 것이다.

  ‘공익’은 오염된 이름이다. 오남용이 심각하다. 밀양에 송전탑을 세워야 한다는 논리는 공익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수탈적·폭력적 국가사업 논리의 동어반복이다. 애써 사례를 찾지 않아도 되고, 사례 하나만으로 전체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할 수 있다. 개중 공익 이름에 가장 걸맞아 보이는 영역은 ‘안보’일 것이다. 흔히 안보는 계층과 지역을 넘어서 온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사안이므로 외부에 대해 배타적으로 단합하고 이익 배분을 둘러싼 내적 갈등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다.

  

  ‘개발 논리’ 새만금 ‘안보 논리’ 대추리·강정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마을은 2007년 해군기지 후보지로 발표된 이후 형사 처벌된 인원이 구속자 20여 명을 비롯해 500여 명을 헤아리고 있다. 기지 건설 과정은 토목공사이기 전에 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한 군사작전이나 다름없다. 정부와 해군은 주민 동의를 전제로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으나, 마을 주민 대다수가 반대한 주민투표 결과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마을 회장이 절차 규정을 어기고 극소수 주민만 불러 결정한 유치 신청서를 흔들어댄다. 이렇게 폭력과 꼼수를 동원해 주민의 삶과 공동체, 자연생태를 송두리째 파괴하면서까지 실현해야 할 공익은 대체 무엇인가.

  강정 해군기지가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필요 때문에 만들어진다는 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우화가 된 지 오래다. 해군은 남방 수송로를 보호하기 위해, 다시 말해 남쪽 바다 일대 해적을 제압하기 위해 강정 기지가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상대가 해적인데 왜 이지스함을 배치하는지, 왜 미군 항공모함의 입·출항까지 감안해 기지를 설계했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해군의 안보 논리는 안보에 반하기까지 한다. 미국의 군사 패권 전략의 일환으로 만들어지는 해군기지는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을 높일 것이라는 비판이 오히려 안보의 논리에 부합한다.

  강정은 제2의 대추리다. 2004년 주한미군의 서울 용산기지와 2사단이 경기도 평택 대추리 일대로 이전을 추진하면서 벌어진 사태는 2006년 5월 군·경 1만4천여 명이 투입돼 민간을 상대로 전투를 방불케 하는 작전을 펼치는 등 엄청난 물리적 충돌 끝에 주민들이 소개(疏開)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그토록 다급하게 밀어붙이던 기지 이전은 애초 2012년까지 마치기로 했다가 2016년으로 늦춰졌다. 미국의 기지 이전 목적도 주한미군을 동아시아 분쟁에 순발력 있게 개입시키기 위한 노림수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이다. 미국의 패권 의지에 의해 한반도가 남북 간 분쟁이 아닌 엉뚱한 국제 분쟁에 휩쓸리게 되는 것이다.

  강정마을 주민들은 7년 전 대추리 주민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도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에서 내쫓기는 처지가 될지 모른다고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합리적 설명은 무엇일까. 당신들이 하필 그곳에 살고 있는 게 잘못이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당신들만 희생하면 온 국민이 발 뻗고 잘 수 있다고 할 것인가. 공익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출몰한다. 당사자 처지에서 보면 대추리나 강정마을에 들어서는 것이 미군기지이든 해군기지이든, 아니 골프장이나 카지노여도 다르지 않다.

  새만금을 보자. 세계 최장 방조제로 바다를 막아 갯벌을 매립하려는 계획이 대통령 선거(1987년) 공약으로 발표된 지 26년이 지났지만 아직 용도조차 정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논을 만든다고 했다가, 어느 날 공장을 들이는 것으로 바뀌더니, 다시 세계 최대 골프장을 조성하려 했다. 몇 해 전에는 삼성이 ‘그린에너지 종합산업단지’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하더니 최근 발을 빼고 있다. 이제는 특별법을 만들어 외국인 전용 카지노를 유치하겠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방조제는 이미 2006년 완공되었고, 갯일을 하던 주민들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 죽어가는 갯벌을 뒤로하고 고향에서 내쫓겼다.

    

  ‘토지 강제 수용… 헌법 위 전원개발촉진법

  

  강정마을에서 시작해 대추리를 거쳐 새만금까지 시간을 거슬러가 보면 사업 주체의 행태가 모든 시기마다 되풀이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원주민의 뜻을 아예 묻지 않거나 지역 안팎의 갈등을 조장하는 등 꼼수를 부려 그들을 일방적으로 내모는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한다. 둘째, 사업 목적은 명분과 실제가 어긋나거나 계속해서 바뀌어 애초 무엇을 위한 사업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셋째, 사업의 수혜자는 결코 그들이 아니고, 그들에게는 혜택은커녕 외려 영원한 질곡이 된다. 끝으로, 놓치기 쉬운 행태가 하나 더 있다. 공익의 이름을 엄호하는 입법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강정마을회가 지난 6월 14일 발표한 성명은 우리 사회에서 공익적 명분과 민주공화국의 원리가 상충하지 않은지 의문을 제기한다. 보도에 따르면 강정마을회는 “해군기지는 헌법 파괴적인 사업이자 환경을 둘러싼 기본 개념 정립의 문제와 사법정의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헌법과 사법 정의가 거론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공익은 언제나 당당하게 법의 이름을 거느리고 등장한다. 입법은 위에 거론한 행태에 사전·사후로 법률적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이에 따라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원주민들의 행위가 오히려 불법이 되는 상황이 연출된다. 그들이 마침 그곳에 있은 게 잘못이라는 것 말고, 그들만 잠자코 있으면 뭐든 들어서기는 들어설 거라는 것 말고 달리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이른바 국책사업에서 법률적으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재산권이다. 재산권은 자유권·평등권·행복추구권 등과 함께 헌법이 보장하는 주요 기본권 가운데 하나다. 대한민국 헌법은 “재산권과 관련해 공공의 필요에 의한 재산권의 수용·사용 또는 제한 및 그에 대한 보상은 법률로써 하되,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여야 한다”(23조 3)고 규정한다. 물론, 이 조항의 기본 전제는 “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23조 1)는 것이다. 헌법 조항의 구성 순서와 축자를 통해 도출할 수 있는 재산권의 위상은 대단히 높다. 공공의 필요가 명확하고 성문화된 법률의 뒷받침을 받아 애초 가치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어야만 예외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헌법대로 해왔는가? 새만금을 다시 보자. 이 사업은 지역 주민의 재산권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으나, 매우 중요한 ‘공공의 필요’가 있어서 할 수 없이 법률에 근거해서라도, 물론 정당한 보상을 한 다음 비로소 추진했는가? 그렇다면 갯벌을 막아서 어디에 쓸지도 정하지 않은 공공의 필요는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갯일로 자식 대학까지 마치던 이들이 어업권을 내놓고 막일 하며 하루하루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는 건 적정한 보상금을 잘못 사용한 그들의 개인적 무능 탓인가? 갯벌과 바다를 파괴하는 데 쏟아 부은 22조 원의 세금은 공공의 영역에 골고루 스며들었는가? 누군가의 재산과 세금을 다른 누군가가 살뜰히 챙겨간 건 아닌가?

  밀양은 제2의 새만금이다. 밀양 송전탑 사업의 법률적 근거인 전원개발촉진법은 전기사업자가 발전, 송·변전 시설 부지 조성과 시설 설치를 하기에 앞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승인만 받으면 환경법, 산림법 등 17개 관련 법률이 규정하는 허가 절차를 밟은 것으로 인정하고, 해당 지자체의 뜻과 상관없이 집행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특히 이 법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행사할 수 있는 토지 수용 및 사용권을 사업자에게 부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사업자는 개인의 재산권을 자기 뜻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으며, 전원개발사업에서 가장 예민한 문제인 노선 결정에 대해 전권을 행사할 수 있다.

  전력산업은 그나마 공공 영역이 아니냐고 생각하면 크나큰 착각이다. 전원개발사업자인 한국전력(한전)은 공기업이지만 주식이 시장에 공개된 상장기업이기도 하다. 더구나 2001년 정부는 한전에서 한국전력거래소와 6개의 발전 자회사를 분리해 민간 대자본에게 소유권을 넘겼다. 핵과 수력발전 부문은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으로 떨어져 나왔다. 현재 한전은 전력거래소를 통해 민자 발전사를 비롯한 446개 발전회사에서 전력을 사다가 소비자에게 되파는 도·소매상 구실만 한다. 지난해 포스코·LG·SK 등 5대 민자 발전사가 전기를 생산해 거둔 순수익은 9400억 원이다. 이들을 다 합친 것보다 규모가 5배 큰 발전공기업(화력)의 총이익은 7천억 원에 그쳤다.2

  이제 공익이라는 이름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넘어서 ‘벌거숭이 임금님’ 우화가 되었다. 민간기업도 대놓고 토지수용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시대다. 물론 법의 엄호를 받는다. 2004년 제정된 기업도시특별법이 대표적이다. 기업도시특별법은 민간기업이 도시 하나를 통째로 계획하고 건설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나아가 부추기는 법이다. 사업 시행자는 개발 구역 토지 면적의 절반 이상만 협의 매수로 확보하면 나머지 토지에 대해서는 공탁을 걸어 자동으로 강제 수용할 수 있다. 이 법률에 대해 여러 차례 위헌 소송이 제기되었지만 헌법재판소는 대부분 기각했다. 삼성이, 현대가 공장이나 골프장, 호텔을 짓겠다며 내 땅에서 나를 ‘합법적’으로 몰아낼 수 있는 세상에 지금 우리는 살고 있다.

  밀양은 공익이라는 불특정 다수를 지시하는 이름 뒤에 은폐된 ‘누구’를 구체적이고 정교하게 따져 묻도록 요구한다. 다수가 소수를, 강자가 약자를, 자본이 시민을, 서울(중앙)이 지방의 특정 지역을 찍어 공동체와 생태를 파괴하고 수탈하는 퍼즐이 짜맞춰진다. 그리고 이 구도는 끝없이 지역과 사람을 옮겨가며 같은 논리, 같은 방식으로 되풀이된다. 진보정의당 김제남 의원실의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현재 건설 중이거나 건설 예정인 원전을 가동하려면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기 위해 1700여 개의 송전탑을 새로 세워야 할 것이다. 제2, 제3의 밀양은 이미 예고되어 있다. 다만, 아직 어디와 누구를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다음은 어디인가. 내가 사는 지역, 적어도 내가 나고 자란 지역은 요행히 비껴갈 수 있을까. 그렇다고 송전탑이 마지막인 것도 아니다. 송전탑 이후, 공익은 다시 어떤 분장술로 어느 지역, 누구 앞에 들이닥칠까. 밀양의 싸움이 지역 차원의 싸움, 과학기술이나 경제 논리 싸움에 그치지 않고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억압과 수탈 체계에 맞서는 싸움, 하위법에 의해 자행되는 헌법 파괴를 막으려는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저항일 수밖에 없는 사정이 거기에 있다. 밀양은 보통명사다.

글 안영춘 편집장 jona@hani.co.kr

  

1 <한겨레> 2012년 10월 11일치 ‘왜냐면: 차라리 서울에 원전을 짓자’. 2 김동성, <한겨레> 2013년 6월 6일치 ‘왜냐면: 정부가 자초한 전력대란으로 돈방석 앉은 재벌·대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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