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28 01:09 수정 : 2012.12.28 01:16

1940년대에서 1950년대 초반 태어난 이들에게 아파트는 ‘중산층’이 될 수 있는 통로였다. 이들의 욕망은 아파트의 폭발적 성장으로 충족되는 듯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이 욕망의 충족 시스템은 기능을 잃었다. 이들은 언론이 ‘제2차 베이비붐 세대’라고 부르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생들의 아버지 세대다. 2차 베이비붐 세대는 아버지 세대의 욕망 충족과 상실의 과정을 생애 전반에 걸쳐 함께 체험하고, 때론 관찰했다. 이 연재는 한국 사회의 아파트 문제를 인문학적으로 성찰한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저자 박해천 교수를 중심으로 박재현, 김류미, 김형재씨가 팀을 이뤄 기획한 것으로, 그들이 섭외한 ‘아파트 키드’들이 돌아가면서 쓰는 집단 자서전이다.

나에겐 자그마한 소망이 하나 있다. 그건 내가 속한 세대가 ‘386’처럼 변치 않는 번듯한 이름을 한번 가져봤으면 하는 것이다. 나는 대학 입학 전후로 ‘이해찬 세대’, 대학을 마칠 무렵에는 ‘88만원 세대’, 얼마 전에는 ‘삼포 세대’로 불렸고, 최근에는 ‘에코 세대’로 불린다. 이름이 자주 바뀌는 건, 아빠가 속한 세대도 마찬가지다. 아빠는 ‘베이비붐 세대’로 태어나 ‘유신 세대’로 대학에 다녔는데,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전까진 무난하게 그냥 ‘중산층’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위기의 자영업자’이자 ‘하우스푸어’로 살아가고 있다. 아빠 세대에 대한 명명법의 변덕스러운 속성이 우리 세대에도 고스란히 옮겨 붙은 탓일까? 우리 세대의 이름은 20대 초반부터 빠르게 변모를 거듭했다. 물론 우리 탓은 아니었다. 우리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던 환경 탓이었지. 지난 15년 남짓 사이 우리에게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던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위기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도 녹록지 않았다. 전문가라는 분들이 병색이 완연한 우리를 진단하겠다며 청진기를 들이댔지만 제대로 된 치료법을 내놓진 못했다. 그들은 그저 우리를 뭐라고 부를지 고심할 따름이었고, 우리는 다만 불치병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박해천 디자인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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