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6.06 14:30 수정 : 2013.06.23 11:47

쑥과 돌나물, 상추 등이 탐스럽게 자란 화단에는 싱그러운 봄내음이 물씬 풍겼다. “이번 주에 한강 난지캠핑장으로 야유회 갈 때 따 갈 거예요.” 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자랑했다. 식물은 만져줘야 잘 자란다는 짧은 생각에 가볍게 쓰다듬어주니 줄기가 쑥 가라앉았다며, 타박했다. “꼭 오세요.” 그녀의 얼굴에는 만난 지 5분도 채 안 된 이에 대한 친근감이 여물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에도 노란색·파란색·보라색 봄이 자리하고 있었다. 네일아트를 좋아하는 같은 방 동생이 그려줬단다. 입소한 지 6개월, 아직은 마음의 빗장이 열리지 않을 만도 한데 벌써 선뜻 입소자들에게 손을 내주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화사한 웃음꽃이 자리한 그녀의 얼굴에서는 과거의 아픔을 찾을 수 없었다.

36살 김사라(가명)씨. 그녀는 성매매 여성이었다. 푸르디 푸른 20대를 룸살롱과 집결지를 떠돌며 보냈다. 그리고 지금은 탈(脫)성매매 여성들의 ‘치유의 집’인 막달레나 공동체에 안착해 있다. 음지에서 보낸 10년, 그녀에겐 어떤 삶이었을까? 투명한 쇼윈도 뒤에서 역설적이게도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야 한 청춘을 직접 들어봤다.

사라씨는 첩의 자식이었다. 10살 때까지 친어머니 집에서 씨다른 형제들과 함께 살았다. 그 뒤 큰집(아버지집)과 작은집(어머니집)을 1년씩 번갈아가며 생활했다. 왜 그랬는지 정확한 속사정은 모르지만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큰집에는 배다른 형제들뿐이었다. 그녀에게 씨와 배가 같은 형제는 연년생 언니가 유일하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서울 용산역 부근의 집결지. 성매매특별법이 발효되고 1년이 지난 2005년, 성매매 여성들이 가게 앞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한겨레 탁기형 기자
10대의 트라우마, 성폭행

천덕꾸러기 신세였으리라. 어린 나이에 배운 것은 눈치였다. 귀여움을 독차지할 새도 없이 떠돌아다니기 바빴다 “안 좋은 점부터 배웠어요. 작은집 오빠·언니들은 자기들 살기 바빴고, 큰집 오빠들은 무뚝뚝한데다, 좀 와일드한 성격이었어요. 말 붙이기가 어려웠죠. 아버지한테도 말을 제대로 못했고요.”

대신 그녀는 무용에 심취했다. 집안 사정으로 포기하기까지 유일한 낙이었다. 집결지에서 업소를 옮길 때면 몇 달씩 시간 날 때가 있다. 그때마다 틈틈이 무용을 배웠다. 늦은 나이에 대학을 가기 위해 무용 입시학원에도 다녔다. 하지만 턱없이 비싼 학원비가 버거워 중단하기 일쑤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배웠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그만두라고 하셨어요. 무용을 정말 하고 싶었는데 못하게 되자 그때부터 반항심이 생긴 것 같아요.”

트라우마, 누구나 하나쯤 지니고 인생을 살아간다. 힘든 순간 불쑥 나타나 자아를 상처내고 호시탐탐 자아를 통제하려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다. 사라씨도 기억하기 싫지만 그럴수록 또렷해지는 이미지가 있었다.

마음 맞는 동네 친구가 있었다. 죽이 잘 맞아 자주 어울려 다녔다. 친구 가족이 놀러 가는 데까지 따라갔으니 아주 살가운 사이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사달이 나고 말았다.

“그때 한 텐트에서 친구 가족이랑 같이 잤어요. 한참 자고 있는데 누가 내 몸을 더듬더라고요. 친구 아버지였어요.”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그녀는 “성매매 일로 빠지게 된 것이 그 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부모님에게 말을 못 했어요. 그 가족이랑 친했거든요. 졸업식 때 부모님이 못 오면 친구 부모님에게 부탁할 정도였으니까요. 불쾌했죠. 친구에게도 말 못했어요. 충격받을까 봐. 그 뒤로 그 친구를 피하게 됐어요.”

방황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경기도가 고향인 그녀는 고등학교 1학년 때만 학교를 세 번 옮겼다. 불량 친구들이 가만두지 않고 괴롭혔다. 결국 자퇴할 수밖에 없었다.

알바(아르바이트) 생활을 하던 19살 때, 기억하기조차 싫은 두 번째 트라우마를 겪는다. 산에서 등산객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사귀던 교회 오빠와도 헤어졌다. 그녀가 먼저 멀어졌다. “난 더럽힌 몸이 됐어요. 그때부터 나 스스로 수많은 기회를 차단해버렸죠.” 10대 때 겪은 두 번의 성폭력은 그렇게 그녀의 20대를 규정지었다. 꺼내기 싫은 과거였으리라. 눈물샘에 미묘한 파장이 일었지만 그녀는 간신히 참고 있었다.

어느 날, 전화벨이 울렸다. 서울 자취방으로 놀러 오라는 고향 친구의 전화였다. 머리도 식힐 겸 친구 집이 있는 천호동으로 갔다. “집 근처에서 만날 줄 알았는데.” 그녀가 간 곳은 룸살롱 대기실이었다.

“처음 가본 곳이라 무서웠어요. 홀복을 입은 언니들을 처음 봤어요. 마담 언니가 차비나 벌어가라며 한탕 뛰라는 거예요. 뭐에 홀렸는지 룸에 들어가게 됐어요.” 그날 일을 마친 친구가 유혹했다. “한 달에 1500만 원 벌 수 있어.” 그녀는 그 뒤로 가끔씩 ‘룸살롱 알바’를 하게 된다.

사라씨는 갖가지 알바를 하면서도 무용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했다. 모든 아픔이 무용을 통해 잊히고 치유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상 돈이 걸림돌이었다. 레스토랑, 옷 가게 등에서 알바해 번 돈으로는 학원비와 등록금을 대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룸살롱서 집결지로

본격적으로 성매매업소를 들락거렸다. 21살이었다. 룸살롱 알바로 쉽게 돈 벌 수 있는 법을 터득한 때다. 강남 룸살롱을 출입했다. 가족 몰래 시작한 일이 직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두 달만 일해서 학원비를 벌려고 했어요. 동료 아가씨들이 명품 백 사는 데 돈을 허비할 때 나는 동대문표 들고 다니며, 짠돌이 소리 들어가면서 모았어요. 무시도 많이 당했죠. 꽤 모았는데 남자친구가 사고를 치는 바람에….”

그녀는 남자친구 뒤치다꺼리로 수천만 원을 날렸다. 그의 이름으로 카드를 만들어준 것이 화근이었다. 남자친구는 카드 돌려막기를 하며 애인이 번 돈을 흥청망청 써버렸다. 한두 달만 한다는 목표는 허물어지고 2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이젠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실의에 빠져 있던 어느 날, 아는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평택이라고 했다.

“겁이 덜컹 났어요, 집결지라면 영화 <창>에 나오는 그런 데로 알았거든요. 만나 보니 성형수술을 많이 해서 그런지 예뻐졌더라고요. 그런데 ‘약’을 먹는 것 같았아요. 동생이 전화에 대고 ‘술’과 ‘고기’ 이야기를 했어요. 주사약과 먹는 약을 말하는 것이었어요. (히로)뽕을 말하는 것 같더라고요. 약 하지 말고 돈 벌어서 빨리 나오라고 하고 헤어졌는데, 빚이 있는 것 같았어요.” 그녀는 그 동생이 걱정되면서도 약간 부러웠다고 한다.

성매매 여성에게 빚은 굴레의 시작이다. 월 1천만 원 이상씩 버는 관계로 돈의 절대적 가치에 무감각하다. 그만큼 쉽게 벌고 쉽게 쓰기 십상이다. 하지만 한번 빚을 내기 시작하면 좀체 갚을 수 없는 것이 이 바닥의 생리다. 돈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왜 빚이 생기는 걸까?

“룸살롱에 있으면 시간이 많아요. 마담 언니가 돈을 쓰게 유도하죠. 매일 미용실에서 머리 드라이해야 하고 옷 사는 것도 경쟁이 붙어요. 거기에다 명품 사고 성형까지 하면 남는 돈이 별로 없어요. 집결지에서는 출근이 늦거나 몸이 아파 무단 결근하면 그게 다 빚으로 가요. 또 대부분 고리의 급전을 쓰다 보니 빚이 늘죠.” 요즘 사회문제가 된 프로포폴과 환각제, 도박 중독도 빚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주요 경로다.

집결지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있던 사라씨도 24살 때 결국 영등포로 가게 된다. 평택에서 일하던 동생이 옮긴 탓도 있지만, 룸살롱에서 일할 때보다 더 벌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다. 하지만 집결지 생활은 그녀를 쇼윈도 안에 갇히게 만들었다. 그녀들이 가장 싫어하는 ‘우연한 만남’ 때문이었다.

“일하는 데서 우연히 옛 남친의 친구들이 나를 본 거예요. 나한테 계속 전화하고 난리도 아니었죠. 돈 안 빌려주면 고향에 알리겠다며 협박도 했어요. 그때까진 빚이 없어 쉽게 옮길 수 있었지만….”

돈은 벌지 못했지만 빚에 찌든 업소생활은 아니었다. 그녀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허투루 돈을 낭비하지 않았다. 빚을 지고 팔려가는 동료를 보면 안쓰러웠다. 고향 동생이 “또 팔려갔다”는 말을 했을 때 누구보다 위로해주었다. 하지만 그녀도 빚의 굴레를 끝내 피해갈 수 없었다.

“영등포에서 청량리로 옮겼을 때죠. 고향 친구가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업주 돈을 당겨 썼어요. 친구가 제때 갚지 못해 일수를 쓸 수밖에 없었죠. 700만 원 빌렸는데 두 달 만에 1천만 원으로 불었어요. 게다가 보증을 선 친구가 떠나면서 빚이 2천만 원으로 늘었죠.”

5년을 일했는데 손에 쥔 건 빚뿐이었다. “엮였구나, 이렇게 팔려가는구나 생각했어요.” 분당 룸살롱에서 ‘마이킹’(선불. 일본어 ‘마에칸’에서 유래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그곳을 나와 레스토랑 알바 등을 하며 돈을 갚아나갔지만, 룸살롱 업주가 중간에 가로챘다. 결국 서울시 ‘다시함께상담센터’에서 법률자문을 받아 해결할 수 있었다.

20대 반복되는 ‘쇼윈도’ 삶

“빚의 굴레에 갇히면서 자신감을 완전히 잃었어요. 사회로 다시 나오려면 쉽지 않다는 걸 느꼈죠. 사람들이 알게 되지 않을지,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빚을 갚을 수 있을지…. 하지만 독하게 마음 먹었어요. 다시는 이쪽 일은 안 하겠다, 손 떼겠다고.”

그때는 군산 집결지 화재사건으로 나라가 시끄러웠다. 정부와 정치인들은 시류를 타고 ‘성매매특별법’ 제정에만 열을 올렸다. 정작 성매매 피해 여성들은 갈 곳이 없었다. 그녀는 성매매업소를 뛰쳐나와 열심히 일했지만, 성인이 된 뒤 처음으로 사회에 내민 손은 환대받지 못했다.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된 2004년, 사라씨는 다시 집결지로 거처를 옮겼다. 이번엔 용산이었다. 룸살롱에서 집결지로, 강남에서 영등포·청량리로 자리를 옮기던 그녀가 ‘탈성매매’를 결심한 지 2년 만이었다. 그녀는 왜 다시 그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을까?

“소송을 진행하면서 힘들었어요. 돈을 가로챈 업주가 처음엔 무혐의로 풀려나기도 했어요.” 법조차 그녀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레스토랑 등 알바를 전전했지만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어요.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또 그 일을 하게 됐어요.”

스스로 결심을 깬 만큼, 악착같이 일했다. 동료들이 회피하는 손님도 받았다. 행색이 초라하거나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업주가 걸핏하면 술을 마시는 통에 장사를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건강관리를 잘 못해 하혈을 자주 했어요. 자궁에 문제가 생긴 거죠. 쉴 때는 성관계를 안 하며 관리했는데….무거운 것만 들어도 하혈을 했어요.” 그녀의 습관성 하혈은 탈성매매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사라씨는 인터뷰 도중 가끔 일하던 해를 착각했다. 10번 가까이 업소를 옮겼기에 자연스러운 현상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녀에게서 기억하기 싫은 과거를 끄집어내는 고통도 전해졌다.

“어느 날 갑자기 동료가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우리 20대는 이렇게 쇼윈도 안에 갇혀 있어야 하나…’.” 현실에 대한 자괴감과 존재에 대한 불투명성을 한꺼번에 의미하는 말이었다. “너무나 나한테 미안해요. 누구한테 드러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점점 사회에서 삭제돼가는 모습을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쉬는 날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일하는 쇼윈도 앞을 지나가야 한다. 빨간 불빛을 머금은 쇼윈도 안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동료를 보면 묘한 감정이 솟구친다. 뒤에서 ‘일반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그녀들을 앞에 두고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자기들끼리 수군거린다. 희미한 소리다.

“쟤네들은 저기 있다가 또 어디로 팔려간대.”

“외국 사람도 받는다며.”

“정말 지저분하다.”

“태생이 걸레야.”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때만큼은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빨리 지나치기 바랄 뿐이었다. 그들의 대화를 한쪽 귀로 흘려버리려고 애썼다. 쇼윈도에서 일하는 동료를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탈성매매한) 지금도 청량리 골목에 가면 쇼윈도 안의 그녀들이 남처럼 생각되지 않아요. 힘들겠다, 슬프겠다 생각해요. 그리고 빨리 마음을 돌리면 좋겠다, 도움을 요청하면 좋겠다 하고 마음속으로 말하죠.”

그녀가 더 가슴 아파하는 말은 내부에서 나온다. 홧김에 하는 말이 대부분이지만 동료가 존엄에 상처를 줄 때다. 가령 이런 말들이다. “너 몇 살인데 아직도 여기 있냐?” “돈 벌어서 뭐했냐?” “여기 있으니까 느는 건 빚과 살밖에 없지?”

사라씨는 ‘빚의 덫’에 걸린 청량리 집결지를 다시 찾은 때를 27살로 기억했다. 전에 함께 일한 업주에게 연락했다.

회귀본능도 아니고, 업주를 사랑하게 되는 ‘스톡홀름 신드롬’은 더욱 아니었다. 순전히 “갈 곳이 그 곳밖에 없어서”였다. 성매매특별법 뒤 휘황찬란하던 청량리는 옛말이었다. 손님도 줄고, 업소도 줄었다. 곳곳에 문 닫은 업소가 보였다. 재개발 붐도 한몫했다. 여기서 그녀는 큰돈을 날렸다.

“부동산개발업자가 투자를 권유했어요. 투자자가 나올 때까지 두 달만 ‘땜방’으로 넣어달라고 사정사정하더라고요. 하지만 1년 동안 수중에 있거나 새로 들어온 돈을 거의 털어넣어야 했어요. 투자자가 없어서 사업은 중지됐고요.” 1억 원이 넘는 돈이었다.

순진한 것일까? 좀처럼 정을 받지 못한 그녀들은 사회가 내민 손을 덥석 잡는 경우가 많다. 그녀도 벌써 몇 번째다. 환대는 매번 ‘배신’으로 돌아왔다. 일반인들은 그녀를 이용하고 쉽게 존재를 지워버렸다. 아니, 애초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리라.

그즈음 하혈이 계속되고 몸이 약해져 석 달 정도 쉬었다. 그 뒤로 일하고 쉬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28살에 마지막으로 목돈을 쥐기 위해 용산행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1년 만에 일을 접었다. 결과적으로 성매매 여성으로서 마지막 순간이었다. 남은 건 고작 1학기분 등록금과 사글셋방 보증금뿐이었다. 빚이 없어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20대를 다 바친 허망한 마침표였다.

새 출발 발목 잡은 스토커

성매매 경험은 탈성매매 뒤에도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였다. 후에 결혼해도 평생을 불안에 떤다. 성매매 경험을 숨기고 결혼하기 때문이다. 과거 ‘신분’이 드러나는 것이 무섭다. 남편이 알게 될까, 자식들이 눈치 챌까, 과거 손님과 우연히 마주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남편에게 이혼당해 다시 집결지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스토커’에 시달리기도 한다. 대부분 과거 손님들이 돌변해 괴롭히는 경우다. 성매매 여성들은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다. 결정적인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스토커들은 그녀들의 과거를 인터넷에 올리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도 한다. 때론 동영상을 올리겠다며 협박도 한다. 사라씨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탈성매매를 선언하고 사회로 나온 사라씨는 과거 손님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들은 만나주지 않으면 가족에게 과거를 폭로하겠다며 협박했다. “몸을 다시 내주어야 했어요. 지옥 같은 생활로 인해 죽음까지 생각했어요.” 한동안 탈성매매는 유보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녀가 만남을 거부하자 스토커로 변신했다. 과거 성매매 사실을 유포해 가족들이 알게 되었다. 한 손님은 몰래카메라를 찍어놓고 유포하겠다며 협박했다.

자신의 과거가 밝혀지자 이중고통을 겪었다. 언니들은 동생이 성매매한 걸 알고 “네가 다치지만 않으면 된다”며 다독였다. 오빠들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 얼굴을 마주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가까스로 회복하던 언니 오빠들과는 다시 어색해졌다. “고의로 속이려고 한 건 아닌데 완전히 이중생활한 것처럼 됐죠. 내 지난 10년이 가족들에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은 겁니다. 세상이 나한테 해준 것도 없으면서 나를 속였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투명한 쇼윈도의 삶을 어렵게 정리하고 나온 그녀에겐 가혹한 형벌이었다. 애초부터 환대는 기대도 안 했다. 지긋지긋한 성매매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그녀를 기다린 건 성매매 행위보다 견디기 힘든 성매매 여성이라는 주홍글씨였다. “이렇게 큰 아픔이 될 지 몰랐어요.” 사회는 그녀를 낙인 찍고 주저앉혔다.

막달레나에서 세상 속으로

사라씨는 현재 스토커를 경찰에 고소한 상태다.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변호사도 선임했다. 무엇보다 막달레나 공동체에서 생활하며 생기를 되찾았다. 같은 처지의 여성들이 있어 힘이 되었다. “여기도 사회잖아요. 한발 한발 나아가는 거죠.” 하마터면 영원히 지워졌을 존재가 불행을 딛고 복원되고 있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는 작가 파울로 코엘류를 좋아한다. <연금술사> <브리다> <순례자>를 읽고 끊임없이 자아를 찾는다고 했다. 잠자기 전에는 사라 맥라클란의 노래를 듣는다. 영화 <시티 오브 엔젤>의 주제곡 ‘엔젤’을 부른 가수다. 20대 때부터 들었는데 입소 동료들은 구닥다리라고 핀잔을 준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를 정화해주는 맥라클란의 목소리가 좋다. 아침 식사 뒤에는 모닝커피와 담배 한 모금의 특별한 즐거움도 만끽한다. 업소 생활에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다.

“눈 뜰 때마다 하루하루가 새로워요. 전에는 피곤하기 만 하고 시간에 얽매였는데, 지금은 오히려 누워 있는 시간 이 줄고 마음이 편해졌어요.” 이 모든 것이 막달레나 공동 체에서 도움닫기한 덕분이다.

막달레나 공동체 이옥정 대표에 따르면 “사라가 처음 입소해서는 표정이 어두웠다”고 한다. 사라씨가 말하는 어 두운 20대의 그림자가 30대 중반인 얼마 전까지 남아 있었 다. 이 대표는 “동료들과 함께 지내며 얼굴이 밝아졌다”며 “지금은 자기보다 동료들을 먼저 챙긴다”고 귀띔했다. 그녀 와 생활하는 동료는 어떻게 생각할까? 가장 최근에 입소한 민영(가명)씨는 “사라씨가 처음에 무척 따뜻하게 반겨줘서 이곳 선생님인 줄 알았다”며 “이쪽(성매매) 일을 한 사람들 은 경계부터 하는데, 먼저 말 걸어주는 사라씨가 나이는 나 보다 어리지만 언니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또 하나의 기쁜 소식은, 20년 동안 지배해오 던 트라우마가 조금씩 지워지고 있다는 것. 얼마 전 성추행 당한 사실을 친구에게 고백했다. 그 친구는 성추행한 옆집 아저씨의 딸이다. 그때 일로 20년간 연락을 안 하고 살았 다. “친구는 나를 위로하고, 나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친 구를 위로해줬어요.” 그녀는 자신의 상처보다 친구가 받을 상처를 더 걱정했다.

존재를 복원하는 작업은 이미 상당 부분 진척된 듯했다. 사라씨는 얼마 전 막달레나 공동체 인턴사원 시험에 응 시했다. 아직 결과가 발표되지 않았지만, 희망적인 눈빛이 다. “제가 성매매 일을 겪어봤잖아요. 동료들이 무엇에 가 장 아파하는지, 어떻게 희망을 갖고 치유해야 하는지 잘 말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수다가 특기거든요.” 그녀는 공동 체에서 입소자와 상담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그녀의 존재 의미인 무용을 위해서도 차근차근 준비 중이다. “이건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댄스테라피 강사가 최종 목표라고 천기를 누설한다. 요즘 자격증 취득을 위한 제반 조건을 파악하기 위해 인터넷 뒤지는 일에 열심이다. 얼마 전 댄스테라피협회에서 워크숍이 있었는데 한발 늦었 다며 아쉬워한다. “강사가 되면 뭐 할 거예요?” 당찬 대답이 돌아온다. “우선 봉사활동하고, 독립할 수 있는 기반도 마련해야죠, 하하.” 선명한 존재에게서 나오는 선명한 웃음이었다.

김원일 기자 nirva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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