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호 3차원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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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여왕 앞에서 낸시랭 왕국을 선포했죠” 그럼 이제 정치적 관점을 갖게 되었나? “누군가는 나를 열심히 종북으로 몰아가지만, 내가 오래전부터 ‘아이 러브 달러’를 외쳐왔다는 걸 대중들이 알고 있어요. 나는 자유주의자예요. 좌파도 우파도 아니에요. 그냥 대한민국이 잘됐으면 좋겠어요. 모두가 잘됐으면 좋겠고, 잘하는 쪽이 좋아요. 좌파는 종종 찌질하고, 우파는 종종 비열하게 구는 게 싫을 뿐이에요.” 예술가는 태생적으로 자유주의자이기 쉽다. 이념 갈등의 골이 깊고 중간 지대가 인정되지 않는 사회의 특수성 때문에, 한국에는 자신을 자유주의자로 규정하는 예술가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스스로 규정하지 않아도 낸시랭이 전형적인 자유주의자임은 금방 눈치챌 수 있다. 그녀를 종북주의자로 규정하려면 먼저 미국 시민권을 가진 종북주의자라는 새로운 인간 범주가 필요할 터다. 그녀가 자유주의자인 만큼 작품에 담긴 개념도 자유주의적 가치를 지향하는가? 영국까지 찾아가 벌인 <거지 여왕> 퍼포먼스는 자유주의자가 시도할 만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개인이 곧 국가’라는 콘셉트의 퍼포먼스였어요. 사랑과 평화와 예술이 가득한 나라. 영국 여왕의 생일에 티아라(작은 왕관)를 쓰고 낸시랭 왕국의 건국을 선포했지요. 여왕은 세금을 받아 봉건적 지위를 이어받는 삶을 살고 있지만, 민주주의에 속하는 나는 똑같은 세금을 받아 사랑과 평화와 예술이 가득한 나라를 세우겠다는 거지요.” 봉건제 여왕에 대항하는 민주주의의 여왕이라…. 모순적이고 독창적인 발상이다. 대화를 계속하려면 먼저 봉건주의·민주주의·여왕에 대한 정의에 합의를 봐야 하고, 그다음엔 사랑·평화·예술이 가득한 것과 민주주의의 관련성을 논해야 한다. 무엇보다 하필 왜 ‘거지 여왕’이었는지 궁금했다. “자본주의에 대해 문제제기하려는 의도가 있었나요?” 그녀는 대답했다. “왕의 반대편에 거지가 있으니까요. <왕자와 거지>라는 동화도 있잖아요.” 봉건적 제왕의 반대편에 거지가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자 낸시랭은 거지로서 왕을 찾아가더니 도리어 나르시시즘에 빠진 여왕으로서 건국을 선포한다. 이 나라는 사랑과 평화와 예술이 가득하다. 한편으로 달러의 최대 피해자, 거지로 분한 그녀는 줄곧 ‘아이 러브 달러’를 외친다. 미국 시민권자면서 종북주의자로 낙인 찍힌다. 자유주의의 화신이자 신자유주의자의 사냥감이 됐다. 랭의 삶은 논리를 아득하게 초월한 듯하다. 이렇게 물어보자. ‘아이 러브 달러’를 외치는 나라에 사랑과 평화가 가득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불행을 느끼는 이유는 누군가 지나치게 많은 달러를 가졌기 때문인데. “불행의 진짜 이유는 나 자신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누군가 더 많이 갖는 것에 불만을 터뜨릴 필요가 뭐 있어요?” “하지만 낸시랭씨 자신부터 더 많이 갖고 싶어 하잖아요.” “맞아요. 그럼 스스로 더 많이 가지면 돼죠!” “더 갖고 싶었지만 결국 가질 수 없었던 사람들은 여전히 불행하지 않을까요?” “그럼 사회를 바꿀 생각을 해야죠.” “모든 사람이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있는 사회가 가능할까요?” “내가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있어요! 나에게 기회를 주세요!” “난 연예인형 아티스트” “어렸을 땐 비엔날레에 무척 가고 싶었어요. 미술계에서도 그런 작가를 우대하는 분위기가 팽배했고요. 그래서 초대받지도 않은 베니스 비엔날레에 찾아갔지요. 하지만 이제 미술계도 비엔날레에 초대받은 작가를 무조건 높이 평가하지 않아요.” “그새 무엇이 어떻게 바뀐 거죠?” “사랑과 평화와 예술이 가득한 세상으로요!” “미술계 제도를 부정하고 갈아엎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신이 아닌 모든 것은 완벽할 수 없어요. 나보다 먼저 산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모든 것을 몰살해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건 독재의 방식이죠. 그냥 품고 정화시키면 돼요. 더 큰 것으로 더 감동시키면 되지요. 그게 예술가의 방식이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예술만의 방식이에요.” “예술지상주의자처럼 말하는군요.” “응? 그게 뭔데요?” “예술가에게는 상반된 욕망이 있어요. 최고의 예술가로 평가되기 바라면서 동시에 자신이 몸담은 예술계에 속박되기 싫어하죠. 속박되는 걸 좋아하는 예술가는 없어요. 그걸 넘어서길 꿈꾸죠. 나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럼 낸시랭의 생계 수입은 주로 예술계에서 들어옵니까, 아니면 그 너머에서 옵니까?” “아무래도 미디어에 출연하거나 기업과 컬래버레이션하는 게 큰돈을 벌어다 주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고승덕 변호사도 직업이 있지만 방송 활동을 하잖아요. 연예인이냐 아티스트이냐는 질문을 왜 나한테만 하는지 모르겠어요.” “직업을 생계로 규정한다면 그런 질문이 가능할 것도 같은데요. 고승덕 변호사는 주요 수입이 방송이 아니잖아요. 낸시랭씨 경우와는 좀 다르지 않을까요?” “나는 직업을 규정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이 내 직업을 규정하려고 하죠. 뭔지 모르겠으면 ‘연예인형 아티스트’라 부르면 되는 거죠!” “우리 사회에선 다들 자신의 삶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타인의 시선을 따라 자기 삶이 결정되지요. 그래서 사실은 자기 삶이 아니라 부모의 삶, 친구의 삶, 직장 동료의 삶을 사는 거예요. 하물며 옷차림마저도!” “낸시랭씨는 어때요. 혹시 지금 자신의 삶을 살고 있나요?” “헌드레드 퍼센트! 저는 낸시랭 그 자체죠!” “결혼은요?” “결혼하고 싶어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싶지 않아요. 애는 원래 안 좋아했지만요.” “왜죠?” “울잖아요. 외계인처럼 생겼고. 안 예뻐요.” “애완동물은 좋아하면서?” “동물은 징징대지 않아요. 그저 반기죠. 그래도 자연의 섭리대로 결혼은 하고 싶어요. 애는 남자가 낳아주고요. 아님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이 낳거나. 아니, 사실은 그래도 애를 낳아볼 거예요. 싫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건 아티스트의 자세가 아닌 것 같아서요.” “아티스트의 자세요?” “네! 그것도 새로운 경험이죠.” “애 낳는 것을 예술가의 창작으로 여긴다는 이야기인가요?” “세상의 온갖 새로운 걸 다 해보고 더 이상 새로운 게 없다고 생각하는 내가, 애 낳는 경험만 피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 해보자!” 이택광 교수가 아버지처럼 근엄한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장담하지요. 낸시랭씨는 애를 낳는 경험뿐만 아니라 애를 사랑하게 될 겁니다. 아주 야단법석을 피우게 될 거예요. 낸시랭 같은 사람은 그냥 딱이에요.” “히히, 사실 그 이야기 정말 많이 들어요.” “뇌가 섹시한 남자 좋아… 외모는 안 봐요” 올해 계획은 어떻게 되나. “힐링, 트레블링, 러브. 예상치 못한 일을 겪으면서 많은 분들이 힐링해줬어요. 내가 원한 방식은 아니었지만. 여행도 이미 다녀왔고요. 말레이시아에.” “말레이시아 어디로 갔나요?” “콸라푸룸푸?” “콸라룸푸르.” “아, 맞아요. 거기요.” “괜찮습니다. 우리도 보통 기억 못해요. 술집 이름까지는.” 그럼 ‘러브’만 남았는데? “결혼하고 싶어요.” “올해?” “결혼할 사람이 나타난다면 결실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강력하게. 이번에 사람들이 사생활을 마구 헤집는 힘든 일을 겪었잖아요. 많이 울었거든요. 처음으로 나 자신을 알게 됐어요. 내 편에 머물러줄 사람을 간절히 원한다는 걸요. 물론 진중권 선생님이 내 편이 되어서 열심히 싸워주긴 했지만…. ”(‘그분 말고’란 뉘앙스였으니 진중권씨는 오해할 필요가 전혀 없다) “어떤 남자를 찾는데요.” “뇌가 섹시한 남자, 눈빛에 인류애가 서린 남자. 외모는 안 봐요. 관심조차 없어요. 남자 재력 보는 건 20대 이야기고요. 무조건 뇌가 섹시해야 돼요. 거기에만 매력을 느껴요.” “제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어디로 튈지. 시련과 고통을 겪었다고 교과서처럼 성장하는 사람은 아닐 거예요. 난 오로지 내가 선택한 것을 실행하는 데만 신경 써요. ‘낸시랭’, ‘난실행’할 거야! 자서전 제목이기도 한데요. 떠오른 걸 바로 실행에 옮겨요. 그렇지 않으면 날아가버리니까요. 지나가면 붙잡을 수 없어요. 실행하기 전에 더 알려고 하면 이미 늦어요. 연애만 해도 그렇지 않나요? 여자들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남편감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망설이다 휙 지나가버린 인연 중에 있어요.” 이택광 교수가 말했다. “요즘 낸시랭씨에게 관심이 가고 기대가 돼요. 예전엔 그저 한국 미술계가 낳은 사생아인 줄만 알았는데.” “으흐하핫!” “주체가 되어간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노력하는 낌새도 보입니다.”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영향이 있었죠.” “하지만 본인의 길이 컨트롤이 되지 않으면 어떡할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 낸시랭씨 주변을 둘러싸고 만들어지고 있는 것들이요.” “뭐가 만들어지고 있는데요?” "새로운 기류가 만들어지고 있잖아요. 못 느끼나요?” “그러니까 뭐가요?” “예를 들어 사람들이 낸시랭씨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시각부터.” “그냥 알아서들 하시면 돼요.” “신경 쓰지 않고 내 길을 가겠다?” “모두 같은 저에요. 한때는 싹을 밟아 죽이려는 듯이 굴던 사람들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어도 구원받았다는 생각은 조금도 안 들어요.”
“내가 가진 개념은 무개념이에요” 어둡고 고통스러운 시기는 어떻게 보냈는가? “나에게 악랄하게 굴던 사람들 다 기억하죠. 치밀한 복수 계획을 세워요. 장기계획이에요. ‘내가 이걸 그냥 넘어갈 줄 알았지? 난 뇌가 섹시해서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복수할 거야.’ 그러다 해야 할 일로 바빠져요. 올인하죠. 그러고는 잊어버려요. 계획이 기억이 안 나요.” 장기적인 복수를 계획한다. 빠르게 잊는다. 어깨 위의 인형이 영혼을 가졌다고 믿는다. 탈수기에 돌려 말린다. 봉건적 사고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유주의자면서 여왕에 즉위하길 꿈꾸고, ‘아이 러브 달러’를 외치면서 거지로 분장한다. 큐티하고 섹시하다. 합하면? ‘앙!’이다. 도저히 일관성 있는 맥락으로 배열해보기 어려운 철학이다. 그래서 낸시랭은 흥미진진하다. 그래서 낸시랭은 스타가 됐다. 그녀는 내가 처음 만나는 종에 속하고, 그녀의 사고방식은 내가 처음 발견한 과에 속한다. 랭을 향한 비난과 관심 역시 오로지 랭의 모순과 독창성에 쏟아지는 것. 그녀 입에서 나오는 대개의 문장 역시 순결성마저 느껴지는 독창적인 모순 구조로 닫힌다. 이렇게. “요즘엔 사람들이 나를 ‘개념녀’라고 부르는데, 사실 내가 가진 개념은 무개념이에요.” 작별하기 직전 코코 샤넬을 잠시 빌렸다. “얘 궁둥이 때리는 거 동영상으로 찍어도 되겠어요?”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진지하게 성화를 부렸다. 나는 당황했다. 그게 랭을 구성하는 양립 불가능한 두 세계의 어느 쪽에서 나온 반응인지 모르겠다. 작품이 훼손당한다고 여겨설까? 아니면 애완동물이 학대당한다고 여겨설까?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랭의 왼쪽 어깨에 코코 샤넬을 곱게 올려주었다. 하하, 당분간 이보다 흥미진진한 사람은 만나볼 수 없겠지.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손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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