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6.06 11:23 수정 : 2013.06.12 14:06

“당신… 변하면… 나한테 죽는다!”

그가 정치에 입문하겠다고 하자, ‘오래된 남친’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지난해 3월, 정치인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그가 갑작스레 출마를 결심할 무렵이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당신 얼굴이 조금이라도 나쁘게 혹은 사납게 변해 있으면 큰일 날 줄 알라”고 되뇌이는 남친의 표정엔 근심이 가득했다. 누구보다 그의 삶의 이력과 경로를 잘 알기에 나온 우려였다.

‘경고’는 짧고 ‘응원’은 화끈했다. 남친은 그가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공천심사 면접에 들고 갈 퍼즐을 맞추느라 날밤을 새웠다. 1천 개의 조각을 맞춰야 하는 일이었다. 거실 한쪽에 쭈그리고 앉은 남친은 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퍼즐 조각을 맞췄다. 퍼즐 그림은 배가 바다에서 항해하는 그림이었는데, 특히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한 빛깔의 하늘 부분을 제대로 맞추기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급기야 ‘퍼즐 맞추기’가 취미인 지인 두 명을 동원한 뒤에야 완성했다.

“일요일 오전 11시가 면접이었는데, 2시간 전인 오전 9시에 완성해서 보냈더라고요. 얼마나 아슬아슬했는지.(웃음) 그 전까지는 공천심사할 때 뭘 들고 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대요. 즉석에서 마지막 한 조각의 퍼즐을 맞추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정치개혁’이라는 큰 그림을 그려가는 과정에서 내가 마지막 한 조각 퍼즐이 되고 싶다고요. 우리 사회는 퍼즐처럼 다양한 조각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한두 조각만 빠져도 전체 그림을 완성하기 어렵잖아요. 한 조각 그 자체로는 작고 미미하지만 그림을 완성하는 마지막 순간에는 없어선 안 될 소중한 존재가 되죠.”

진선미 의원은 그의 ‘오래된 남친’과 연애 14년, 함께 산 지 16년째이지만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 진 의원은 결혼제도 바깥에 있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입법에 나설 계획이다. 한겨레 박승화 기자
진선미(46) 민주당 의원의 국회 입성기다. 그는 일명 ‘퍼즐 이론’을 앞세운 공천심사에서 후한 점수를 얻었다. 당선 안정권인 비례대표 5번을 받았다. 원래 그의 이력은 차별받는 소외된 이웃을 대변해온 변호사 생활로만 채워져 있었다. 1999년 법무법인 덕수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호주제 위헌소송, 송두율 교수 간첩혐의 사건 등에 참여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그가 정치인으로 변신한 지 1년이 지났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의 ‘입’(대변인)으로 활약한 그는, 올해 국가정보원의 정치 개입 의혹을 폭로하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출국을 저지하려고 인천공항에 직접 출동한 일은 이번 사안을 국민에게 각인시키는 데 적잖은 역할을 했다.

그렇다고 이번 인터뷰가 국정원 사태를 계기로 이루어진 건 아니다. <나·들>은 그의 또 다른 의정 활동 구상에 주목했다. 기존 결혼제도의 틀에서 비켜나 있는 진 의원은 19대 회기 내에 ‘생활동반자등록법’(가칭)을 제정할 계획이다. ‘남편’이라는 말 대신 ‘오래된 남친’이라는 호칭을 쓰는 이유도 이런 계획과 무관하지 않다. 남친과는 연애만 14년, 함께 산 지 16년째이지만 아직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다. 그는 자의 혹은 타의로 결혼제도 바깥에 있게 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입법 과정에서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이 되기로 작정한다.

인터뷰하는 2시간 30분 동안 그의 표정은 두 가지뿐이었다. 시종 웃고 있거나 울고 있었다. 기분 좋은 말을 할 때는 연신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렸고, 슬픈 기억을 더듬기라도 할 때면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진 의원과 만난 지난 5월 15일은 마침 그의 음력 생일이었다. 그가 앉은 자리 바로 옆에 커다란 꽃바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남친이 보낸 건가요?”

“하하하, 이거 ‘깔때기’(모든 화제가 자기자랑으로 귀결된다는 뜻)가 아닐까 싶은데. 여기 보낸 사람의 이름은 없고 ‘축복-행운-행복’이라고 쓰여 있잖아요. 이게 꽃집에서 써 보내는 메시지가 아니거든요.”

“숨은 뜻이라도 있나요?”

“우리가 태어난 건 ‘축복’, 우리가 만난 건 ‘행운’, 우리가 함께하는 건 ‘행복’이란 뜻이에요. 이 말을 우리가 최근 새롭게 개발해서 가끔 문자로 주고받고 있거든요. 너무 염장질인가요? 나도 문자로 ‘아우~ 센스쟁이’라고 보냈어요.(웃음)”

30년차 커플이 주고받았다고 하기엔 꽃바구니 크기가 너무 커 보였다. 닭살 커플만이 가능한 것이리라. 혼인신고 하지 않고 ‘사실혼’ 상태로 살게 된 사연을 듣기 위해선 ‘오글거림’을 감수하고 연애담부터 들어야 했다. 그는 대학 시절 ‘운동권’이 아니라 ‘연애권’이었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난 대학 때 ‘연애권’… 혼인신고는 거부

전북 순창이 고향인 진 의원은 읍내 탁구장집 막내딸로 자랐다. 중3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먹고살 길을 찾던 어머니가 탁구장을 운영했다. 그 덕분에 진 의원도 탁구 실력이 수준급이다.

어릴 때부터 법조인을 꿈꾼 건 아니다. 텔레비전에서 좋은 직업이 나오면 한번씩 생각해보는 정도였다. 당시만 해도 동네에서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을 간 여고생은 그가 처음이었다. “시골이라 더 그랬겠지만, 여자가 법조인이 되려는 생각은 가당치 않은 일로 여기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지금 변호사 일을 하고 있는) 큰오빠가 제가 사회 과목에 흥미를 느낀다는 말을 듣고 법대 진학을 권유했어요. 운 좋게 시험 성적도 괜찮게 나왔고요.”

성균관대 법학과에 입학하면서 시골 소녀의 서울살이가 시작됐다. 남친과 처음 만난 것은 1984년 대학 1학년 때다. 2학기로 접어든 어느 날, 과제물 취합을 하는 과대표 일을 거들었다. 그런데 두 학번 선배이자 복학생인 남친의 과제물을 잃어버리는 ‘운명적’ 사건이 벌어졌다.

“혹시 마음에 드는 선배라서 일부러 그러신 건가요?”

“아우, 설마 그럴리가요. (얼굴) 보면 아시겠지만….(웃음)”

‘과제물 분실사건’으로 맺어진 인연의 끈은 그때부터 집요하게 이어졌다. 알고 보니 95번 버스를 같이 타고 등교하는 사이였다. 수업을 같이 듣고 도서관 자리를 잡아주면서 관계도 발전해갔다.

“매일 버스를 같이 타고 다니는데 자꾸 꼬시더라고요. 학교에서 명동이 가까웠는데 돈가스도 사주고, 함박스테이크도 사주고…. 그전에는 자장면 먹는 게 외식의 전부였는데, 얼마나 신기했겠어요. 그런 거 얻어먹다가 지금 밥 해주고 있지만.(웃음)”

“학생운동은 전혀 안 한 건가요?”

“1987년에… 누구나 할 때 같이 한 정도였어요. 맨 나중에 합류한 무리 가운데 하나였고요. 학교를 일찍 들어가서 18살에 대학에 입학했거든요. 철없기도 했고 너무 일찍 한 남자를 만나서…. 뒤늦게 철든 경우라고 보면 돼요.”

올해 초 그는 ‘결혼하지 않는 사회’를 주제로 다룬 케이블방송 tvN의 <백지연의 끝장토론>에 출연했다. 한 패널은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진 의원은 모든 걸 갖추고 있으면서 왜 비혼으로 살고 있어요?” <나·들>도 같은 질문을 던져본다.

두 사람은 연애한 지 14년 만인 1998년에야 결혼식을 올렸다. 진 의원이 사법시험을 준비한 8년간을 남친은 묵묵히 기다려줬다.

“그분이 결혼제도를 좀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면이 있었어요. 삶에서 서로에 대한 교감이 중요한 거지, 내게서 아내 역할을 바라는 건 아니라고…. 그래서 고시공부하는 걸 접고 서둘러 결혼할 필요 없다고 한 겁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닭살 커플임을 다시 한번 과시하고 만다.

“엄마가 까다로운 분이었어요. 거울만 잠깐 들여다봐도 공부 안 하고 멋낸다고 뭐라 하시고. 그래서 무조건적 지지나 전폭적 사랑, 이런 거는 남친에게서 받은 것 같아요. 한 번도 내가 뭘 하겠다고 할 때 반대한 적이 없고, ‘넌 잘할 수 있다’고 격려해줬어요. 항상 서로에게 ‘충전기’가 돼주자고 해요. 바깥에서 할 일이 무척 많고, 다른 사람들과 대립·충돌하는 일도 많잖아요. 그래서 둘이 있을 때는 가장 유치찬란하게 놀고 북돋워주자는 거죠.”

결혼식을 올리고도 혼인신고를 안 한 데는 그가 ‘호주제 위헌소송 변호인단’으로 활동한 일이 영향을 미쳤다.

“사실 처음에는 서로 바빠서 혼인신고를 미루던 차였어요. 그러다가 내가 변호인단에 관여하게 된 겁니다. 원래는 ‘무호주 변경 신고’(남편이 호주로 된 것을 무호주로 변경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를 해볼까 하다가 변호인은 객관성을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원고에는 들어가지 않았어요.”

“남친도 선뜻 동의하던가요?”

“그럼요. 내가 변호인으로 호주제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마당이기에 이 문제가 해결되면 (무호주 변경 신고) 하자고 했어요. 그분도 그러자고 했고. 나중에는 남친도 약간 활용하던데요, 본인이 여성주의자라도 된 것처럼….(웃음)”

“그래도 집안에선 반대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엄마가 이런 말 하는 거 싫어하시는데…. 호주제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났을 때 어느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가장 힘든 게 뭐였느냐는 질문을 받고 ‘우리 엄마죠’ 했거든요. 전형적인 시골의 몰락한 양반 가문의 노인이에요. 여자는 조신해야 하고 집안의 화목에 신경 써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런 엄마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너, 내 딸 맞느냐’는 농담 이었으니까요.”

법률혼 잠시 고민… “쿨하게 그대로 가자”

2008년 호주제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혼인신고 는 여전히 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진 의원은 “호주 제 폐지 소송 과정을 겪으면서 나 스스로도 생각이 많이 바 뀐 거 같다”고 말했다.

“우선 남친과의 관계가 굳이 어떤 제도에 의해 보전되 는 단계는 이미 넘어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이고요. 그리고 변호사를 하면서 다양한 사례를 접해서 그 런지 모르겠는데, 기존 가족제도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 향이 항상 긍정적이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테두리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는 억압적 기제로 작용할 수 도 있는 거죠. 차별받는 이들을 그런 식으로 대변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그런 그도 지난해 국회로 오기 전에는 잠시 흔들렸다. “의원이 되면 공인으로 주목받을 텐데 국민이 어떻게 볼까 싶어서 주변에 몇몇 분과 상의한 적이 있어요. ‘결론은 그냥 쿨하게 지금대로 가자’였습니다. 의원이 되려고 갑자기 혼인 신고하는 것도 좀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진 의원은 우리 사회의 법과 제도의 상상력이 아직 다 양한 가족 형태를 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주목한다. 사실혼 혹은 동거·동성 커플, 비혼모·비혼부 가족 등이 그 런 사례다. 결혼 기피의 해결책으로 경직된 기존 결혼제도 외에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인정하고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주로 어떤 경우에 결혼을 기피하는 건가요?”

“주변에 의외로 많습니다. 경제적 문제 때문에 그런 경 우가 많은 편이고, 집안 반대 등 현실적 어려움으로 동거하 는 사람들이 있어요. 많은 사람이 동거를 부정적으로 평가 하는 이유가 성적으로 문란하다거나 관계 자체의 깊이를 폄하하기 때문이에요. 혼인신고하고 살다가 몇 달 만에 이 혼해서 헤어지는 건 괜찮고, 혼인신고 안 하고 살다가 헤어 지는 사람은 비난받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최근 들어 불가피한 사정이 없어도 자발적 선택으로 법률혼을 거부하는 이들도 늘어나는 추세라고 했다. 가부 장적 결혼제도를 거부하기로 한 의식적 선택이다.

“동거 커플의 가장 큰 어려움은 무언가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데요. 예를 들어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큰 질병에 걸렸다고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같이 사는 가족이더라도 법적으로 보호자가 될 수 없어요. 오히려 관계를 다 끊고 관심조차 없이 살던 가족이 와서 응급수술 같은 걸 결정해야 하는 거죠.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한 커플이면 문제는 더 심각해져요. 파트너가 사망하는 최악의 경우 장례 절차에서도 배제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처럼 동거·동성 커플 법적 인정 필요

그뿐만이 아니다. 법률혼으로 맺어지지 않은 경우 각종 세제 및 사회보장 혜택 등을 받기 어렵다. 예컨대 신혼부부 특별청약을 실시하는 보금자리주택의 경우, 혼인신고를 거친 이들에게만 청약 자격을 부여하는 식이다.

프랑스의 공동생활약정(PACS)은 앞으로 진 의원이 입법 활동을 펴게 될 ‘생활동반자등록법’의 근간이 될 것이다. 동거가 일반적 삶의 형태로 보편화된 프랑스에선 이 제도가 적극 활용되고 있다. 동성애 혹은 이성애 커플이 동거 계약서를 지방법원에 제출하면 사회보장과 세제 혜택, 상속 등에서 기존 결혼제도와 유사한 권리와 의무를 보장받는다. 이 제도는 동성 커플이 결혼을 대신할 수 있는 제도로 출발했지만 최근에는 이성 커플에게 더 인기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진 의원은 법안을 제출하기까지는 좀더 시간이 걸리지 않겠느냐고 내다봤다. 그는 호주제 위헌소송의 변호인으로 활동할 때 “가족을 모두 해체시키고 짐승의 나라로 만들려는 역적” 취급을 받던 기억을 떠올렸다.

“호주제 위헌소송이 결실을 맺기까지 10년이 걸렸어요. 물론 그전에도 많은 분들이 수십 년간 싸워온 토대가 있었지만. 이 문제도 긴 호흡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호적인 여론 조성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그때도 가장 답답한 것이 호주제가 폐지되면 가족이 붕괴되는 것처럼 인식하는 분위기였거든요.”

진 의원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이들의 논리가 고스란히 이 법안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동성 커플을 인정할 것인지는 뜨거운 쟁점으로 부상할 수 있는 문제다. “혼인·가족 제도는 기존 특성을 계속 유지하려는 습성이 그 어떤 분야에서보다 훨씬 강하게 작용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이 때문에 제도에서 이탈돼 있는 이들이 받는 상처와 소외감이 크다는 얘기다.

“좀더 다양한 결합 형태를 인정해주자는 것인데요. 논의가 본격화되면 ‘가족을 파괴하겠다는 거냐’, ‘결혼을 네댓 번씩 하겠다는 거냐’는 여러 가지 말이 쏟아져 나올 거라고 봐요. 과거 호주제 폐지에 반대하는 어느 법대 교수가 공식석상에서 이런 말까지 한 적이 있어요. ‘오빠가 동생이랑 잠자리를 같이 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요. 그러면 대중은 ‘근친상간이 만연해지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기 가 막힐 노릇이죠.”

흔히 대안적 가족제도의 논쟁이 ‘사회적 안정’ 대 ‘개인 의 자유’ 간의 갈등으로 여겨지는 게 문제라고 그는 비판한 다. 오히려 새로운 방식으로 개인의 욕망을 사회적 통합으 로 추스려내는 방향으로 논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송두율 변론 때 실향민 부친 생각에 눈물

변호사 시절 진 의원은 유독 사회적 파장이 큰 사안을 많이 다뤘다. 송두율 교수 간첩혐의 사건의 변호에 참여한 일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 그 는 아직도 감정이 북받치는 듯했다.

“지금도 생생하죠. 송 교수가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 려날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어요. 그 사건이 국가보안법의 폐해를 국민에게 보여준 계기가 됐다고 생각 하는데요. 아마 분단으로 고통받던 아버지 생각이 겹쳐서 그랬던 것 같아요.”

초대 순창문화원장을 지낸 진 의원의 아버지는 북에 서 혈혈단신으로 내려온 실향민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국 군이 북으로 올라왔을 때 정훈장교에 합류해 내려온 것이 다. 북에 두고 온 홀어머니를 내내 마음에 걸려 하다 돌아 가셨다.

“전쟁통에 평양사범대학 1학년을 채 못 마치셨다고 해 요. 무척 다재다능한 분이셨는데 시골에서 제대로 뜻을 펼 수 없으셨죠. 송 교수 사건이 정말 말도 안 되는 거잖아요. 우리에게 주어진 비극적 굴레가 아닌가 싶었어요. 그때 이 후로 그런 굴레에서 좀 벗어나지 않을까 싶어서 격한 감정 에 눈물을 쏟곤 했는데…, 지금 보면 아직 세상이 덜 바뀐 것 같아요.”

간통사건을 다루면서는 악의적으로 활용될 소지가 다 분한 법·제도가 인간을 어떻게 타락하게 만드는지 뼈저리 게 절감했다(진 의원은 간통죄 폐지론자다). 한 여성 공무 원을 둘러싸고 벌어진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결혼을 약속 한 남성이 어느 날 알고 보니 애 딸린 유부남이었다. 유부남 은 아내와 이혼할 거라면서 집요하게 여성 의뢰인을 놓아 주지 않았다. 이런 집요함에 마음이 허물어진 의뢰인은 그 와 잠자리를 하게 됐고, 이를 빌미로 유부남의 아내는 간통 죄로 의뢰인을 고소하겠다고 나섰다.

당시엔 의뢰인이 모든 걸 포기하기로 하고 합의가 이루 어졌다. 문제는 몇 년이 흐른 뒤에 다시 불거졌다. 반성의 기 미를 보이지 않는 유부남의 아내가 맞바람을 피우자 유부 남이 간통죄로 고소하겠다고 나섰고, 그 아내도 의뢰인과 남편의 과거 사건을 다시 들추겠다고 했다.

“어느 순간 가장 큰 죄를 지은 남편이 간통죄를 무기 삼아 사건을 잡고 흔들고 있더라고요. 그게 간통죄의 현실 이에요. 얼마나 어이 없어요. 제도를 악의적으로 활용하는 사례를 여럿 봤거든요. 나중에는 모두 후회하는 상황이 빚 어지기 마련이고요.”

진 의원은 법무법인 덕수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변호사로서 삶의 토대를 잘 닦아놓을 수 있었다고 털어놨 다. 그 인연의 끈에는 이석태 변호사가 있었다.

“제가 대학 때 ‘연애권’이었잖아요.(웃음) 덕수가 많은 사람이 일하고 싶어 하는 곳이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어 요. 1994년 고시공부하다가 위기를 맞은 적이 있어요. 원래 즐겁기 만한 성격인데 그만두고 싶더군요. 그때 단전호흡하 면서 정신세계에 대한 탐구에 몰입하게 됐고, 결국 생태주 의로까지 눈을 돌리게 됐죠. 감동적으로 읽은 책이 헬런 니 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인데, 이 책을 이 변호사님이 번역했어요.”

문득 궁금해졌다. 정치인이 된 이유는 뭐였을까. 진 의원 특유의 큰 웃음소리부터 들려온다.

“하하하, 미쳤던 거 같아요.”

“솔직하게 털어놔보시죠.”

“이전에도 제안받은 적이 있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어요. 전혀 생각해볼 수 없는 문제였죠. 여성의 사회 진출에서 가장 낙후한 분야가 정치이지만 내 길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다가 (기자도) 알 만한 어떤 분한테서 ‘지식인으로서 역할을 방임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들었어요. ‘너 혼자 편하게 살 거냐’는 식의 문제제기를 진지하게 한 거죠.”

정치 입문요? “제가 미쳤던 거 같아요”

“(정치를) 직접 해보니 어떤가요?”

“매순간 자기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나빠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중심을 잡는 힘이 없으면 여기저기 끌려다닐 수 있다는 거죠. 한편으로는 반성하는 점도 있어요. 무엇보다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무척 과로하는 분들이 많아요. 변호사 때도 바빴는데, 그래도 그때는 콘서트 보러 갈 수는 있었거든요.(웃음)”

“의원이 되고 나서는 한 번도 못 가셨나요?”

“한 번 갔어요. 지난해 11월에 열린 노라 존스 콘서트. 문재인 후보를 따라다니던 시절이라 못 가겠구나 싶었는데 그것만은 포기를 못하겠더라고요. 일정 끝나고 나서 막 달려가니까 한 시간쯤 지난 뒤에 입장할 수 있었어요. 혼자서 엉엉 울면서 음악을 들은 기억이 나네요.”

지난해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의 대변인으로 활약한 일은 정치인으로서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전국 곳곳의 다양한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쪽방에 사는 독거 노인들을 찾아뵌 적이 있어요. 내 마음을 움직인 건 그분들의 가난한 삶이 아니라, 그 와중에도 후보의 건강을 걱정하는 모습이었어요.”

그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면서 다시 눈물을 쏟았다.

“어르신들이 너무 담담하게… 손을 잡으면서 건강 주의하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 좋은 마음을 갖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발현시켜줄 것인지가 정치인들의 몫이구나 싶었어요. 원래 나쁜 사람들은 많지 않잖아요. 다만 제도적·사회적 환경이 여의치 않아서 사람들을 극한 상황으로 내몰고 있고, 그걸 최소화하는 게 우리가 할 일이구나 싶었어요.”

진 의원은 지난 3월 국정원의 정치 개입 정황을 보여주는 내부 문건을 공개한 바 있다. 이어 5월 19일에는 국정원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반값 등록금 관련 보고 문건을 공개해, 정치 개입 의혹을 거듭 주장했다. 할 말이 많아 보였다. 답답함도 커보였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턴가 기본부터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보를 장악하고 있는 기관이 공무원들이 지켜야 할 윤리 규정을 정면으로 위배한 거예요. 그러면서도 너무나 당당하게 부인하고. 왜 내가 그걸 입증해야 하나 싶더군요. 계속 부인하다가 꾸역꾸역 자료를 찾아내서 문제제기하면 딱 그만큼만 물러서고 있잖아요.”

“인천공항 출동은 직접 결정한 건가요?”

“그럼요. 너무나 엄정한 사안인데 언론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전 국정원장은 출국할지 모른다 그러고. 오전 11시에 기자회견 마치고 공항으로 출발해서 오후 5시 40분까지 공항을 지켰어요. 잠깐 짬을 내서 트위터에 사진을 올렸는데 그게 나름 홍보 효과가 좋았던 것 같아요.(웃음) 한 보수단체가 국회의원이 ‘생쇼’한다고 성명서를 냈기에, 우리가 전국에 좀 뿌려줬으면 한다고 그랬어요.”

진 의원은 “법이 따뜻한 한 그릇의 밥이 될 수 있다”고 한, 고 이돈명 변호사의 말을 늘 간직하며 산다. 국회의원으로 일하면서 그가 바라는 일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했다.

“거대한 것보다는 작고 사소한 것이 쌓여서 뭔가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예를 들면 최근 소방공무원들의 근무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소방히어로법안’을 발의했는데요. 위험과 직접적으로 맞닿은 곳에서 일하는 분들이 대접받는 사회가 돼야 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기 전, 그는 개인적으로 또 다른 꿈이 있다고 귀띔해줬다. 이탈리아의 피렌체, 프랑스의 파리 등 몇몇 도시를 정해서 ‘6개월씩 살아보기’란다.

“역사가 깊고 문화적으로 향유할 것도 많은 곳, 그러면서도 최신 트렌드가 함께 있는 곳에서 살아보고 싶어요.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서 ‘비너스의 탄생’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앞에서 1시간 30분을 앉아서 봤어요. 눈물이 주르륵 흐르면서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더라고요. 그런 게 행복 아닌가 싶어요.”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