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5.07 00:29 수정 : 2013.05.08 10:15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인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신은정씨와 광주에서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지난해 신씨와 사별했다. 2011년 봄 두 사람이 메사추세츠 공대(MIT) 교정에서 입맞추고 있는 모습.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 제공

5월이면 누구보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미국의 사회정치학자가 있다. 눈부신 5월의 햇살 대신 독재자의 총탄이 쏟아졌던 도시, 불의한 폭력에 맞서 싸우다 쓰러져간 시민들, 잠깐 동안의 해방 공간에서 그들이 보여준 공동체 정신은 그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조지 카치아피카스(64), 보스턴 웬트워스공대 인문사회학부 교수인 그는 5·18 광주 항쟁을 비롯한 한국 민중운동 전문가다. 1999년 그의 저서가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2001~2002년 전남대에서 교환교수를 지내는 등 지금까지 수십 차례 한국을 찾았고, 2003년에는 북한을 방문했다. 광주항쟁 33돌을 앞두고 <나·들>이 그를 만났다.

마침 워싱턴에서 연수 중인 기자는 지난 4월 22일(현지 시각) 보스턴행 비행기를 탔다. 보스턴 마라톤대회 폭탄테러 사건이 일어난 지 일주일, 수배 중이던 용의자가 경찰과 총격전 끝에 체포된 지 사흘 뒤였다. 그전까지 주요 구역이 봉쇄되고 대중교통이 끊기는 등 도시는 마비 상태였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바쁜 일정을 쪼개 공항까지 마중을 나왔다. 보스턴 바로 옆 케임브리지에 있는 그의 집까지 지하버스를 탔다. 보스턴의 지하 대중교통인 서브웨이(Subway)는 전동열차와 전기·디젤 겸용 버스가 함께 다닌다.

“나도 2007년까진 좋은 차가 있었는데 딸에게 줬어요.”

그는 ‘노 마이 카’가 좋은 점을 세 가지 들었다.

“우선 걷는 시간이 많아져서 건강에 좋아요. 자동차가 꼭 필요하면 렌터카나 지프카(자동차 공동이용 시스템)를 활용합니다. 내 차가 오히려 더 많아진 거지요(웃음). 지구 온난화 방지에도 참여하고요. 자동차를 없앤 뒤로 더 행복 해졌습니다.”


MIT 재학 중 베트남전 반대시위로 옥고


인터뷰는 ‘68혁명’ 이야기로 물꼬가 트였다. 그가 대학 생이던 1968~70년 유럽과 미국은 사회변혁의 열망과 보수 기득권의 가치가 거세게 충돌한 격동의 시기였다. 인종, 성 (젠더), 전쟁, 노동, 민주주의 등 다양한 인권 이슈에서 급진 적인 변혁 요구가 유럽을 휩쓸었다. “미국에선 1970년이 절정이었습니다. 전국에서 베트남전 반대시위가 격렬했고, 민권 확대의 목소리가 높았지요.”

보스턴에 있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 다니던 청년 카치아피카스의 피도 뜨거웠다. 그는 대학 시절에 “아주 잘나갔다”(very successful)고 말했다. “총장 전액 장학금을 받았고, 학생클럽협의회 회장을 했고, 배구와 라크로스1 등 운동도 잘했습니다.” 그가 관심을 갖고 적극 참여한 것은 베트남전 반대운동이었다. MIT의 교수진, 노벨상 수상 과학자, 대학원 연구자들로 구성된 파운드위원회(Pounds Commission)의 멤버 20명 중 유일한 학부생이었다.

“당시 MIT는 미 국방부의 의뢰를 받아 베트남전에 사 용할 미사일 정밀유도장치, 동시다발타격 핵미사일, 전투 헬기 비행안정시스템, 이동표적물 식별 레이더 등 수십 가 지의 첨단 군사기술을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국방부는 그 대가로 막대한 연구자금을 지원했다. 파운드위원회는 대학 의 이런 풍토에 대한 비판을 수용해 실태를 점검하고 대안 을 찾으려는 연구조직이었다. 그는 이 모임에서 노엄 촘스 키 교수와 처음 만나 지금껏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교감과 우정을 유지하고 있다.

카치아피카스는 여러 학생운동 조직과 파운드위원회 에서 활동하면서 대학의 전쟁 협력을 비판하고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를 조직하는 등 반전시위에 앞장섰 다. “학교가 무기개발 연구를 당장 멈추지 않으면 학생과 교 수들이 학교를 멈추겠다고 압박했습니다. 항의 시위, 학내 총파업, 수업 거부, 점거 농성 등 수단은 많았어요.”

미 연방수사국(FBI)은 그를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최 우선 감시 대상’으로 분류했다. 1970년 5월, 카치아피카스 는 학교 당국의 고소로 구속됐다. 정식 재판에서 유죄 판 결을 받고 6주간 교도소 독방에 갇혔다. 그 때문에 대학 졸 업도 감방에서 맞았다. 죄목은 ‘학교 혼란 조성죄’로 18세기 에 만들어진 법이 100여 년 만에 부활했다.

졸업식 날이 다가오자 카치아피카스는 교도소장에게 ‘일생에 한 번뿐인 졸업식에 참석하게 해달라’는 메모를 전 달했다. “곧바로 소장실로 불려갔습니다. 그는 터프가이였고, 아주 이상한 사람(very crazy man)이었어요.”

교도소장은 좌우로 10명의 경호원을 거느리고 팔짱을 낀 채 일갈했다.

“카치아피카스, 여긴 컨트리클럽이 아니야!”

“아, 네. 여긴 공기도 좋고 모든 게 평화로운데요. 그러 니 졸업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내보내주세요. 도망치지 않 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분노가 폭발한 소장은 책상 위 로 벌떡 올라가 소리쳤다.

“난 네가 공산주의자라는 걸 알아! 넌 네가 세상을 장 악할 수 있다고 믿지. 내 집을 빼앗는 것 따위는 쉬울 거다. 난 대비가 돼 있어. 곧 핵전쟁이 날 거다. 그러면 딱 두 종류 의 인간만 살아남는다. 너 같은 죄수놈들과 돈 가지고 지하 에 숨는 은행가들. 핵전쟁이 끝나면 네놈은 은행가들을 죽 이겠지!”

그는 감방 안에서 가슴 아픈 소식을 접했다. 반전시위 를 벌이던 켄트주립대(오하이오주)와 잭슨주립대(미시시피 주) 학생들에게 주 방위군이 발포해 6명이 숨진 것. 켄트주 립대 발포 사건 다음 날 미국 전역에서 400만 명의 학생과 50만 명의 교수가 시위에 나섰다. 1970년 5월 미국은 10여 년 뒤에 있을 우리나라의 1980년 광주항쟁이나 1987년 6월 항쟁을 연상케 하는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카치아피카스는 대학 졸업 뒤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 고로 건너가 대안적 진보 공동체 모델을 실험하던 중 캘리 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UCSD)에서 프랑크푸르 트학파 사회철학자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교수를 만났다. 카치아피카스는 스승의 권유로 1979년 독일 베를린 자유대 학으로 건너가 2년 가까이 유럽의 민중운동 현장을 보고 돌아온다. 그가 미국과 유럽에서 보고 겪은 ‘68혁명’은 박사 학위 논문으로 결실을 맺었고, 1987년 <신좌파의 상상력: 전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년>이란 책으로 출간됐다.


민중의 해방 욕구 ‘에로스 효과’와 5·18


이 대목에서 대화는 카치아피카스의 핵심 개념인 ‘에 로스 효과’(Eros Effect)로 넘어갔다. 에로스 효과란 ‘민중 이 스스로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직관적 믿음으로 일시에 자발적으로 봉기하는 현상’을 말한다. 1871년 프랑 스 파리 코뮌, 1980년 광주항쟁, 1999년 미국 시애틀의 신 자유주의 세계화 반대시위 등은 에로스 효과로 잘 설명된 다. 에로스는 자유와 해방을 지향하는 진정한 욕구의 원천 이자 삶의 총체적 본능이다. 그의 에로스 효과 개념은 마르 쿠제의 저서 <에로스와 문명>에서 영감을 받았다.

카치아피카스는 에로스 효과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광주를 꼽는다. 1980년 5월, 그는 독일에 있으면서 광주항 쟁 보도에 주목했다. 1999년 자신의 책을 번역한 한국의 출판사 초청으로 방한했을 때 광주와도 첫 인연을 맺었다.

“깜짝 놀랐어요. 많은 사람이 내 책을 읽었고 생각지도 못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광주에서 만났습니다. 광주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광주를 공부하기 시작했지요. ‘5월 광주’는 에로스 효과를 가장 뚜렷이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대다수 서구 학자들은 지금도 광주항쟁을 잘 모르고, 심지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 시민사회의 형성과 민중항쟁을 믿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광주는 매우 예외적으로 시민사회의 모범을 보여준 절대적 공동체, 아름다운 공동체였습니다. 서구 학계의 유럽중심주의 시각에 대한 ‘위대한 반증’이지요. 내겐 지금 두 개의 고향이 있습니다. 샌디에이고, 그리고 광주.”

2001년, 카치아피카스는 1년간 전남대 5·18연구소의 교환교수로 와서 ‘시민군’ 출신을 인터뷰하는 등 광주에 깊이 천착했다. 그의 관심은 한국 등 아시아 국가의 민주화운동 전반으로 확장됐다. 지난해 출간한 <아시아의 알려지지 않은 봉기들>(Asia’s Unknown Uprisings) 제1권은 ‘20세기 남한의 사회운동’이란 부제를 달고 나왔다. 430여 쪽에 이르는 책은 1894년 동학 농민전쟁을 시작으로 1919년 3·1운동과 항일 무장투쟁, 해방 뒤 미군의 점령과 한반도 분단, 4·3 제주항쟁과 여순 항명사건, 4·19 혁명과 5·16 쿠데타, 박정희 암살과 12·12 쿠데타, 광주항쟁과 6월항쟁, 김대중·노무현 집권과 신자유주의 반대투쟁 등 한국 근대사 100년을 아우른다.


부인 고 신은정 감독의 첫마디 “양키 고 홈”


카치아피카스는 지난해 11월 한국인 부인과 결혼 8년 만에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독립영화 감독 고 신은정(향년 40살)씨다. 신 감독은 2011년 세계 최초로 하버드대학의 알려지지 않은 음습한 뒷면을 폭로한 다큐멘터리 (베리타스)2 를 제작 발표해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카치아피카스는 신 감독과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은정이 그립다”는 말을 여러 차례 읊조렸다. “슬프다”고도 했다. 떠난 이에 대한 그리움이 깊을수록 남은 자의 외로움도 짙어 보였다.

카치아피카스가 2001년 2월 광주의 한 재즈카페에서 신은정씨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전남대 5·18연구소에 와 있을 때다. 그의 저서 중 한국에서 맨 먼저 번역된 <신좌파의 상상력>을 읽은 한 청년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은정씨가 불쑥 나타났다. 캄보디아에서 평화운동을 하다 잠시 귀국한 청년이 신 감독을 불러냈는데 카치아피카스와 함께 만난다는 말은 하지 않은 참이었다.

“은정씨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말했어요. 양키, 고 홈.”

“네? 첫마디가?”

“예스, 양키 고 홈.”

기자는 이 대목에서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생전 신 감독의 톡톡 튀는 발랄함이 떠오른데다, 초면의 카치아피카스에게 한마디 던질 때의 표정과 몸짓까지 상상이 되어서였다.

“상냥한 말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첫눈에 사랑에 빠졌어요. 특히 ‘양키 고 홈’ 하는 모습에서.”

신 감독은 당시 광주 KBS의 방송작가로 일하는 틈틈이 광주인권운동센터의 비상근 활동가로 인권영화제를 기획하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녀도 속마음으론 카치아피카스에게 관심이 컸고, 둘은 연인이 됐다. “그 뒤로 난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광주에 자주 가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어요.”

그러나 말 그대로 나이와 국경을 훌쩍 뛰어넘은 두 사람의 데이트는 그리 쉽지 않았다. 카치아피카스가 1년 교환교수를 마치고 돌아가서가 아니었다.

“은정의 미국 비자가 번번이 거부됐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어요. 당시 매사추세츠주(보스턴이 있는 주) 상원의원인 에드워드 케네디에게 편지도 썼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캐나다, 멕시코, 중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을 맴돌며 해외 원정 데이트를 해야 했다. 그렇게 3년, 마침내 2004년 여름 광주에서 전통혼례를 올렸다. 무등산 아랫자락, 너른 마당과 정원이 있는 전통음식점이었다. 혼례식은 시끌벅적, 걸쭉하고 재미있었다. 사모관대 차림에 목화를 신은 미국인 신랑, 고운 활옷과 쪽두리에 연지·곤지를 찍은 ‘양키 고 홈’ 신부. 혼례식 주례가 설 자리에는 영원한 혁명가 체 게바라의 초상화가 걸렸다. 나무 사이로는 한글과 영문으로 ‘미국은 범죄국가이다, U.S. government is criminal’이라고 쓴 플래카드가 가로질러 걸렸다. 그 아래선 풍물패가 한바탕 신명을 펼쳤다. 잔치와 투쟁과 해학이 어우러진 마당이었다.

세상의 진보와 변혁을 꿈꾸고 온몸으로 실천해온 두 사람의 신혼은 참 행복했다. 그리고 너무 짧았다. 신 감독이 열정을 쏟은 다큐멘터리 <베리타스>를 지난해 <하버드, 그들만의 진실>이란 제목의 우리말 책으로 펴낸 데 이어, 영역본 출간을 위해 번역 작업에 전념하다 과로로 쓰러진 것. 카치아피카스가 병원 응급실로 옮겼지만 끝내 눈을 뜨 지 못했다. 신 감독이 쓰던 방에는 지금도 책상 위의 책과 자료, 다큐멘터리 촬영 장비, 컴퓨터 등이 생전 모습 그대 로 놓여 있었다. 집 안 곳곳에 걸린 사진액자와 초상화 속 에서 ‘은정’은 활짝 웃고 있었다.

화제를 한국과 한반도 상황으로 돌렸다. 이명박 집권 시기에 인권이 심각하게 뒷걸음질치고, 올해 초 박근혜 정 부 출범 이후 한반도가 전쟁위기로까지 치닫는 정세가 그 에겐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촛불시위 구호 중 하나가 ‘이명박 아웃’이었어요. 민주 적 절차로 선출된 정부의 퇴진 요구는 비현실적입니다. 지 금 박근혜 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남북회담 추진’, ‘작전 통제권 회수’ 같은 현실적 요구를 해야 합니다. 베트남전 당 시 미국 대학가에서 닉슨 대통령은 북베트남 지도자 호치 민보다 인기가 없었어요. 하지만 당시 시위 구호는 ‘닉슨 아 웃’이 아니라 ‘전쟁 반대’였습니다.”

그는 남북관계와 관련해 미국의 사례를 들었다. “보수 적인 닉슨 정권이 중국과 외교관계를 연 것처럼, 박근혜 대 통령도 내부 반대세력의 저항이 적다는 점에서 오히려 남 북관계를 개선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국가권력의 감시, 시민사회의 몫


국가권력에 대한 근본적 경계, 궁극적 자유공동체 의 지향. 카치아피카스의 이런 성향은 박애주의나 아나키 즘(무정부주의)을 연상케 한다. 이에 대한 답변은 꽤나 길 고 진지했다. 그는 우선 오늘날 지배적 형태인 국민국가 (Nation State)의 ‘두 얼굴’에 대한 시민사회의 감시와 통제 를 강조했다.

“국민국가는 매우 근대적인 형태의 정치조직이다. 국민 국가는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엄청난 경제발전을 주 도해왔다. 또한 국민국가의 출현은 오늘날 지구상에 배타 적 군사통제권과 영토주권을 주장하며 대량살상무기를 보 유한 200여 개국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세계 시민들 은 이를 용인해선 안 된다. 칠레가 집속탄을 만들어 국제시 장에 팔게 해야 하는가? 미국이 온갖 무기를 사우디아라 비아, 이스라엘 등에 팔게 해야 하는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범죄행위다. 언젠가는 심판받아야 한다.”

내친 김에 아나키즘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그는 한 번 도 자신이 아나키스트라고 선언한 적이 없음에도, 연방수 사국(FBI)과 일부 보수적 학자들이 그에게 ‘아나키스트’라 는 딱지를 붙인다고 했다.

“아나키즘을 말할 땐 이념과 현실을 분리해서 봐야 한 다. 고대 그리스의 많은 도시국가에 직접민주주의가 있었 고, 이는 매우 강력했다. 이를 아나키즘이라고 말한다면 그 럴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유나바머’로 잘 알려진 시어도어 카진스키3 의 예를 보자. 이 둘은 매우 다른 이미지다. 보통 사람들은 아나키즘을 매우 헷갈려한다. 아나키즘의 실제는 직접민주주의,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평 등이라는 점에서 매우 장밋빛이다. 아나키즘은 신자유주의 보다 훨씬 좋다. 그러나 그 이념과 용어는 시대에 뒤떨어진 19세기 산물이고,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다. 그에 걸맞은 새로운 단어가 필요하다. 아나키즘이란 단어는 그 의미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다소 경직됐다. 그런데 내가 더 많은 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 더 많은 자유, 대중적 참여, 직업 정치인에게서 권력의 회수 등을 말하면 모두가 동의한다.”

그는 “한국에도 흥미로운 아나키즘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했다. “1930년대에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아나키스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탈린이 스페인에서처 럼 조선에서도 아나키즘을 숙청했지요.”

카치아피카스는 한국 사회의 최근 이슈와 그 배경은 물론 한반도 위기 상황까지 비교적 빠르고 상세하게 파악 하고 있다.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 을 끊은 지 이틀 만에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후퇴’라는 장 문의 글을 발표했다. “<한겨레> 영문판을 비롯해 한국 언 론보도를 자주 들여다봅니다. 바다(신은정씨의 애칭)가 있 을 땐 그의 도움도 컸지요.”

그는 5월 중순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라고 했다. “은정 의 생일이 초파일 전날입니다. 장모님이 계시는 광주에서 한 달 지낼 겁니다. 은정 산소도 가고, 사람들도 만나야지요.”

보스턴/글 조일준 <한겨레> 국제부 기자 iljun@hani.co.kr

1 그물이 있는 스틱을 이용해 상대편 골에 공을 넣는 경기로 농구·축구·하키가 복합된 운동이다. 2 베리타스는 하버드대학의 문양에 새겨진 라틴어로 ‘진리’를 뜻한다. 신 감독은 하버드대학이 권력과 돈을 향한 욕망의 구조체라는 것을 폭로하기 위해 다큐멘터리 홍보 포스터에 ‘veritas’를 ‘verita$’로 표기했다. 3 하버드대학 출신의 천재 수학자. 현대 문명이 인류를 파괴한다며 과학기술 전문가들에게 우편물 폭탄테러를 자행했다. 별명인 ‘유나바머’(UnABomber)는 대학(University)·항공사(Airline)·폭파범(Bomber)의 앞 글자 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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