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인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신은정씨와 광주에서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지난해 신씨와 사별했다. 2011년 봄 두 사람이 메사추세츠 공대(MIT) 교정에서 입맞추고 있는 모습.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 제공
|
MIT 재학 중 베트남전 반대시위로 옥고
인터뷰는 ‘68혁명’ 이야기로 물꼬가 트였다. 그가 대학 생이던 1968~70년 유럽과 미국은 사회변혁의 열망과 보수 기득권의 가치가 거세게 충돌한 격동의 시기였다. 인종, 성 (젠더), 전쟁, 노동, 민주주의 등 다양한 인권 이슈에서 급진 적인 변혁 요구가 유럽을 휩쓸었다. “미국에선 1970년이 절정이었습니다. 전국에서 베트남전 반대시위가 격렬했고, 민권 확대의 목소리가 높았지요.” 보스턴에 있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 다니던 청년 카치아피카스의 피도 뜨거웠다. 그는 대학 시절에 “아주 잘나갔다”(very successful)고 말했다. “총장 전액 장학금을 받았고, 학생클럽협의회 회장을 했고, 배구와 라크로스1 등 운동도 잘했습니다.” 그가 관심을 갖고 적극 참여한 것은 베트남전 반대운동이었다. MIT의 교수진, 노벨상 수상 과학자, 대학원 연구자들로 구성된 파운드위원회(Pounds Commission)의 멤버 20명 중 유일한 학부생이었다. “당시 MIT는 미 국방부의 의뢰를 받아 베트남전에 사 용할 미사일 정밀유도장치, 동시다발타격 핵미사일, 전투 헬기 비행안정시스템, 이동표적물 식별 레이더 등 수십 가 지의 첨단 군사기술을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국방부는 그 대가로 막대한 연구자금을 지원했다. 파운드위원회는 대학 의 이런 풍토에 대한 비판을 수용해 실태를 점검하고 대안 을 찾으려는 연구조직이었다. 그는 이 모임에서 노엄 촘스 키 교수와 처음 만나 지금껏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교감과 우정을 유지하고 있다. 카치아피카스는 여러 학생운동 조직과 파운드위원회 에서 활동하면서 대학의 전쟁 협력을 비판하고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를 조직하는 등 반전시위에 앞장섰 다. “학교가 무기개발 연구를 당장 멈추지 않으면 학생과 교 수들이 학교를 멈추겠다고 압박했습니다. 항의 시위, 학내 총파업, 수업 거부, 점거 농성 등 수단은 많았어요.” 미 연방수사국(FBI)은 그를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최 우선 감시 대상’으로 분류했다. 1970년 5월, 카치아피카스 는 학교 당국의 고소로 구속됐다. 정식 재판에서 유죄 판 결을 받고 6주간 교도소 독방에 갇혔다. 그 때문에 대학 졸 업도 감방에서 맞았다. 죄목은 ‘학교 혼란 조성죄’로 18세기 에 만들어진 법이 100여 년 만에 부활했다. 졸업식 날이 다가오자 카치아피카스는 교도소장에게 ‘일생에 한 번뿐인 졸업식에 참석하게 해달라’는 메모를 전 달했다. “곧바로 소장실로 불려갔습니다. 그는 터프가이였고, 아주 이상한 사람(very crazy man)이었어요.” 교도소장은 좌우로 10명의 경호원을 거느리고 팔짱을 낀 채 일갈했다. “카치아피카스, 여긴 컨트리클럽이 아니야!” “아, 네. 여긴 공기도 좋고 모든 게 평화로운데요. 그러 니 졸업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내보내주세요. 도망치지 않 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분노가 폭발한 소장은 책상 위 로 벌떡 올라가 소리쳤다. “난 네가 공산주의자라는 걸 알아! 넌 네가 세상을 장 악할 수 있다고 믿지. 내 집을 빼앗는 것 따위는 쉬울 거다. 난 대비가 돼 있어. 곧 핵전쟁이 날 거다. 그러면 딱 두 종류 의 인간만 살아남는다. 너 같은 죄수놈들과 돈 가지고 지하 에 숨는 은행가들. 핵전쟁이 끝나면 네놈은 은행가들을 죽 이겠지!” 그는 감방 안에서 가슴 아픈 소식을 접했다. 반전시위 를 벌이던 켄트주립대(오하이오주)와 잭슨주립대(미시시피 주) 학생들에게 주 방위군이 발포해 6명이 숨진 것. 켄트주 립대 발포 사건 다음 날 미국 전역에서 400만 명의 학생과 50만 명의 교수가 시위에 나섰다. 1970년 5월 미국은 10여 년 뒤에 있을 우리나라의 1980년 광주항쟁이나 1987년 6월 항쟁을 연상케 하는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카치아피카스는 대학 졸업 뒤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 고로 건너가 대안적 진보 공동체 모델을 실험하던 중 캘리 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UCSD)에서 프랑크푸르 트학파 사회철학자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교수를 만났다. 카치아피카스는 스승의 권유로 1979년 독일 베를린 자유대 학으로 건너가 2년 가까이 유럽의 민중운동 현장을 보고 돌아온다. 그가 미국과 유럽에서 보고 겪은 ‘68혁명’은 박사 학위 논문으로 결실을 맺었고, 1987년 <신좌파의 상상력: 전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년>이란 책으로 출간됐다.
민중의 해방 욕구 ‘에로스 효과’와 5·18
이 대목에서 대화는 카치아피카스의 핵심 개념인 ‘에 로스 효과’(Eros Effect)로 넘어갔다. 에로스 효과란 ‘민중 이 스스로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직관적 믿음으로 일시에 자발적으로 봉기하는 현상’을 말한다. 1871년 프랑 스 파리 코뮌, 1980년 광주항쟁, 1999년 미국 시애틀의 신 자유주의 세계화 반대시위 등은 에로스 효과로 잘 설명된 다. 에로스는 자유와 해방을 지향하는 진정한 욕구의 원천 이자 삶의 총체적 본능이다. 그의 에로스 효과 개념은 마르 쿠제의 저서 <에로스와 문명>에서 영감을 받았다. 카치아피카스는 에로스 효과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광주를 꼽는다. 1980년 5월, 그는 독일에 있으면서 광주항 쟁 보도에 주목했다. 1999년 자신의 책을 번역한 한국의 출판사 초청으로 방한했을 때 광주와도 첫 인연을 맺었다. “깜짝 놀랐어요. 많은 사람이 내 책을 읽었고 생각지도 못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광주에서 만났습니다. 광주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광주를 공부하기 시작했지요. ‘5월 광주’는 에로스 효과를 가장 뚜렷이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대다수 서구 학자들은 지금도 광주항쟁을 잘 모르고, 심지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 시민사회의 형성과 민중항쟁을 믿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광주는 매우 예외적으로 시민사회의 모범을 보여준 절대적 공동체, 아름다운 공동체였습니다. 서구 학계의 유럽중심주의 시각에 대한 ‘위대한 반증’이지요. 내겐 지금 두 개의 고향이 있습니다. 샌디에이고, 그리고 광주.” 2001년, 카치아피카스는 1년간 전남대 5·18연구소의 교환교수로 와서 ‘시민군’ 출신을 인터뷰하는 등 광주에 깊이 천착했다. 그의 관심은 한국 등 아시아 국가의 민주화운동 전반으로 확장됐다. 지난해 출간한 <아시아의 알려지지 않은 봉기들>(Asia’s Unknown Uprisings) 제1권은 ‘20세기 남한의 사회운동’이란 부제를 달고 나왔다. 430여 쪽에 이르는 책은 1894년 동학 농민전쟁을 시작으로 1919년 3·1운동과 항일 무장투쟁, 해방 뒤 미군의 점령과 한반도 분단, 4·3 제주항쟁과 여순 항명사건, 4·19 혁명과 5·16 쿠데타, 박정희 암살과 12·12 쿠데타, 광주항쟁과 6월항쟁, 김대중·노무현 집권과 신자유주의 반대투쟁 등 한국 근대사 100년을 아우른다.
부인 고 신은정 감독의 첫마디 “양키 고 홈”
카치아피카스는 지난해 11월 한국인 부인과 결혼 8년 만에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독립영화 감독 고 신은정(향년 40살)씨다. 신 감독은 2011년 세계 최초로 하버드대학의 알려지지 않은 음습한 뒷면을 폭로한 다큐멘터리
국가권력의 감시, 시민사회의 몫
국가권력에 대한 근본적 경계, 궁극적 자유공동체 의 지향. 카치아피카스의 이런 성향은 박애주의나 아나키 즘(무정부주의)을 연상케 한다. 이에 대한 답변은 꽤나 길 고 진지했다. 그는 우선 오늘날 지배적 형태인 국민국가 (Nation State)의 ‘두 얼굴’에 대한 시민사회의 감시와 통제 를 강조했다. “국민국가는 매우 근대적인 형태의 정치조직이다. 국민 국가는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엄청난 경제발전을 주 도해왔다. 또한 국민국가의 출현은 오늘날 지구상에 배타 적 군사통제권과 영토주권을 주장하며 대량살상무기를 보 유한 200여 개국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세계 시민들 은 이를 용인해선 안 된다. 칠레가 집속탄을 만들어 국제시 장에 팔게 해야 하는가? 미국이 온갖 무기를 사우디아라 비아, 이스라엘 등에 팔게 해야 하는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범죄행위다. 언젠가는 심판받아야 한다.” 내친 김에 아나키즘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그는 한 번 도 자신이 아나키스트라고 선언한 적이 없음에도, 연방수 사국(FBI)과 일부 보수적 학자들이 그에게 ‘아나키스트’라 는 딱지를 붙인다고 했다. “아나키즘을 말할 땐 이념과 현실을 분리해서 봐야 한 다. 고대 그리스의 많은 도시국가에 직접민주주의가 있었 고, 이는 매우 강력했다. 이를 아나키즘이라고 말한다면 그 럴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유나바머’로 잘 알려진 시어도어 카진스키3 의 예를 보자. 이 둘은 매우 다른 이미지다. 보통 사람들은 아나키즘을 매우 헷갈려한다. 아나키즘의 실제는 직접민주주의,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평 등이라는 점에서 매우 장밋빛이다. 아나키즘은 신자유주의 보다 훨씬 좋다. 그러나 그 이념과 용어는 시대에 뒤떨어진 19세기 산물이고,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다. 그에 걸맞은 새로운 단어가 필요하다. 아나키즘이란 단어는 그 의미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다소 경직됐다. 그런데 내가 더 많은 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 더 많은 자유, 대중적 참여, 직업 정치인에게서 권력의 회수 등을 말하면 모두가 동의한다.” 그는 “한국에도 흥미로운 아나키즘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했다. “1930년대에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아나키스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탈린이 스페인에서처 럼 조선에서도 아나키즘을 숙청했지요.” 카치아피카스는 한국 사회의 최근 이슈와 그 배경은 물론 한반도 위기 상황까지 비교적 빠르고 상세하게 파악 하고 있다.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 을 끊은 지 이틀 만에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후퇴’라는 장 문의 글을 발표했다. “<한겨레> 영문판을 비롯해 한국 언 론보도를 자주 들여다봅니다. 바다(신은정씨의 애칭)가 있 을 땐 그의 도움도 컸지요.” 그는 5월 중순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라고 했다. “은정 의 생일이 초파일 전날입니다. 장모님이 계시는 광주에서 한 달 지낼 겁니다. 은정 산소도 가고, 사람들도 만나야지요.” 보스턴/글 조일준 <한겨레> 국제부 기자 iljun@hani.co.kr 1 그물이 있는 스틱을 이용해 상대편 골에 공을 넣는 경기로 농구·축구·하키가 복합된 운동이다. 2 베리타스는 하버드대학의 문양에 새겨진 라틴어로 ‘진리’를 뜻한다. 신 감독은 하버드대학이 권력과 돈을 향한 욕망의 구조체라는 것을 폭로하기 위해 다큐멘터리 홍보 포스터에 ‘veritas’를 ‘verita$’로 표기했다. 3 하버드대학 출신의 천재 수학자. 현대 문명이 인류를 파괴한다며 과학기술 전문가들에게 우편물 폭탄테러를 자행했다. 별명인 ‘유나바머’(UnABomber)는 대학(University)·항공사(Airline)·폭파범(Bomber)의 앞 글자 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