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5.07 00:21 수정 : 2014.06.13 13:35

‘하컴’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1정체불명의 이 단어는 어떤 모임을 일컫는 약칭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로 들어가기 몇 해 전부터 일부 학자들과 공부하던 스터디 모임입니다. 풀네임은 ‘하모니 앤 컴패터티브니스’(Harmony & Competitiveness·화합과 경쟁력)라고 합니다.

2010년 12월 27일, 당시 한나라당 유력 대선주자 가운데 한 명인 박근혜 의원이 서울 삼성동 코엑스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국가미래연구원’ 발기인대회에 참석하고 있다. 한겨레 탁기형 기자


‘미래연의 시초’ 박근혜 스터디그룹 하컴


공부 모임의 시작은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의 소개로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 원장이 당시 박근혜 의원과 처음 스터디 모임을 만들 무렵입니다. 2007년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대비하는 모임이었습니다. 남 전 총리는 서강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발탁된 바 있습니다. 제3공화국에서 재무부 장관·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지낸 인물입니다. 일명 ‘서강학파’의 좌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남덕우)이 원래 그런 말씀을 잘 안 하는 데, 좀 돕는 게 어떠냐고 하시더라고요. 그전에도 (박근혜 대통령과는) 얼굴 정도는 아는 사이였죠. 동문회 등에서 뵙기도 했고요. 은사님이 좌장 역할을 하고 계시다 보니 제가 간사 역할을 하게 된 겁니다.” 김광두 원장의 이야깁니다.

당내 경선에서 이명박 당시 후보에게 패배한 뒤로도 공부모임은 이어졌습니다. 2007년 연말에 있었던 송년 식사모임에서 박근혜 의원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5년 뒤에 있을 차기 대선을 준비하자는 취지였습니다.

박 의원까지 모두 10명이 모였습니다. 상대적으로 출석률 높은 사람들이 5명이었기 때문에 일부 언론에는 ‘5인회 모임’ 혹은 ‘5인 공부모임’으로 알려지기도 한 겁니다. 김광두 원장 외에 안종범 의원(새누리당)과 김영세 연세대 교수,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 최외출 영남대 교수가 멤버입니다.

공부모임의 핵심 내용은 경제정책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5명의 하컴 멤버가 ‘경제 과외교사’ 혹은 ‘경제 브레인’으로 불린 것은 그 때문입니다. 2007년 당내 경선에서 나온 이른바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우자) 정책도 이 모임의 손길을 거쳐 나왔습니다. 이들은 대선에서도 박 대통령의 공약을 만드는 데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이어 2010년 12월 박근혜 대통령이 발기인으로 참여해 설립된 국가미래연구원은 박 대통령의 싱크탱크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박 대통령을 도와 함께 공부한 하컴 멤버가 주로 참여했습니다. 새 정부 출범 이후에도 이 연구원 출신들은 청와대와 정부 부처에 많이 포진되었습니다. ‘박근혜표’ 정책의 콘텐츠와 인물을 공급하는 ‘산실’이 된 것입니다.

박 대통령의 공부 스타일은 그룹형 스터디를 즐기는 걸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실체가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스터디 그룹도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2008년에는 전하진 전 ‘한글과 컴퓨터’ 사장의 저서를 보고 함께 공부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해 정보기술(IT) 분야 전문가 10여 명으로 공부모임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박 대통령뿐 아니라 역대 대통령은 대체로 선거를 앞두고 경제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국정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인데다 전문성을 요구하는 영역이어서 별도의 ‘과외공부’가 필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과외교사를 기용할 것인지는 향후 출범할 정부의 경제정책을 가늠할 중요한 잣대가 되곤 했습니다.

역대 대통령들은 경제 공부를 누구와 어떻게 했을까요.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의 군 경력으로 볼 때 누가 봐도 경제에 문외한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대통령 취임을 전후해 경제 전문가들과의 공부에 열중했다고 합니다. 군 출신 전두환이 ‘경제 대통령’을 꿈꾸던 시절입니다.


‘무데뽀’ 전두환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


그의 첫 번째 과외교사는 옛 재무부 출신의 박봉환 전 동력자원부 장관입니다. 보안사령관으로 있던 시절, 전두 환은 경제과학심의회 사무국장 박봉환 전 장관과 공부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히틀러보다 더 나쁜 놈이 인플레이션” 이라면서 물가안정의 중요성을 가르쳤다고 하네요.

1980년 박봉환 전 장관은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 을 전두환 대통령에게 소개합니다.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 장이던 김재익은 두 번째 과외교사이자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입니다.

“여러 말 할 것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제5공화국 시절 전 대통령이 김재익 국장에게 청와대 경제수석 자리를 제안하면서 말했습니다. 이 말은 그를 얼 마나 신임했는지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김 수석 역시 물가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가 하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금 융을 자율화시켜야 한다고 주로 가르쳤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김재익이 있었다면,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는 김종인(현 대한발전전략연구원 이사장·한 국외국어대 석좌교수)이 있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 름이라고요? 맞습니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후보의 경제민주화 관련 논의를 주도해왔지만 선거 과정에서 견해 차로 사이가 틀어진 바로 그분입니다. 그는 1987년 개정 헌 법에 경제민주화 조항을 도입한 분이기도 합니다.

교수 출신 국회의원이던 김종인과 노태우의 인연은 1985년에 시작됩니다. 여당 대표던 노 전 대통령이 12대 국 회가 시작할 무렵 “적극적으로 나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고 합니다. 김 교수가 당내에서 경제부처들의 정책을 조정 하는 역할을 하던 시절입니다.

“저는 여러 사람과 같이 공부하는 방식으로 (모임을) 하진 않았어요. 개별적으로 만나서 여러 경제 상황에 대한 인식과 진단에 대해 말씀드리고 의견을 나누는 과정이었 지요. 당 집무실에서 할 때도 있고 바깥에서 만나기도 했어 요. 시간이 좀더 흐르면서 저더러 칼을 갈라고 하시더군요. 선거 준비를 철저히 해달라는 이야기 아니었겠어요?” 김종 인 교수의 기억입니다.

대선이 임박하면서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청와대 경 제수석, 노태우 후보 등과 함께 넷이 만나는 자리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노태우 후보의 신임을 얻었다는 이야깁니다. 주변에선 그가 노태우 경제팀에서 중요한 자리 에 기용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노태우 정권 초기에는 청와대에 입성하지 못했습니다. 한참이 지난 뒤에 노 전 대통령이 ‘물태우’라는 비난을 받던 즈음에야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들어가게 됩니 다. 그 사연을 김 교수는 이렇게 전합니다.

“1987년 10월 19일 뉴욕 증시가 폭삭 가라앉았습니다. 다우존스 지수가 23%나 빠진 날인데, 성급하게 앞서가는 사람들은 1930년대 대공황 같은 큰 불황이 올 거라고 우려 했어요. 특히 경제 관료 쪽에서 그런 주장이 많이 나왔어 요. 경제위기론을 들고 나오고 그걸 빙자해서 경기를 부양 해보자는 식이었어요. 저는 별 염려 안 해도 된다고 봤습니 다. 실제로 경제가 그렇게 크게 침체한 것도 아니었고, 1988 년 서울올림픽 특수도 예상되는 때였기 때문에 (노 전 대통 령에게) 오히려 인플레이션과 부동산 투기에 각별히 주의 하시라고 했죠.”

노태우 전 대통령은 김 교수를 기용하지 않으면서 “상당 수가 당신과 다른 진단을 하고 있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취임한 뒤로는 경제 관료들의 진단과 대책을 더 신봉하기 시 작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부동산 투기가 과열되고 물가가 치솟은 데다 정권에 대한 지지도가 추락한 뒤인 1990년 초 에야 김 교수는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가게 됩니다.


YS ‘세계화론’, 박세일 이사장 작품


YS(김영삼 전 대통령)를 가르치느라 애쓴 사람은 박재 윤 전 서울대 교수입니다. 후보 시절에 경제 공부를 집중적 으로 해서 실력이 많이 느는 게 보통인데, 김영삼 후보는 그 러지 못했다는 평가입니다. 숫자와 관련된 것은 싫어 했다 는 후문이 나돌기도 했습니다. 1992년 대선 후보 시절의 이 야깁니다.

김영삼 대통령 취임 이후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박 재윤 교수는 ‘신경제계획’의 설계자이기도 합니다. 신경제계 획은 김 대통령이 지적한 ‘한국병’에 대한 종합 처방전 같은 것이었지만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김 대통령의 과외교사를 언급할 때 빼놓으면 섭섭한 사람이 또 한 명 있습니다.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 장입니다. 김 대통령의 ‘세계화’ 구상이 바로 이분 작품입니 다. 두 사람의 인연은 훨씬 일찍 시작되었습니다.

“1986년 서울대 교수로 있을 때였습니다. 대선 1년 전 이었죠. 법대 후배인 박종웅 전 의원이 연락해, 당시 야당 총재인 김 대통령에게 경제를 가르쳐주면 어떻겠느냐고 제 안하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야당을 도우면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몰래 만나서 이야기(경제 공부)를 했습니다. 음식점 뒷문으로 제가 들어가면 앞문으로 그분이 오시기 도 하고…. 정책의 세부적인 면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큰 방향이 옳은 거라는 판단이 들면 정치적으로 다소 손해보 는 게 있더라도 밀어붙이는 경향을 보이셨습니다.”

박 이사장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3당 합당으로 여당 후 보가 된 뒤 1992년 대선을 준비할 때는 관여하지 않았답니 다. 물론 경제 공부를 같이 하자는 제의를 다시 받았지만 거 절했다고 합니다.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다가 군부세력과 손 잡는 김 후보가 충분히 납득되지 않았다고 하네요. 그는 대 선 기간에 미국 컬럼비아대학 연구교수로 가 있었습니다.

박 이사장이 ‘세계화’라는 화두에 영감을 받은 건 미 국 클린턴 대통령의 선거 참모를 지낸 로버트 라이시(전 노동부 장관)의 <더 워크 오브 네이션스>(The Work of Nations)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글로벌화가 진행되면서 국 가라는 개념이 종전보다 약화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 다. 이후 그는 세계화에 몰입하기 시작했고, 1993년 귀국한 뒤로도 이를 주창하다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들어가 게 됩니다.

“1994년 초 한 언론에 정부가 각 부문을 세계화 시대 에 맞게 바꿔야 한다는 논지로 글을 낸 적이 있는데, 그걸 (김 전 대통령이) 보신 것 같더군요. 나를 청와대로 부르더 니 한참 관련 내용을 경청하셨습니다. 경제 운용은 우수한 관료를 뽑아서 하면 되지만, 미래 지향적인 과제를 구상하 는 데는 도와줄 사람이 없다면서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말 씀이었습니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 협력체(APEC) 정상회담이 열린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의 한 호텔에서 세계화 장기 구상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박 이사장은 “정치·경제·사회에 대한 자신의 정책 구상을 분명하게 확립하고 있었던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마이 크로’에 강했다면, YS는 ‘매크로’에 강한 편이었다”고 회고 합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화론은 훗날 1997년 외환위기와 국가부도 사태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확고한 ‘경제철학’을 가진 첫 번째 대통령으로 거론되곤 합니다. 그는 젊은 시절 해운회사를 경영한 경험이 있고, 국회 재무위원회에서 경제통으로 활약 했습니다. 이어 1970년대에 펴낸 저서 <대중경제론>으로 자 신의 경제관을 드러냈습니다. 이 책은 진보 성향의 경제학자 박현채 선생에게 영향받아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박현채 선생 영향받은 DJ ‘대중경제론’


이른바 ‘DJ 노믹스’의 출현에는 학현학파가 힘을 보탰 습니다. ‘학현’은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를 지낸 변형윤 선생 의 아호입니다. 이전 정부에서 홀대받은 ‘분배’를 중시하는 진보 성향의 경제학자 그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중경회’라는 학자 모임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 전후 에 그의 싱크탱크로 맹활약합니다.

그중에서도 이진순 숭실대 교수(전 KDI 원장)는 김 전 대통령의 오래된 과외교사로 손꼽힙니다. 그가 김 전 대통 령과 함께 경제 공부를 시작한 건 1990년의 일이라고 합니 다. 당시 <매일경제>가 해마다 한 차례씩 경제학자들에게 주는 이코노미스트상을 이 교수가 받은 해입니다. 이 교수 가 그 상을 받은 행사장에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났습니다.

“권노갑 전 의원을 통해서 연락하셨습니다. 경제정의 실천시민연합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였는데, (김 전 대통령 이) 당시 큰 이슈던 부동산 투기 근절 대책을 눈여겨보셨던 것 같더군요. 힐튼호텔 중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게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동안 경제 공 부를 죽 해왔는데 좀더 계속해보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말 씀이셨습니다.”

이 교수는 ‘대통령의 경제 공부 돕는 일을 비밀에 부쳐 달라’는 요구를 약속받고 나서 공부를 시작했답니다. 정권 교체는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 많은 지식인은 DJ를 돕고 싶 어도 돕지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곧이어 김 전 대통령은 비호남 출신으로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경제학자를 한 명 더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답니다. 미국 예일대학 유학생 시절 부터 DJ의 강연을 듣기 위해 10시간 넘게 자동차로 달려갔 다는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가 합류하게 된 계기입니다.

“감옥에서 지낸 기간을 포함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독 서량이 엄청나게 많은 분이었습니다. 경제뿐 아니라 세계 사 등 다방면으로 지식을 갖춘 분이었죠. 이해 속도가 매 우 빠른데다 날카로운 질문을 수시로 던졌기 때문에 곤혹 스러울 때가 적잖이 있었습니다.(웃음) 저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가 쓴 책들까지 다 읽고 말씀을 건네셨으니까요.”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관치경제를 어떻게 극복해갈 것 인가’는 공부모임의 핵심 화두였습니다. 독일의 ‘사회적 시 장경제’의 이론적 토대인 ‘질서자유주의’에 입각한 대안을 모색하곤 했습니다. 이 교수는 “독재정치의 극복을 위한 민 주화와 관치경제의 대안으로서 시장경제를 확립하자는 것” 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훗날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금 융·기업·노동·공공 등 4대 부문 개혁과 맥락이 닿습니다.

1992년 대선에서 실패한 뒤, 1996년 학현학파 학자들 은 다시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나섭니다. 대선이 있던 1997년에는 경제정책을 짜는 팀의 규모가 확 커졌고, 상시 적으로 모인 학자 수가 20명 남짓 됐다고 합니다. ‘중경회’라 는 이름은 대통령 당선 이후에 붙인 이름이랍니다.

이 교수는 김대중 전 대통령만큼 집권을 위해 치열한 준비를 했던 후보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는 “나만 해도 무려 7년 동안 DJ를 만나서 한국 경제의 대안 모색을 위해 치열한 분석과 진단을 해왔다”며 “어느 때는 5시간 이 상 토론이 이어지기도 했고, 힐튼호텔이나 서교호텔에 방 을 잡아놓고 마라톤식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고 전합니다.

전문성과 개혁성을 겸비한 학자 출신과 위기 관리·대 응에 능숙한 관료집단 간의 충돌은 김대중 정부에서도 불 거졌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 직후 청와대 경제수석에 임명된 김태동 교수는 불과 3개월 만에 경제기획원 출신 관 료인 강봉균에게 자리를 넘겨주게 됩니다. ‘현황-문제점- 대안’으로 명쾌한 상황 진단과 해법을 내리는 관료들에 대 한 대통령의 의존도가 점차 높아진 것은, 실전보다는 아카 데믹한 연구에 몰두해온 교수 출신의 한계 때문이라는 시 각이 있습니다. 반면 중경회 소속 학자들은 김 전 대통령의 경제개혁이 미완으로 끝난 데는 관료집단의 실책에서 비롯 된 측면이 있다고 꼬집습니다.

“한국의 경제정책 결정 과정은, 정치가가 군림하고 관 료가 통치하는 개발지향형 국가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 다. 국가 경영을 맡길 인재풀이 크지 않기 때문에 위험을 회 피하기 위해서 결국 관료집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이 야깁니다. 시장경제의 경쟁을 신뢰하지 않는 경제관료들의 행태는 이른바 ‘빅딜 정책’ 같은 데서 한계를 드러내곤 했습 니다.”

이 교수의 총평입니다. 그는 “시장 경쟁을 통해 이뤄져 야 할 사업 구조조정이 정부의 ‘보이는 손’에 의해 추진됨으 로써 관치경제를 걷어내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노무현 정권 말기 보수화 이끈 ‘서강학파’


2002년 12월 19일 실시된 제16대 대통령 선거 1년 전 만 해도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예상한 이들은 많지 않았습 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느냐고요? 당선 유력 후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주변에 싱크탱크를 형성하는 것도 다소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은 비교적 초 기에 공부모임에 결합합니다. 대선을 1년 정도 남긴 2001년 12월의 일입니다. 정 원장은 “두뇌 회전이 매우 빨랐던 노 대통령은 짧은 기간이었는데도 금융·공공 부문 등 다양한 경제 사안에 대한 이해도를 넓혀갔다”고 전합니다.

노 전 대통령의 대표적 경제 브레인으로 알려진 이정 우 경북대 교수와의 첫 만남은 2002년 8월쯤입니다. 이 교 수는 “학구적이고 책 읽기를 워낙 좋아했던 당시 노무현 후 보에게서 기본 실력이 탄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 합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경제 공부는 대선을 전후해 속 성으로 이루어진 것보다는 집권 이후 본격화됐다고 말하 는 게 더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시 대통령자문위원회 안에는 수많은 경제학자가 포진해 있었고, 이틀이 멀다 하 고 수시로 국정과제 회의가 열렸다고 합니다.

“언론에서는 ‘위원회공화국’이다 ‘토론공화국’이다 하 면서 비난했지만 참석자 누구나 자유롭게 발언할 기회가 주어지는 분위기는 청와대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만 해도 미리 발언자를 정해놓고 발언 내용을 미리 청와대에 통보하는 식이었거든요. 노 대통령 은 어떤 사안을 두고 회의할 때 항상 개방적이면서 학구적 인 자세를 견지했습니다. 정치인이라기보다는 학자에 가까 운 태도를 가졌다고 할까요.” 노 전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지 켜본 이 교수의 이야깁니다.

노 대통령은 회의를 직접 주재하는 과정에서 실력을 쌓아나간 것으로 전해집니다. 적당히 넘어가는 일이 없고, 자유로운 토론 과정에서 실무자들에게 묻고 따지기를 즐겨 했답니다.

하지만 이 교수는 “대통령은 바깥에 알려진 것과 달리 대단히 신중하고 합리적이었다”며 “그런 신중함이 집권 중반을 거치면서 (정책의) 보수화로 흐르기도 했다”고 말합니 다. 국민적 저항에 부딪혔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당시 진보 성향의 학자들은 크게 반대 한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결정에는 기존 경제관료 집단 외에 조윤제 서강 대 교수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노 전 대통령이 집권 초기 조 교수를 자신의 경제보좌관으로 기용한 일은 다소 의외였습니다. 시장주의자이자 서강학파인 조 교수의 학문적 관점이 노 전 대통령 주변의 진보 성향 학자들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에서 이코노미스트로 일한 경력도 있습니다.

당시 청와대에서 일한 경제부처 출신 한 인사는 “대통 령이 일주일에 세 차례씩 조윤제 경제보좌관의 강의를 들을 정도로 그의 의견을 경청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합니다.


강만수 대 곽승준… 가신그룹 경쟁시킨 MB


“내가 해봐서 아는데….”

이미 눈치 채셨나요? 첫 기업인 출신 이명박 전 대통령 이 줄곧 내뱉던 말입니다. 실제로 실물경제는 자문교수단 보다 더 잘 파악하는 분야가 많았다고 합니다.

예컨대 이런저런 정책을 펴면 대기업들이 투자 약속을 할 거라고 조언하면, 대뜸 “내가 회사를 경영해봐서 아는데 그런 정도로는 절대 투자 안 할 것 같다”고 말하는 식이랍 니다. 다만, 경제정책의 큰 방향이나 비전을 수립하는 것보 다는 비즈니스와 프로젝트 해결 능력에서 탁월함을 보였다 는 것이지요.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가 대표적 사 례로 꼽힙니다.

그는 대선에서 ‘경제 대통령’ 혹은 ‘CEO 대통령’을 표방 하면서 지지층을 끌어 모았습니다. 그러나 집권 초기부터 이른바 ‘747’(7% 성장, 4만 달러 소득, 7대 경제강국 달성) 공약 실현과 친기업 정책을 추진했지만 미국발 금융위기 등 악재가 겹치면서 외려 양극화 심화라는 부메랑을 맞게 됩니다.

어느 한쪽의 견해만 신뢰하지 않고 끊임없이 가신그룹 들을 경쟁시킨 것도 이 전 대통령의 주된 특징입니다. 이 대 통령이 서울시장을 지내던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곽승준 고려대 교수(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미래기획위 위원장) 를 비롯한 ‘소장 개혁파’와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대표되는 ‘훈구파’의 대립이 그런 경우입니다.

“고환율, 수출지향주의, 대기업 감세 등을 주장한 강 전 장관 쪽과 끊임없이 싸울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 쪽에선 대기업 감세 정책에 반대하며 시장에서 탈락한 이들을 보 듬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왔기 때문입니다.” 곽 교수의 설명 입니다.

공통적으로 역대 대통령이 과외교사들에게 가장 의존 한 시기는 집권을 준비하는 기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집 권 이후에는 훨씬 더 많은 정보가 자연스럽게 대통령에게 집중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그 시기에 무엇을 어떻게 공부하는 게 가장 현명한 걸까요?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지도자로서 경제 공부의 핵심은 각각의 경제정책이 어떤 충돌을 일으킬 수 있는지, 현실 여건에서 어떤 어려움에 가로막힐 수 있는지 를 파악하는 데 있다. 그런 이해도를 높인 뒤에 핵심 정책 을 어떤 우선 순위로 어떤 컨트롤 타워를 가지고 조정해나 갈 것인지 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이와 다르게 현실에서는, 과외교사를 자처하는 이들 이 자신의 전문 분야를 가르치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 애하기 때문에 정작 필요한 공부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깁니다. 김 교수는 “이를테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동 산값을 세금으로 잡으려 했지만 그런 정책이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에 대해선 이해도가 부족했다. 부동산 대책에 정 작 중요한 금융정책이 너무 늦게 추진된 건 아닌지 등도 생 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대통령에 취임한 뒤 시간 이 흐를수록 기존 경제관료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것 도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과외교사들이 아무리 많은 내용을 가르쳐도 결국 대 통령이 소화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는 이정우 교수의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하도 여러 사람이 다양한 이야기를 해주다 보니, 본인 이 기본 실력과 판단력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머릿속만 혼란 스럽게 만들고 마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시어도르 루즈벨 트 대통령은 평생 하루 한 권씩 독서를 계속했다고 하죠. 대 통령 혹은 후보가 엄청나게 바쁜 자리이긴 하지만 쓸데없는 보고와 격식에 시간을 뺏기는 것보다는 스스로 독서와 공 부, 토론을 통해 실력을 연마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1 이 기사는 역대 대통령의 경제 과외교사 역할을 했던 사람들과의 인터뷰와, <대통령의 경제학>(이장규)을 참고해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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