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5.06 22:10 수정 : 2013.05.07 14:14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지만 공부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까지도 공부하려고 한다. ‘가장자리’ 활동가들과 함께한 나(왼쪽 두 번째).
나는 운이 좋았다. 기억 없는 어린 시절, 전쟁과 학살과 증오의 땅에서 못 먹고 병들어 죽은 내 동생과 달리 나는 살아남았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그 억울한 사정들은 죽음과 함께 묻혔다. 죽은 이들에게 힘이 없고 그들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아직 낮기 때문일까. 가해자들은 패배한 적이 없고 사죄하지 않았는데 간혹 가해자들을 용서한다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땅이다.

학살과 증오의 땅은 독재의 땅이었다. 외할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세 번째 개똥을 하나라도 덜 먹겠노라고 일상적인 고문 행위와 억울한 죽음이 있는 사회에 맞서 나름 저항했는데, 운 좋게도 다른 동료나 선후배와 달리 장기수가 되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그 대신 망명자가 되어 프랑스 땅에서 살았다. 나 같은 소심한 사람에게 좁은 공간에 갇힌 채 오랜 세월을 보내도록 강제하는 형벌은 인간성의 철저한 파괴나 훼손 또는 마모를 뜻한다. 한창 때인 30~40대를 망명생활로 외롭게 보냈다지만, 그것은 분명 대단히 운이 좋은 것이었다. 나는 틀림없이 감옥 들어가기 전에 남영동 대공분실, 남산 중앙정보부 또는 서빙고동 보안사에서의 과정에서 이미 인간이기를 스스로 부정하는 데 이르렀을 것이다.

그렇게 인간성이 처절하게 무너져 내릴 시간에, 나는 경쾌하고 섬세한 파리의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에 크로와상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며 <르몽드>를 읽었다. 물론 항상 불안과 함께 살았다. 남의 땅에서 먹고살아야 했는데, 한국식당을 열 만한 돈이 없었다. 만약 1980년대 초 파리에서 불고깃집 같은 식당을 열 수 있었더라면 지금쯤 꽤 안온한 이국의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른다. 카페의 한귀퉁이를 빌려 빈대떡집 낼 돈이 없어 결국 택시운전을 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우연의 산물이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로 나는 어쭙잖게 상징자본까지 꿰차게 되었고, 귀국과 함께 언론고시도 거치지 않은 채 언론인이 될 수 있었다.

 파리에 있는 동안 자주 두통에 시달렸다. 머리통이 깨질 것 같은 아픔은 노란 위액까지 모두 토해내야 사라지곤 했는데, 그 통증이 사라진 것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출간하면서였다. 그 책을 통해 가슴속에 담고 있던 응어리를 풀어냈기 때문일까. (이 두통이 2011년 늦가을 진보신당 대표가 되면서 재발했다. 그런데 그 1년 뒤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다시 사라졌다. 그만큼 내 정서적 깜냥과 능력에 비해 정당의 대표로서 감당해야 할 짐이 버겁고 불편했던 것일까.)

 나는 잘 알고 있다. 우연의 산물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센강변에서 배회하거나 소멸했을 존재라는 점을. 그렇게 소멸했을 존재의 자리에서 그런 존재들과 연대하겠다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보잘것없는 글이나마 쓰겠노라고 다짐했던 것은, 아직 덜 훼손된 인간으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발언까지 하게 해준 ‘우연’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우연이 내게 준 또 하나의 선물이 있다. 이른바 ‘KS’(경기고-서울대) 출신의 엘리트 의식이 KS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회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의지로 그런 의식을 없애겠다고 다짐해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사물과 현상에서 긍정적인 면은 부정적인 면을 함께 지니기 십상이다. 6살과 3살에 한국을 떠난 두 아이는 모든 교육과정을 프랑스에서 보냈고, 이젠 프랑스말로 사유하고 소통하고 추론하는 프랑스 사회 구성원이 되었다. 두 아이는 자신의 선택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이중의 정체성을 안고 살아야 한다. 두 아이를 그렇게 만든 나는 이제 떠난 그 땅에서. 한국 땅으로 돌아온 나와, 프랑스 땅에 남아 있고 틀림없이 거기서 계속 살아야 하는 아이들 사이에 끼어 정처를 잃은 아내에게 암이라는 병이 찾아온 건 내게 허용된 좋은 운의 부정적 그림자 중 하나일 것이다. 다행스럽게 암세포 제거 수술 뒤 재발하지 않고 있지만. 운이 좋은 자는 부채의식을 가져 마땅한데 끝내 덜어낼 수 없는 그것은 함께 저항했던 동료와 선후배에게서 멈추지 않는다.

 사람의 삶은 몸 자리의 궤적이다. 모든 몸들이 존엄하게 태어났다면 그 몸들의 자리도 존엄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게 내 소박한 바람의 출발지점이다. 각자의 처지에 따라 ‘놓이는’ 몸 자리와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의지로 ‘놓는’ 몸 자리의 궤적이 그의 삶이라고 할 때, 놓이는 자리와 놓는 자리는 동떨어진 채 규정되지 않으며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말할 것도 없이, 처지에 의해 놓이는 자리에서 의지로 놓는 자리 쪽으로 합일되는 게 바람직하겠지만, 오늘과 같은 약육강식과 제로섬 게임의 사회에서 그것은 마치 가장 고급한 ‘빵’과 가장 아름다운 ‘장미’를 함께 누리겠다는 과욕일 가능성이 크다. 내게 가장자리는 몸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조건 아래 각자의 처지에 따라 ‘놓이는’ 몸의 자리와 의지로 ‘놓는’ 몸의 자리가 하나로 만나는 ‘소박한 자유인’의 자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중심은 오직 하나의 점일 뿐이지만, 가장자리는 평등한 점들이 만나 이루는 선이다. 이 가장자리에서 중요한 것은 성장이 아니라 존재와 관계의 성숙이다. 여기서 하나의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 ‘우리 각자는 지금 존재의 완성태에 이르렀을까?’ 이 물음 앞에 아무도 감히 “그렇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의 모두 이미 완성태에 이른 양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누구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지금 이미 ‘존재의 완성태’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없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어느 몸 자리에서든 공부하겠다는 것이 나로서는 당연하다. 운이 좋은 사람이지만 공부는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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