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5.06 22:05 수정 : 2013.05.07 10:52

‘홍세화’라는 이름 석 자 뒤에 붙일 수 있는 수식어는 그의 삶을 통해 만들어진 궤적이기도 하다. 파리의 택시운전사에서 한겨레신문사 기획위원, 그리고 진보신당 당대표를 거쳐 지금은 ‘가장자리’라는 협동조합에 기반을 둔 학습공동체를 구상하고 있다. 인터뷰 중에 그는 파이프 담배를 피웠다. 굳이 파이프 담배를 피우게 된 내력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물었다. 파리에 대한 향수 같은 것이 묻어 있는 것이 아닌지.

“그런 게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굳이 숨기지 않았다. 이어진 인터뷰는 항상 이런 식으로 대화가 진행되었다. 묻는 질문에 완전한 부정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해볼 점도 있다”는 태도가 홍세화의 것이었다. 명쾌한 답보다도 ‘생각’할 것을 주문하는 홍세화 특유의 대화법이었다. 질문은 아무래도 진보신당과 관련해서 위기에 처한 진보의 문제로 운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때 무너져가는 진보 진영을 책임지기 위해 당대표까지 맡지 않았던가? “체질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고 술회하지만, 그래도 정치판에 들어가 망가지지 않고 온전히 귀환했다는 점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는 NL(민족해방)계 진보 진영에서의 특수한 사상 경향의 문제점을 냉정하게 지적했다. “모든 것을 미국 탓으로 돌리는 이런 생각이 진보를 위기에 빠트렸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의식화 넘어서는 새 주체를 위한 학습

“나도 NL이었다”는 진술은 최근 공력을 기울이고 있는 학습공동체의 필요성과 맞닿아 있었다. 이른바 ‘의식화’라고 불리던 1980년대 운동권의 학습 이상이 진보 진영 내에 없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었다. “모두 각자의 성벽을 쌓고 의식화의 대물림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의식화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주체였다. 이 주체를 만들어내는 방법으로 그는 새로운 학습을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반성 없는 의식화 학습이 진보의 성숙을 방해한다는 취지였는데, 그래서 단도직입해서 물었다. 학습을 통해 진보의 성숙이 가능하겠는가?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에 반성을 부여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함께 공부하자’는 분위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도 했다. 그렇다면 그 공부의 방법은 무엇일까? “‘가장자리’에 모여서 함께 책 읽는 것”이라 했다.

물론 책만 읽는 것은 아니다. ‘가장자리’는 격월간으로 <말과 활>이라는 잡지를 낼 계획이다. 이 잡지의 목적은 공부하면서 논의한 내용을 현장에 접목시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런 방식은 협동조합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취지에 동조하고 이익을 공유하는 집단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확장성이라는 문제에서 기존 진보 진영이 보여준 한계를 고스란히 답습할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물었다. 지역별로 독서모임을 만들겠다는 취지는 이해하는데, 이것이 끼리끼리 독서클럽으로 전락할 수 있지 않겠는가?

“뚜렷한 목표보다는 사유와 실천이 우선한다”는 이야기였다. 사유하는 인간에 대한 집요한 선언이 이런 주장에 숨어 있었다. 그러므로 홍세화는 진보 진영의 문제가 ‘사유하지 않음’에 있다고 보는 셈이다. 근대 철학의 효시라고 불리는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를 발견한 철학자였다. ‘생각하는 나’를 발견한 사건이 누구나 윤리 교과서에서 배운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였다. 데카르트가 이 명제를 발견할 수 있었던 까닭은 ‘노예도 말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입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명제는 단순하게 인간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라는 단순결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데카르트가 발견한 ‘생각하는 나’는 평등하게 생각하는 능력을 나눠 가진 존재였다. 홍세화의 주장도 여기에 근거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은 데카르트의 명제를 훌륭하게 계승한 것처럼 보였다.

이 생각을 확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자리’의 기획인 것 같았다. 손아람은 이 문제를 파고들었다. 자발성에 기초한 학습공동체라고 하지만 공동의 이해관계가 확실하지 않다는 문제제기였다. 누구나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었다. 역시나 사유에 대한 이야기가 돌아왔다. “또 다른 길을 찾는 사람을 위한 모임이었으면 한다”는 결론이었다.

어찌 보면 피상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 보면, 홍세화가 주장하는 가장 핵심적인 사안은 ‘생각하는 나’를 진보 진영에 도입하는 것이었다. 이 ‘나’는 평등한 능력을 나눠 가진 이들이다. 배움의 능력을 가진 이들이다. 문제는 이들이 무엇을 배울 것인지다. ‘가장자리’가 뭔가를 가르치고 배우는 장소라면, 기존에 있던 느슨한 교양 교육기관의 단점을 극복하지 못할 것 같았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이택광 영국 셰필드대학 문화학 박사.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 다양한 문화 분석을 통해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코드를 찾아내는 작업을 한다. 지은 책으로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한국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인상파, 파리를 그리다> 등이 있다.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