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5.06 21:58 수정 : 2013.05.07 10:52

연기가 성운처럼 우아하게 꽈리를 틀며 피어오른다. 그의 손에는 알베르 카뮈가 애용하던 철쭉 뿌리 재질의 담배 파이프가 들려 있다. 능숙하게 빨아들이고 내뿜지만 감탄을 자아내는 카뮈의 자태로 보일 리는 없다. 그건 공정한 비교가 아니다. 40대에 자동차 사고로 요절한 카뮈는 파리의 지식인들이 모이는 살롱에 드나들며 여배우를 정인으로 거느리던 전성기 시절에 찍힌, 파이프 담배를 물고 강렬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젊은 용모로 영원히 각인되었다. 사진 속의 젊은 카뮈와 비슷한 나이, 홍세화는 그날그날 생존에 바쁜 ‘빠리의 택시운전사’였다. 카뮈가 아직 살아 있다면 올해로 딱 100살이다. 그러니까 생애 마지막 날 미숙한 솜씨로 자가용 운전대를 잡는 대신 홍세화가 몰던 택시라도 잡아탈 수 있었다면 말이다.

파리에서 택시 운전대를 잡았던 홍세화는 최근 양산 담배를 내려두고 파이프 담배를 잡았다. 그와의 인터뷰는 그 메시지의 결을 읽어내는 일이기도 했다.
홍세화는 파리에 살 때 파이프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최근에 붙인 취미다. 시간이 지날수록 파리 시절이 자꾸 생각난다고 한다. 왠지 그게 파이프를 손에 잡은 이유의 전부는 아닌 것 같다. 파이프 흡연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잘게 간 담뱃잎을 꼼꼼하게 다져넣어야 하고, 담뱃잎보다 손가락을 먼저 연소시키지 않으려면 불 한번 붙이는 데도 노하우가 필요하다. 매번 파이프 속을 긁어 청소하는 작업은 흡연과 노동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파이프의 모든 장점은 곰탕과 라면 사이만 한 편의의 간극을 메우지 못하고 양산 담배에 자리를 내주었다. 흡연을 위한 인내의 문턱이 허물어지자 누구나 흡연하게 되었다. 게임 로딩하는 시간조차 잘 참지 못하는 청소년들도 담배를 피운다. 동남아시아 관광지의 원숭이들도 흡연 중독에 시달린다. 숙성이 필요없는 즉각성은 아예 흡연 문화를 바꾸었다. 작년에 진보신당 대표를 사임한 홍세화는 ‘진보’가 성숙해야 할 필요를 말하며 학습공동체 ‘가장자리’를 준비하고 있다. 좌표 위에 점을 하나 골라 찍듯이 선언만 하면 진보의 간판이 허용되는 시대다. 최근 양산 담배를 내려두고 파이프 담배를 잡은 건 인고와 숙성으로 다져진 다음 세대의 진보정치를 준비하는 심경의 표현이 아닐까?

홍세화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파리에 있을 때부터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그러나 ‘진보의 미성숙’에 대해 그는 할 말이 많다.

홍세화 한국 진보 진영 내에서는 안목과 의식이 아주 특수한 계기를 통해 형성되고 있어요. 쉽게 말하면 ‘선배 잘못 만난’ 계기라고 할 수 있죠. 그 미성숙의 결과로 2004년 13%의 지지율을 얻던 진보 정당이 4%대까지 추락하는 현상이 나타났어요. 진보 내부에 숭숭 뚫린 구멍들이 드러난 겁니다. 이제 그 빈 자리를 채워넣는 학습의 작업이 필요한 때예요. 자유주의의 전유만으로도 어려운 상황이지만, 모든 문제를 분단상황에 대한 논의로 축소시키거나, 여성주의의 테두리 안에서만 고민하는 태도 역시 진보 진영이 처한 난관입니다. 모두가 각자의 성벽을 쌓고 있어요. 자기 인식의 과정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고민하거나 단련하지 않고 스무 살 안팎에 만난 선배가 가져다준 반전을 통해 세상을 배우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면 범진보 진영의 다수를 민족주의 계열이 점하고 있어요. 노동문제와 계급문제 같은 당면한 현실보다는 분단의 현대사에서 가학과 증오를 먼저 배우게 되는 거지요. 그런 섬세하지 못한 학습이 선배를 따라 정파가 결정되는 구조, 의식화된 자의 우월감, 정파 간 권력 다툼과 맞물려 쌓이면 ‘배제의 장벽’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작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 이후 불어닥친 경제적 공포가 낳은 ‘노동의 분할’ 문제에 진보 진영에서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어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철탑 위에 올라갈 때 같은 노동자로서 불편함을 느끼기는커녕 적대적 분위기가 만들어졌지요. 그건 나 자신의 노동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습니다. 인간성 자체가 파괴돼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손아람 힙합 그룹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의 멤버로 활동했다. 그룹 이름과 같은 제목의 소설을 써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용산참사를 소재로, 정통 법정소설인 <소수의견>을 썼으며,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해 <너는 나다-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하다>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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