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5.06 21:19 수정 : 2013.05.07 10:52

“당신은 곧 여든두 살이 됩니다. 키는 예전보다 6센티미터 줄었고, 몸무게는 겨우 45킬로그램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오직 내 몸을 꼭 안아주는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앙드레 고르 지음·임희근 옮김·2007·6쪽)

앙드레 고르(1923~2007)는 마르크시즘과 생태주의를 하나로 품어 생태정치학을 창시한 좌파 사상가다. 사르트르-보부아르 부부의 오랜 벗이기도 하다. 고르의 아내 도린은, 20세기 가장 ‘소란스러운’ 커플 가운데 하나인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는 물론 1980년대 초반 일찍 사상계에서 은퇴한 남편에 견줘도 완전히 무명이었다. 적어도 고르가 도린 앞으로 쓴 편지가 라는 책으로 출간되기 전까지는.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는 평가를 받은 고르가 도린에게 이 육체성 충만한 편지를 쓴 건 2006년이었다. 고르는 여든셋, 도린은 한 살 ‘어린’ 여든둘이었다. 혹여 이 책을 통독하지 않고 사전 정보 없이 앞의 인용구를 읽는다면 거기서 노추(老醜)를 읽어낼 수도 있다. 언뜻 표현만 봐서는 ‘작업’의 낌새가 자욱하다. 그런데 100쪽 분량의 책을 끝까지 읽어보면 두 존재가 일궈가는 연애의 풍경에 매료될 것이다. 둘의 사랑은 드물고 귀하다. 오죽하면 소설가 김훈이 이 책의 추천사에서 이렇게 말했을까. ‘아, 나는 언제 이런 사랑 한번 해보나.’

고르와 도린은 부부로서 한평생 사적인 성애 관계를 공적인 경지로 승화시켰다. 젊은 시절(왼쪽)과 말년의 고르-도린 부부. 한겨레 자료

연애는 본디 통속적이지 않다

오늘날 연애는 통속하다. 시인 박인환이 요즘 세태를 본다면 ‘연애는 그저 드라마처럼 통속하거늘’이라고 읊지 않을까. 거리는 온통 통속한 연애의 로케이션 현장이고, 집안은 급히 편집한 통속극으로 만연하다. 거리와 집안은 서로를 되먹이며 한통속으로 굴러간다. 거리의 연애는 트렌드로 통속극에 삼투하고, 통속극은 내면화되어 거리에서 다시 시전된다. 이것이 연애의 생산·유통·소비 체계다. 이제 연애의 통속성은 유구한 전통처럼 여긴다. 그러나 우리가 전통이라고 믿는 것 가운데 태반은 발명된 ‘짝퉁’이다. 연애는 본디 통속하다고 할 수 없다. 연애의 통속성은 시대적인 현상이다. 통속의 반대말은 ‘숭고’보다는 차라리 ‘희소’다.

인류 역사에서 연애는 통속이 되기에는 너무 특권적이었다. 중세 말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의 주인공인 로미오와 줄리엣은 평민이 아닌 귀족이었고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그보다 몇 급수 위였다. 그들의 연애가 숭고하기만 했던가. 연애는 산업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비로소 ‘민주화’되고 ‘대량소비’되며 통속화되었다. 대량생산·대량소비라는 자본주의 문법은 연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니 ‘통속이냐 숭고냐’ 따위의 문제 설정은 애초 성립할 수 없으며, 연애의 참된 의미를 왜곡하기까지 한다.

연애가 살(Flesh)이 개입된 사태라는 건 그에 견주면 얼마나 실제적인가.1 그 번연한 사실 앞에서 인류는 오랜 세월 청맹과니 행세를 해왔고, 통속과 숭고의 이분법 뒤에 살을 유폐시켜왔다. 연애 자체를 백안시하거나, 생선회 뜨듯 살을 떴다. ‘연애는 대학 가서 해도 늦지 않다’와 ‘건전한 교제는 학업에도 도움이 된다’는 대립적으로 보이지만, 삶의 본분을 연애보다 학업에 둔다는 점에서 상동적인 언설이다. 연애에서 살을 배제한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적 성규범의 판타지 버전으로 유통되고 있다. 하지만 플라토닉 러브는 시민권을 가진 성인 남성과 시민권 대기자인 미소년 사이의 이슈였다. 플라톤은 현상(감각)의 세계는 선이 아니라고 보았다. 오직 이데아를 바탕으로 한 이성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라토닉 러브라는 개념도 이데아론에서 비롯됐다. 육체를 멀리하고 이성적인 물음을 통해 진정한 사랑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에서 여성은 나이 불문하고 시민권이 없었다. 당대 이데아론자들은 그런 비시민과의 연애는 ‘진정한 사랑’의 범주에서 아예 제외했다. 중세시대 부패한 성직자들의 연애 사건으로 태어난 아이들을 거두어 키우기 위해 고아원이 생겨났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계보도 앞에서도 교회는 자못 숭고했다. 늘 그렇듯이 문제가 되는 것은 (살이 개입된 연애가 아니라) ‘누구의’ 연애냐이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안영춘 편집장 jona@hani.co.kr

1 철학자 김영민이 지은 <동무와 연인>(한겨레출판·2008)의 부제는 ‘말, 혹은 살로 맺은 동행의 풍경’이다. 그는 본문에서도 ‘살’이라는 개념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데, 연애의 육체성을 은유한 표현으로 이해된다. 이 글에 나오는 연애 사례들의 상당 부분은 이 책에서 참조하거나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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