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27 23:18 수정 : 2012.12.27 23:28

시작은 소박했다. 지난 3월, 집 앞 길 건너에 ‘희망식당 하루’가 문을 연다는 소식을 트위터에서 보고, 일요일이 되기를 기다렸다. 힘든 사람들이 너무 많은 세상, 흉흉한 소식들 사이에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죽음을 알게 됐다. 하지만 노동문제에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데 매주 와서 밥 먹고 가는 일,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식당에 가보았다. 오후 2시, 아이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식당을 들어서는 순간 약간 겁먹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여기 사람들 너무 비장한 거 아닐까….’ 소리 없이 밥 먹고 돈만 내고 갈 수 있으면 싶었다. 그런데 너무 조용했다.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두 번째 손님이라고 했다. 울컥, 속이 상했다. 방명록에 겨우 ‘힘내세요’라고 쓴 것 같다. 그 뒤로 지방 여행을 갔을 때 딱 한 번 빼고, 식당 문을 여는 일요일마다 몇 달째 그곳에서 가족과 함께 ‘외식’을 한다.

한상연(왼쪽 사진)씨가 서울 상도동 ‘희망식당 1호점’에서 밥을 먹고 있고, 이곳 셰프인 쌍용차 해고자 신동기(오른쪽 사진 앞)씨는 부엌에서 나물을 담고 있다.
 나, 한상연(43)은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산다. 직장 다니며 10살 된 딸을 키우는 평범한 ‘워킹맘’이다. 많이 가진 것도 없지만, 그다지 굴곡진 삶을 살지도 않았다. 어느 날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스무 명 넘게 숨을 거뒀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슴에서 ‘쿵’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쌍용자동차처럼 무자비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직장에서 부서가 없어지고 조직이 개편되어 직장을 떠나야 하는 사람을 여럿 봤다. 우연히 대한문 앞 분향소를 지날 때면 마음이 쓰였다. ‘저기는 나와 상관없는 세상이다. 저 거대한 벽을 넘어서면 위험하다.’ 심호흡 한번 하고 지나쳤다. ‘희망식당 하루’ 1호점에 조심스레 첫발을 딛기 전까지는.

 어느 날 광화문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대한문 앞으로 발길을 돌렸다. 조심조심 절을 하고 일어나려는데 괜히 울컥 했다. 내가 값싼 위로를 하는 게 아닌가, 어떻게 이들의 마음을 내가 알까, 이런 일을 모를 때가 편했는데….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몰래 절만 하고 가려고 했는데, 일요일 점심마다 음식을 내주는 식당 셰프와 마주쳤다. 그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는 사람이 그곳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동네 아저씨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그에게는 내 딸 한빈이와 같은 10살 된 아들이 있다. 두 번째 갔을 때부터 한빈이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었다. 지방으로 여행 가던 날, 이른 시간이라 밥이 아직 준비 안 되었을 때에는 아이에게 라면이라도 끓여서 기어이 먹여 보내던 사람이다. 예의 그 익숙한 웃음으로 나를 반갑게 맞아준다. 방명록에서 본 이웃들의 따뜻한 응원을 그곳 사람들이 느끼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내 마음이 이곳에 닿고 있었구나. 분향소가 그리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그곳에는 나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사람들과 삶이 있었다. 거대해 보이던 벽은 사실 내 마음속의 것이었다.

 지난겨울,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의 밥을 지었다. 경기도 평택의 쌍용자동차 정문 앞에 만들어진 ‘희망텐트촌’의 셰프를 맡았기 때문이다. ‘희망버스’로 시작한 희망 릴레이는 ‘희망걷기’를 거쳐 쌍용자동차 앞의 ‘희망텐트’로 이어졌다. 전국에서 수천 명이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을 위해 텐트촌에 입주했다. 공장 안에 들어가기 위해 담 밖에서 싸운 지 3년. 담장 안의 일터를 그리워하는 해고자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위무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담벼락 아래 희망텐트가 줄을 이었다. 가히 장관이었다. 이들은 밤새 노래하고 춤추며 흥겹게 어우러져 놀았다. 추위는 해고자들이 처한 현실만큼 혹독하고 매서웠지만, 무릎까지 내린 폭설로 얼어붙은 콘크리트 바닥의 냉기를 녹인 것은 “해고는 살인이다”, “함께 살자”는 호소에 공감하는 따뜻한 사람들의 온기였다. 이들의 온기를 행여 놓칠세라, 조금이라도 그 몸을 따뜻하게 덥히기 위해 밥을 지었다. 워낙 남에게 밥 해 먹이는 걸 좋아하던 터라 힘든 줄도 모르고 밤새 국을 끓여서, 그 밥을 맛있게 먹는 사람들을 보면 뿌듯했다.

 나, 신동기(35)는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다. 원래 해고 명단에는 없었지만 해고된 동료들과 함께했다. 그래서 더 이상은, 아니 아직까지는 자동차 만드는 작업도구를 다시 손에 들 수 없다. 눈 한번 질끈 감고 동료의 아픔을 모른 체했더라면, 지금 공장 안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하고 있을 것이다. 12살, 10살, 9살의 고만고만한 세 아이 학원비며 입성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직장 잃은 남편과 아이들을 보살펴야 하는 아내의 우울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때의 선택에 후회가 밀려들 때, 그래도 내가 옳았다는 확인을 하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건 희망텐트에 와준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면서다. 작업도구 대신 조리기구를 손에 쥐고 내가 좋아하는, 누구나 먹는 ‘밥’으로 다시 사람들과 만나고 싶었다.

 나에게 희망식당의 셰프를 제안한 파트너 ‘오후에’(닉네임)는 나같은 해고자들에게 사람들의 온기를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얼마만큼을 팔든 좋은 재료로 정성껏 밥을 지어 사람들과 나누고, 그들이 성의껏 낸 돈으로 다시 해고 노동자들의 ‘밥’을 마련하는 희망의 순환을 만들고 싶었다. 일주일 중 하루라도 해고 노동자들을 응원하는 따뜻한 밥 한 끼의 연대를 벌여보자는 ‘희망식당 하루’는 그렇게 문을 열었다.

 

 밥차를 운영해봤다. ‘요리실험실’이라는 이름으로 두 달 동안 했다. ‘밥은 달빛이다’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일본 영화 <안경>에 나오는 ‘달빛은 어느 길에나 쏟아진다’는 시구에서 따온 말이다. 누구에게나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달빛이 밥 같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누구나 밥을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내가 지은 밥이 달빛처럼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이면 좋겠다는 바람을 밥차를 통해 이뤄보고 싶었다. 밥차를 시작하던 날과 마치던 날, 두 번의 잔치를 열었다. 개업날은 ‘흩날리는 벚꽃 아래 들뜨는 밤, 쏟아지는 달빛 아래 평등한 밤’으로, 문을 닫던 날은 ‘첫 봄의 매듭짓기’라 이름 붙이고 사람들을 모아 음식을 먹으며 공연과 시 낭송도 했다.

 ‘요리실험실’에서 시도한 메뉴 레시피와 ‘요리실험실’ 활동을 정리해서 짤막한 요리 소책자를 준비하던 중, 희망식당의 셰프로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인터넷으로 ‘희망식당’을 검색해보고 상도점에 밥을 먹으러 가봤다. 불안한 비정규직과 해고의 문제를 부지런히 퍼뜨리려는 식당이었다. 평소 문제로 여기던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단이 ‘밥’이라는 점이 좋았다. 밥 짓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소중한 일에 동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울 상수동에 있는 희망식당 2호점에서 젊은 요리사 ‘순대’(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희망을 나눌 밥을 짓고 있다.
 나, ‘순대’(별명·27)는 젊은 요리사다. 희망식당 2호점에서 요리한다. 보통 200인분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렇게 많은 양을 해본 건 처음이다. 다행히 농성장에서 잔뼈가 굵은 콜텍악기 해고자 임재춘 아저씨가 함께 셰프로 일해 많이 배운다. 아저씨와 함께 일한 지 다섯 달이 된 지금, 같은 일을 한다는 공감대가 생겼다. 주방일을 끝낸 후 “오늘도 수고했어”라는 아저씨의 말을 들어야 하루가 산뜻하게 마무리된다.

 예전에 학교에서 레스토랑 아르바이트할 때, 장사가 안 된다며 아르바이트 학생들을 해고한 일이 있었다. 아무리 학생이라고 해도 생활비도 꼭 필요한 돈인데, 그들의 생계를 쉽게 생각하는 게 너무 화가 났다. 그래서 정규적 직장에서 해고되

어 장기투쟁하는 이들을 생각하면 얼마나 더 불안할까 싶어 안타깝다. 일은 힘들지만 희망식당에서 많은 것을 배워 간다. 첫 사회생활을 좋은 동료들과 함께 해 좋고, 무엇보다 희망식당에 일손을 거들어주는 이들에게 늘 고맙다. 희망식당은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연대할 수 있는 멋진 공간이다.

상도동의 한 귀퉁이 실내 포장마차에서 시작한 희망식당은 지금 서울 상수동에 2호점, 청주 수곡동에 3호점을 냈다. 3곳 모두 성업 중이다. 자신의 가게를 희망식당으로, 희망카페로, 희망술집으로 내주겠다는 주인들의 문의가 줄을 잇는다. 설거지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트위트가 오르면 단숨에 달려오는 일꾼들이 있고, 하루 호스트는 이제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인기다. 여러 모임과 단체에서 일을 하고, 정을 나누고, 연대의 마음을 다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려 홍보한다. 누가 조직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저절로 움직인다.

서울 상수동 희망식당 2호점의 요리사 ‘순대’가 요리를 하다 멈추고 환하고 웃고 있다.
 ‘밥을 구하다 밥이 되어버린 우리 삶에 희망을’ 주기 위해 시작한 치유의 식당이자, 우리 삶을 지탱하는 흔하면서 본질적인 ‘밥’이라는 매개를 통해 시혜와 동정을 넘어선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확인해주는 희망식당. 1호점의 신동기 셰프뿐 아니라 2호점의 임재춘 셰프(콜텍기타 해고자), 3호점의 김풍년 셰프(유성기업 해고자)는 손님들에게 밥을 해 먹이면서 일상이 파괴된 자신들의 삶을 치유한다. 그로부터 5개월 만에 상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손님들의 밥값이 다시 이들의 일상을 지탱하는 밥이 되어 돌아가고 있다. 벌써 4천만 원을 넘어섰다. 수많은 투쟁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손님들이 건넨 연대의 밥을 먹고 기운을 냈다.

 어떤 ‘벽’이 있다. 그 벽 너머에는 나와 관계없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 그곳은 언제나 과격하고 무서운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 세상을 보려면 견고한 벽을 넘어야 하므로 나는 그저 모른 체 살아간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너머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함께 살자”고 외치는 간절한 목소리였다. 도대체 장벽 너머 저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하지만 선뜻 넘을 수 없었다. 넘을 수도 허물 수도 없을 만큼 견고한 벽, 저 벽을 넘으면 위험하다는 생각에 늘 그 앞에서 주춤거리게 하던 벽. 그런 장벽을 마주하고 선 사람들에게 ‘희망식당 하루’는 아무리 견고해도 저 벽 어딘가 그 너머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 있을 거라고 속삭여준 작은 전령이었다.

희망식당 하루 트위터 @hopeharu

* 희망식당 하루의 이야기는 곧 출간될 단행본 <희망 레시피>(가제)에 자세히 실릴 예정이다.

글 이선옥 르포르타주 작가 · 사진 김용욱 <참세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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